사찰과 불교 유물
성북구에는 유서 깊은 사찰이 많이 모여있습니다. 돈암동 흥천사는 이성계와 조선의 건국을 함께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위치로 옮긴 후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가 한국전쟁 때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조선 왕실과 역사를 함께한 사찰은 이후 서울 사람들의 나들이 처로 각광받기도 했습니다. 성북동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이었습니다. 백석의 연인으로도 유명한 운영자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감화하여 땅과 건물을 시주하면서 사찰로 거듭났습니다. 흥천사를 비롯해 안암동의 개운사와 보타사, 정릉동의 경국사 등 사찰은 중요한 불교 유물을 소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찰뿐만 아니라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는 국보급 문화재인 불상과 불감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는 고려시대 석탑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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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유물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국시대 금동삼존불입상이다. 커다란 하나의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중앙에 본존불과 양 옆에 협시보살을 배치하고 있는 삼존불(三尊佛)이다. 이러한 삼존불의 양식은 고구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과 매우 비슷하며, 중국 남북조시대의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광배 뒤에 새겨진 기년명으로 보아 563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로운 기법을 묘사하고 있고, 기교면에서 세련되어 6세기 중엽경의 조각양식을 대변해주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2호로 지정되었다.
  • 금동여래입상
    유물
    금동여래입상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으로, 간송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다가 2020년 8월 경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하였다. 출토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금동불상으로서는 비교적 큰 편이며, 일부 도금이 떨어진 부분도 있으나 육계부터 대좌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불상은 팔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 위에 약간 배를 내밀고, 자연스러우면서도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대좌는 단판양련(單瓣仰蓮)과 복판복련(複辦覆蓮)이 같이 붙어 있고, 그 밑에 안상(眼象)이 각 면에 투각된 팔각의 받침이 있는데, 그러나 구황동탑 출토의 불상 가운데 706년의 좌상보다는 아직 풍만한 감이 덜한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그보다는 시대적으로 약간 이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2020년 5월 간송미술관이 경매에 내놓았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매입하여 보관 중에 있다.
  • 금동보살입상
    유물
    금동보살입상
    삼국시대 금동불상으로, 간송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다가 2020년 8월 경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하였다.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불상은 광배는 결실되고 원형의 복판연화대좌 위에 똑바로 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천의가 양쪽으로 뻗쳐있는 모습, 조각의 표현이 간략한 점 등에서 삼국시대 보살상의 초기 양식을 이어주고 있지만, 몸에 구슬양식이 보이는 것이나 보주를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모습은 그다음 보살양식 발달 단계에서 나타난 요소이다. 따라서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호류사 주존불인 구세관음과 일본의 초기 불상의 대표적인 사십팔체불(四十八體佛)에서 이 불상과 비슷한 양식이 나타나는 것을 통해 일본 초기 불상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음이 입증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85호로 지정되었다. 2020년 5월 간송미술관이 경매에 내놓았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매입하여 보관 중에 있다.
  • 금동보살입상(뒤)
    시청각류
    금동보살입상(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금동보살입상의 뒷모습 사진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 금동삼존불감
    유물
    금동삼존불감
    간송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불감(佛龕)이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모로 만든 것으로, 그 안에 모신 불상의 양식뿐만 아니라, 당시의 건축 양식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 불감은 지금도 금색이 찬란하고 지붕에 녹청색이 남아 있는 등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본존불의 긴 허리,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옷주름, 그리고 보살이 쓰고 있는 구슬로 장식한 관 등 여러 양식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중국 북방 계통의 영향을 받은 11~12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의 목조건축 양식과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3호로 지정되었다.
  • 금동삼존불감(2)
    시청각류
    금동삼존불감(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금동삼존불감 사진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 금동삼존불감(3)
    시청각류
    금동삼존불감(3)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금동삼존불감 사진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 문경 오층석탑(2)
    시청각류
    문경 오층석탑(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문경 오층석탑 2·3층 탑신과 상륜부 사진이다. 이 탑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 괴산 외사리 승탑
    유물
    괴산 외사리 승탑
    간송미술관이 보유한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원래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삼성마을 절터 마을 산기슭에 있었던 이 부도는 일제 때 일본인에 의해 해외로 반출되기 직전에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이를 매입, 수습하여 간송미술관에 옮겨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 때 탑이 무너져 각 부분이 흩어졌으나, 1964년 다시 세워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된 것으로,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의 각 부분이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다. 안상(眼象) 및 연화문, 귀꽃의 조각 솜씨 그리고 탑진부와 옥개석 등의 수법과 각 부(部) 양식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석조 부도(浮屠)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74년 10월 2일 보물 제579호로 지정되었다.
  • 괴산 외사리 승탑 옥개석 귀꽃
    시청각류
    괴산 외사리 승탑 옥개석 귀꽃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괴산 외사리 승탑 사진이다.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 석조팔각승탑
    유물
    석조팔각승탑
    간송미술관에 진열되어 있는 8각 사리탑이다. 건립연대는 통일 신라시대로 추정된다. 높이 1.6m이며,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바닥돌 위로 기단(基壇)을 올리고, 탑신(塔身)을 얹은 후 머리장식으로 마무리한 모습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2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여덟 귀퉁이마다 큼직한 꽃조각이 솟아 있다. 꼭대기에는 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둥근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1975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다.
  •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유물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간송미술관이 소장중인 불상으로 제작 연대는 고려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화강암으로 된 높이 1.5m의 좌상으로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선의 표현에서는 형식화된 모습이 보인다. 불상이 앉아있는 4각의 대좌(臺座)에는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 중기 전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1975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 석불입상
    유물
    석불입상
    간송미술관이 소장중인 불상으로 제작 연대는 고려 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화강암으로 된 높이 2.1m의 미륵불로서 머리에는 큰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고 옷에는 주름이 사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 손은 가슴에 올려 모으고 있으며, 몸은 긴 돌기둥 모양으로 되어 굴곡이 없는 편이다. 얼굴의 표현이라든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유연하게 서 있는 모습은 마음속에 간직한 내적 성정(性情)이 아무 과장 없이 나타나고 있고, 조각 수법이 예스러운 점이 있어 토속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75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 문경 오층석탑
    유물
    문경 오층석탑
    간송미술관에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원래는 경상북도 문경에 있었던 것이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 하자, 전형필이 이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놓은 것이다. 2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각 부분이 거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뚜렷한 안상조각,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 등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짐작할 수 있다. 드러난 상하의 비례가 매우 아름답고 작풍(作風)이 착실하며, 탑 앞에 배례석(拜禮石)이 놓여져 있어서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다. 1974년 10월 2일 보물 제580호로 지정되었다.
  • 삼층석탑
    유물
    삼층석탑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석탑이다. 탑신의 1층 몸돌이 2층과 3층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받침이 3단인 점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아래층 기단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이 탑은 보기 드문 소탑(小搭)으로 고려시대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75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 안암동 오층석탑
    유물
    안암동 오층석탑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5.55m의 오층석탑으로, 본래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원당국민학교에 소재했으나, 1986년 10월 27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의 상대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있으며, 탑신부(塔身部)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이 얕고 옥신(屋身)이 높아 웅장한 감을 준다. 2층 옥신과 기단부 면석 3매와 상륜부(相輪部)는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 안암동 삼층석탑(봉화 소재)
    유물
    안암동 삼층석탑(봉화 소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3.7m의 삼층석탑으로,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에 소재했으나 1987년 3월 13일에 고려대학교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의 하대갑석은 1매의 큰 방형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屋蓋石)의 낙수면(落水面)은 두터우며 추녀 모서리는 반전이 얕아 전체적으로 단아한 감을 준다.
  • 안암동 삼층석탑(예산 소재)
    유물
    안암동 삼층석탑(예산 소재)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 석탑이다. 고려 중기(추정)에 건조된 높이 3.31m의 삼층석탑으로, 본래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모사리에 소재했으나 1962년 1월 5일에 고려대학교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기단부에서 탑신부까지의 옥개석과 옥신은 일정한 비례로 축소되어 안정감을 준다. 2, 3층 옥개석 추녀 모서리의 각각 세 부분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 육조대사법보단경(언해) 권상
    유물
    육조대사법보단경(언해) 권상
    성북구에 거주하는 개인소유자가 소유했던 문헌이다. 이 언해본은 성종이 승하하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성종의 계비인 정현대비와 어머니인 인수대왕대비가 1495년(연산군 1) 원각사(圓覺寺)에서 불경을 찍어낸 이듬해인 연산군 2년(1496) 한글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것이다. 내탕고의 지원을 받아 정성껏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책이기 때문에 활자체가 바르고 가지런하며 먹의 빛깔도 진하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왕실의 불교신앙 및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15년 4월 23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 팔정사 목 보살좌상
    유물
    팔정사 목 보살좌상
    팔정사(성북구 성북로31가길 82)에서 보유하고 있는 불상이다. 팔정사 극락보전에 아미타불의 오른쪽 협시보살(脇侍菩薩)로 봉안되어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의 한 암자에서 모셔 왔다고 한다. 머리에는 높고 화려한 불꽃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는데 조선 후기 보살상의 보관으로 크게 유행한 것이다. 몸체는 단아한 느낌을 주며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바닥에는 복장공(腹藏孔)이 있으나 현재 복장물은 남아있지 않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유행하던 목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정연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대세지보살로서 조선 후기 불상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004년 7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 정각사 석가불도
    유물
    정각사 석가불도
    정각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1897년에 조성된 것으로 화폭은 세로 117㎝, 가로 91㎝로 작은 편인데, 일부 채색이 박락되긴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채색은 적색이 주조를 이루고 녹색과 청색, 흰색, 황색 등을 함께 사용하였으며, 필선은 철선묘의 곧고 강한 묘선이 사용되었다. 화기에 의하면 이 불화는 영운 봉수와 동호 진철, 소현, 편수인 봉화, 상조, 긍엽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 이 불화는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조성연대가 확실하며, 조선 말기 서울 지역의 대표적 화승인 영운 봉수와 동호 진철이 중심이 되어 조성한 불화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깊다. 2007년 5월 10일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었다.
  • 정각사 목 아미타불좌상
    유물
    정각사 목 아미타불좌상
    정각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높이 29.2㎝의 작은 불상으로 개금 원문(改金 願文)에 의하여 아미타불상으로 밝혀진 불상이다. 갸름하게 보이는 얼굴, 약간 긴 상체, 짧은 하체의 결가부좌 자세 등 18세기 초의 목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목불상이 근래에 개금된 것은 1916년 4월 19일이며 최근에도 다시 한번 개금되었다. 이 아미타불상은 양식상 18세기 초기의 목불상으로는 보기 드물게 단아하고 우아한 불상이며, 20세기 초의 개금 원문 자료도 남아 있어 조선 후기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2007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장소, 유물
    흥천사
    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동595)에 있는 사찰이다. 1397년(태조 6)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사찰로서 중구 정동에 창건되었다. 1409년(태종 9) 정릉이 이전되고, 조선왕조의 억불정책과 몇 번의 화재 등을 겪으면서 폐사되었다. 1669년(현종 10) 함취정(含翠亭) 자리에 이건하여 중창하고 신흥사(新興寺)로 이름을 고쳤다. 1794년(정조 18) 현재 자리에 중창하였고,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흥천사라고 불리면서 왕실원당의 기능을 담당했다. 흥천사는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첫 번째 왕후였던 신덕왕후의 원찰(願刹)에서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의 피난생활까지 조선왕실의 역사와 함께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 흥천사(1)
    시청각류
    흥천사(1)
    1991년에 촬영한 돈암동 흥천사 대방의 모습이다. 흥천사 대방은 서울특별시 등록문화재 제583호로 지정되어 있다.
  • 흥천사 본채(1)
    시청각류
    흥천사 본채(1)
    흥천사 본채를 촬영한 사진. '흥천사'라고 쓰인 현판이 중앙에 두 개 걸려있다. 좌측에는 '서선실', 우측에는 '옥정루'라고 쓰인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 흥천사 본채 후면
    시청각류
    흥천사 본채 후면
    흥천사 본채 후면을 촬영한 사진. 흥천사 본채는 정면과 후면의 구조가 같은 'H'자 형태의 건축물이다.
  • 흥천사 본채 좌측면
    시청각류
    흥천사 본채 좌측면
    흥천사 본채 좌측면을 촬영한 사진. 사진 우측에 옥정루가 보인다.
  • 흥천사 우측 옥정루
    시청각류
    흥천사 우측 옥정루
    흥천사 본채 우측 옥정루를 촬영한 사진.
  • 흥천사 종각
    시청각류
    흥천사 종각
    흥천사 옥정루 맞은편에 있는 종각을 촬영한 사진.
  • 흥천사 현왕도
    유물
    흥천사 현왕도
    흥천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명부회주(冥府會主)인 현왕(現王)이 여러 권속을 거느리고 망자를 심판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1867년에 아미타불도, 지장시왕도 등과 함께 일괄 조성된 작품이다. 양식적으로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경상북도 사불산파의 화승 신겸(愼謙)의 영향이 보이며, 도상적으로는 19세기 후반 경 서울, 경기도 및 경상북도 지역에서 유행한 현왕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 당시 서울 경기지역과 경상북도 화승들 간의 교류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2016년 4월 7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0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천룡도
    유물
    흥천사 천룡도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화면 중앙에는 위태천이 합장하고 서 있으며 주위에는 천녀와 일월천자 및 여러 신중들이 배치되었다. 인물표현은 음영법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강조하였으며 채색은 전체적으로 붉은색이 많이 사용되었고, 기물과 복식 일부에 화려한 금박이 사용되었다. 이 불화는 위태천과 천룡팔부를 간단하게 그린 천룡도로서 1898년에 용담이 초본을 제작하였다. 신중도 중 천룡도 형식은 유례가 많지 않으며 특히 서울지역에는 천룡도가 별로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세기 말의 서울·경기지역의 천룡도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8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지장시왕도
    유물
    흥천사 지장시왕도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장시왕도이다. 1867년(고종 4)에 제작되었으며, 불화 제작 연대와 표현기법을 통해 의운 자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 서울지역에서 제작된 개운사 지장시왕도와 봉국사 지장시왕도, 미타사 지장시왕도의 선행되는 사례이자 모본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2015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8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조왕도
    유물
    흥천사 조왕도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왕도이다. 차양 밖으로 일렁이는 수파문이 가득한 바다와 수평선 좌우에 큼직한 해와 달이 떠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을 옅게 표현하였다. 해와달은 곡물생장과 식생활에 필요하여 조왕신에 그려지는 도상 특징의 하나이다. 보응문성이 제작하였는데 그는 조선후기 계룡산파 화승인 금호약효의 제자로 19세기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그리고 서울에 이르기 까지 매우 왕성하게 활동하여 수많은 불화를 제작한 근대기의 대표적인 불화승이다. 2018년 2월 19일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약사불도
    유물
    흥천사 약사불도
    흥천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약사여래와 권속들을 그린 약사불도이다. 1847년 수봉 법총을 수화승으로 하여 벽담 도□, 대은 창활, 양전, 계□이 함께 그린 것으로, 신흥사(흥천사의 옛이름)에서 개최된 수월도량 불사 때 아미타불화, 지장보살화, 산신도 등과 함께 조성되었다. 조성연대와 화원, 조성배경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어 당시 흥천사의 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2016년 4월 7일 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아미타불도
    유물
    흥천사 아미타불도
    흥천사 극락보전 불단 후불벽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이다. 1867년(고종 4)에 왕실소속인 상궁 천씨(千氏), 조씨(趙氏), 안씨(安氏) 등의 시주를 받아 고종과 민비의 안녕과 무강을 기원하며 제작되었다. 불화를 그린 이는 의운자우(義雲慈雨)와 보조화원 응완(應完)이다. 수화승 의운자우는 19세기 중엽에 경상북도에서 화명을 떨친 인물로 흥천사 아미타불도는 의운자우가 경상도를 넘어 서울·경기지역까지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 불화는 지역간 교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19세기 후반 서울지역에서 나타나는 왕실과 사찰간의 후원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사료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15년 1월 1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7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시왕도
    유물
    흥천사 시왕도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시왕도이다.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확인되며, 19세기 말 서울·경기지역에서 성행했던 대표적인 시왕도에 속한다. 시왕이 있는 곳이 성 안쪽이고, 지옥형벌을 받는 곳이 성 바깥이라는 표현을 성벽과 구름 또는 산수, 성문 등으로 장면을 분할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 시왕도에서 성행하던 기법이다. 2018년 2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3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비로자나불 삼신괘불도
    유물
    흥천사 비로자나불 삼신괘불도
    흥천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1832년(순조 32)에 제작한 불화로, 가로 403㎝, 세로 556㎝의 크기이다.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불의 비로자나삼신불을 화면 가득 묘사하고, 이 아래 합장한 가섭존자·아난존자, 하단에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배치하였다. 앞 시대의 삼신불도상에 19세기 서울, 경기지역에 성행한 가섭·아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가 결합한 형식이다. 서울지역 사찰에 소장된 괘불도 중에서도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이자 왕실발원 불화로서의 가치가 크다. 괘불함과 복장물 등이 함께 남아있어 괘불도와 괘불함 및 복장물을 일괄하여 2015년 4월 2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2월 22일 보물로 승격되었다.
  • 흥천사 목조여래좌상
    유물
    흥천사 목조여래좌상
    흥천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불상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56.3㎝의 불상의 크기로 보아 조선총독부 관보(1933년)와 『봉은본 말사지』에 실린 「흥천사 귀중품 목록」에 보이는 1척8촌의 아미타불상으로 생각된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허리가 길고 어깨가 넓은 장대한 신체의 비례는 조선시대 불상 가운데서도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주목된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3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및 복장유물
    유물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및 복장유물
    흥천사에서 소장중인 보살삼존상이다. 중앙의 관음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용왕과 선재동자가 협시하고 있는 삼존 형식이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1701년이라는 정확한 제작시기와 조각가가 확인되는데, 원래 전라북도 임실 사자산 적조암에서 제작한 것을 언젠가 흥천사로 옮긴 것이다. 용왕과 선재동자를 협시로 한 삼존 형식은 조각의 경우에는 그 예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불상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2017년 8월 1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6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감로도
    유물
    흥천사 감로도
    흥천사에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이 감로도는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젊은 남녀가 데이트하는 모습, 전당포의 모습, 태평양전쟁의 모습 등 불화가 그려지던 1940년대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기존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기법으로, 흥천사 감로도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유물
    흥천사 도량장엄번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도량장엄용 의식불화인 오여래도·사보살도·팔금강도로서, 오여래도 5점, 사보살도 4점, 팔금 강도 7점(8점 중 1점 결실) 등 총 16점이다. 화기가 없어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없지만, 얼굴의 형태와 채색, 문양 등에서 1898년 조성된 흥천사 극락보전 천룡도의 양식과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음영법을 사용하는 등 19세기 말 서울·경기지역의 불화양식을 보여주며, 19세기 말 흥천사의 불교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12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벽독금강)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벽독금강)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5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벽독금강)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자현신금강)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자현신금강)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5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자현신금강)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정제재금강)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정제재금강)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5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정제재금강)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적성화금강)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적성화금강)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5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적성화금강)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백정수금강)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백정수금강)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5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백정수금강)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청제재금강)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팔금강도(청제재금강)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4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방편경물권보살)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대성인로왕보살)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대성인로왕보살)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4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대성인로왕보살)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현신조복애보살)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현신조복애보살)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4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현신조복애보살)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방편경물권보살)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방편경물권보살)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4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사보살도(방편경물권보살)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감로왕여래)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감로왕여래)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3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감로왕여래)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이포외여래)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이포외여래)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3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이포외여래)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광박신여래)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광박신여래)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3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광박신여래)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묘색신여래)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묘색신여래)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3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묘색신여래) 사진이다.
  •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다보여래)
    시청각류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다보여래)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3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량장엄번 오여래도(나무다보여래) 사진이다.
  • 서울 흥천사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유물
    서울 흥천사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
    흥천사 금동천수관음상은 현재 국내에 현전하는 매우 희귀한 42수 천수관음상으로, 1894년에 작성된판기록을 통해 적어도 19세기부터는 흥천사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양식적인 특징에서 고려에서 조선 초에 걸쳐 제작된 작품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에서의 천수관음 신앙은 통일신라 초에 관련 경전이 수용된 이후 널리 유행하였고, 이에 따른 천수관음보살상의 조성도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흥천사 천수관음상은 고려~조선 초에 제작된 천수관음보살상의 매우 드문 작례로서 천수관음 도상 및 관음신앙 연구에 조각사적 가치가 크다. 2016년 2월 22일 보물 제1891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시청각류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흥천사 목조관음보살삼존상 사진이다.
  • 흥천사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유물
    흥천사 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석조불상이다. 현재 노전에 봉안된 석조불상은 세 구이며, 석조약사여래좌상(石造藥師如來坐像)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조아미타여래좌상(石造阿彌陀如來坐像)과 석조지장보살좌상(石造地藏菩薩坐像)이 있다. 나머지 좌상은 그 조성연대를 추정하기 어려우나. 본존인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내부에서 1829년에 금어 영운의윤, 관허정관, 편수 지성이 조성했다는 조성발원문이 조사되어 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2018년 12월 13일 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지장보살좌상(우)
    시청각류
    흥천사 지장보살좌상(우)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34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약사여래좌상 오른편에 있는 지장보살좌상 사진이다.
  • 흥천사 불상좌(좌)
    시청각류
    흥천사 불상좌(좌)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34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약사여래좌상 왼편에 있는 불상좌 사진이다.
  • 흥천사 용왕상
    시청각류
    흥천사 용왕상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35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용왕상 사진이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을 협시한다.
  • 흥천사 도명존자입상
    시청각류
    흥천사 도명존자입상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36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도명존자입상 사진이다. 석조지장보살좌상의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 흥천사 동자상
    시청각류
    흥천사 동자상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32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동자상 사진이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을 협시한다.
  • 흥천사 괘불함
    시청각류
    흥천사 괘불함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42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괘불함 사진이다.
  • 서울 흥천사 대방
    유물
    서울 흥천사 대방
    돈암동 흥천사에 있는 건축물로 염불과 수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흥천사 대방은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할 당시 중수된 것으로, 대원군이 직접 쓴 편액이 걸려있다. 조선 후기에는 정토 염불 사상이 크게 성행하여 접대를 위한 공간이 필요해지면서 누각 형태의 건축물이 큰 절과 왕실 원찰을 중심으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흥천사의 대방은 수행, 공양, 법회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구성된 복합건물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어 건축사적·불교사적 의의를 가진다. 2013년 12월 20일 등록문화재 제583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
    유물
    흥천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전이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은 당나라 때 불타다라가 한문으로 번역한 경전으로,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없는 까닭에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으로 알려져 있다. 흥천사 소장본은 전 3권 60판(2판 결판)으로, 함허당 기화의 주석본이며, 왕실과 신도들의 지원으로 1882년(고종 19) 8월 감로사에서 간행한 목판이다.흥천사 소장본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우리나라 고승인 함허 득통이 주석한 간본 중에서 현전하는 경판으로는 유일하여 희소성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2016년 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9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명부전
    유물
    흥천사 명부전
    흥천사 주불전 앞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 1855년(철종 6)에 순기(舜麒)가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목조의 맞배기와집으로 좌우에 풍판을 달았다. 명부전이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을 명부(冥府), 즉 저승의 주존(主尊)으로 모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아미타신앙과 함께 유행하여 널리 퍼진 민간신앙이었고, 따라서 이 시기 사찰에는 명주부전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이 건물은 옛 목조 건물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불사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85년 12월 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유물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흥천사에서 소장중인 불교유물이다. 지장보살삼존상을 비롯하여 시왕상 10구, 귀왕상 2구, 사자상 2구, 판관상 2구, 금강역사상 2구, 동자상 6구로 총 27구로 구성되어 있다.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 대부분 존상은 석재로 조성되고, 사자상과 금강역사상은 흙으로 만들었다. 착의법은 대의 안쪽에 편삼을 입고, 대의자락이 오른쪽 어깨를 반달모양으로 덮고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왼쪽 어깨의 대의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와 복부에서 편삼과 겹쳐져 있다. 이러한 겹쳐진 표현은 17세기 중반에 제작된 목조불상에서 편삼이 대의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는 것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과 차이가 난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명부전 무독귀왕입상
    시청각류
    흥천사 명부전 무독귀왕입상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36쪽에서 수집한 흥천사 명부전 무독귀왕입상 사진이다. 석조지장보살좌상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시청각류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수집한 흥천사 명부전 석조지장삼존상 사진이다.
  • 흥천사 좌측 만세루
    시청각류
    흥천사 좌측 만세루
    흥천사 본채 좌측 서선실과 만세루를 촬영한 사진.
  • 흥천사 만세루 제석천도
    유물
    흥천사 만세루 제석천도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가로와 세로의 크기가 거의 비슷한 규모로 제석천을 중심으로 천부세계의 여러 신을 그린 비교적 간단한 구성의 신중도이다. 화면의 중앙의 제석천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제석천을 감싸듯 천부중(天部衆)과 천녀(天女) 등의 권속들이 빙 둘러 배치되어 있다. 하단 중앙의 화기의 내용으로 보아 1890년(고종 24) 긍조가 책임화승을 맡아 조성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1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만세루 아미타불회도
    유물
    흥천사 만세루 아미타불회도
    흥천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1890년 상궁들의 시주로 조성된 왕실발원 불화이다. 수화승 긍조를 비롯하여 만파정익, 혜산축연, 보암긍법 등 주로 19세기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화승들이 조성하였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위의 보살, 십대제자, 타방불, 사천왕, 천부중 등이 배치되어있다. 왕실발원 불화로 값비싼 재료인 금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점이 돋보인다. 채색, 필선, 장식, 문양 등에서도 정교함이 드러나 있다. 특히 결가부좌한 본존불 좌우의 8위 보살 및 사천왕이 모두 의좌상을 한 좌세는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9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만세루 신중도
    유물
    흥천사 만세루 신중도
    흥천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가로와 세로가 거의 동일한 크기의 정방형 바탕 위에 제석천과 범천을 중심으로 천부의 무리를 그린 신중도이다. 1885년(고종 22) 조성된 흥천사 극락보전 신중도와 채색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도상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이 신중도의 조성에 참여한 화승이 극락보전 신중도 조성에도 참여한 사실에서 관련성을 찾을 수 있다. 화면 하단의 화기 내용으로 보아 1890년(고종 27) 긍조가 수화승을 맡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410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극락보전
    유물
    흥천사 극락보전
    흥천사 경내의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 목조 와가로, 1853년(철종 4) 중수한 것이다. 돌층계를 정면에 두고 기둥은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사이에도 전, 후면에서는 각 2구, 측면에서는 각 1구의 공간포를 둔 다포식 건물이다. 이러한 구조와 형태는 조선말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시대 건축의 모범이 될 만하다. 이 건물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1985년 12월 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극락보전 후면
    시청각류
    흥천사 극락보전 후면
    흥천사 극락보전 뒤편 탱화를 촬영한 사진. 부처가 중생들을 극락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내용의 탱화이다.
  • 흥천사 극락보전 신중도
    유물
    흥천사 극락보전 신중도
    흥천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군도 형식의 신중도이다. 가로로 길어진 크기의 화면을 상하로 나누어 상단에는 제석․범천을 위시한 천부세계를 표현하고,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각종 무구로 무장한 천룡부를 나타내었다. 채색은 적색과 녹색이 주조색을 이루는 가운데 하늘색 계열의 밝은 청색이 사용되었으며, 위태천의 투구 및 갑옷과 삼지창, 검과 각종 기물 등에 고분법을 적용하고 금(색)을 올렸다. 그림 하단부에 있는 시기로 보아 1885년(고종 22)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표 시주자로 상궁 김씨와 상궁 홍씨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발원 불화로 짐작된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극락보전 도량신도
    유물
    흥천사 극락보전 도량신도
    흥천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도량신도이다. 대허와 학허 등 두 명의 화승이 조성하였다. 도량신은 화엄신중 가운데 하나로 도량의 더러움을 없애는 신으로, 화면 상단의 삼곡병처럼 각이 진 흰색을 배경으로 하여 정면을 향해 앉아있다. 향우측의 신장은 앙발의 귀졸모습으로 이마에 검은 띠를 둘렀고, 오른손은 허리춤에 대고 왼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둥근 지물을 들고 맨발로 서있다. 향좌측의 신장 역시 앙발의 귀졸모습 으로 머리에는 청색의 두건을 쓰고 두 다리를 약간 벌린 채 오른손에 긴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6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극락보전 극락구품도
    유물
    흥천사 극락보전 극락구품도
    흥천사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이다.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상 우측에 봉안된 이 극락구품도는 화면을 9개 구획으로 나누고, 그 구획 안에 구품의 내용을 도해한 형식이다. 영산회 좌·우는 주악천인과 보살중 및 비구중이 묘사되어 있으며 극락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보살상들은 모두 구름을 타고 마치 왕생자를 맞으러 오는 것처럼 표현된 것은 특징적이다. 화승들의 이름으로 미루어 188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7년 6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5호로 지정되었다.
  • 흥천사 용화전
    시청각류
    흥천사 용화전
    흥천사 본채 좌측 후방에 있는 용화전을 촬영한 사진.
  • 서울시보 제3413호
    문서류
    서울시보 제3413호
    내용 : 서울특별시에서 발행한 시보로 흥천사가 소유하고 있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05호~제415-9호의 명칭, 규격, 조성연대, 지정사유 등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 봉국사
    장소
    봉국사
    정릉로 202-27(정릉동637)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원찰로, 고려말 공민왕 3년(1354) 나옹대사가 주도하여 창건했다고 하는 설이 있으나, 조선 태조 4년(1395)에 당시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주도하여 세운 사찰로, 창건 당시 법당에 약사여래를 봉안하여 약사사라고 불렀다. 조선 현종 10년(1669)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을 단장하고 태묘에 제사를 드리게 되면서 이 절을 원찰로 삼고 나라를 받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봉국사로 고쳤다. 임오군란(1882) 때 불에 탔으나 이듬해 한계·덕운 등이 중건하였고, 이후 몇 차례 더 중건되었다. 1979년 10월에는 절 입구에 일음루를 건립하고, 1994년에는 안심당을 지어 스님들의 수행정진과 신도들의 신행처로 사용하고 있다.
  • 봉국사(2)
    시청각류
    봉국사(2)
    2004년에 촬영한 정릉동 봉국사 범종루 사진이다. 봉국사는 정릉의 원찰로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 봉국사 지장시왕도
    유물
    봉국사 지장시왕도
    봉국사 명부전 중앙단의 지장삼존상 뒷면에 봉안되어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이다. 이 지장시왕도는 권속들의 크기를 앞쪽에서 뒤쪽으로 갈수록 작게 표현하고 지장보살 주위로 둥글게 열 지어 배치한 점, 본존상 무릎 아래쪽에 선악동자를 둔 점으로 볼 때 19세기 후반 이후 서울·경기지역에서 유행한 불화 형식을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19~20세기 서울·경기 지역 불화를 주도해온 화승 체훈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2호로 지정되었다.
  • 봉국사 아미타괘불도
    유물
    봉국사 아미타괘불도
    봉국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아미타불·관음보살·대세지보살의 아미타삼존을 화면에 가득 묘사하고, 그 아래 가섭존자·아난존자, 하단에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를 배치하였다. 이 괘불도는 서울, 경기도 일대에서 화명을 떨쳤던 금곡 영환, 한봉 창엽, 덕월 응륜 등 14명의 화승이 제작했을 뿐만 아니라 상궁 하씨, 공씨, 정씨, 이씨, 백씨를 비롯하여 총 26인이 시주에 참여하였다. 서울지역에서는 연대가 올라가는 괘불도에 속하며 형태, 필선, 채색, 문양, 장식 등 각 세부 묘사 등이 당시 불화와 비교하여 완성도가 높아, 19세기 말 서울지역에서 제작된 새로운 괘불도 형식의 선행적인 사례로 미술사적 가치를 지닌다.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1호로 지정되었다.
  • 봉국사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
    유물
    봉국사 석조지장삼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
    봉국사가 소유하고 있는 불교유물이다. 중앙의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좌우의 무독귀왕상, 도명존자상이 삼존불 형태로 봉안되어 있으며, 벽면을 따라 시왕 및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상들은 대부분 지장보살좌상과 동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시왕상과 인왕상 등은 지장보살상처럼 돌로 만들어졌으나 일부 상들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7~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 일부 상들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은 드물게 석조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는 점과 권속의 구성이 빠짐없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5호로 지정되었다.
  • 봉국사 석가여래좌상
    유물
    봉국사 석가여래좌상
    봉국사 만월전에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 석불좌상이다. 두 손을 포개어 놓고 약합으로 생각되는 둥근 보주를 들고 있어 약사여래상으로 신앙되고 있다. 조선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좁고 쳐진 어깨에 이중착의 형식으로 표현된 가사에는 단조롭지만 단정한 3조의 층단 주름이 양 깃과 어깨에 걸쳐진 대의 자락, 옷소매와 발목을 덮은 군의에 일정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후기 서울 경기 중부지역에서 유행하였던 양식으로 생각된다. 2013년 12월 26일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되었다.
  • 봉국사 목조석가여래좌상
    유물
    봉국사 목조석가여래좌상
    봉국사 만월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이다. 무릎부분과 얼굴부분을 접합한 흔적이 역력한 접목식 조성의 불상으로, 전반적인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나 등과 머리의 나발부분이 훼손된 것을 수리했던 흔적이 보인다. 이 불상에서 다라니 및 시주목록 등 복장품이 발견되었으나 조성기가 보이지 않아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18세기 중후반 조성의 불상조각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 봉국사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
    유물
    봉국사 명부전 시왕도 및 사자도
    봉국사 명부전의 시왕상 뒤에 봉안된 불화이다. 1898년에 한봉창엽을 비롯하여 명응환감, 계은봉법, 월선봉종 등 다수의 화승들이 함께 조성하였다. 그림은 총5폭으로, 전각의 향우측에 1대왕⋅3대왕도, 5대왕⋅7대왕⋅9대왕도, 향좌측에 2대왕⋅4대왕도, 6대왕⋅8대왕⋅10대왕도 및 건령대장군⋅일직사자 월직사자도가 걸려있는데, 향좌측 끝에도 원래 사자 및 장군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결실되었다. 봉국사 시왕도는 19세기 말 서울·경기지역에서 성행했던 대표적인 시왕도 형식으로, 같은 형식의 다른 불화들과 달리 시왕도 및 사자도를 모두 갖추고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2013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3호로 지정되었다.
  • 보타사
    장소
    보타사
    성북구 개운사길 60-46(안암동 5가 7)에 위치한 사찰이다. 보타사는 개운사의 암자인데, 이 절의 전각들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데 비해 높이가 5m나 되는 마애불이 눈에 띈다. 마애불은 대웅전 뒤에 있는데, 좌상의 형태이고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큰 바위에 부조로 새겨진 이 마애불상은 몸 전체에 호분(胡粉)이 칠해져 있어서 ‘백불(白佛)’이라고도 부른다. 보타사 마애좌상은 현재 보물 제182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유물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개운사(성북구 개운사길 60-46)의 암자(칠성암)인 보타사 대웅전 뒤쪽 화강암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이다. 거대한 보살상 머리에는 좌우 옆으로 뿔이 있는 관이 있고, 뿔끝에는 다양하게 장식된 타원형 느리개가 있다. 보타사의 전각들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것에 비해 이 미륵불은 그 높이가 5m나 되는데 이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큰 바위에 부조로 새겨진 이 마애불상은 몸 전체에 호분(胡粉)이 칠해져 있어서 흔히 백불(白佛)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초기 서울지역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보살상으로,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7월 2일 보물 제1828호로 지정되었다.
  •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유물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보타사가 보유하고 있는 금동으로 만든 보살상이다. 조성과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제작연대, 조각자, 시주자, 봉안 사찰 등을 알 수 없지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크기로 볼 때 조선 초 왕실이나 지배층이 발원하여 조성하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대좌 위에 앉아 있는 좌상으로, 왼쪽 다리는 대좌 아래로 내려뜨려 바닥을 딛고 오른쪽 다리는 무릎을 세우고 앉는 유희좌(遊戱座)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을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유행한 귀족적 면모의 보살상 양식을 보여주는 예로서, 조선 전기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2014년 3월 11일 보물 제1818호로 지정되었다.
  • 보문사
    장소, 유물
    보문사
    성북구 보문사길 20(보문동 3가 168)에 위치한 사찰이다. 보문사는 고려 때 승려 담진(혜조국사)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건물로는 영조 때 건축된 대웅전이 있다. 이 절은 원래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이 절의 대웅전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보문사 석가불도>,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보문사 지장보살도> 등 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들이 있다. 한편 석굴암 앞 팔각 9층 석탑은 1978년에 오대산 월정사의 탑을 본떠 조성하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내부에 봉안했다. 보문사 스님의 범패(梵唄)는 잘 알려진 무형자산이다.
  • 보문사 입구
    시청각류
    보문사 입구
    성북문화원에서 촬영한 보문사 입구 사진이다.
  • 보문사 전경(1)
    시청각류
    보문사 전경(1)
    보문동에 위치한 보문사 전경 사진이다. 보문사는 고려 때 승려 담진(혜조국사)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원래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 보문사 범종루
    시청각류
    보문사 범종루
    성북문화원에서 촬영한 보문사 범종루 사진이다.
  • 보문사 삼성각
    시청각류
    보문사 삼성각
    보문동에 위치한 보문사 삼성각 사진이다. 보문사는 고려 때 승려 담진(혜조국사)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원래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 보문사 호지문 현판
    시청각류
    보문사 호지문 현판
    성북문화원에서 촬영한 보문사 호지문 현판 사진이다.
  • 보문사 묘승전
    시청각류
    보문사 묘승전
    보문동에 위치한 보문사 묘승전 사진이다. 보문사는 고려 때 승려 담진(혜조국사)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후 여러 차례 중건되었다. 원래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현재의 묘승전은 법준스님이 중건하였다.
  • 보문사 내 석굴암으로 통하는 문
    시청각류
    보문사 내 석굴암으로 통하는 문
    보문사 내 석굴암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문이다. 성북문화원에서 촬영하였다.
  • 대한뉴스 제886호 '이런일 저런일'
    시청각류
    대한뉴스 제886호 '이런일 저런일'
    e영상역사관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대한뉴스> 제886호 '이런일 저런일' 영상이다. 보문동에 위치한 보문사의 석굴암 준공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영상은 01:35~01:55)
  • 보문사 석가불도
    유물
    보문사 석가불도
    보문사 대웅전 내에 그려진 불화이다. 석가여래가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을 묘사했다. 보문사의 다른 불화와 마찬가지로 1867년(고종 4)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단에 채색하였고, 중앙의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아래쪽 좌우에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였다. 석가여래의 머리 위쪽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 그리고 10대 제자와 화불 2위를 오른쪽에 배열하였다. 화면 사방에는 4천왕상을 배열하였다. 서울·경기지역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 유물은 1996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다.
  • 보문사 지장시왕도
    유물
    보문사 지장시왕도
    보문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화이다. 보문사 묘승전 내에 지장보살을 그린 것으로 보문사의 다른 불화와 마찬가지로 1867년(고종 4)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145㎝×200㎝ 크기의 이 불화는 비단에 채색하였다. 중앙에는 지장보살과 그 좌우에 가까이 모시는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들 삼존상(三尊像)의 뒷면에는 금색의 빛을 발하는 원형광배(圓形光背)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1996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유물
    보문사 대웅전 신중도
    보문사 대웅전 내에 있는 불화이다. 인도의 재래적인 토속신(土俗神)인 신중(神衆)을 그렸다. 신중은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수용된 불교의 호법신(護法神)들인데 별도로 그림을 그려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1867년(고종 4)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중도에는 화기(畵記)가 남아있어 불화 조성과 관련된 사실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름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상궁(尙宮)의 시주로 불화 조성 경비가 마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사찰의 불사에는 상궁을 비롯한 궁중여인들의 시주가 눈에 띄는 경향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996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9호로 지정되었다.
  • 묘법연화경 권3~4, 5~7
    유물
    묘법연화경 권3~4, 5~7
    보문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불경이다. 묘법연화경은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한역한 불교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도 하며, 초기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교경전이다.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묘법연화경은 조선 전기 왕실에서 주도하여 간행한 불경으로, 초인본은 아니고 성종연간(1470~1494)에 간행된 후인본으로 보인다. 동일한 판본으로는 보존상태가 온전하고, 서두에 남아있는 김수온(金守溫,1410-1481)의 발문에 간행시기와 연유가 분명하게 남아있다. 인쇄 상태와 지질도 뛰어나므로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1월 20일 보물 제1164-2호로 지정되었다.
  • 보문사 묘법연화경(2)
    시청각류
    보문사 묘법연화경(2)
    『한국의 사찰문화재 2』 98쪽에서 수집한 보문사 묘법연화경 사진이다.
  • 미타사
    장소, 유물
    미타사
    성북구 보문사길 6-16(보문동 3가 3-51)에 위치한 사찰이다. 미타사는 여승을 지칭하는 비구니의 수양 도량인데, 고려 초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하고 미타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승된다. 이후 몇 차례의 중수 사실이 전해지지만 의미있는 것은 1457년(세조 3)에 단종비였던 정순왕후 송씨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미타사 서쪽, 숭인동의 정업원·동망봉·자지동천(紫芝洞泉·자줏빛 물이 흘러나오던 샘) 등에 정순왕후와 관련된 사실이 있음으로 보아 이 절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곳 보문동 일대는 ‘탑골’이라 불리고, 이 절은 ‘탑골승방’이라 불리는데, 미타사 대웅전 뒤 단하각(丹霞閣) 왼쪽 언덕 위에 있는 석탑으로 인해 그렇게 불리게 된 듯하다.
  • 미타사 입구
    시청각류
    미타사 입구
    성북문화원에서 촬영한 보문동 미타사 입구 사진이다.
  • 미타사(2)
    시청각류
    미타사(2)
    1991년에 촬영한 보문동 미타사 대웅전 측면 사진이다. 이 사찰은 광종 원년(950)에 혜거국사가 처음 창건하였으며, 문종 원년(1047) 에는 석탑을 조성하여 탑골승방이라고 불리어졌다.
  • 미타사(3)
    시청각류
    미타사(3)
    1991년에 촬영한 보문동 미타사의 모습이다. 이 사찰은 광종 원년(950)에 혜거국사가 처음 창건하였으며, 문종 원년(1047) 에는 석탑을 조성하여 탑골승방이라고 불리어졌다.
  • 미타사 석탑 (1)
    시청각류
    미타사 석탑 (1)
    성북문화원에서 촬영한 미타사 석탑 사진이다. 사진 속 석탑때문에 미타사를 '탑골승방'으로 불렀다는 추측이 있다.
  • 미타사 칠성도
    유물
    미타사 칠성도
    미타사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이다. 칠성도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여러 별들을 부처와 보살로 의인화하여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화면 중앙에 그려진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좌우로 칠불(七佛)과 칠원성군(七元星君), 28수(宿)의 크기를 달리하여, 그림으로서 위계를 지키고 있다. 19~20세기 서울, 경기지역의 대표화승 경선당 응석이 주도하여 조성된 불화로서 서울, 경기, 경상도지역의 칠성도 형식을 선도하고 있다. 당시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띠고 있어 불교 미술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2014년 7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1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유물
    미타사 지장시왕도
    미타사 대웅전에 봉안되어있는 불화이다. 이 지장시왕도는 시주자인 계유생 이씨 부인이 아버지 전주 이씨, 어머니 문의 이씨, 남편인 정축생 남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발원한 것이다. 신중도와 양식·화풍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신중도와 같은 해인 1873년 4월에 삼각산 미타사에서 함께 제작·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조색으로 사용되었으며,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서울·경기지역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섬세한 필선과 탄탄한 구성 등 경선당 응석의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2014년 7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9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아미타후불도
    유물
    미타사 아미타후불도
    미타사에 봉안되어있는 불화로 1873년 신중도 및 지장시왕도와 동시에 한 조로 조성된 것이다. 아미타후불도는 극락보전, 아미타전, 무량수전에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불화는 대웅전에 후불도로 모셔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불화는 아미타불좌상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금강역사 등이 배치된 아미타불의 법회모임을 표현하고 있다. 신중도, 지장보살도와 일습으로 상단탱화로 조성된 이 아미타후불도 중 평상에 앉은 사천왕상의 등장은 경상북도 예천군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그 예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2014년 7월 3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358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신중도
    유물
    미타사 신중도
    미타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이다. 신중도는 부처의 정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 것으로, 미타사의 신중도는 1873년 4월 경선당 응석이 출초하였다. 가로로 긴 화면은 2단으로 나뉘어져 상단에는 범천과 제석천 및 천부중, 하단에는 위태천과 천룡팔부가 배치되었고, 하단의 중앙부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창과 칼 등으로 무장한 천부 팔부중 무리가 자리하고 있다. 서울 경기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크게 유행하여 현재 여러 점의 작품이 남아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형태, 안정적인 색채 등에서 19세기 말 서울·경기지역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014년 7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산신도
    유물
    미타사 산신도
    미타사에 봉안되어있는 불화이다. 산신도는 산신을 그린 불화로 민간신앙의 대상인 산신이 불교에 편입되면서 제작되었다. 미타사의 산신도는 1915년 초암 세복과 금명 운제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19~20세기의 전형적인 화면구성을 보여주며 패널 형식의 그림으로 손상 없이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19~20세기 산신도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경우 긴 꼬리를 위로 쳐들어 살랑거리고 있는 정감 있고 익살스러운 모습인데 비해, 이 그림의 호랑이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경직된 머리에 꼬리를 감추고 있는 색다른 모습이다. 2014년 7월 3일 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
    유물
    미타사 백의관음도
    미타사에 봉안되어있는 불화이다. 1906년(광무 10)에 삼각산 미타사 향로전 불화로 조성된 백의관음도로서, 석옹 철유가 단독으로 제작하였다. 현재 액자상태로 장황되었으며, 화면 아래 부분에 보채 및 수리의 흔적이 있다. 푸른 바다 위에 백의를 입은 관음보살이 파도 위 연잎에 서서 오른손에 버들가지, 왼손에 끈에 묶인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향해 서 있으며, 그 주위로 용왕과 천녀, 동자가 배치되어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2014년 7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독성도
    유물
    미타사 독성도
    미타사에 봉안되어있는 불화이다. 독성도는 부처님의 제자인 독성존자(獨聖尊者)를 그린 불화로 독성존자는 부처님 열반 후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이 독성도는 19~20세기의 전형적인 화면구성을 보여주는 독성도로서 당시 서울․경기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 화승인 초암 세복과 금명 운제가 산신도와 함께 조성한 작품이다. 미타사 소장의 산신도와 유사하게 심산유곡을 뒤 배경으로 한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패널 형식의 그림으로 손상 없이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2014년 7월 3일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
    유물
    미타사 감로도
    미타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화로 금어인 고산 축연, 초암 세복에 의해 제작되었다. 화면을 상·중·하단으로 구분하면 상단에는 칠여래 좌우로 관음보살, 인로왕보살, 지장보살이 있으며, 중단인 의식단이 강조되었고 하단의 아귀는 매우 작게 묘사되어있다. 행사를 기록화처럼 묘사하기 위해서 전대보다 더 많은 인물과 장면들로 화면을 채웠다. 이와 같은 유형은 19세기 서울·경기지역에서 성행하던 감로왕도의 도상을 계승한 것으로, 특히 서울지역의 감로도와 비교할 만하다.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로, 한 쌍의 아귀 규모가 줄어든 것은 1918년 당시 감로도의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2014년 7월 3일 문화재자료 제61호로 지정되었다.
  • 경국사
    장소
    경국사
    성북구 보국문로 113-10(정릉3동 753)에 자리한 사찰이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 율사 정자(淨慈)가 청암사(靑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공민왕 때에 지공(指空)선사가 머물면서 고승대덕의 수도처로 알려졌다. 17세기 초 조선 현종 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고, 몇 차례의 보수와 증축을 거쳐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16세기 중반 문정왕후의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1921년 승려 보경(寶鏡)이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현재의 봉안된 탱화, 벽화 등의 대부분이 이 보경의 작품이다. 한편 경국사 주변은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휴식처로서 예로부터 사대부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자주 방문했었고, 1953년 당시 미국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방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 경국사 안내판
    시청각류
    경국사 안내판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3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
  • 경국사 입구
    시청각류
    경국사 입구
    정릉동에 위치한 경국사의 일주문 및 그 주변의 모습이다. [한성대학교 서비스러닝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경국사(1)
    시청각류
    경국사(1)
    눈 쌓인 전통사찰 경국사의 모습이다. 경국사는 정릉동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로, 보물 제748호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 있다.
  • 경국사(2)
    시청각류
    경국사(2)
    눈 쌓인 전통사찰 경국사의 모습이다. 경국사는 정릉동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로, 보물 제748호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 있다.
  • 경국사 극락보전
    시청각류
    경국사 극락보전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4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耀-⤰㶮ǮW㸒Ǯ鷠㷭Ǯ 㸓Ǯ飐㷭Ǯ얐㸖Ǯ您㷭Ǯ
  • 경국사 관음성전 정면(1)
    시청각류
    경국사 관음성전 정면(1)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2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
  • 경국사 관음성전 정면(2)
    시청각류
    경국사 관음성전 정면(2)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9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
  • 경국사 관음성전 측면
    시청각류
    경국사 관음성전 측면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8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
  •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시청각류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7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
  •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현판(1)
    시청각류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현판(1)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5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
  •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현판(2)
    시청각류
    경국사 관음성전 후면 현판(2)
    경국사는 고려말기에 삼각산 푸른 봉우리 밑에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자정국존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조선 현종때에 이름이 경국사로 바뀌면서 현재의 사원규모를 갖추었다. 영조 13년에 洛菴義訥선사가 절을 보전하였고, 정조 17년에 天峯泰屹선사가 주석하였으며 고종 5년에 금고를 조성하며 삼성전과 칠성전, 산신각을 창건하였다. 1915년 극락전을 중수하고 1926년 불교예식에 정통하고 화승이자 선지식이었던 寶鏡普賢화상이 주지로 부임하였고, 현재의 극락전, 명부전,耀-⤰㶮ǮW 성북구, 1993, 602-603쪽)Ǯ
  • 경국사 팔상도
    유물
    경국사 팔상도
    경국사에서 소장 중인 불화이다. 석가모니의 일생 중 중요한 8가지 일화를 4장면씩 2폭에 나누어 그린 팔상도로, 화승 금운순민, 봉규, 긍법, 종현이 1887년(고종 24)에 제작하여 경국사에 봉안하였다. 두 폭으로 이루어진 경국사 팔상도는 한 폭을 넷으로 구획하여 8장면을 그렸는데, 두 폭이 서로 다른 화면분할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화풍에 있어서도 공간 구성과 음영법의 사용에 차이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경국사 팔상도는 상궁들이 후원하여 제작된 불화로 각 폭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분할하여 그리거나, 음영법을 사용하고 중국 소설삽화의 인물 표현을 도입하는 등 19세기 말 불화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8년 5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 경국사 팔상도(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시청각류
    경국사 팔상도(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한국의 사찰문화재 2』 67쪽에서 수집한 경국사 팔상도(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 사진이다.
  • 경국사 지장시왕도
    유물
    경국사 지장시왕도
    경국사에서 소장 중인 불화이다. 지장보살과 시왕 등의 권속을 함께 그린 지장시왕도로, 화승 혜산축연과 성전, 봉조가 1887년(고종 24)에 제작하여 경국사에 봉안하였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인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 등의 각 권속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지장보살의 앞쪽에 선악동자가 표현되어 있는 것이 이 지장시왕도의 도상적 특징으로, 19세기 말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지장시왕도와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붉은색을 주조색으로 하는 섬세한 서울·경기 지역 불화의 화풍을 잘 보여준다. 2008년 5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 경국사 신중도
    유물
    경국사 신중도
    경국사에 봉안되있던 불화이다. 신중도(神衆圖)란 여러 신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1887년(고종 24) 혜산 축연과 허곡 긍순이 조성하고, 건봉사의 유명한 승려인 보운 긍엽과 보응 인수, 등운 수은이 증명하였다. 이 신중도는 전형적인 19세기 신중탱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호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구름에 입체감을 표현한 것은 축연의 화풍상 특징이다. 경국사 신중도는 금강산의 불모 축연과 경기도·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기형이 경국사 신중도를 함께 조성하였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화파 간의 교류와 협업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2008년 5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유물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경국사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이다. 1703년(숙종 29) 청신이 화주가 된 도갑사 견성암에 봉안되었던 관세음보살좌상이다. 높이가 60cm에 달하는 중형의 보살상으로서,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기에 의하면 색난을 수조각승, 순경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 대원, 일기, 추☐, 대유, ☐척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고 한다. 신체에 비하여 다소 큰 듯한 얼굴이라든가 안정감있는 좌세, 오똑한 코, 수평으로 가로지른 군의의 표현, 단정한 결가부좌의 자세 등이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17세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2007년 12월 27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유물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경국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목각탱화이다. 조각 수법이나 형식 등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조각 수법이 둔중하고 양감이 결여되어 있어 형식화된 면이 많이 보이고 있으나, 고부조로 조각되어 원각상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인물의 구성에 있어서 횡적 혹은 종적으로 질서 정연하고 단순하게 인물들을 배열한 다른 목각탱화들과 달리, 본존을 중심으로 권속들이 둥글게 둘러싸는 구도를 취하여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현존하는 몇 예에 불과한 조선 후기 목각탱화의 하나로서, 당시의 아미타신앙의 일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983년 5월 7일 보물 제748호로 지정되었다.
  • 경국사 괘불도
    유물
    경국사 괘불도
    경국사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불화이다. 1878년(고종 15) 삼각산 경국사에서 고종과 명성황후, 신정왕후, 명헌왕후와 이후 순종이 되는 왕세자의 성수만세를 기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화기의 대시주자 명단에는 당시의 유력가였던 병조판서 민겸호 부부와 대호군 서당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20여 명의 상궁과 100여 명에 이르는 시주자가 왕실 일가의 축수를 발원하며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을 꽉 채우는 삼존의 안정된 구도와 비율, 불보살의 육신부에 채색된 황색조와 부분적으로 사용된 군청과 녹색의 조화는 19세기 후반 불화 후원의 주요 시주자였던 고관과 상궁 발원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2008년 5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제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 경국사 감로도
    유물
    경국사 감로도
    경국사가 보유하고 있는 조선시대 불화이다. 1868년(고종 5) 흥국사 감로왕도의 도상을 초본으로 하여 1887년(고종 24) 제작되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감로왕도의 전형적인 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성 당시 불교의 제의식(齋儀式) 장면을 비롯하여 서민들의 생활상 등 수륙재 의식과 생활상을 충실히 묘사하였다. 특히 다양한 인물들의 표현과 생동감 있는 자세 등의 연출로 인해 화면 전체가 생기있는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강원도와 서울, 경기지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화승인 축연과 철유가 제작한 작품이자 상궁들의 시주로 제작된 불화로서 당시 왕실에서의 불화발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8년 5월 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1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장소, 유물
    개운사
    성북구 개운사길 73(안암동 5가 157)에 자리한 사찰이다. 1396년(태조 5)에 무학대사가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인 인명원(仁明園)이 절 옆에 세워지자, 영도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절의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로 바꾼 시기는 절을 옮긴 시점일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26년부터 근대 불교의 대표적인 석학이었던 승려 박한영이 이 곳에서 많은 제자를 키워냈고, 선사 탄허가 개운사의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경 번역에 힘썼다. 현재 개운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 1점과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5점이 보관되어 있다.
  • 개운사(2)
    시청각류
    개운사(2)
    2004년에 촬영한 개운사 사진이다. 조선 태조 5년(1396)에 무학대사가 현재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절을 짓고 영도사(永導寺)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후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인 인명원(仁明園)이 절 옆에 세워지자, 영도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절의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로 바꾼 시기는 절을 옮긴 시점일 가능성이 크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절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1926년부터 근대 불교의 대표적인 석학이었던 승려 박한영이 이 곳에서 많은 제자를 키워냈고, 선사 탄허가 개운사의 암자인 대원암에서 불경 번역에 힘썼다. 현재 개운사에는 국가에서 지정한 보물 1점과 서울특별시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 5점이 보관되어 있다.
  • 대원암
    장소, 유물
    대원암
    성북구 개운사길 60-46(안암동 5가 8)에 위치한 사찰이다. 대원암은 개운사에 딸린 암자인데, 1845년(헌종 11)에 우기(祐祈, 호는 지봉)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에는 근대 불교계의 석학인 박한영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많은 석학을 배출하였다. 당시에는 출가 제자 뿐만 아니라 신석정, 서정주, 홍명희, 이광수, 최남선, 정인보 등 당대 대표적 지식인들이 모여들었다. 1970년대에는 탄허스님이 이곳에서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의 역경사업에 힘썼다.
  • 66. 중앙승가대 전신 중앙불교승가학원
    기타
    66. 중앙승가대 전신 중앙불교승가학원
    내용: 중앙승가대학교의 연혁을 설명하는 기사이다. 중앙승가대학교이 설립되고 운영이 안정되어 가던 과정과 학교의 초석을 다진 승려 석주의 역할 등을 설명하고 있으며, 승려 석주가 보현사에서 개원 법회를 하고 있는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저널명: 법보신문 발행 형태: 인터넷 신문 기사. 발행일: 2018.05.22. 11:43(승인) 비고: 『법보신문』 1441호 2018년 5월 23일자에 게재
  • 개운사 팔상도
    유물
    개운사 팔상도
    개운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팔상도이다. 1883년(고종 20)에 대허 체훈과 금곡 영환, 한봉 창엽이 그린 것이다. 이 불화는 19세기 후반 서울・경기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화면 분할식 불화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한 화면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석가모니의 일생을 그린 것이다. 원색의 남용과 일부 팔상장면의 생략, 화면 분할식 구도 등 18세기 팔상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19세기 팔상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서 서울 지역에 예가 많지 않은 팔상도 중 하나이다. 이와 함께 19세기 후반 서울・경기지역 화승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대웅전 지장시왕도
    유물
    개운사 대웅전 지장시왕도
    개운사에 봉안된 조선 후기 불화이다. 1870년(고종 7)에 서울 지역의 대표적 화승인 경선 응석, 봉감, 자한, 체훈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 개운사 대웅전의 향좌측 벽에 봉안되어 있다.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지장시왕도 형식의 대표작으로, 응석과 그 제자들이 그린 이런 형식의 지장보살도 중 개운사 불화는 가장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라든가 놀란 듯한 동그란 눈동자와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 뺨 부분에 음영을 표현하여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신중도
    유물
    개운사 신중도
    개운사에 봉안된 조선 후기의 불교 유물이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67.2㎝, 가로 193㎝. 범천과 제석천, 위태천을 중심으로 많은 신중들을 표현한 신중도이다. 조성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불화의 양식적 특징과 조성 화원으로 볼 때 반대쪽에 봉안된 지장시왕도와 같은 시기인 1870년(고종 7)으로 추정된다. 천부중과 천룡팔부를 한 폭에 묘사한 형식이라든가 산신과 조왕신이 위태천의 협시로 등장하는 점, 주악천녀 등의 등장은 19세기 신중탱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면서도 다양한 존상의 세밀한 표현과 균형을 이루는 구성, 더불어 화사의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유물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개운사가 보유하고 있는 불상과 복장 유물이다. 중수발원문에는 충청남도 아산 축봉사에 봉안되어 있던 사실과 고려 충렬왕이 즉위했던 1274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제작된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불상은 단엄한 상호, 세련되고 뛰어난 조각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 등이 잘 어우러진 매우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불상 내에서 발견된 다수의 발원문은 각기 작성한 연대가 표시되어 있어 구체적인 시기를 알 수 있고,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복장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2010년 4월 23일 보물 1649호로 지정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
    유물
    개운사 감로도
    개운사(성북구 개운사길 73)가 소장하고 있는 불화이다. 이 감로도는 1883년에 3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상궁들의 시주에 의해 제작된 불화로서 대허 체훈(大虛 軆訓)과 천기(天機), 수일(守一), 태삼(台三) 등이 그린 것이다. 감로도(甘露圖)는 지옥 아귀도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에게 설법을 듣는 불화로, 개운사의 감로도는 19세기 중엽 이후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한 감로왕도의 전형적인 도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성 당시 불교의 재의식 장면을 비롯하여 서민들의 생활상 등 수륙재(水陸齋)의식과 생활상을 충실히 묘사했으며, 30여 명에 이르는 상궁들의 시주로 제작된 불화로서 당시 왕실에서의 불화발원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6년 7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중간대사 원문
    시청각류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중간대사 원문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4쪽에서 수집한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중간대사 원문 사진이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천정혜흥 원문
    시청각류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천정혜흥 원문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4쪽에서 수집한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천정혜흥 원문 사진이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최춘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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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최춘 원문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4쪽에서 수집한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최춘 원문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전적
    유물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전적
    개운사 미타전에 봉안된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발견된 복장유물이다. 충청남도 아산 축봉사에서 13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발원문 3점, 신라 하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쳐 간행된 불서 22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 6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다라니 8점, 탁본 1점, 족자 1점이다. 고려시대의 전적류와 함께 중수기에 등장하는 시기 외에 조선 후기에 들어서 재차 중수 및 이에 따른 복장 납입이 이루어졌으며, 이때 납입된 경전을 통해 당시의 신앙과 아미타불상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불상을 포함한 개금기 3건과 대방광불화엄경 사경 7건, 대방광불화엄경 인본 15건 등 총 25건은 2010년 4월 23일 보물 제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 복장전적은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5)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5)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7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5)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49)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49)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8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49)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3)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3)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8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63)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8)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8)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8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8)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8 변상도)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8 변상도)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8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8 변상도)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10)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10)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8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10)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16)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16)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9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16)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20)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20)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9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20)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보살본행경 권중)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보살본행경 권중)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9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보살본행경 권중)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8)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8)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7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8)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7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56)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56)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56)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2)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2)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2)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진본 권33)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진본 권33)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5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33)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44)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44)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6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44)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48)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48)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6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권48)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4)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4)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6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4)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6)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6)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6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6)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3)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3)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7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3)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9)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9)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7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9) 사진이다.
  •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권20)
    시청각류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권20)
    『한국의 사찰문화재 2』 19쪽에서 수집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전적(대방광불화엄경 권20) 사진이다.
  • 심곡암
    장소
    심곡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골 초입에서 비밀스런 관문을 통과하듯 길을 오르면, 이름 그대로 깊은(深) 골짜기(谷) 속의 암자(庵)에 다다른다.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로 개창한지 1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내에는 기도처인 관음굴, 너럭바위, 굴참나무, 관음바위 등이 있다. 관음바위는 원래 ‘물개바위’라고 불렸으나 정릉 ‘김 참판댁’이 이 바위에서 관세음보살을 보고 대를 잇게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면서 관음바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심곡암에서는 너럭바위 주변을 산사음악회와 같은 각종 문화행사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템플스테이도 운영중이다.
  • 심곡암 진신사리탑
    시청각류
    심곡암 진신사리탑
    심곡암 대웅전 앞 코끼리 바위 정상 위에 자리하고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탑이다.
  • 서울 정릉 심곡암 관음굴
    기타
    서울 정릉 심곡암 관음굴
    내용: 정릉 심곡암의 기도처인 관음굴과 관음굴 옆에 위치한 너럭바위에 얽힌 설화를 소개하는 기사. 저널명: 불교신문 발행 형태: 인터넷 신문 기사. 발행일: 2008.03.22 12:00(승인) 비고: 2008년 3월 26일 『불교신문』 2412호에 지면 기사 게재.
  • 심곡암 석등
    시청각류
    심곡암 석등
    성북구청 포토갤러리에서 수집한 정릉동 심곡암 석등 사진이다.
  • 심곡사 목조보살좌상
    유물
    심곡사 목조보살좌상
    심곡사가 소유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이다. 복장물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 정확한 제작 연대와 조각승은 알 수 없지만, 17세기 중·후반기에 활동한 조각승 혜희(慧熙, 惠熙) 또는 그 유파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불상은 높이가 88.3㎝ 정도로 중형에 속하며 전체적으로 얼굴, 상체, 하체의 형태가 안정적인 불상이다. 이 불상은 비록 제작 시기를 알 수 없고 일부 손가락이 훼손되었지만, 조선 후기 조각승의 양식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 2012년 5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37호로 지정되었다.
  • 2009 심곡암 산사음악회
    시청각류
    2009 심곡암 산사음악회
    성북구청 포토갤러리에서 수집한 심곡암 산사음악회 사진이다. 심곡암은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로 개창한지 1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내에는 기도처인 관음굴, 너럭바위, 굴참나무, 관음바위 등이 있다.
  • 2011 심곡암 산사음악회
    시청각류
    2011 심곡암 산사음악회
    성북구청 포토갤러리에서 수집한 심곡암 산사음악회 사진이다. 심곡암은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로 개창한지 1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내에는 기도처인 관음굴, 너럭바위, 굴참나무, 관음바위 등이 있다
  • 2013 심곡암 산사음악회
    시청각류
    2013 심곡암 산사음악회
    성북구청 포토갤러리에서 수집한 심곡암 산사음악회 사진이다. 심곡암은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로 개창한지 1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내에는 기도처인 관음굴, 너럭바위, 굴참나무, 관음바위 등이 있다
  • 2015 심곡암 산사음악회
    시청각류
    2015 심곡암 산사음악회
    성북구청 포토갤러리에서 수집한 심곡암 산사음악회 사진이다. 심곡암은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로 개창한지 1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내에는 기도처인 관음굴, 너럭바위, 굴참나무, 관음바위 등이 있다.
  • 2017 심곡암 산사음악회
    시청각류
    2017 심곡암 산사음악회
    성북구청 포토갤러리에서 수집한 심곡암 산사음악회 사진이다. 심곡암은 북한산 형제봉 아래 제1사찰로 개창한지 1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내에는 기도처인 관음굴, 너럭바위, 굴참나무, 관음바위 등이 있다.
  • 길상사
    장소
    길상사
    성북구 선잠로 5길 68(성북동 321-3)에 위치한 사찰이다. 길상사는 군사정권 시절 삼청각 등과 함께 최고급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졌다.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이 1987년 법정스님께 대원각을 불교 도량으로 만들어 주기를 청하였다. 1995년 법정스님이 그 뜻을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을 하였다. 그 후 2년여 동안 예전 음식점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 단장하여 1997년 '맑고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등록하고 같은 해 창건법회를 열었다. 이듬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선방 ‘길상선원’을 개원하였고, 불도 체험, 수련회 등의 프로그램과 어린이 미술대회, 대중가수의 콘서트까지 개최하는 등 도심 속 문화공간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길상사 극락전
    시청각류
    길상사 극락전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길상사 극락전 사진이다. 이 사진은 2015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길상사 보탑
    시청각류
    길상사 보탑
    성북문화원 마을기록아카이브팀에서 촬영한 길상사 보탑 사진이다.
  • 길상사 내 길상화 공덕비
    시청각류
    길상사 내 길상화 공덕비
    길상사 내 길상화 공덕비를 촬영한 사진이다. 길상화는 김영한 여사의 법명으로,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 여사는 자신의 건물과 대지를 모두 시주하여 지금의 길상사로 거듭나게 하였다.
  • 길상사 관음보살상
    시청각류
    길상사 관음보살상
    성북문화원 아카이브팀에서 촬영한 길상사 관음보살상 사진이다. 천주교 신자인 김종태 조각가가 기증한 작품이다.
  • 길상사 연등
    시청각류
    길상사 연등
    성북문화원 마을기록아카이브팀에서 촬영한 길상사 사진이다.
  • 길상사(구 대원각) 정문
    시청각류
    길상사(구 대원각) 정문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성북동 길상사 사진이다.
  • 길상사(구 대원각) 내부 전경
    시청각류
    길상사(구 대원각) 내부 전경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성북동 길상사 사진이다.
  • 길상사(구 대원각) 극락전
    시청각류
    길상사(구 대원각) 극락전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성북동 길상사 사진이다.
  • 길상사(구 대원각) 적묵당
    시청각류
    길상사(구 대원각) 적묵당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성북동 길상사 사진이다.
  • 길상사(구 대원각) 내부 다리
    시청각류
    길상사(구 대원각) 내부 다리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성북동 길상사 사진이다.
  • 길상사(구 대원각) 탑
    시청각류
    길상사(구 대원각) 탑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에서 수집한 성북동 길상사 사진이다.
  •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 1997년12월14일
    시청각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창건 1997년12월14일
    길상사 창건 당일의 정황을 촬영한 영상 자료로 법정스님과 길상사의 전신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의 모습이 담겨있다.
  •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20] 삼곡사~보토현~길상사
    기타
    [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20] 삼곡사~보토현~길상사
    내용: 심곡사~여래사~하늘마루(김신조 루트 앞)~북악하늘길~길상사를 탐방하면서 쓴 저널 기사이다. 성북구와 관련된 지명이나 각 장소에 얽힌 이야기 등이 소개되어 있다. 저널명: 문화경제 발행 형태: 인터넷 저널 기사. 발행일: 2011.03.28 11:10:38 비고: CNB저널 제215호에 실림.
  • 서울 성복동 '대원각' 도심속 山寺로 탈바꿈
    기타
    서울 성복동 '대원각' 도심속 山寺로 탈바꿈
    내용: 대원각이 길상사로 개원되고 있는 상황을 보도한 기사. 신문명: 중앙일보 발행 형태: 인터넷 신문 기사. 발행일: 1997.08.17 00:00(입력) 비고: 기사 제목 "성복동"은 "성북동"의 오기. 1997년 8월 17일 『중앙일보』 종합 15면에 게재.
  • 정법사
    장소
    정법사
    성북구 대사관로13길 44(성북동 330)에 위치한 사찰이다. 현재 위치에 절이 처음 창건된 것은 조선 후기 채정선사에 의해서였는데, 원래 이름은 복천암(福泉庵)으로 국운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이었다. 이후 1960년 가회동에 있던 건봉사의 포교당인 정법원을 이곳으로 옮겨서 중창하고 정법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웅전은 정법사를 이전할 때 당시 서대문 신학대학에 있던 황태자궁을 이전해 온 것인데, 내부에는 1918년에 그려진 열반도, 후불탱화 등이 있다.
  • (4) 삼각산 정법사
    기타
    (4) 삼각산 정법사
    내용: 정법사의 연혁과 정법사에 계신 스님들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 1960년 사찰명을 정법사로 개명하고 새로 봉안한 불상과 새로 중수한 건축물에 대해 설명함. 저널명: 불교저널 발행 형태: 인터넷 신문 기사. 발행일: 2014.02.06 10:40
  • 보국사
    장소
    보국사
    성북구 아리랑로19길 70(정릉동 506)에 위치한 사찰이다. 보국사는 정릉 입구의 주택가에 있는데, 보국사 현판을 보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치면 여느 단독 주택처럼 보일 정도이다. 정릉 마지막 능참봉의 후손인 서완석에 따르면, 보국사의 왼편에 있는 ‘대동염불원(大同念佛院)’이란 현판이 붙은 한옥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국사의 초기부터 있었다고 한다. 보국사의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새로 지은 것들이다.
  • [2020] 보국사(1)
    시청각류
    [2020] 보국사(1)
    골목에서 촬영한 보국사 건물의 외관 모습이다. [한성대학교 서비스러닝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2020] 보국사(2)
    시청각류
    [2020] 보국사(2)
    보국사 마당에서 촬영한 건물 모습이다. [한성대학교 서비스러닝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관음사
    장소
    관음사
    성북구 성북로21길 12(성북동 116-1)에 위치한 사찰이다. 관음사는 주지인 혜강스님이 불교의 대중화와 포교를 위해 1997년 성북동에서 개원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활동을 위해 관음사 내에 ‘관음불교출판사’를 만들어 다양한 서적과 『관음불교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며, 불교에 대한 교양강좌 개설을 위해 ‘관음불교대학’을 만들었다.
  • 관음사 출입구
    시청각류
    관음사 출입구
    관음사 출입구의 모습이다. [한성대학교 서비스러닝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촬영되었다.]
  • 영취사
    장소
    영취사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영취사는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북한산을 오르다보면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사찰이다. 창건 등의 연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웅전 계단 아래 마당에 5층 석탑이 있는데, 고려말~조선 전반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작은 크기이지만 서울지역에 별로 많지 않은 석탑 가운데 하나이며, 석탑의 부재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2007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
  • 영취사 오층석탑
    유물
    영취사 오층석탑
    영취사(성북구 보국문로 261-222) 경내에 소재한 석탑이다. 영취사의 대웅전 계단 아래쪽 마당에 위치한 오층석탑으로 원래는 요사채 앞쪽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층기단은 넓고 높은 편인데 여러 장의 장대석을 이어 결구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으며, 사이사이에 잡석을 끼워 지탱하고 있다. 이 탑은 높고 넓은 기단부와 쌓아올리듯이 탑신을 올린 구성법, 소략화된 층급의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 말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많이 훼손되어 형체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2007년 12월 27일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
  • 영취사 대웅전(2)
    시청각류
    영취사 대웅전(2)
    영취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북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측면에서 촬영한 영취사 대웅전의 앞쪽 사진이다.
  • 영취사 대웅전(3)
    시청각류
    영취사 대웅전(3)
    영취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북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영취사 대웅전의 측면 사진이다.
  • 영취사 대웅전 내부(1)
    시청각류
    영취사 대웅전 내부(1)
    영취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북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영취사 대웅전 내부 본존불 사진이다. 본존불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본존불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 영취사 대웅전 내부(2)
    시청각류
    영취사 대웅전 내부(2)
    영취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북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영취사 대웅전 내부 불화 사진이다. 불화의 중심에 위치한 부처의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그려져있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약사여래의 협시보살이다. 따라서 불화 중심의 부처는 약사여래로 추정된다.
  • 영취사불사공덕비
    시청각류
    영취사불사공덕비
    영취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북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영취사 불사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1990년에 세운 공덕비다.
  • 영취사 용왕각(1)
    시청각류
    영취사 용왕각(1)
    영취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북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영취사 용왕각 정면 사진이다.
  • 영취사 용왕각(2)
    시청각류
    영취사 용왕각(2)
    영취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정릉계곡을 따라 보현봉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북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영취사 용왕각 내부에 있는 용왕도 사진이다.
  • 내원사
    장소
    내원사
    성북구 보국문로 262-151(정릉4동 산 1-1)에 위치한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 창건된 연혁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조선 후기 김정호의 한양 지도인 “수선전도”와 “백의대사불도(白衣大士佛圖)”라는 목판에는 같은 위치에 내원암(內院庵)이라는 표기가 있어 늦어도 19세기 중엽에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 등 상세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 내원사 향성해(1)
    시청각류
    내원사 향성해(1)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종루 또는 종각의 사진이다. 향성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사찰의 루는 정문과 연결되어 있거나 정문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내원사의 경우 사진처럼 막혀있어 사찰의 출입구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 내원사 향성해(2)
    시청각류
    내원사 향성해(2)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종루 또는 종각의 사진이다. 건물 안에는 불전사물인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이 있다.
  • 내원사 향성해(3)
    시청각류
    내원사 향성해(3)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종루 또는 종각 내부의 범종과 법고의 사진이다.
  • 내원사 향성해(4)
    시청각류
    내원사 향성해(4)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종루 또는 종각 내부의 목어과 운판의 사진이다.
  • 내원사 대웅전(1)
    시청각류
    내원사 대웅전(1)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대웅전 외부 사진이다.
  • 내원사 대웅전(2)
    시청각류
    내원사 대웅전(2)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대웅전 내부 사진이다.
  • 내원사 대웅전(3)
    시청각류
    내원사 대웅전(3)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대웅전 측면 사진이다.
  • 내원사 장보다(1)
    시청각류
    내원사 장보다(1)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삼성각 외부 사진이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하는 건축물이다. 장보다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 내원사 장보다(2)
    시청각류
    내원사 장보다(2)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삼성각 측면 사진이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하는 건축물이다. 장보다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 내원사 장보다(3)
    시청각류
    내원사 장보다(3)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삼성각 내부 사진이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하는 건축물이다. 장보다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 내원사 장보다(4)
    시청각류
    내원사 장보다(4)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삼성각 내부 사진이다. 외부암벽에 의지하여 건축하였으며, 암벽 부분에 독성을 조각하였다. 삼성각은 산신, 칠성, 독성을 봉안하는 건축물이다. 장보다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 내원사 괘불대
    시청각류
    내원사 괘불대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괘불대 사진이다. 괘불대는 법당 밖이나 야외에서 의식을 행할 때 그곳에 불화를 걸어 두는 긴 막대기이다.
  • 내원사 석불
    시청각류
    내원사 석불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석불 사진이다. 대웅전 뒷편 삼성각을 지나 내원사 가장 높은 곳 야외에 모셔져 있는 석불이다.
  • 내원사 기타건물(1)
    시청각류
    내원사 기타건물(1)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법당을 제외한 기타건물이다. 이 곳은 사찰 종무소와 공양간 및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내원사 기타건물(2)
    시청각류
    내원사 기타건물(2)
    내원사는 성북구 정릉동 북한산에 있는 사찰이다. 내원사라는 명칭은 1969년 이재현 스님이 폐사지였던 곳에 새로 절을 만들며 대웅전을 건립할 때, 이전 건물에서 내원사라는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원사 법당을 제외한 기타건물이다. 이 곳은 사찰 종무소와 공양간 및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영불사
    장소
    영불사
    성북구 보국문로 225-35(정릉동 산1-1)에 위치한 사찰이다. 국민대학교 매표소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다. 태화산 마곡사에서 출가하고 인왕산에서 수도한 묘전 스님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동쪽으로 가면 석굴이 있다는 계시를 받아 1959년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총화종 소속이다.
  • 영불사 표지석
    시청각류
    영불사 표지석
    영불사는 성북구 보국문로 225-35(정릉동 산1-1)에 위치한 사찰이다. 국민대학교 매표소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다. 사진은 영불사 입구의 표지석이다.
  • 영불사 대웅전 뒤편 전경
    시청각류
    영불사 대웅전 뒤편 전경
    영불사는 성북구 보국문로 225-35(정릉동 산1-1)에 위치한 사찰이다. 국민대학교 매표소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다. 사진은 영불사 대웅전 뒤편에서 전경을 촬영한 것이다.
  • 영불사 사적비
    시청각류
    영불사 사적비
    영불사는 성북구 보국문로 225-35(정릉동 산1-1)에 위치한 사찰이다. 국민대학교 매표소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다. 사진은 영불사 경내의 '영불사 사적비'이다.
  • 영불사 석불 입상
    시청각류
    영불사 석불 입상
    영불사는 성북구 보국문로 225-35(정릉동 산1-1)에 위치한 사찰이다. 국민대학교 매표소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다. 사진은 영불사 경내의 석불 입상이다.
  • 영불사 약사전
    시청각류
    영불사 약사전
    영불사는 성북구 보국문로 225-35(정릉동 산1-1)에 위치한 사찰이다. 국민대학교 매표소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다. 사진은 영불사 약사전이다.
  • 영불사 약사전 내부
    시청각류
    영불사 약사전 내부
    영불사는 성북구 보국문로 225-35(정릉동 산1-1)에 위치한 사찰이다. 국민대학교 매표소에서 형제봉으로 오르는 능선 좌측에 있다. 사진은 영불사 약사전의 내부이다.
  • 적조사
    장소, 유물
    적조사
    성북구 흥천사길 49-23번에 위치하는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의 사내 암자이다. 특히 근대 한국현대불교의 정신적 지주였던 경산스님의 수행처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후기 헌종 때에 지어진 흥천사의 부속암자로 혜암 성혜스님이 창건하였다. 초기에 독립된 사찰로 세워진 것이 아니어서 규모는 크지 않으며 전통적인 암자의 틀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관음전, 동국선원, 법당 등의 건물이 있으며, 한국 불교사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경산스님(조계종 총무원장, 동국대학교 재단 이사장 역임)의 마지막 수행 장소로서 사리탑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2019년 2월 14일 적조사 신중도가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성라암
    장소
    성라암
    성북구 성북로31길 27(성북동 285)에 위치한 사찰이다. 성라암은 창건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 곳이 유명해진 것은 일제강점기 윤심덕,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 3인방으로 불리던 김일엽이 자전 소설 『청춘을 불사르고』를 쓴 곳이기 때문이다. 김일엽의 아들인 승려 일당(김태신, 1922~2014)도 성라암에 주석하다 입적했다. 또한, 성라암은 다양한 봉사활동을 벌이는 사회복지법인 성라원의 본산으로도 유명하다. 성라원을 만든 법성스님은 노인복지를 위하여 1990년 복지법인을 설립한 후 이듬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사찰 건물과 대지·임야 등 약 30억 원의 사재를 성라원에 기증하였다.
  • 청룡암
    장소
    청룡암
    성북구 동소문로3길 22(동소문동1가 45-1)에 위치한 사찰이다. 청룡암의 원래 위치는 성북구 대사관로 3(성북동 330-115)의 삼청각이 있는 자리였고, 조선후기 세도가였던 김좌근이 철종 4년(1853)에 창건하였는데, 미륵석상이 노천에 있어서 미륵당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청룡암이 널리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었고 그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국어학자 이윤재는 청룡암을 묘사한 기사를 남겼고, 이광수는 방을 얻어 글을 쓰곤 하였다. 또한 이태준의 소설 「딸 삼형제」에 등장하기도 하였고, 김용준과 이태준 등 성북동에 살았던 예술가들은 이곳을 자주 다녔다. 1969년 산지개발계획에 밀려 토지를 매각하고 동소문동 현재 위치로 도량을 옮겼다.
  • 삼곡사
    장소
    삼곡사
    성북구 정릉로 57-99(정릉동 산1-1)에 있는 기도도량이다. 삼곡사는 국민대쪽 북악터널 입구 위에 있는 기도도량으로, 굿당을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 삼각산 수월암
    장소
    삼각산 수월암
    성북구 성북로 170(성북동 274-2)에 위치한 사찰이다. 성북우정의공원 바로 건너편에 있는 조그만 사찰인 수월암은 1968년에 김상순·최수월화 두 사람이 창건하였다. 1972년 법당 서쪽에 칠층연화탑을 세워 탑 안에 비로자나불상・석가여래상을 봉안하였으며, 탑 4면에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탑 위층 동쪽에 약사여래상, 서쪽에 아미타여래상, 남쪽에 문수보살상, 북쪽에 관세음보살상을 각각 조각했다. 탑은 높이가 약 10m, 둘레가 16m이고, 탑 앞에는 거북조각에 비석을 세웠으며, 입구에는 ‘명랑약수’라는 샘물이 있다.
  • 여래사
    장소
    여래사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이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여래사는 1963년부터 해마다 불교의식에 따라 정초(설날), 백중(음력 7월 15일), 현충일, 추석 등에 신도들과 후손들이 순국선열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 여래사 일주문
    시청각류
    여래사 일주문
    여래사는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로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사진은 여래사의 일주문이다.
  • 여래사 순국선열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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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사 순국선열위령탑
    여래사는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로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사진은 여래사의 순국선열위령탑이다. *순국선열위령탑의 안내판 내용 "이 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신명을 바친 순국선열 376위의 넋을 추모하고 그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11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에 건립하였습니다. 여기 모신 순국선열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이준 열사 등 12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봉창 의사 등 27분, 건국훈장 독립장 유관순 열사 등 303분, 건국훈장 애국장 승영제 등 31분, 건국훈장 애족장 유돈상 등 3분입니다. 여래사는 1958년 2월 5일 창건이래 대부분 후손이 없는 무후선열들의 안식을 기원해 온 호국사찰로서 애국선열들을 정성을 다하여 모시고 있습니다."
  • 여래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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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사 대웅전
    여래사는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로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사진은 여래사 대웅전이다.
  • 여래사 산신각
    시청각류
    여래사 산신각
    여래사는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로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사진은 여래사 산신각이다.
  • 여래사 아미타여래입상
    시청각류
    여래사 아미타여래입상
    여래사는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로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사진은 여래사 뒤편에 있는 아미타여래입상이다.
  • 여래사 극락전(순국선열사당)
    시청각류
    여래사 극락전(순국선열사당)
    여래사는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로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사진은 여래사 극락전(순국선열사당)이다.
  • 여래사 생명의 집
    시청각류
    여래사 생명의 집
    여래사는 성북구 정릉로 57-57(정릉동 산87-1)에 위치한 사찰이다. 1958년 2월 5일 창건되었다. 여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호국사찰이자 현충사찰로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이다. 사진은 여래사 생명의 집이다.
  • 순국선열 추모식
    기타
    순국선열 추모식
    내용: 1974년 11월 17일 정릉동 여래사 순국선열사당에서 순국선열 추모식이 열렸다는 내용의 기사. 신문명: 동아일보 발행일: 1974년 11월 18일 월요일 발행 호수: 제16349호 판본: 제2판 기사 위치: 7면
  • 대성사
    장소
    대성사
    성북구 정릉로8가길 126에 위치한 사찰이다.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 주목된 것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변관식은 근대 전통화단의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현판
    시청각류
    대성사 현판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전경
    시청각류
    대성사 전경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삼층석탑
    시청각류
    대성사 삼층석탑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대웅전(1)
    시청각류
    대성사 대웅전(1)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대웅전(2)
    시청각류
    대성사 대웅전(2)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대웅전(3)
    시청각류
    대성사 대웅전(3)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대웅전 내부(1)
    시청각류
    대성사 대웅전 내부(1)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대웅전 내부(2)
    시청각류
    대성사 대웅전 내부(2)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대웅전 내부(3)
    시청각류
    대성사 대웅전 내부(3)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풍경(風磬)
    시청각류
    대성사 풍경(風磬)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마당 전경
    시청각류
    대성사 마당 전경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석등
    시청각류
    대성사 석등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대성사 방풍림
    시청각류
    대성사 방풍림
    정릉 골짜기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다. 이 사찰은 근대 실경산수화의 대가 변관식(1899~1976)이 1974년 마지막 작품전을 준비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변관식은 조선시대 화단의 마지막 세대이자 남종화의 대가였던 조석진의 외손자이다. 그는 겸재 정선이 개척한 민족적 산수화풍을 근대에 계승한 실경산수화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로 1974년 대성사에서 작품을 그리던 변관식이 자신의 그림 속 노인을 가리키며 “나를 그린 것인지도 모른다”며 쓸쓸히 웃었고, “내 작품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미륵당
    장소
    미륵당
    성북구 성북로 28길 60(성북동 292-1)에 있었던 사찰이다. 미륵당은 작은 절이었는데, 그 옆에는 정자가 있었고, 정자 옆에는 폭포와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미륵당 안에는 1700년대에 왕실에서 봉안한 석조미륵불좌상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인 임규가 말년에 10년간 거주하면서 『북산산고』를 탈고하였다. 미륵당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곳의 주인이 몇 번 바뀌었는데, 1987년 운산스님이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을 유치하면서 태고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과 종립기관인 동방대학원이 들어와 있으며, 미륵당 자리에는 현대식 동방대학원 건물이 들어서 있고, 법당에 석조미륵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 태고사
    장소
    태고사
    성북구 성북로 28길 60(성북동 292-1)에 있는 사찰이다. 태고사의 원래 이름은 미륵당이었는데, 미륵당 안에 1700년대에 왕실에서 봉안한 석조미륵불좌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즈음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며 주인이 몇 번 바뀌었고, 1987년 운산스님이 서울 봉원사에 있던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을 유치하면서 태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 청사는 종립기관인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의 학사로 이용되고 있다. 원래 미륵당 자리는 현대식 동방대학원 건물이 들어서있고, 법당에 석조미륵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 안암사
    장소
    안암사
    조선 초기 현재의 성북구 안암동에 있었던 사찰이다. 안암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하지만 정확한 사실은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 초에 다시 세워졌지만 억불정책에 따라 성종 1년(1470)에 철거되었다. 그리고 성종 15년(1484)에 인수대비와 귀인 권씨가 중창을 추진하여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비빈들의 원찰(願刹)로서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연산군 10년(1504) 절은 폐사되고 말았다. 절의 비구니들은 모두 한치형의 빈집으로 옮겨 살게 하였고, 이후 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지금은 정확한 위치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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