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만세운동

  • 1926.06.10 - ?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난 학생 중심의 항일 만세운동이다. 성북구 출신의 독립운동가들도 참여했다. 순종의 장례식에 맞추어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했지만,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산발적이지만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일제에 의해 약 5,000명의 시위대가 연행되었다. 이때 체포된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권유근은 돈암동에 거주하였는데, 1929년에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동조시위를 계획하다 다시 투옥되었다. 역시 이때 체포되었던 장익민도 돈암동에 거주하였었는데, 1928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다.

근거자료

  • ○ 학생이 중심이 된 6·10만세운동 - 한편 대중운동의 한 갈래인 학생운동은 계몽을 중시하는 다른 운동들보다 저항적인 항일운동으로 진행됩니다. 1920년대 대표적인 학생운동이자 항일운동으로 6·10만세운동이 있습니다. 1926년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기획된 운동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진영과 천도교 등의 종교단체도 포함되면서 3·1운동 이후 거국적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이 운동은 안타깝게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산되지 못합니다. 고종의 인산일에 3·1운동이 일어났던 과거를 기억한 일본이 순종의 인산일을 방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중앙고보 학생 권유근은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동조시위를 벌이려 했다가 다시금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됩니다. 학생운동을 한 성북인 중에는 돈암동 164번지에 거주한 바 있는 장익민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창하며 1928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6·10만세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듬해 1927년,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반일사회운동단체 조직이 탄생합니다. 바로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창립한 신간회입니다. 신간회는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단체이지요.

    ○ 학생이 중심이 된 6·10만세운동 - 한편 대중운동의 한 갈래인 학생운동은 계몽을 중시하는 다른 운동들보다 저항적인 항일운동으로 진행됩니다. 1920년대 대표적인 학생운동이자 항일운동으로 6·10만세운동이 있습니다. 1926년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진영에서 기획된 운동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진영과 천도교 등의 종교단체도 포함되면서 3·1운동 이후 거국적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이 운동은 안타깝게도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산되지 못합니다. 고종의 인산일에 3·1운동이 일어났던 과거를 기억한 일본이 순종의 인산일을 방관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중앙고보 학생 권유근은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입니다. 그는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동조시위를 벌이려 했다가 다시금 체포되어 2년간 투옥됩니다. 학생운동을 한 성북인 중에는 돈암동 164번지에 거주한 바 있는 장익민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창하며 1928년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징역 3년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6·10만세운동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듬해 1927년,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반일사회운동단체 조직이 탄생합니다. 바로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함께 손을 잡고 창립한 신간회입니다. 신간회는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단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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