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협상

  • 南北協商
  • 1948.04.19 - 1948.04.26

1948년 있었던 정치회담이다. 한반도의 분단이 가시화되자 김구, 김규식 등이 마지막까지 통일을 위해 노력한 정치회담이었는데, 이 협상에는 성북구의 정치지도자인 조소앙, 안재홍 등도 참여하였다. 1948년 1월 UN의 한국통일안에 따라 UN 임시한국위원단이 방문하였는데, 소련과 북한이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남북의 통일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고 분단의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에 2월부터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고자하는 정치세력이 결집하였고, 4월 19일부터 평양에서 회담을 열고 자주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성북구에 살았던 조소앙과 안재홍은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이러한 운동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근거자료

  • ○ 분단을 막기 위해 골몰한 독립운동가들 국내에서는 좌우 대립이, 국외에서는 냉전 전야의 불안한 상황이 계속 되는 와중에 미국의 제안으로 UN 총회는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총선거가 좌절되고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하자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1948년 5·10총선을 치르게 됩니다. 북한은 1946년에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5·10총선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남한에 남아 있는 공산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우익 진영의 대표 김구 역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북한과 대화를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한 김구는 조소앙, 우사 김규식, 배성룡, 김의한 등과 함께 북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진행한 남북협상에서 남한도 북한도 따로 정부수립을 하지 않는다는 협약을 하지만 사실 북한의 정부기구들은 일찌감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분단을 막기 위해 골몰한 독립운동가들 국내에서는 좌우 대립이, 국외에서는 냉전 전야의 불안한 상황이 계속 되는 와중에 미국의 제안으로 UN 총회는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총선거가 좌절되고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하자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1948년 5·10총선을 치르게 됩니다. 북한은 1946년에 이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5·10총선도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남한에 남아 있는 공산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우익 진영의 대표 김구 역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북한과 대화를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한 김구는 조소앙, 우사 김규식, 배성룡, 김의한 등과 함께 북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진행한 남북협상에서 남한도 북한도 따로 정부수립을 하지 않는다는 협약을 하지만 사실 북한의 정부기구들은 일찌감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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