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룡

  • 金壽龍, 김수용
  • 3.1운동
  • 1901.04.20 - 1973.06.14
  • 애족장

성북동에서 거주한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9년 중앙학교 재학 중에 현상윤의 권고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책임을 맡아 파고다에서 단성사까지의 연도의 일반인 및 상인에게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5일에는 태극기를 제작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근거자료

  •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5-8 (중앙학교 학생) ·1919년 중앙학교 재학 중 현상윤의 권고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책임을 맡아 파고다에서 단성사까지의 연 도의 일반인 및 상인에게 선언서를 배포함. 1919년 3월 5일 태극기를 제작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5-8 (중앙학교 학생) ·1919년 중앙학교 재학 중 현상윤의 권고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책임을 맡아 파고다에서 단성사까지의 연 도의 일반인 및 상인에게 선언서를 배포함. 1919년 3월 5일 태극기를 제작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이름 : 김수용 주소(당시) : 경성부 성북정 175-8번지 주소(현재) :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5-8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이름 : 김수용 주소(당시) : 경성부 성북정 175-8번지 주소(현재) :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5-8

  • 성북동에 거주한 중앙학교 학생 김수룡(金壽龍)은 현상윤의 권고로 서울시내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고향인 동래 기장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성북동에 거주한 중앙학교 학생 김수룡(金壽龍)은 현상윤의 권고로 서울시내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고향인 동래 기장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본적은 경남 양산으로 성북동 175번지 8에 거주하였다. 중앙학교 재학 중 현상윤의 권고로 파고다공원에서부터 단성사에 이르는 길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고향인 동래 기장에 돌아가 3월 28일 경 4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제작한 후 4월 5일 기장공립보통학교 등지에서 군중을 이끌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활동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변경).

    본적은 경남 양산으로 성북동 175번지 8에 거주하였다. 중앙학교 재학 중 현상윤의 권고로 파고다공원에서부터 단성사에 이르는 길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고향인 동래 기장에 돌아가 3월 28일 경 4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제작한 후 4월 5일 기장공립보통학교 등지에서 군중을 이끌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활동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변경).

  • 본적: 경남 양산군 동면 교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5-8 주소: 서울 서대문 신영동 209 계열과 단체: 3·1운동 <활동내용> 1919년 중앙학교 재학 중 현상윤의 권고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책임을 맡아 파고다에서 단성사까지의 연도의 일반인 및 상인에게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5일 태극기를 제작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귀향하여 4월 4일 기장군(동래군)에서 좌천시장, 4월 5일 기장시장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받았다. <특이사항>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공적조서」.

    본적: 경남 양산군 동면 교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5-8 주소: 서울 서대문 신영동 209 계열과 단체: 3·1운동 <활동내용> 1919년 중앙학교 재학 중 현상윤의 권고로 독립선언서를 배부할 책임을 맡아 파고다에서 단성사까지의 연도의 일반인 및 상인에게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5일 태극기를 제작하여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귀향하여 4월 4일 기장군(동래군)에서 좌천시장, 4월 5일 기장시장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받았다. <특이사항>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참고문헌> 국가보훈처, 「공적조서」.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김수룡 1901~1973 / 애족장 / 성북동 175-8 거주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중앙학교 학생이었던 김수룡은 파고다공원에서 단성사 일대에 걸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습니다. 이후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와 4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후 4월 5일과 10일 기장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김수룡 1901~1973 / 애족장 / 성북동 175-8 거주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 중앙학교 학생이었던 김수룡은 파고다공원에서 단성사 일대에 걸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습니다. 이후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와 400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후 4월 5일과 10일 기장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 ○ 오직 나라를 위해 맞섰던 성북인들 성북동에 거주한 중앙학교 학생 김수룡은 시내 곳곳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했습니다.

    ○ 오직 나라를 위해 맞섰던 성북인들 성북동에 거주한 중앙학교 학생 김수룡은 시내 곳곳에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했습니다.

  •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의 양산군 기장읍(梁山郡機張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 때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으로서, 현상윤(玄相允)의 권고로 이날 파고다공원에서 단성사( 成社) 일대에 걸쳐 연도에 모인 일반인과 상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그후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기장읍 장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8일, 그는 김도엽과 함께 기장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원지 14매를 얻어서 장관청(將官廳)에서 4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김도엽이 「양심발원인도적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기와 대형 독립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11시,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혈서와 독립기를 장터 복판에 꽂아두고 1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일단 해산하였지만, 그는 다시 4월 10일 기장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50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99·200·20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08∼1210면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의 양산군 기장읍(梁山郡機張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 때 서울의 중앙학교(中央學校) 학생으로서, 현상윤(玄相允)의 권고로 이날 파고다공원에서 단성사( 成社) 일대에 걸쳐 연도에 모인 일반인과 상점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그후 고향인 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구수암(具壽巖)·최기복(崔基福)·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기장읍 장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8일, 그는 김도엽과 함께 기장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원지 14매를 얻어서 장관청(將官廳)에서 4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김도엽이 「양심발원인도적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기와 대형 독립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11시,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혈서와 독립기를 장터 복판에 꽂아두고 1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력행사로 일단 해산하였지만, 그는 다시 4월 10일 기장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50여명의 시위군중을 모아놓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99·200·201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08∼12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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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김수룡’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