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태

  • 朴魯胎, 정상노태(井上魯胎)
  • 선전활동
  • 1915.10.17 - 1983.12.19
  • 건국포장

성북구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성제국대학 졸업 후 휘문중에서 교사로 생활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43년 일본의 전시상황과 연해주 등지의 독립군 활동 상황을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가 해방 후에 출옥하였다. 당시 성북정 189-1번지에 거주하였다. 1995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박노태 집터, 2020.07.15

    박노태 집터, 2020.07.15

근거자료

  •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1944년 2월 상순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 189번지 1호 피고인의 기숙사 선배 권정숙 방에서 휘문중학교 학생들에게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 가능성을 지도계몽하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형 ·종로구 성북정 189-2

    ·경성제국대학 졸업생 ·1944년 2월 상순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 189번지 1호 피고인의 기숙사 선배 권정숙 방에서 휘문중학교 학생들에게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 가능성을 지도계몽하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형 ·종로구 성북정 189-2

  • 종로구 성북정 189-2번지에 거주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으로 1943년 일본의 전시상황과 연해주 등지의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종로구 성북정 189-2번지에 거주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으로 1943년 일본의 전시상황과 연해주 등지의 독립군의 활동 상황을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 본적: 경북 칠곡군 지천면 덕산동 363번지 주소: 종로구 성북정 189-2 계열과 단체: 단파방송사건 <활동내용> 경북 칠곡군 지천면 소재 신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12월 중퇴하였다. 1920년 4월 대구계성중학교 4학년에 보결입학하여 1922년 3월 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選科에 입학하여 중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9월 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43년 10월부터 휘문중학교 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선과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우월감을 갖고 반도인 학생을 멸시하자 내선일체의 구현은 불가능하고,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우수한 민족이라면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기회를 타고 조선을 제국의 굴레에서 이탈시켜 독립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목적 수행을 위하여 1943년 5월 상순 불상일에 경성부 종로구 돈의정 13번지 자택에서 친구 平山都健에게 내선일체의 실현은 불가능하고 일본인은 短氣狹量하여 대륙성을 띠는 조선민족과는 융화하기 어렵고, 조선민족은 우수하다면 조선독립을 실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이 행할 때에는 경솔한 해동을 피하고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귀군은 항상 공부할 필요가 있지만 조선 내에서는 그 공부가 불가능하다면 중국에 가서 모택동의 휘하의 사람에게 가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1943년 8월 하순 경 동부 서대문구 홍제정 330번지 李圭旗건축사무소에서 평산도건에게 경성제국대학에서는 井上보도반원의 강연에 의하면 일본은 비행기가 부족하고 생산전에서 미·영을 도저히 쫓아갈 수 없으므로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조선임시정부가 있고, 소련에 약 20만의 조선인군대가 있어 일본패전의 기회에 귀선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또 동년 7월 하순 경 경성부 종로구 敦義町 13번지 피고인의 기숙사 선배 朴澤在康의 방에서 ”경성제국대학에서 각국의 신문을 열람한 결과 일본은 물질이 부족하여 결국 미영에 패퇴할 것이다. 따라서 금차 대전은 조속히 종료되고, 미국에는 다수의 조선독립군이 있고, 소련에는 다수의 조선인 공산당군이 있어서 저들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일본에 항전하여 결국 저들은 승리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그렇지만 항전기간 중에 조선이은 비상한 곤란을 각오해야 한다. 재미조선독립군의 수령은 이승만으로서 동인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활약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 동년 4월 중순 경 전 동소에서 朴澤淑鉉에 대하여 미국에는 조선인 다수가 거주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활약중이다고 말하였다. 1944년 2월 상순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 189번지 1호 피고인의 기숙사 선배 權貞淑 방에서 휘문중학교 학생 平沼善, 淸川秉哲, 安東日重, 松田武信 등에게 조선인은 만주지나, 미국, 영국, 소련 등 해외의 각처에 거주하고 있고, 특히 소련에는 전부 공산당원이 되어 남녀 공히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서 활약할 뿐만이 아니라 선내에 잠입 활동 중인 자가 있다. 기타 각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도 모두 조선독립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여 동인들을 지도계몽하였다. 이 일로 박노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의 형을 받았다. <특이사항> 창씨명은 井上魯胎 <참고문헌> 「청송신남·정상노태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7.4.9.).

    본적: 경북 칠곡군 지천면 덕산동 363번지 주소: 종로구 성북정 189-2 계열과 단체: 단파방송사건 <활동내용> 경북 칠곡군 지천면 소재 신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4월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12월 중퇴하였다. 1920년 4월 대구계성중학교 4학년에 보결입학하여 1922년 3월 동교를 졸업하였다. 1940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選科에 입학하여 중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9월 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1943년 10월부터 휘문중학교 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선과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우월감을 갖고 반도인 학생을 멸시하자 내선일체의 구현은 불가능하고,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우수한 민족이라면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기회를 타고 조선을 제국의 굴레에서 이탈시켜 독립을 도모해야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목적 수행을 위하여 1943년 5월 상순 불상일에 경성부 종로구 돈의정 13번지 자택에서 친구 平山都健에게 내선일체의 실현은 불가능하고 일본인은 短氣狹量하여 대륙성을 띠는 조선민족과는 융화하기 어렵고, 조선민족은 우수하다면 조선독립을 실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대들이 행할 때에는 경솔한 해동을 피하고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귀군은 항상 공부할 필요가 있지만 조선 내에서는 그 공부가 불가능하다면 중국에 가서 모택동의 휘하의 사람에게 가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1943년 8월 하순 경 동부 서대문구 홍제정 330번지 李圭旗건축사무소에서 평산도건에게 경성제국대학에서는 井上보도반원의 강연에 의하면 일본은 비행기가 부족하고 생산전에서 미·영을 도저히 쫓아갈 수 없으므로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조선임시정부가 있고, 소련에 약 20만의 조선인군대가 있어 일본패전의 기회에 귀선하여 조선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또 동년 7월 하순 경 경성부 종로구 敦義町 13번지 피고인의 기숙사 선배 朴澤在康의 방에서 ”경성제국대학에서 각국의 신문을 열람한 결과 일본은 물질이 부족하여 결국 미영에 패퇴할 것이다. 따라서 금차 대전은 조속히 종료되고, 미국에는 다수의 조선독립군이 있고, 소련에는 다수의 조선인 공산당군이 있어서 저들은 조선독립을 위하여 일본에 항전하여 결국 저들은 승리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그렇지만 항전기간 중에 조선이은 비상한 곤란을 각오해야 한다. 재미조선독립군의 수령은 이승만으로서 동인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활약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또 동년 4월 중순 경 전 동소에서 朴澤淑鉉에 대하여 미국에는 조선인 다수가 거주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활약중이다고 말하였다. 1944년 2월 상순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 189번지 1호 피고인의 기숙사 선배 權貞淑 방에서 휘문중학교 학생 平沼善, 淸川秉哲, 安東日重, 松田武信 등에게 조선인은 만주지나, 미국, 영국, 소련 등 해외의 각처에 거주하고 있고, 특히 소련에는 전부 공산당원이 되어 남녀 공히 공산대학을 졸업하고 소련에서 활약할 뿐만이 아니라 선내에 잠입 활동 중인 자가 있다. 기타 각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도 모두 조선독립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고 말하여 동인들을 지도계몽하였다. 이 일로 박노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의 형을 받았다. <특이사항> 창씨명은 井上魯胎 <참고문헌> 「청송신남·정상노태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7.4.9.).

  • ○ 독립의 희망을 말한 대가는 가혹한 처벌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일본의 패망을 내다보는 시국담은 자연스럽게 오갔습니다. 성북동에 거주했던 박노태는 경성제국대학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는 모습을 보고 어서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주변 지인들에게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며 이를 계기로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국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의 근황 또한 전달합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 독립의 희망을 말한 대가는 가혹한 처벌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일본의 패망을 내다보는 시국담은 자연스럽게 오갔습니다. 성북동에 거주했던 박노태는 경성제국대학에 재학 중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는 모습을 보고 어서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주변 지인들에게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며 이를 계기로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국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의 근황 또한 전달합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박노태 1915~1983 / 건국포장 / 성북동 189-2호 거주 1943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 후 휘문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내선일체를 거부하며 한국 민족이 더 우수함을 강조했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을 예견하는 한편, 주위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숙지시키며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돼 1년의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이하며 출옥했습니다.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박노태 1915~1983 / 건국포장 / 성북동 189-2호 거주 1943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 후 휘문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내선일체를 거부하며 한국 민족이 더 우수함을 강조했고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전을 예견하는 한편, 주위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숙지시키며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돼 1년의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이하며 출옥했습니다.

  •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1943년 9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을 졸업 후 휘문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 한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인에 대하여 저항의식을 길러 왔으며,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 적극 반대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내선일체의 허구성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은 민족성이 다르므로 융화가 어려울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일본 민족에 비해 한국 민족이 우수함을 강조하면서 내선일체를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태평양전쟁의 전황을 주시하면서 일제의 패전을 예견하는 한편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숙지시키고 힘을 합하여 일제의 패전을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45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판결문(1945. 4. 9 경성지방법원)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1943년 9월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을 졸업 후 휘문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 한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인에 대하여 저항의식을 길러 왔으며,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대하여 적극 반대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내선일체의 허구성에 대하여 한국과 일본은 민족성이 다르므로 융화가 어려울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일본 민족에 비해 한국 민족이 우수함을 강조하면서 내선일체를 거부하였다. 또한 그는 태평양전쟁의 전황을 주시하면서 일제의 패전을 예견하는 한편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숙지시키고 힘을 합하여 일제의 패전을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45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판결문(1945. 4. 9 경성지방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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