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낙현

  • 申洛鉉, 平川洛鉉
  • 선전활동
  • 1921.01.03 - 1997.11.03
  • 대통령표창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배재중 재학 중에 김영헌과 함께 자유주의 사상과 독립사상을 가졌다. 1944년 6월에는 충청남도 서천의 김영헌 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조선독립사상에 매진하자고 다짐하였다. 같은 해 8월 함평여관에서는 농촌정신대를 조직한 후 적절한 시기에 이를 역이용할 것과 일본 패망에 따른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를 준비하자고 김영헌과 협의하였다. 이로 인해 1945년 4월에 치안유지법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의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신낙현은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정 69-27번지에 거주하였다. 201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신낙현 집터, 2020.07.24

    신낙현 집터, 2020.07.24

근거자료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신낙현 - 1921~미상 / 대통령표창 / 돈암동 262번지 거주 - 1942년 배재중학교 재학 중 정치를 통해 민중을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변에 말했습니다. 1944년 6월 충남 서천군 김영헌의 집에서 지인들에게 조선독립사상에 매진하자고 다짐했으며, 같은 해 8월 함평여관에서는 농촌정신대를 조직한 후 적절한 시기에 이를 역이용하자고 김영헌과 협의했습니다. 이후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 패망에 따른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다 체포되었습니다. 1945년 4월 치안유지법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신낙현 - 1921~미상 / 대통령표창 / 돈암동 262번지 거주 - 1942년 배재중학교 재학 중 정치를 통해 민중을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변에 말했습니다. 1944년 6월 충남 서천군 김영헌의 집에서 지인들에게 조선독립사상에 매진하자고 다짐했으며, 같은 해 8월 함평여관에서는 농촌정신대를 조직한 후 적절한 시기에 이를 역이용하자고 김영헌과 협의했습니다. 이후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 패망에 따른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다 체포되었습니다. 1945년 4월 치안유지법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의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 본적: 경기 광천 초월 신대 41 주소: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동 262 계열과 단체: 시국담 <활동 내용> 경기도 광주군 곤지공립보통학교 4년을 졸업하고, 광주군 공립보통학교에서 5학년, 6학년을 수학하였다. 경성공립농업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3월 졸업하였다. 1942년 4월 경성전기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배재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41년부터 金永憲과 함께 자유주의사상과 독립사상을 가졌다. 김영헌이 李光洙·李基永·宋影 등의 지도를 받아 아동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사상을 고취하겠다고 하자, 신낙현은 정치를 통하여 민중을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말하였다. 1944년 6월 중순 충남 서천군 문산면 문정리 김영헌의 집에서 김영헌, 平原 등과 조선독립사상을 버리지 말고 용왕매진하자고 다짐하였다. 1944년 8월 함평여관에서 김영헌과 농촌정신대를 조직하지만 시기가 도래하면 이를 역이용하자고 협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東條수상이 일본군이 사이판도에서 전멸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고 전시상황을 알리고 일본의 패망시의 결정적 기회가 오기를 준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45년 4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구류 29일, 2년 집행유예의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특이사항> 창씨명은 平川洛鉉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2, 1118쪽

    본적: 경기 광천 초월 신대 41 주소: 경성부 동대문구 돈암동 262 계열과 단체: 시국담 <활동 내용> 경기도 광주군 곤지공립보통학교 4년을 졸업하고, 광주군 공립보통학교에서 5학년, 6학년을 수학하였다. 경성공립농업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고, 배재중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3월 졸업하였다. 1942년 4월 경성전기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배재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41년부터 金永憲과 함께 자유주의사상과 독립사상을 가졌다. 김영헌이 李光洙·李基永·宋影 등의 지도를 받아 아동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사상을 고취하겠다고 하자, 신낙현은 정치를 통하여 민중을 지도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말하였다. 1944년 6월 중순 충남 서천군 문산면 문정리 김영헌의 집에서 김영헌, 平原 등과 조선독립사상을 버리지 말고 용왕매진하자고 다짐하였다. 1944년 8월 함평여관에서 김영헌과 농촌정신대를 조직하지만 시기가 도래하면 이를 역이용하자고 협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東條수상이 일본군이 사이판도에서 전멸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고 전시상황을 알리고 일본의 패망시의 결정적 기회가 오기를 준비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45년 4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구류 29일, 2년 집행유예의 처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특이사항> 창씨명은 平川洛鉉 <참고문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2, 1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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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신낙현’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