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창

  • 李根昌, 이고길(李高吉), 松山高吉
  • 선전활동
  • 1916.09.20 - 1944.01.21
  • 건국훈장 애족장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3월 6일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에 입사하여 기술원으로 근무했다. 1942-1943년 단파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된 조선어 방송 등을 청취하였다. 내용은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측이 승리할 것이므로, 연합군이 일본을 공략할 때 조선 동포들도 국내에서 호응하여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송 내용을 1942년 12월 성북정에 거주하는 조선방송협회 회원 김병욱에게 전달하고, 1943년 2월 20일경에는 성북정에 거주하는 동료 노현중에게 전달하였다. 1943년 7월 4일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이근창 집터, 2020.07.15

    이근창 집터, 2020.07.15

근거자료

  •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 1942~43년 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된 조선어 방송 등을 듣고 전시상황 등을 유포함.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 중 1944년 1월 21일 옥중에서 사망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 1942~43년 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된 조선어 방송 등을 듣고 전시상황 등을 유포함.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 중 1944년 1월 21일 옥중에서 사망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이름: 이근창 주소(당시):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7-25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이름: 이근창 주소(당시):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7-25

  • 본적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76번지. 주소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단파 방송으로 전시 상황 전파하여 1943년 징역 8월형을 받았다. 1944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본적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76번지. 주소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단파 방송으로 전시 상황 전파하여 1943년 징역 8월형을 받았다. 1944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 본적: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76번지 주소: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계열과 단체: 단파방송사건 <활동 내용> 1942-43년 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된 조선어 방송 등을 듣고 전시상황 등을 유포하였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 중 1944년 1월 21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특이사항> 이명은 李高吉, 창씨명은 松山高吉.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으로 재직하였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70.

    본적: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우고리 76번지 주소: 경성부 성북정 177-25번지 계열과 단체: 단파방송사건 <활동 내용> 1942-43년 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된 조선어 방송 등을 듣고 전시상황 등을 유포하였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 중 1944년 1월 21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특이사항> 이명은 李高吉, 창씨명은 松山高吉.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기술원으로 재직하였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70.

  • ○ 시국담으로 고초를 겪은 성북인들 이근창 역시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수신기로 미국으로부터 한국어 방송을 접하고 전시 상황을 주변에 알렸고 이로 인해 감옥에 들어갑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44년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듣고 알린 소식이 이듬해 실현되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살아서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독립을 열망하다 광복 순간을 맞이하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스러져간 애국지사들은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 시국담으로 고초를 겪은 성북인들 이근창 역시 1942년과 1943년에 걸쳐 수신기로 미국으로부터 한국어 방송을 접하고 전시 상황을 주변에 알렸고 이로 인해 감옥에 들어갑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44년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듣고 알린 소식이 이듬해 실현되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살아서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독립을 열망하다 광복 순간을 맞이하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스러져간 애국지사들은 셀 수 없이 많을 겁니다.

  •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이근창 1916-1944 / 애족장 / 성북동 177-25호 거주 1942년부터 약 1년간 조선방송협회의 보수과 기술원으로 근무하면서 단파방송을 청취했고 그 내용(최후의 승리는 미영 연합군 측에 있으며 태평양전쟁이 미영 연합국의 승리로 종료되면 반드시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다)을 성북동에 거주하는 김병욱과 노현중 등에게 전달한 혐의로 징역 8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 그 외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이근창 1916-1944 / 애족장 / 성북동 177-25호 거주 1942년부터 약 1년간 조선방송협회의 보수과 기술원으로 근무하면서 단파방송을 청취했고 그 내용(최후의 승리는 미영 연합군 측에 있으며 태평양전쟁이 미영 연합국의 승리로 종료되면 반드시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다)을 성북동에 거주하는 김병욱과 노현중 등에게 전달한 혐의로 징역 8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 1942~1943년 서울에서 조선방송협회(朝鮮放送協會) 보수과(保修課) 기술원(技術員)으로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내용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41년 9월 경성부(京城府) 봉래정(蓬萊町)에 소재한 조선무선공학강습회(朝鮮無線工學講習會)를 졸업한 뒤, 1942년 2월 6일에 조선방송협회 사업부(事業部) 보수과에 입사하여 기술원으로 근무하였다. 동년 2월경 경성부 봉래정의 김종호(金鍾浩)의 하숙집에서 단파수신기 <컨버터(converter)>로 외국방송을 들었으며, 동년 5월경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검정실에서 동(同) 과원(課員)인 신상운(申相雲)의 단파수신기 <컨버터>로 두 사람이 여러 차례 외국 방송을 청취하였다. 이후 동년 12월 1일부터 동월 5일경까지 보수과에서 야근 중, 동년 4일경 조종국(趙琮國)으로부터 보수과에 보관 중인 경성정유사(京城精乳舍)의 전파수신기로 동일 야근 중인 홍근호(洪瑾鎬)·김안방(金安邦)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김건이(金健二) 등과 더불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조선어 방송을 청취하였다. 방송 내용은 "조선동포들아, 이번의 세계대전은 물자가 풍부하고 병기도 우수함으로 장기전이라면 차츰 유리하며 최후의 승리는 미영 연합국 측에 있다. (중략) 이번 전쟁이 미영 연합국의 승리로 종료되면 미영 연합국은 반드시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미영 연합군은 항공모함·전함을 기간으로 한 대함대(大艦隊)로써 일거에 일본 본토를 공략할 준비 중이지만,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공략할 때에 조선에도 상륙과 함께 비행기로써 조선 동포에 대하여 병기 및 탄약을 공급할 것이므로 조선동포는 이를 사용하여 연합군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거에 내란을 일으켜 철도 및 군수창고의 파괴, 전신전화의 절단 등을 감행하여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동 방송 내용을 1942년 12월 6·7일경 경성부 성북정(城北町)에 거주하는 조선방송협회 회원인 김병욱(金炳昱)에게, 동년 12월 중순경 보수과 상담소(相談所)에서 동(同) 과원 고득제(高得濟)에게, 1943년 2월 20일경 경성부 성북정에 거주하는 동 과원 노현중(盧鉉重)에게 전달하였다. 1943년 7월 4일에 체포되어 1943년 9월 2일 육군형법(陸軍刑法) 제99조, 해군형법(海軍刑法) 제100조,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 제20조, 무선전신법(無線電信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월 21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1942~1943년 서울에서 조선방송협회(朝鮮放送協會) 보수과(保修課) 기술원(技術員)으로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내용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41년 9월 경성부(京城府) 봉래정(蓬萊町)에 소재한 조선무선공학강습회(朝鮮無線工學講習會)를 졸업한 뒤, 1942년 2월 6일에 조선방송협회 사업부(事業部) 보수과에 입사하여 기술원으로 근무하였다. 동년 2월경 경성부 봉래정의 김종호(金鍾浩)의 하숙집에서 단파수신기 <컨버터(converter)>로 외국방송을 들었으며, 동년 5월경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 검정실에서 동(同) 과원(課員)인 신상운(申相雲)의 단파수신기 <컨버터>로 두 사람이 여러 차례 외국 방송을 청취하였다. 이후 동년 12월 1일부터 동월 5일경까지 보수과에서 야근 중, 동년 4일경 조종국(趙琮國)으로부터 보수과에 보관 중인 경성정유사(京城精乳舍)의 전파수신기로 동일 야근 중인 홍근호(洪瑾鎬)·김안방(金安邦)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김건이(金健二) 등과 더불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조선어 방송을 청취하였다. 방송 내용은 "조선동포들아, 이번의 세계대전은 물자가 풍부하고 병기도 우수함으로 장기전이라면 차츰 유리하며 최후의 승리는 미영 연합국 측에 있다. (중략) 이번 전쟁이 미영 연합국의 승리로 종료되면 미영 연합국은 반드시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미영 연합군은 항공모함·전함을 기간으로 한 대함대(大艦隊)로써 일거에 일본 본토를 공략할 준비 중이지만, 연합군이 일본 본토를 공략할 때에 조선에도 상륙과 함께 비행기로써 조선 동포에 대하여 병기 및 탄약을 공급할 것이므로 조선동포는 이를 사용하여 연합군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거에 내란을 일으켜 철도 및 군수창고의 파괴, 전신전화의 절단 등을 감행하여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동 방송 내용을 1942년 12월 6·7일경 경성부 성북정(城北町)에 거주하는 조선방송협회 회원인 김병욱(金炳昱)에게, 동년 12월 중순경 보수과 상담소(相談所)에서 동(同) 과원 고득제(高得濟)에게, 1943년 2월 20일경 경성부 성북정에 거주하는 동 과원 노현중(盧鉉重)에게 전달하였다. 1943년 7월 4일에 체포되어 1943년 9월 2일 육군형법(陸軍刑法) 제99조, 해군형법(海軍刑法) 제100조,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 제20조, 무선전신법(無線電信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월 21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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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이근창’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