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

  • 李吉用, 파하(波荷), 월강(月江)
  • 문화운동 , 사회운동
  • 1899.08.15 - ?
  • 애국장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자이다. 1936년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재직시절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제거한 후 사진을 보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에서 강제 퇴직당한 후 집회에서 반일 가요를 부르거나 반일 발언을 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이길용은 1930년대 초부터 전쟁 이후 납북 직전까지 성북동 56번지에 거주했다. 그는 성북동 조기회 활동도 했는데 일본은 이를 항일운동단체라고 트집잡아 그를 투옥시키기도 했다. 성북동에서는 심우장을 찾아 한용운과 법담을 나누며 위로를 받기도 했고, 이웃인 이태준, 전형필, 배성룡 등과 교류하였다.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은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길용,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길용,

근거자료

  • ·경남 마산 출생(호 : 波荷, 月江) ·성북동 56번지 거주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에 귀국함. ·귀국 후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함. ·출감 후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의 권고로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활약 ·192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 주관 ·1932년 『신동아』에 「여자정구 10년사」를 연재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투옥 ·성북동 거주 시절 이태준, 전형필, 한용운 등과 교류 ·광복 후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참여,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를 부활시키는 데 공헌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수여함.

    ·경남 마산 출생(호 : 波荷, 月江) ·성북동 56번지 거주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에 귀국함. ·귀국 후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함. ·출감 후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의 권고로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활약 ·192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 주관 ·1932년 『신동아』에 「여자정구 10년사」를 연재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투옥 ·성북동 거주 시절 이태준, 전형필, 한용운 등과 교류 ·광복 후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참여,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를 부활시키는 데 공헌 ·6·25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수여함.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이길용 주소(현재): 성북동 56-1 분야: 신문기자, 독립운동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이길용 주소(현재): 성북동 56-1 분야: 신문기자, 독립운동

  • 본적: 서울 성북동 56 주소: 성북동 (납북) 계열과 단체: 국내항일 <활동 내용> 서울 사람이다. 1919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南滿洲鐵道株式會社 京城管理局)에 근무하며 철도수송업무를 맡아 보는 것을 이용하여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인쇄되어 온 반일(反日) 격문을 수송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근무하던 1936년 8월 25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其禎) 선수의 사진을 동아일보에 게재함에 있어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일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1개월여의 조사를 받고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1936년 9월 25일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본적: 서울 성북동 56 주소: 성북동 (납북) 계열과 단체: 국내항일 <활동 내용> 서울 사람이다. 1919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南滿洲鐵道株式會社 京城管理局)에 근무하며 철도수송업무를 맡아 보는 것을 이용하여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인쇄되어 온 반일(反日) 격문을 수송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근무하던 1936년 8월 25일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孫其禎) 선수의 사진을 동아일보에 게재함에 있어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일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1개월여의 조사를 받고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1936년 9월 25일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36년-이길용 동아일보에 손기정사진 일장기 말소로 강제퇴직 1943년-이길용 창씨개명에 불응해 투옥 1950년-조헌영,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손진태 등 주요인사 대거 납북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36년-이길용 동아일보에 손기정사진 일장기 말소로 강제퇴직 1943년-이길용 창씨개명에 불응해 투옥 1950년-조헌영,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손진태 등 주요인사 대거 납북

  •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독립운동가로, 건국 요인으로 활동했던 성북인들 또한 전쟁 중 납북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납북 후 그들의 삶은 물론 지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업적들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의 단절은 곧 후세의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공백이 되는 것과도 같지요.

    ○ 6·25전쟁의 발발과 납북된 독립운동가들 조소앙, 김의한, 안재홍, 이길용, 조헌영 등 독립운동가로, 건국 요인으로 활동했던 성북인들 또한 전쟁 중 납북을 당합니다. 이로 인해 납북 후 그들의 삶은 물론 지난 일제강점기 당시의 업적들까지도 자세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기록의 단절은 곧 후세의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공백이 되는 것과도 같지요.

  •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이길용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 1899-1950 / 애국장 / 성북동 56번지 거주 1936년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재직시절,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제거한 후 사진을 보도했습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의거 사건으로 그는 동아일보에서 강제 퇴직 당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된 항일운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으며 성북동의 이웃인 한용운, 이태준, 전형필, 배성룡 등과 교류하다 6·25전쟁 때 납북됐습니다.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이길용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 1899-1950 / 애국장 / 성북동 56번지 거주 1936년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재직시절,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제거한 후 사진을 보도했습니다. 이른바 일장기 말소 의거 사건으로 그는 동아일보에서 강제 퇴직 당했습니다. 이후에도 계속된 항일운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으며 성북동의 이웃인 한용운, 이태준, 전형필, 배성룡 등과 교류하다 6·25전쟁 때 납북됐습니다.

  • ○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애국지사 이길용 조선어연구회가 우리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는 한편, 같은 흐름 속에서 브나로드 운동이 일어납니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을 내건 이 운동은 전국 규모의 문맹 퇴치가 그 목적이었지요. 당시 지식인들이 식민지라는 제약 속에서 어떻게 저항의 불씨를 살리고자 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운동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약 4회에 걸쳐 전개됩니다. 야학을 열고 음악과 연극 등의 예술 활동을 공유하기도 하며 조선어학회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가 열리기도 했지요. 동아일보하면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36년 열린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은 한국인 최초로 남자 마라톤 부문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이 기쁜 소식을 신문에 보도하게 된 동아일보 체육담당기자 이길용은 시상식 단상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간 손기정의 사진을 보며 기쁨보다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 때문이었지요. 이길용은 일장기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하고 결국 지면에는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의 사진이 실리게 됩니다. 일본은 이를 크게 문제 삼고 동아일보에 279일 간의 무기정간을 명령하고 이길용은 강제 퇴직당합니다. 그는 퇴직 이후에도 항일 활동을 멈추지 않아 여러 번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집회에서 반일 가요를 부르거나 반일 발언을 하는 데 서슴없었습니다. 창씨개명 역시 거부했지요. 이러한 일련의 항일 활동 때문에 일본은 이길용을 요주의 인물로 판단하고 그의 활동 하나하나를 주시합니다. 1930년대 초부터 6·25전쟁 납북 직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했던 그는 성북동 조기회 활동도 했는데 일본은 이를 항일운동단체라고 트집 잡아 그를 투옥시키기도 했지요. 납북 후 독립운동가 이길용의 삶은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없어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길용 기자의 셋째아들 이태영씨는 우연하게도 체육부 기자로만 33년을 근무하였으며 ‘6 ·25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대변인을 역임했습니다.

    ○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애국지사 이길용 조선어연구회가 우리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는 한편, 같은 흐름 속에서 브나로드 운동이 일어납니다. ‘민중 속으로’라는 뜻을 내건 이 운동은 전국 규모의 문맹 퇴치가 그 목적이었지요. 당시 지식인들이 식민지라는 제약 속에서 어떻게 저항의 불씨를 살리고자 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운동은 동아일보사가 주축이 되어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약 4회에 걸쳐 전개됩니다. 야학을 열고 음악과 연극 등의 예술 활동을 공유하기도 하며 조선어학회의 후원으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조선어강습회가 열리기도 했지요. 동아일보하면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36년 열린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은 한국인 최초로 남자 마라톤 부문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이 기쁜 소식을 신문에 보도하게 된 동아일보 체육담당기자 이길용은 시상식 단상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간 손기정의 사진을 보며 기쁨보다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그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 때문이었지요. 이길용은 일장기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하고 결국 지면에는 일장기가 지워진 손기정의 사진이 실리게 됩니다. 일본은 이를 크게 문제 삼고 동아일보에 279일 간의 무기정간을 명령하고 이길용은 강제 퇴직당합니다. 그는 퇴직 이후에도 항일 활동을 멈추지 않아 여러 번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집회에서 반일 가요를 부르거나 반일 발언을 하는 데 서슴없었습니다. 창씨개명 역시 거부했지요. 이러한 일련의 항일 활동 때문에 일본은 이길용을 요주의 인물로 판단하고 그의 활동 하나하나를 주시합니다. 1930년대 초부터 6·25전쟁 납북 직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했던 그는 성북동 조기회 활동도 했는데 일본은 이를 항일운동단체라고 트집 잡아 그를 투옥시키기도 했지요. 납북 후 독립운동가 이길용의 삶은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없어 그저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길용 기자의 셋째아들 이태영씨는 우연하게도 체육부 기자로만 33년을 근무하였으며 ‘6 ·25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대변인을 역임했습니다.

  • ○ 에피소드 열-이길용의 일장기 말소 사건 그 전후 이야기 이길용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처음 접한 매체는 그의 성북동 56번지 자택으로 도착한 격월간 잡지 《아사히 스포츠》를 통해서였습니다. 이길용은 잡지의 첫 머리 사진 중 금메달의 영광을 안은 손기정과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의 사진에 주목합니다. 정확히는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 마크였지요. 그는 사진을 오려 회사로 가져갑니다. 이길용은 당시 사회부 부장이었던 소설가 현진건에게 “손기정 선수의 가슴이 잘 보이지 않게 보도하는 편이 좋겠다”고 동의를 구한 후 삽화와 도안을 담당하는 이상범 화백과 “깨끗이 지워버리자”는 합의를 봅니다. 그리하여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당일 석간에 실려 독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일본군 사령부는 수정된 사진을 포착해 바로 다음날 동아일보에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립니다. 이후 직접 책임자인 이길용을 비롯한 무려 14명이 사직합니다. 이길용은 이 사건으로 모든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워지자 크게 좌절했으나 집과 가까운 심우장을 찾아 한용운과 법담을 나누며 위로를 받기도 했고 이태준, 전형필 등 이른바 ‘동네주민’들과 자주 어울리며 항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 에피소드 열-이길용의 일장기 말소 사건 그 전후 이야기 이길용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사진을 처음 접한 매체는 그의 성북동 56번지 자택으로 도착한 격월간 잡지 《아사히 스포츠》를 통해서였습니다. 이길용은 잡지의 첫 머리 사진 중 금메달의 영광을 안은 손기정과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의 사진에 주목합니다. 정확히는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 마크였지요. 그는 사진을 오려 회사로 가져갑니다. 이길용은 당시 사회부 부장이었던 소설가 현진건에게 “손기정 선수의 가슴이 잘 보이지 않게 보도하는 편이 좋겠다”고 동의를 구한 후 삽화와 도안을 담당하는 이상범 화백과 “깨끗이 지워버리자”는 합의를 봅니다. 그리하여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이 당일 석간에 실려 독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일본군 사령부는 수정된 사진을 포착해 바로 다음날 동아일보에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립니다. 이후 직접 책임자인 이길용을 비롯한 무려 14명이 사직합니다. 이길용은 이 사건으로 모든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어려워지자 크게 좌절했으나 집과 가까운 심우장을 찾아 한용운과 법담을 나누며 위로를 받기도 했고 이태준, 전형필 등 이른바 ‘동네주민’들과 자주 어울리며 항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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