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숙

  • 李恩淑, 李榮求
  • 사회운동
  • 1889.08.08 - 1979.12.11
  • 건국훈장 애족장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우당 이회영의 아내이기도 하다. 1966년에 자서전적 회상기인 『서간도시종기』를 출간하였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면을 기록한 일종의 역사서이자 전통적 양반집 부인의 교양과 생활, 의지를 절실하게 묘사한 문학작품이다. 작가의 가계와 이회영과의 혼인, 신민회의 초기 활동부터 1910년 말 서간도(만주)로 이주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은숙은 아들인 이규창과 함께 1961년부터 정릉에서 거주하였다. 집의 정확한 위치는 정릉동 226-33번지로, '재건주택'이라 불리는 작은 마당이 있는 단층 주택이었다. 정릉동 언덕에 위치한 이 장소에는 현재 그의 손자가 빌라를 건축하여 거주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은숙,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은숙,

  • 이규창 집터, 2020.07.02

    이규창 집터, 2020.07.02

근거자료

  • 한 사람을 먼저 소개할 때, 흔히 그 가문을 먼저 소개한다. 이은숙은 한산 이씨이며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1889년 충남 공주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이회영과 결혼한 것은 1908년 10월 20일, 만 19살 때 일이다. 당시 이회영은 첫째부인 서씨徐氏와 사별한 뒤였고, 슬하의 두 아들이 있는 만 41살의 중년 남자였다. 심지어 첫째 아들은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 시대가 그랬듯 이 결혼은 이은숙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다만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의 주례로 치러진 결혼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신식 결혼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형적인 유교적 교육을 받은 여자였다. 남편을 가군家君(집의 주인)으로 부르고, 또 그렇게 여기며 그것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갔던 듯하다. 22살이라는 나이차는 부부의 나이 차이라기보다는 부녀의 나이차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남편을 ‘하늘 같이 앙망仰望(우러러 바라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안에서 결정한, 22살이나 많은 남편과의 결혼이었지만, 그녀는 운명이라 여기고 남편을 우러러 바라보며 살려고 했다. 하지만 평탄한 시대도 아니었고, 그의 남편 이회영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게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었고, 그것이 그 이후 그녀의 삶을 결정했다.

    한 사람을 먼저 소개할 때, 흔히 그 가문을 먼저 소개한다. 이은숙은 한산 이씨이며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1889년 충남 공주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이회영과 결혼한 것은 1908년 10월 20일, 만 19살 때 일이다. 당시 이회영은 첫째부인 서씨徐氏와 사별한 뒤였고, 슬하의 두 아들이 있는 만 41살의 중년 남자였다. 심지어 첫째 아들은 그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 시대가 그랬듯 이 결혼은 이은숙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다만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의 주례로 치러진 결혼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신식 결혼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전형적인 유교적 교육을 받은 여자였다. 남편을 가군家君(집의 주인)으로 부르고, 또 그렇게 여기며 그것을 운명으로 알고 살아갔던 듯하다. 22살이라는 나이차는 부부의 나이 차이라기보다는 부녀의 나이차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남편을 ‘하늘 같이 앙망仰望(우러러 바라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집안에서 결정한, 22살이나 많은 남편과의 결혼이었지만, 그녀는 운명이라 여기고 남편을 우러러 바라보며 살려고 했다. 하지만 평탄한 시대도 아니었고, 그의 남편 이회영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게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었고, 그것이 그 이후 그녀의 삶을 결정했다.

  • 1931년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합작한 항일구국연맹과 일본측의 기물파괴와 인물을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을 결성했다. 이회영은 흑색공포단을 직접 지휘했는데, 실제로 중국의 친일 인물들을 암살하고, 일본 영사관과 일본 기선 등을 폭파시키기도 했다. 그는 1932년 11월 더 활발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다렌(大連)으로 이동하는 도중 일본 밀정 등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미 당시 60이 넘었던 그는 체포 후 얼마 되지 않아 11월 17일에 순국한다. 일본 경찰은 사인을 자살로 보도하였지만, 딸이 시신을 찾으려 했을 때 바로 화장을 시킨 경황 등으로 보아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높게 산 정부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우당 기념관을 건설해 주었다. 2000년에는 중국에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추기도 했다. 이회영 일생의 공로는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 이은숙에 대해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함께 같이 낮선 간도로 이주해서 고생했고, 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다. 그녀가 있었기에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독립운동에 그녀의 지분은 분명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솔직해지자. 그녀 말고도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의 삶에 관심을 갖은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그들은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들의 삶을 아는 것은 더 알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숙의 역사는 마이너의 역사이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는 드물게 자서전을 남겼고, 이를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 나아가 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를 추체험 할 수 있다.

    1931년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이 합작한 항일구국연맹과 일본측의 기물파괴와 인물을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흑색공포단을 결성했다. 이회영은 흑색공포단을 직접 지휘했는데, 실제로 중국의 친일 인물들을 암살하고, 일본 영사관과 일본 기선 등을 폭파시키기도 했다. 그는 1932년 11월 더 활발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다렌(大連)으로 이동하는 도중 일본 밀정 등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미 당시 60이 넘었던 그는 체포 후 얼마 되지 않아 11월 17일에 순국한다. 일본 경찰은 사인을 자살로 보도하였지만, 딸이 시신을 찾으려 했을 때 바로 화장을 시킨 경황 등으로 보아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높게 산 정부는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우당 기념관을 건설해 주었다. 2000년에는 중국에 항일혁명열사 증서를 추기도 했다. 이회영 일생의 공로는 비록 사후이긴 하지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아내 이은숙에 대해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는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함께 같이 낮선 간도로 이주해서 고생했고, 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했다. 그녀가 있었기에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독립운동에 그녀의 지분은 분명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솔직해지자. 그녀 말고도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의 삶에 관심을 갖은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그들은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들의 삶을 아는 것은 더 알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숙의 역사는 마이너의 역사이다.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는 드물게 자서전을 남겼고, 이를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산다는 것, 나아가 가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를 추체험 할 수 있다.

  • ○ 에피소드 여섯-이회영의 아내이자 이규창의 어머니가 쓴 『서간도시종기』 『서간도시종기』는 우당 이회영의 아내이자 이규창의 어머니인 이은숙이 1966년 탈고한 자서전적 회상기입니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면을 기록한 일종의 역사서이자 전통적 양반집 부인의 교양과 생활, 의지를 절실하게 묘사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야기는 작가의 가계와 이회영과의 혼인, 신민회의 초기활동부터 1910년말 서간도(만주)로 이주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에 언급된 독립운동가들만 200여 명에 이르지요. 한편, 1932년 이회영의 순국을 정점으로 작품 중후반에는 아들 이규창이 일본 경찰에 잡혀 투옥되면서 어머니로서 옥바라지를 하면서 겪은 일들을 묘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한용운이 《별건곤》에 게재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만주산간에서 청년의 권총에 마져서’에 대한 에피소드가 이 책에도 등장합니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자신의 학생이 한용운에게 총을 쏜 것은 아닌지 학생을 불러 꾸짖었던 일과 이후 한용운을 재회해 반가워하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이은숙과 아들 이규창은 1960년부터 정릉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 에피소드 여섯-이회영의 아내이자 이규창의 어머니가 쓴 『서간도시종기』 『서간도시종기』는 우당 이회영의 아내이자 이규창의 어머니인 이은숙이 1966년 탈고한 자서전적 회상기입니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일면을 기록한 일종의 역사서이자 전통적 양반집 부인의 교양과 생활, 의지를 절실하게 묘사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야기는 작가의 가계와 이회영과의 혼인, 신민회의 초기활동부터 1910년말 서간도(만주)로 이주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에 언급된 독립운동가들만 200여 명에 이르지요. 한편, 1932년 이회영의 순국을 정점으로 작품 중후반에는 아들 이규창이 일본 경찰에 잡혀 투옥되면서 어머니로서 옥바라지를 하면서 겪은 일들을 묘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한용운이 《별건곤》에 게재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만주산간에서 청년의 권총에 마져서’에 대한 에피소드가 이 책에도 등장합니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자신의 학생이 한용운에게 총을 쏜 것은 아닌지 학생을 불러 꾸짖었던 일과 이후 한용운을 재회해 반가워하던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이은숙과 아들 이규창은 1960년부터 정릉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 이은숙1889~1978 이회영은 사후에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그의 아내 이은숙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은숙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이회영과 함께 낯선 간도로 이주,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힘썼다. 이회영의 독립운동에 그의 아내 이은숙의 존재는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은숙은 1908년 10월 20일, 만19살 때 만 41세의 이회영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결혼 2년 만에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가꾸겠다는 이회영의 뜻에 따라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딸도 함께 서간도로 향했다. 1917년 귀국 후 짧지만 행복한 나날을 따라 북경으로 다시 왔지만 망명객의 처지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결국 1925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이은숙은 남편과 남매를 두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힘들게 일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매달 남편에게 돈을 송금했다. 그런 그녀에게 1932년 10월 21일 비극적인 소식이 도착했다. 남편의 사망을 전하는 전보였다. 이은숙은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났다. 이은숙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1954년 11월 상경하여 막내 사위가 구해준 정릉 집에서 큰아들 규창과 함께 살았다. 그녀가 이회영의 부인인지 이웃들은 알지 못했고 이회영 역시 당시에는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 그녀는 건강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경복궁 근처의 법륜사에 다녔는데 정릉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곳이다. 안양의 둘째아들 집에도 자주 들리고, 80년대 후반까지도 걸어다녔다고 한다. 이은숙은 1975년 1월 정릉에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서간도시종기(西間島侍從記)』를 집필하였다. 당시 이미 80을 훌쩍 넘은 나이였다. 손자 이종철씨는 이은숙이 만년까지도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다고 전하는데 수기의 내용이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1975년 제1회 월봉문학상을 수상했다. 손주들에게 자상한 할머니였던 그녀는 평범한 말년을 보내다가 1978년 12월 12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은숙1889~1978 이회영은 사후에 공로를 인정받았지만 그의 아내 이은숙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이은숙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이회영과 함께 낯선 간도로 이주,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힘썼다. 이회영의 독립운동에 그의 아내 이은숙의 존재는 결코 적지 않은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은숙은 1908년 10월 20일, 만19살 때 만 41세의 이회영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결혼 2년 만에 해외에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가꾸겠다는 이회영의 뜻에 따라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딸도 함께 서간도로 향했다. 1917년 귀국 후 짧지만 행복한 나날을 따라 북경으로 다시 왔지만 망명객의 처지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 결국 1925년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이은숙은 남편과 남매를 두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힘들게 일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매달 남편에게 돈을 송금했다. 그런 그녀에게 1932년 10월 21일 비극적인 소식이 도착했다. 남편의 사망을 전하는 전보였다. 이은숙은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났다. 이은숙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1954년 11월 상경하여 막내 사위가 구해준 정릉 집에서 큰아들 규창과 함께 살았다. 그녀가 이회영의 부인인지 이웃들은 알지 못했고 이회영 역시 당시에는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 그녀는 건강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경복궁 근처의 법륜사에 다녔는데 정릉에서 꽤나 거리가 있는 곳이다. 안양의 둘째아들 집에도 자주 들리고, 80년대 후반까지도 걸어다녔다고 한다. 이은숙은 1975년 1월 정릉에서 자신의 삶을 기록한 『서간도시종기(西間島侍從記)』를 집필하였다. 당시 이미 80을 훌쩍 넘은 나이였다. 손자 이종철씨는 이은숙이 만년까지도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다고 전하는데 수기의 내용이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1975년 제1회 월봉문학상을 수상했다. 손주들에게 자상한 할머니였던 그녀는 평범한 말년을 보내다가 1978년 12월 12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뮤지컬 <아나키스트의 아내>는 이 가족사를 조망한다. 이회영이라는 거목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큰 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회영이 순국한 1932년 이후로 이은숙은 47년을 더 살아가야 했다.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고,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런 그녀가 죽어 남편을 만났을 때 서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이런 상상에서 극은 시작한다. 더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를 위한 신념은 그 자체로 옳고 가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을 지켜나가기는 힘들다. 이것은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뒤를 지켜주었던 가족들도 이제는 기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의 아내>의 극본을 쓴 차지성 연출은 '이 뮤지컬이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위로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신념'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우리에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던진 한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아나키스트의 아내>는 2017년 11월 30일부터 12월 10일까지 대학로 알과핵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뮤지컬 <아나키스트의 아내>는 이 가족사를 조망한다. 이회영이라는 거목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큰 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회영이 순국한 1932년 이후로 이은숙은 47년을 더 살아가야 했다. 자식의 옥바라지를 하고,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런 그녀가 죽어 남편을 만났을 때 서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이런 상상에서 극은 시작한다. 더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를 위한 신념은 그 자체로 옳고 가치 있을 지 모르지만, 그것을 지켜나가기는 힘들다. 이것은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야 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그리고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뒤를 지켜주었던 가족들도 이제는 기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의 아내>의 극본을 쓴 차지성 연출은 '이 뮤지컬이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면 위로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신념'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우리에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던진 한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아나키스트의 아내>는 2017년 11월 30일부터 12월 10일까지 대학로 알과핵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 이회영은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滿洲)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이듬해에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베이징 일대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1924년에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직후에는 상하이에 집결한 한인들이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은숙은 남편 이회영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이래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투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이은숙, 1981) 「이회영의 북경생활:1919~1925」(최기영, 2013, 『동양학』 54) 136면 동지, 동반자, 조력자로서 모녀가 함게 걸었던 항일독립이란 형극의 길-이은숙과 이규숙의 생애(이종걸, 묻혀진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다, 2018) 9~11, 19~20면

    이회영은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滿洲)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이듬해에는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베이징 일대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고, 1924년에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직후에는 상하이에 집결한 한인들이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은숙은 남편 이회영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이래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투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이은숙, 1981) 「이회영의 북경생활:1919~1925」(최기영, 2013, 『동양학』 54) 136면 동지, 동반자, 조력자로서 모녀가 함게 걸었던 항일독립이란 형극의 길-이은숙과 이규숙의 생애(이종걸, 묻혀진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다, 2018) 9~11, 19~20면

  • 이종철 씨는 이규창의 장남이다. 이규창은 이회영과 이은숙의 장남으로 1913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이종철 씨는 할머니 이은욱과 아버지 이규창을 돌아가실 때까지 정릉에서 모시고 살았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종철 씨는 이규창의 장남이다. 이규창은 이회영과 이은숙의 장남으로 1913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이종철 씨는 할머니 이은욱과 아버지 이규창을 돌아가실 때까지 정릉에서 모시고 살았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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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이은숙’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