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정

  • 李孝貞, 이춘식(李春植)
  • 노동운동
  • 1913.07.28 - 2010.08.14
  • 건국포장

보문동과 관련있는 독립운동가이다. 1933년 9월 21일 숭인면 신설리(현 성북구 보문동, 동대문구 신설동 일대)에 있었던 종연방직[종방(鐘紡)] 경성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주도했다. 이 사건은 1930년대 열악하였던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과 당시 성북구의 노동환경을 알 수 있는 파업 사건이다. 종방 파업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에는 이재유, 권우성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건국포장을 받았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효정,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이효정,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2),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2),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3),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4),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_이효정(4),

근거자료

  • 이틀 간격을 두고 일어난 서울고무회사 공장과 종연방적 경성제사 공장 파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당시 서울고무공장 파업은 허마리아를 중심으로 지순이, 맹계임 등이 주도했고,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은 이병희와 이효정, 이순금 등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이병희와 이효정을 들 수 있다. 이병희와 이효정은 친인척 관계로 이병희가 이효정의 고모였으나 나이는 이병희가 이효정보다 다섯 살 어렸다. 각각 경북 봉화와 서울에서 태어난 이효정과 이병희는 이경식, 이동하, 이병기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집안의 영향을 받아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고 한다. 10대 후반과 중반 서울로 유학 온 이효정과, 고모 이병희는 각각 동덕여자보통학교와 서울여상에 재학했으나 학교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내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1933년 9월 종연방적 노동자들의 파업을 전면에서 이끌었다. 파업 이후 이효정은 국내에 남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종사했고, 이병희는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특히 이병희는 북경에서 사망한 이육사 시인의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 온 장본인이었다.

    이틀 간격을 두고 일어난 서울고무회사 공장과 종연방적 경성제사 공장 파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당시 서울고무공장 파업은 허마리아를 중심으로 지순이, 맹계임 등이 주도했고,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은 이병희와 이효정, 이순금 등이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이병희와 이효정을 들 수 있다. 이병희와 이효정은 친인척 관계로 이병희가 이효정의 고모였으나 나이는 이병희가 이효정보다 다섯 살 어렸다. 각각 경북 봉화와 서울에서 태어난 이효정과 이병희는 이경식, 이동하, 이병기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집안의 영향을 받아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고 한다. 10대 후반과 중반 서울로 유학 온 이효정과, 고모 이병희는 각각 동덕여자보통학교와 서울여상에 재학했으나 학교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내 학교를 떠나 노동운동에 투신했으며 1933년 9월 종연방적 노동자들의 파업을 전면에서 이끌었다. 파업 이후 이효정은 국내에 남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종사했고, 이병희는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특히 이병희는 북경에서 사망한 이육사 시인의 시신과 유품을 수습해 온 장본인이었다.

  • 1930년대 초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만세를 부르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으며,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직[鐘紡]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이효정은 이재유(李載裕)의 지도를 받아 여직공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지도하였다. 노동쟁의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의 확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 하에 파업을 선동하였던 것이다. 종방 파업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 이효정은 서울에서 이재유·권우성(權又成)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朝鮮中央日報(1935. 11. 8) 勞動爭議 背後煽動 其他에 關한 件, 京東警高秘 第3248號1933. 10. 26, 思想에 關한 情報 6(국사편찬위원회) 被疑者 素行調書(東大門警察署:1935. 12. 25)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별집7권 78면 朝鮮日報(1936. 12. 29) 東亞日報(1933. 10. 19, 10. 21, 1935. 12. 28)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發覺에 關한 件, 京西高秘 第8613號의31934. 2. 7, 思想에 關한 情報 7(국사편찬위원회) 決定書(京城地方法院:1936. 5. 13, 7. 14, 11. 11)

    1930년대 초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효정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만세를 부르고 종로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으며, 3학년 때는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1933년 9월 21일, 종연방직[鐘紡] 경성제사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이효정은 이재유(李載裕)의 지도를 받아 여직공을 선동하여 총파업을 지도하였다. 노동쟁의의 확대를 꾀해 공장 내 조직의 확대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별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계획 하에 파업을 선동하였던 것이다. 종방 파업 이후 1933년 10월 17일 청량리에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11월, 이효정은 서울에서 이재유·권우성(權又成) 등이 주도 조직한 ‘경성지방좌익노동조합 조직준비회’에 가담하여 동지 규합과 항일의식 고취에 주력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어 약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朝鮮中央日報(1935. 11. 8) 勞動爭議 背後煽動 其他에 關한 件, 京東警高秘 第3248號1933. 10. 26, 思想에 關한 情報 6(국사편찬위원회) 被疑者 素行調書(東大門警察署:1935. 12. 25)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별집7권 78면 朝鮮日報(1936. 12. 29) 東亞日報(1933. 10. 19, 10. 21, 1935. 12. 28) 朝鮮共産黨再建同盟事件 發覺에 關한 件, 京西高秘 第8613號의31934. 2. 7, 思想에 關한 情報 7(국사편찬위원회) 決定書(京城地方法院:1936. 5. 13, 7. 1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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