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

  • 林圭, 우정(偶丁)
  • 3.1운동
  • 1863.09.23 - 1948.03.07
  • 애국장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여한 핵심 인사 48인 중 한 사람으로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통고문 및 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3월 1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하여 일본수상과 의회에 문서를 전달하고 3월 9일 귀국 도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을 받아 출옥하였다. 말년에 성북동의 미륵당이라는 암자에서 약 10년간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한시집 『북산산고』를 탈고했다. 그는 미륵당에서 기거하며 한용운을 비롯해 오세창, 정인보 등과 시류를 논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2), 2020.01.07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2), 2020.01.07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임규,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 사진_임규,

근거자료

  • 본적: 전북 익산 주소: 성북동 계열과 단체: 3·1운동 <활동 내용>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이다. 손병희(孫秉熙) 등이 주축이 된 거족적인 독립운동계획에 참여하여 일본 정부와 귀족원(貴族院)·중의원(衆議院)에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통고문 및 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7시 최남선(崔南善)으로부터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통고문 3통과 선언서를 받아가지고 경성을 출발하여, 3월 1일 오후 4시경에 일본 동경(東京)에 도착하여 3일에 이 서류를 일본 수상과 의회에 우송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3월 9일 귀국 도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에 압송되었으나,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을 받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본적: 전북 익산 주소: 성북동 계열과 단체: 3·1운동 <활동 내용> 3·1운동 당시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이다. 손병희(孫秉熙) 등이 주축이 된 거족적인 독립운동계획에 참여하여 일본 정부와 귀족원(貴族院)·중의원(衆議院)에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통고문 및 선언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2월 27일 오후 7시 최남선(崔南善)으로부터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통고문 3통과 선언서를 받아가지고 경성을 출발하여, 3월 1일 오후 4시경에 일본 동경(東京)에 도착하여 3일에 이 서류를 일본 수상과 의회에 우송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3월 9일 귀국 도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에 압송되었으나,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을 받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9년-임규 일본에 「독립선언서」 전달 1948년-임규 사망

    ○ 성북구 독립운동가들이 걸어온 독립의 길 1919년-임규 일본에 「독립선언서」 전달 1948년-임규 사망

  •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임규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 전달한 애국지사 1867~1948 / 애국장 / 성북동 미륵암에 거주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여한 핵심 인사 48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일본에 들어가 일본주재 외국 공관과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를 직접 전달했습니다. 말년을 성북동 미륵암에서 보내며 『북산산고』라는 한시집을 발행했습니다.

    ○ 성북구 거주 독립운동가 임규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 전달한 애국지사 1867~1948 / 애국장 / 성북동 미륵암에 거주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여한 핵심 인사 48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 당시 일본에 들어가 일본주재 외국 공관과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를 직접 전달했습니다. 말년을 성북동 미륵암에서 보내며 『북산산고』라는 한시집을 발행했습니다.

  • ○ 에피소드 둘-‘언어천재’ 임규와 미륵암 십년의 세월을 성북동 모퉁이에 살고 있으니 청룡암 미륵당이 바로 골목과 통한다 고승이 간 뒤 경전을 걷고 좋은 친구 때로 오면 술병을 당긴다 정해진 곳 없는 버들은 눈보다도 더 가볍고 살 찌려는 살구알은 구슬보다 더 크다 늙으막에 점점 산에 사는 취미를 깨달으며 날마다 기쁘게 홀로 즐긴다 우정 임규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만큼 언어적, 문학적 감각이 굉장히 뛰어났던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러 갈 때 아예 일본어로 선언서 전체를 외워갈 정도였고 어린 시절 방에서 글 읽는 소리를 밖에서 듣고 한문을 깨쳤다는 일화에서 그 천재성을 짐작할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주시경과 훈민정음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7만자나 되는 어휘를 수집한 한글학자였습니다. 또한 일본어 문법의 대가였습니다. 평생 나라의 독립 이외에는 관심이 없던 임규는 말년을 성북동 미륵당(현 동방대학원대학교 부지)이란 암자에서 약 10년간 거주했습니다. 이곳에서 그가 쓰고 싶었던 한시를 지었고 한시집 『북산산고』(北山散稿)를 탈고했습니다. 위 구절은 북산산고에 실린 「산거잡영(山居雜詠)」 중 9연에 해당하는 구절로 그가 자리한 암자의 그윽한 운치가 느껴집니다. 임규는 미륵암에 기거하며 한용운을 비롯해 오세창, 정인보 등과 시류를 논하곤 했습니다.

    ○ 에피소드 둘-‘언어천재’ 임규와 미륵암 십년의 세월을 성북동 모퉁이에 살고 있으니 청룡암 미륵당이 바로 골목과 통한다 고승이 간 뒤 경전을 걷고 좋은 친구 때로 오면 술병을 당긴다 정해진 곳 없는 버들은 눈보다도 더 가볍고 살 찌려는 살구알은 구슬보다 더 크다 늙으막에 점점 산에 사는 취미를 깨달으며 날마다 기쁘게 홀로 즐긴다 우정 임규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만큼 언어적, 문학적 감각이 굉장히 뛰어났던 인물이었습니다.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러 갈 때 아예 일본어로 선언서 전체를 외워갈 정도였고 어린 시절 방에서 글 읽는 소리를 밖에서 듣고 한문을 깨쳤다는 일화에서 그 천재성을 짐작할 수 있지요. 뿐만 아니라 주시경과 훈민정음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7만자나 되는 어휘를 수집한 한글학자였습니다. 또한 일본어 문법의 대가였습니다. 평생 나라의 독립 이외에는 관심이 없던 임규는 말년을 성북동 미륵당(현 동방대학원대학교 부지)이란 암자에서 약 10년간 거주했습니다. 이곳에서 그가 쓰고 싶었던 한시를 지었고 한시집 『북산산고』(北山散稿)를 탈고했습니다. 위 구절은 북산산고에 실린 「산거잡영(山居雜詠)」 중 9연에 해당하는 구절로 그가 자리한 암자의 그윽한 운치가 느껴집니다. 임규는 미륵암에 기거하며 한용운을 비롯해 오세창, 정인보 등과 시류를 논하곤 했습니다.

  • ○ 일본 총리 앞에서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한 임규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장소는 우정 임규의 집이었습니다. 임규는 민족대표 33인 못지 않게 3·1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해 3·1 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가한 핵심 인사를 민족대표 48인으로 칭하기도 하는데 임규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최남선은 3주간 임규의 집에 머물며 몰래 독립선언서를 썼습니다. 임규의 부인이 일본인이었기에 일본의 감시망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추측됩니다. 임규는 독립선언서가 완성된 이후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완성된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문을 적국인 일본과 해외에 퍼뜨리는 일이었지요. 일본 유학생활로 일본어에 능통했던 임규는 이 일을 자청했고 그는 2월 27일 서울을 떠나 3월 1일 도쿄에 도착,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합니다. 더욱이 독립선언서를 머릿속에 모두 외우고 그것들을 직접 일본어로 번역해 옮겼으며 국무총리 하라다카시(原敬) 앞에서 조선의 독립을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그의 기백에 놀란 하라다카시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하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를 연행토록 지시했습니다.

    ○ 일본 총리 앞에서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한 임규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장소는 우정 임규의 집이었습니다. 임규는 민족대표 33인 못지 않게 3·1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해 3·1 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가한 핵심 인사를 민족대표 48인으로 칭하기도 하는데 임규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최남선은 3주간 임규의 집에 머물며 몰래 독립선언서를 썼습니다. 임규의 부인이 일본인이었기에 일본의 감시망에서 다소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으로 추측됩니다. 임규는 독립선언서가 완성된 이후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합니다. 완성된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문을 적국인 일본과 해외에 퍼뜨리는 일이었지요. 일본 유학생활로 일본어에 능통했던 임규는 이 일을 자청했고 그는 2월 27일 서울을 떠나 3월 1일 도쿄에 도착,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합니다. 더욱이 독립선언서를 머릿속에 모두 외우고 그것들을 직접 일본어로 번역해 옮겼으며 국무총리 하라다카시(原敬) 앞에서 조선의 독립을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그의 기백에 놀란 하라다카시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하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를 연행토록 지시했습니다.

  • ○ 성북인의 목소리 둘 임규 임규가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한 말 임규: 나는 조선의 임규요.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려고 왔소. 하라다카시 일본 총리: 지금 조선의 사태는 어째서 일어났소? 총독의 행정이 옳지 못해서 그런 것이오? 만약 그렇다면 곧장 바꾸어 주리라. 임규: 총독이 잘하건 못하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다만 자결주의 원칙의 따라 조선인의 일은 조선인이 담당하리니 속히 총독부의 문을 닫고 조선에 있는 일본 군사를 철수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가혹했던 일본의 탄압 속에서 독립을 외쳤던 수많은 민중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안위보다도 나라가 먼저였던 사람들은 총칼이 두렵지 않았지요. 우정 임규는 그 중에서도 기백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광장에 나와 ‘독립’을 외치는 일도 쉽지 않으련만 일본의 총리 앞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일은 누구도 나서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임규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함은 물론이고 총리 앞에서 당당하게 외칩니다. 독립을 선포하러 왔노라고, 일본 군사를 철수하라고 말입니다. 이에 일본 총리는 임규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 성북인의 목소리 둘 임규 임규가 일본 총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한 말 임규: 나는 조선의 임규요.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려고 왔소. 하라다카시 일본 총리: 지금 조선의 사태는 어째서 일어났소? 총독의 행정이 옳지 못해서 그런 것이오? 만약 그렇다면 곧장 바꾸어 주리라. 임규: 총독이 잘하건 못하건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다만 자결주의 원칙의 따라 조선인의 일은 조선인이 담당하리니 속히 총독부의 문을 닫고 조선에 있는 일본 군사를 철수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가혹했던 일본의 탄압 속에서 독립을 외쳤던 수많은 민중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안위보다도 나라가 먼저였던 사람들은 총칼이 두렵지 않았지요. 우정 임규는 그 중에서도 기백이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광장에 나와 ‘독립’을 외치는 일도 쉽지 않으련만 일본의 총리 앞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일은 누구도 나서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임규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함은 물론이고 총리 앞에서 당당하게 외칩니다. 독립을 선포하러 왔노라고, 일본 군사를 철수하라고 말입니다. 이에 일본 총리는 임규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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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임규’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