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당

  • 延薇堂, 연충효(延忠孝)
  • 임시정부 , 사회운동
  • 1908.07.15 - 1981.01.01
  • 1990년 애국장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연충효이나 1938년 임시정부가 장사(長沙)에 피신했을 때부터 아명인 ‘연미당’을 사용하여 본명보다 ‘연미당’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20년 초, 가족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이주하여 인성학교를 졸업하였고, 아버지를 따라 진강으로 이사하여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하이에 정착하였으며, 1927년 3월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상해여자청년동맹, 한인애국단, 임시의정원, 한국독립당, 한국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 남편 엄항섭이 먼저 1945년 11월에 환국하였고, 연미당과 가족들은 1946년 6월 입국하였다. 엄항섭과 연미당 가족은 김구가 거처하는 경교장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후 삼청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엄항섭과 연미당 가족은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남편 엄항섭이 자진 월북했다는 오해를 받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으나 이후 본인 의사에 반해 납북된 사실이 확인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연미당도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근거자료

  • 정의 1908(순종 2)~1981. 독립운동가. 개설 연미당(延薇堂)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상해여자청년동맹(上海女子靑年同盟),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본명은 연충효(延忠孝)이다.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아버지 연병환(延秉煥)과 어머니 김정숙(金貞淑)의 1남 1녀 중에 맏딸로 출생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가 장사(長沙)에 피신했을 때부터 아명인 ‘연미당’ 이름을 사용하여 본명보다 ‘연미당’으로 알려졌다. 생애 12세 때인 1920년 초, 가족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이주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졸업하였다. 진강해관(鎭江海關)으로 전근하는 아버지를 따라 진강으로 이사하여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하이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정착하였다. 1927년 3월 20일 엄항섭과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폭탄투척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를 탈출하여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안착하였다. 광복이 되자 이듬해인 1946년 7월, 광복군 제2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남편 엄항섭이 납북되자,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하였다. 말년에 중풍을 앓으며 고생하다가 1981년 1월 1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930년 8월 16일, 상하이의 한국여자구락부가 상해여자청년동맹(上海女子靑年同盟)으로 재편되었을 때 참여하였다. 1931년 7월에 출범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에 상해여자청년동맹 단체 대표로서 참여하여 독립운동계의 공동 항일연합전선 구축 운동을 주도하였다. 각 신문사에 배일전문을 보내고 중국 신문기자들을 초대해 한인들의 입장을 설명했으며 동연합회 명의의 의연금을 모금하는 일을 맡았다. 1930년대 초 임시정부가 조직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도 남편과 함께 참여하여 단장 김구(金九)를 적극 지원했으며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중국군 19로군 부상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위문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 상해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매년 8·29 국치기념일에 ‘국치기념(國恥紀念)’ 전단을 만들어 각 방면으로 배포하며 항일민족의식 앙양에 노력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가 일어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자싱[嘉興]으로 피신했으며 위중한 상태에 있던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1936년부터 연미당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을 하였고 재건 한국독립당이 새로 출범했을 때도 여성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 10월에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의 대원이 되어 중국의 선전공작대와 함께 선전 홍보 활동과 연극, 무용공연 등 위문활동을 하였다. 1943년 2월 23일, 각 정파의 여성들 50여 명이 모여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를 재건했을 때, 조직부 주임으로 복무하며 충칭방송[重慶放送]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과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선무 방송을 하였다. 한편 중국전선에 끌려온 일본군 소속의 한적(韓籍) 사병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한국말로 알리며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하도록 유도하였으며 국제동맹군과 한국 동포들에게 중국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충칭 토교(土橋)에 소재한 일본군포로수용소도 방문하여 한인 포로를 위문했으며 한국가요를 불러 그들의 향수와 애국심을 자극하는 공연을 펼치며 그들을 광복군으로 들어오도록 권유하는 초모공작도 적극 전개하였다. 한편 1943년 5월 10일, 충칭 한인사회에 종전 후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6개 대표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과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3·34·35(국사편찬위원회 편,2013)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1976)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자료 20(국사편찬위원회 편,1968)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朝鮮思想運動調査資料)』 2(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1933)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재상해일본총영사관경찰부 제2과(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第二課),1932) 『애국지사 연병환·연병호 전기』 (애국지사 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2013) 『연미당의 애국춘추(愛國千秋)』(엄기선,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2013)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박영준 자서전』(한국독립유공자협회,2005)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 (정원택 저. 홍순옥 편,탐구당,1983) 『사랑과 열정을 조국에: 일파 엄항섭선생·미당 연충효여사 부부 독립운동사』(대전애국지사숭모회) 「연미당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명화,『역사와 담론』 73,호서사학회,2015) 「연병환의 생애와 민족운동」(박걸순,『역사와 담론』 73,호서사학회,2015) 집필자 집필 (2017년) 이명화(독립기념관연구소 연구위원, 한국근대사)

    정의 1908(순종 2)~1981. 독립운동가. 개설 연미당(延薇堂)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상해여자청년동맹(上海女子靑年同盟),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본명은 연충효(延忠孝)이다.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아버지 연병환(延秉煥)과 어머니 김정숙(金貞淑)의 1남 1녀 중에 맏딸로 출생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가 장사(長沙)에 피신했을 때부터 아명인 ‘연미당’ 이름을 사용하여 본명보다 ‘연미당’으로 알려졌다. 생애 12세 때인 1920년 초, 가족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이주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졸업하였다. 진강해관(鎭江海關)으로 전근하는 아버지를 따라 진강으로 이사하여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하이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정착하였다. 1927년 3월 20일 엄항섭과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폭탄투척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를 탈출하여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안착하였다. 광복이 되자 이듬해인 1946년 7월, 광복군 제2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남편 엄항섭이 납북되자,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하였다. 말년에 중풍을 앓으며 고생하다가 1981년 1월 1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930년 8월 16일, 상하이의 한국여자구락부가 상해여자청년동맹(上海女子靑年同盟)으로 재편되었을 때 참여하였다. 1931년 7월에 출범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에 상해여자청년동맹 단체 대표로서 참여하여 독립운동계의 공동 항일연합전선 구축 운동을 주도하였다. 각 신문사에 배일전문을 보내고 중국 신문기자들을 초대해 한인들의 입장을 설명했으며 동연합회 명의의 의연금을 모금하는 일을 맡았다. 1930년대 초 임시정부가 조직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도 남편과 함께 참여하여 단장 김구(金九)를 적극 지원했으며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중국군 19로군 부상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위문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 상해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매년 8·29 국치기념일에 ‘국치기념(國恥紀念)’ 전단을 만들어 각 방면으로 배포하며 항일민족의식 앙양에 노력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가 일어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자싱[嘉興]으로 피신했으며 위중한 상태에 있던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1936년부터 연미당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을 하였고 재건 한국독립당이 새로 출범했을 때도 여성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 10월에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의 대원이 되어 중국의 선전공작대와 함께 선전 홍보 활동과 연극, 무용공연 등 위문활동을 하였다. 1943년 2월 23일, 각 정파의 여성들 50여 명이 모여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를 재건했을 때, 조직부 주임으로 복무하며 충칭방송[重慶放送]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과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선무 방송을 하였다. 한편 중국전선에 끌려온 일본군 소속의 한적(韓籍) 사병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한국말로 알리며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하도록 유도하였으며 국제동맹군과 한국 동포들에게 중국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충칭 토교(土橋)에 소재한 일본군포로수용소도 방문하여 한인 포로를 위문했으며 한국가요를 불러 그들의 향수와 애국심을 자극하는 공연을 펼치며 그들을 광복군으로 들어오도록 권유하는 초모공작도 적극 전개하였다. 한편 1943년 5월 10일, 충칭 한인사회에 종전 후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6개 대표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과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3·34·35(국사편찬위원회 편,2013)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1976)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자료 20(국사편찬위원회 편,1968)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朝鮮思想運動調査資料)』 2(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1933)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재상해일본총영사관경찰부 제2과(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第二課),1932) 『애국지사 연병환·연병호 전기』 (애국지사 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2013) 『연미당의 애국춘추(愛國千秋)』(엄기선,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2013)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박영준 자서전』(한국독립유공자협회,2005)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 (정원택 저. 홍순옥 편,탐구당,1983) 『사랑과 열정을 조국에: 일파 엄항섭선생·미당 연충효여사 부부 독립운동사』(대전애국지사숭모회) 「연미당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명화,『역사와 담론』 73,호서사학회,2015) 「연병환의 생애와 민족운동」(박걸순,『역사와 담론』 73,호서사학회,2015) 집필자 집필 (2017년) 이명화(독립기념관연구소 연구위원, 한국근대사)

  • 1930년 8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韓人女子靑年同盟)이 조직되었을 때 5명의 임시위원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어 상해 청년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10월 일제의 무력침략으로 발발한 만주사변 이후 상해에 았는 한인 각단체 대표자회의에 여자청년동맹의 대표로 참석하여 배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가 있은 다음 일제의 포악한 탄압을 피해 1932년 4월부터 1936년 5월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가흥(嘉興)·진강(鎭江)을 거쳐 장사(長沙)로 이동할 때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며 봉사하였고 장사에 있는 남목청(楠木廳)에서 3당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운한(李雲漢)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김구(金九)를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員)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고 1943년 2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의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어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또한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를 통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상황을 우리말로 방송하였고 일본군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하여 초모공작을 하면서 한국 여성들의 총궐기를 촉구하며 활동하는 한편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編)(國會圖書館) 657·658·685·689·691·762·827·830面 寫眞(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在柳州 與各機關團體代表 留別紀念撮影 : 1939. 4. 4)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343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031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3卷 494·612·613面 白凡逸志(金九) 246·252·253·256·261·264面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 3面 寫眞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315·405面

    1930년 8월 중국 상해(上海)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韓人女子靑年同盟)이 조직되었을 때 5명의 임시위원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어 상해 청년여자교민에 대한 조사 및 상해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단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10월 일제의 무력침략으로 발발한 만주사변 이후 상해에 았는 한인 각단체 대표자회의에 여자청년동맹의 대표로 참석하여 배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의거가 있은 다음 일제의 포악한 탄압을 피해 1932년 4월부터 1936년 5월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가흥(嘉興)·진강(鎭江)을 거쳐 장사(長沙)로 이동할 때 임시정부 요인들을 수행하며 봉사하였고 장사에 있는 남목청(楠木廳)에서 3당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운한(李雲漢)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김구(金九)를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員)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고 1943년 2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의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어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며 활동하였다. 또한 1944년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대적선전위원회(對敵宣傳委員會)를 통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상황을 우리말로 방송하였고 일본군내의 한국인 사병에 대하여 초모공작을 하면서 한국 여성들의 총궐기를 촉구하며 활동하는 한편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입당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編)(國會圖書館) 657·658·685·689·691·762·827·830面 寫眞(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在柳州 與各機關團體代表 留別紀念撮影 : 1939. 4. 4)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343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4卷 1031面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3卷 494·612·613面 白凡逸志(金九) 246·252·253·256·261·264面 大韓民國臨時政府文書輯覽 3面 寫眞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6卷 315·405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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