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항섭

  • 嚴恒燮, 엄대형(嚴大衡), 일파(一波)
  • 임시정부 , 사회운동
  • 1898.10.15 - 1962.07.30
  • 1989년 독립장. 1950년 납북(납북당시 주소는 종로구 삼청동)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임시의정원 의원, 청년동맹회 집행위원, 한국교민단 의경대장,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 선전부장, 주석비서로 임명되어 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환국하여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6년 귀국한 가족들과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삼청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김구와 함께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9월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1962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근거자료

  • 김규식 선생의 집은 삼청동 꼭대기에 있었다. 우사 부부 모두 우리가 잘 아는 분이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뵌 기억이 있다. 나는 엄항섭 선생 아들 기동과 같이 세배를 갔었다. 우사 부인 김순애 여사가 세뱃돈을 주셨다. 당시 내 나이가 열아홉이어서 "저도 이제 어른이 다 됐는데 무슨 세뱃돈입니까?"하고 사양했더니 "다른데 가서는 어른인지 몰라도 나한테는 애기야!"하며 한사코 주셔서 꼼짝없이 받은 기억이 난다. 그게 아마 내 생애 마지막 세뱃돈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성북동에 살던 엄항섭 선생 가족이 우사 집 근처로 이사를 가 이웃이 되었다.

    김규식 선생의 집은 삼청동 꼭대기에 있었다. 우사 부부 모두 우리가 잘 아는 분이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 뵌 기억이 있다. 나는 엄항섭 선생 아들 기동과 같이 세배를 갔었다. 우사 부인 김순애 여사가 세뱃돈을 주셨다. 당시 내 나이가 열아홉이어서 "저도 이제 어른이 다 됐는데 무슨 세뱃돈입니까?"하고 사양했더니 "다른데 가서는 어른인지 몰라도 나한테는 애기야!"하며 한사코 주셔서 꼼짝없이 받은 기억이 난다. 그게 아마 내 생애 마지막 세뱃돈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성북동에 살던 엄항섭 선생 가족이 우사 집 근처로 이사를 가 이웃이 되었다.

  • 삼청동으로 이사 가기 전에 엄항섭 선생은 성북동에서 살았다. 삼선교에 살던 조소앙 성생 댁과 우리 집과도 가까웠다. 거리도 가깝거니와 중국에서부터 친분이 두터워 우리는 수시로 내왕하며 지냈다.

    삼청동으로 이사 가기 전에 엄항섭 선생은 성북동에서 살았다. 삼선교에 살던 조소앙 성생 댁과 우리 집과도 가까웠다. 거리도 가깝거니와 중국에서부터 친분이 두터워 우리는 수시로 내왕하며 지냈다.

  • 경기 여주(驪州) 사람이다. 1919년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한 이래 임시정부 여주군(驪州郡) 담당의 국내조사원(國內調査員)과 법무부 참사(參事)등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지강대학(之江大學)을 졸업한 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임시정부 비서국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에 선정되었으며 경제후원회(經濟後援會)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임시의정원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가 1927년 1월에 의원직을 사직하였다. 1931년 한국교민단(韓國僑民團)의 의경대장(義警隊長)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하여 조직의 재무를 맡았으며,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여 김 구의 주도하에 계획되어진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의 의거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1936년부터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7년 2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였으며, 임정의 결산위원을 담당하였다. 1940년 5월 3당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외무위원회(外務委員會)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0월 11일에는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한국측 이사에 선임되었다. 1944년 5월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및 주석판공비서에 임명되어 광복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광복후 1945년 11월 백범(白凡) 김 구(金九)와 함께 환국하였다. 광복후 민주의원의 의원등으로 활동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25면 조선민족운동년감 60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31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63·241·270·738·858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51·504·509·656·695·668·71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42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3권 242·279·457·469·60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01·102·349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644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3·354면

    경기 여주(驪州) 사람이다. 1919년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한 이래 임시정부 여주군(驪州郡) 담당의 국내조사원(國內調査員)과 법무부 참사(參事)등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지강대학(之江大學)을 졸업한 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과 임시정부 비서국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에 선정되었으며 경제후원회(經濟後援會)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임시의정원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가 1927년 1월에 의원직을 사직하였다. 1931년 한국교민단(韓國僑民團)의 의경대장(義警隊長)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조직하여 조직의 재무를 맡았으며, 애국단(愛國團) 조직에 참여하여 김 구의 주도하에 계획되어진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의 의거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1936년부터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7년 2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였으며, 임정의 결산위원을 담당하였다. 1940년 5월 3당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외무위원회(外務委員會)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0월 11일에는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의 한국측 이사에 선임되었다. 1944년 5월 임시정부의 선전부장 및 주석판공비서에 임명되어 광복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광복후 1945년 11월 백범(白凡) 김 구(金九)와 함께 환국하였다. 광복후 민주의원의 의원등으로 활동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25면 조선민족운동년감 60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31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163·241·270·738·858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51·504·509·656·695·668·71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422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3권 242·279·457·469·60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01·102·349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644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3·354면

  • 정의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내용 1898년 9일 1일 경기도 여주군(현재의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90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일파(一波)이다. 일명 엄대형(嚴大衡)으로 불렸으며, 중국 망명 당시에는 ‘예빗·엄’이라고도 불렀다.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국무원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었고, 임시의정원의 지역대표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경기도 여주군 담당 국내 조사원이 되었다. 1922년 항저우[抗州] 지강대학(芝江大學)에서 수학하고, 김구의 의정활동을 보좌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회 발기인, 집행위원, 재정부장이 되었고, 1926년 12월에는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부터는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30년 1월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조직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상해 한국교민단의 의경대장(義警隊長)이 되었고, 자활자위(自活自衛)를 목적으로 하는 공평사운동(公平社運動)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1년 다시 의정원 의원이 되어 외무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선전부장과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 제1진으로 환국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서 김구를 보좌하여 김구 명의의 발표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 등을 대부분 기초하였다. 1946년 2월 1일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서 선전위원장이 되었으며, 1947년 3월 1일 국민의회 전국대표자대회의 임시정부 확대 강화에 따른 정무위원 개편에서도 정무위원이 되어 선전부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남북요인 15인 회담)’에 참석하고, 대회결정서(4월 30일 공동성명) 초안작성위원(7인)에 선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在北)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의 개최를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5년 11월 12일 엄항섭은 오하영·윤기섭·조소앙·송호성·안재홍과 더불어 6인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성명은 “남반부의 정사·군사·경제·문화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으로 “해방 10주년 경축대회에서 제기된 통일 방안을 지지하고, 남북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실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들 6인의 본의와는 달리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58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적이 뚜렷하더라도 해방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했거나 이북에서 활동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화 진전 분위기 속에서 재북(월·납북) 문학인 작품의 해금 등과 함께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이 이루어졌다. 그 일환으로 엄항섭에게도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훈론』(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북한정치사연구』Ⅰ건당·건국·건군의 역사 (김광운, 선인, 2003) 『압록강변의 겨울』(이태호, 다섯수레, 1991) 「북의 통일정책과 월·납북인의 통일운동(1948~1961)」(이신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5)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파 엄항섭 지사」(최병수,『충북사학』10, 1998)

    정의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선전부장,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내용 1898년 9일 1일 경기도 여주군(현재의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90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일파(一波)이다. 일명 엄대형(嚴大衡)으로 불렸으며, 중국 망명 당시에는 ‘예빗·엄’이라고도 불렀다.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국무원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었고, 임시의정원의 지역대표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경기도 여주군 담당 국내 조사원이 되었다. 1922년 항저우[抗州] 지강대학(芝江大學)에서 수학하고, 김구의 의정활동을 보좌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회 발기인, 집행위원, 재정부장이 되었고, 1926년 12월에는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부터는 청년운동에 참여하여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30년 1월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조직책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31년에는 상해 한국교민단의 의경대장(義警隊長)이 되었고, 자활자위(自活自衛)를 목적으로 하는 공평사운동(公平社運動)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1년 다시 의정원 의원이 되어 외무위원장직을 맡았으며, 1944년 5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 선전부장과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23일 임정 요인 제1진으로 환국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서 김구를 보좌하여 김구 명의의 발표 성명이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 등을 대부분 기초하였다. 1946년 2월 1일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서 선전위원장이 되었으며, 1947년 3월 1일 국민의회 전국대표자대회의 임시정부 확대 강화에 따른 정무위원 개편에서도 정무위원이 되어 선전부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남북요인 15인 회담)’에 참석하고, 대회결정서(4월 30일 공동성명) 초안작성위원(7인)에 선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이후 엄항섭 등 재북(在北) 인사들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의 개최를 계기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북측 대표 외에 자신들의 대표단 파견을 북측 당국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엄항섭과 권태양이 대표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으나 스위스 당국의 비자 발급 거부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1955년 11월 12일 엄항섭은 오하영·윤기섭·조소앙·송호성·안재홍과 더불어 6인 공동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성명은 “남반부의 정사·군사·경제·문화 각계각층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으로 “해방 10주년 경축대회에서 제기된 통일 방안을 지지하고, 남북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 실천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들 6인의 본의와는 달리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58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되었다.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다. 상훈과 추모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정부는 오랫동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적이 뚜렷하더라도 해방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했거나 이북에서 활동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7년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화 진전 분위기 속에서 재북(월·납북) 문학인 작품의 해금 등과 함께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이 이루어졌다. 그 일환으로 엄항섭에게도 1989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훈론』(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북한정치사연구』Ⅰ건당·건국·건군의 역사 (김광운, 선인, 2003) 『압록강변의 겨울』(이태호, 다섯수레, 1991) 「북의 통일정책과 월·납북인의 통일운동(1948~1961)」(이신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5)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일파 엄항섭 지사」(최병수,『충북사학』10,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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