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락부

  • 成北俱樂部
  • 문화운동
  • 1923 - ?

일제 강점기 성북동의 주민자치조직이다. 1923년 성북구락부가 창립되어 1925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동맹 가입을 결의하였다. 이 조직은 마을의 공공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성북소년회’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성북야학원’을 설립하여,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가는 ‘무산어린이’들을 위한 무상교육의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 성북구악가맹(城北俱樂加盟), 1925.08.12

    성북구악가맹(城北俱樂加盟), 1925.08.12

근거자료

  • 3. 성북동의 지역주민운동 1920년대 성북구락부의 활동 1923년 당시 성북리에는 청년회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다. 이 조직은 ‘성북구락부城北俱樂部’라고 불렸다. 성북구락부는 1923년에 조직되었다. 하지만 초기 활동은 매우 미미했다. 창립한 지 2년이 지난 후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7월 27일 임시총회를 열고 부장 및 임원진을 선정했다. 당시 선정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부장 : 김동근金東瑾, 총무 : 서광훈徐光勳, 재무 : 박성근朴性根, 서기 : 고덕룡高德龍, 간사 : 김윤식金潤植 이 중 성북구락부를 이끌어간 사람은 총무 직에 선임된 서광훈이었다. 서광훈은 성북구락부 임시총회의 임시의장이었으며 성북구락부가 개최하는 회의의 사회를 도맡아 했다. 성북구락부의 부흥을 이끌었고, 조직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서광훈에 대해서 알아보자. 서광훈의 생년월일은 1901년 10월 17일이다. 성북구락부의 임시총회가 열렸던 당시 그는 25세의 젊은 청년이었으며, 성북리 173번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학력을 보면 1913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오성학교, 철원 잠업견습소를 졸업했다. 이후 평강면平康面 서기가 되었는데 1년 후 사직하고 역 앞에서 운송점을 개업했다. 1922년에 성북리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서광훈의 이력 중 독특한 점은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였던 형평사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1924년 서광훈은 형평사 서기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제 당국에서는 서광훈에 대해 “영리하고 사회주의적 언사를 일삼고 형평운동에 관여하여 다른 사람을 선동할 우려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고 경계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 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 때 서광훈의 역할이 컸다. 서광훈은 자산이 없어서 매우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북구락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성북동의 청년들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청년조직을 결성하고 마을의 일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광훈은 1925년 이후 성북동을 떠나 활동하게 되지만 성북구락부는 성북리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성북구락부는 임시총회, 총회, 월례회의 등을 열고 조직 내의 일은 물론 성북리 내에서 필요한 공공사업을 진행했다. 먼저 마을 내에 소방구消防具를 구입하는 것과 도난당한 상비상여常備喪輿를 구입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이것을 위해 성북리 거주 유지로부터 의연금義捐金모집 활동을 했다. 다음으로 운동구 및 ‘팜프레트’를 구비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마지막으로 여름철에 밤늦게 물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한 피서객이 많아 주민들에게 방해가 됨으로 이것을 금지하는 활동을 했다. 성북구락부는 마을의 공공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1908년에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성북구락부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던 서광훈과 재무를 담당했던 김동근은 삼산학교에서 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동리 유력청년 수 명이 침식을 잊어가면서 눈물 섞인 열정으로 삼산학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삼산학교의 유지, 운영과 더불어 성북구락부는 성북소년회城北少年會 창립과 성북야학원 설립과 운영에 관여했다. 성북소년회는 1927년6월 23일에 만들어졌다. 이 소년회에서는 동년 7월에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가 는 무산어린이를 위해 야학원을 설립했다. 이 곳에서는 보통학교 1, 2, 3, 4학년의 아동을 모집했다. 하지만 성북야학원에서는 학생들을 아동으로만 한정하지 않은 것 같다. 1928년 3월 성북소년회 야학원의 진급식이 있었다. 우등으로 진급한 여자부 학생의 이름은 김아지金阿只였는데 그는 성북구락부 서광훈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성북구락부가 성북소년회와 성북야학원의 운영에 참여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성북소년회는 현재 성북구 지역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소년단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9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20여개 세포를 가진 경성소년연맹에서 경성어린이날 거행에 대한 재경소년단체 대표자회의를 열었고 구역을 정했는데 성북소년회 담당 구역은 동소내외東小內外 일대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동소내외라는 것은 혜화문 주변 지역을 의미한다. 성북소년회는 혜화문 주변 지역의 소년단체, 또는 관련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성북동의 지역주민운동 1920년대 성북구락부의 활동 1923년 당시 성북리에는 청년회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다. 이 조직은 ‘성북구락부城北俱樂部’라고 불렸다. 성북구락부는 1923년에 조직되었다. 하지만 초기 활동은 매우 미미했다. 창립한 지 2년이 지난 후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7월 27일 임시총회를 열고 부장 및 임원진을 선정했다. 당시 선정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부장 : 김동근金東瑾, 총무 : 서광훈徐光勳, 재무 : 박성근朴性根, 서기 : 고덕룡高德龍, 간사 : 김윤식金潤植 이 중 성북구락부를 이끌어간 사람은 총무 직에 선임된 서광훈이었다. 서광훈은 성북구락부 임시총회의 임시의장이었으며 성북구락부가 개최하는 회의의 사회를 도맡아 했다. 성북구락부의 부흥을 이끌었고, 조직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서광훈에 대해서 알아보자. 서광훈의 생년월일은 1901년 10월 17일이다. 성북구락부의 임시총회가 열렸던 당시 그는 25세의 젊은 청년이었으며, 성북리 173번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학력을 보면 1913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오성학교, 철원 잠업견습소를 졸업했다. 이후 평강면平康面 서기가 되었는데 1년 후 사직하고 역 앞에서 운송점을 개업했다. 1922년에 성북리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서광훈의 이력 중 독특한 점은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였던 형평사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1924년 서광훈은 형평사 서기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제 당국에서는 서광훈에 대해 “영리하고 사회주의적 언사를 일삼고 형평운동에 관여하여 다른 사람을 선동할 우려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고 경계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 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 때 서광훈의 역할이 컸다. 서광훈은 자산이 없어서 매우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북구락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성북동의 청년들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청년조직을 결성하고 마을의 일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광훈은 1925년 이후 성북동을 떠나 활동하게 되지만 성북구락부는 성북리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성북구락부는 임시총회, 총회, 월례회의 등을 열고 조직 내의 일은 물론 성북리 내에서 필요한 공공사업을 진행했다. 먼저 마을 내에 소방구消防具를 구입하는 것과 도난당한 상비상여常備喪輿를 구입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이것을 위해 성북리 거주 유지로부터 의연금義捐金모집 활동을 했다. 다음으로 운동구 및 ‘팜프레트’를 구비할 것에 대해 논의했다. 마지막으로 여름철에 밤늦게 물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한 피서객이 많아 주민들에게 방해가 됨으로 이것을 금지하는 활동을 했다. 성북구락부는 마을의 공공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1908년에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성북구락부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던 서광훈과 재무를 담당했던 김동근은 삼산학교에서 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동리 유력청년 수 명이 침식을 잊어가면서 눈물 섞인 열정으로 삼산학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삼산학교의 유지, 운영과 더불어 성북구락부는 성북소년회城北少年會 창립과 성북야학원 설립과 운영에 관여했다. 성북소년회는 1927년6월 23일에 만들어졌다. 이 소년회에서는 동년 7월에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가 는 무산어린이를 위해 야학원을 설립했다. 이 곳에서는 보통학교 1, 2, 3, 4학년의 아동을 모집했다. 하지만 성북야학원에서는 학생들을 아동으로만 한정하지 않은 것 같다. 1928년 3월 성북소년회 야학원의 진급식이 있었다. 우등으로 진급한 여자부 학생의 이름은 김아지金阿只였는데 그는 성북구락부 서광훈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성북구락부가 성북소년회와 성북야학원의 운영에 참여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성북소년회는 현재 성북구 지역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소년단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9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20여개 세포를 가진 경성소년연맹에서 경성어린이날 거행에 대한 재경소년단체 대표자회의를 열었고 구역을 정했는데 성북소년회 담당 구역은 동소내외東小內外 일대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동소내외라는 것은 혜화문 주변 지역을 의미한다. 성북소년회는 혜화문 주변 지역의 소년단체, 또는 관련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성북구락부, 한양청년연맹에 가맹 경성부근에 있는 청년단체를 망라하여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을 조직하고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북동에 있는 성북구락부(成北俱樂部)에서는 지난 8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동아일보』 1925. 8. 12.

    성북구락부, 한양청년연맹에 가맹 경성부근에 있는 청년단체를 망라하여 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을 조직하고 활동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북동에 있는 성북구락부(成北俱樂部)에서는 지난 8일에 임시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동아일보』 1925. 8. 12.

  • 1. 1920년대 성북구락부(城北俱樂部)의 활동 1923년 창립 후 1925년부터 본격적인 활동 시작 - 1925년 7월 27일 임시총회를 열고 부장 및 임원진 선출 ㆍ성북구락부 임원 (1925. 7) 부장 : 김동근(金東瑾), 총무 : 서광훈(徐光勳), 재무 : 박성근(朴性根) 서기 : 고덕룡(高德龍), 간사 : 김윤식(金潤植) ※ 1925년 구락부의 활동에서는 총무 서광훈의 역할이 컸음.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동맹 가입 결의

    1. 1920년대 성북구락부(城北俱樂部)의 활동 1923년 창립 후 1925년부터 본격적인 활동 시작 - 1925년 7월 27일 임시총회를 열고 부장 및 임원진 선출 ㆍ성북구락부 임원 (1925. 7) 부장 : 김동근(金東瑾), 총무 : 서광훈(徐光勳), 재무 : 박성근(朴性根) 서기 : 고덕룡(高德龍), 간사 : 김윤식(金潤植) ※ 1925년 구락부의 활동에서는 총무 서광훈의 역할이 컸음.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동맹 가입 결의

  • 마을 공공사업의 추진 - 마을 공용 소방구 구입 - 도난 당한 상비상여(常備喪輿) 재구입 - 운동구 및 ‘팜프레트’ 구비 - 여름철 밤늦게 물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한 피서객을 단속 - 성북리 거주 유지로부터 의연금 모집 교육운동의 전개 - 삼산학교의 유지를 위한 자금 모집 - 성북소년회 창립(1927. 6. 23) ㆍ경성소년연맹 가입 ㆍ혜화문 주변 지역 소년단체나 관련 행사를 주관 - 성북야학원 설립(1927. 7) ㆍ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가는 무산 어린이를 위한 교육 시설 ㆍ성북구락부 총무 서광훈의 어머니 김아지(金阿只)도 재학 → 일반 주민에게 교육 기회 제공

    마을 공공사업의 추진 - 마을 공용 소방구 구입 - 도난 당한 상비상여(常備喪輿) 재구입 - 운동구 및 ‘팜프레트’ 구비 - 여름철 밤늦게 물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한 피서객을 단속 - 성북리 거주 유지로부터 의연금 모집 교육운동의 전개 - 삼산학교의 유지를 위한 자금 모집 - 성북소년회 창립(1927. 6. 23) ㆍ경성소년연맹 가입 ㆍ혜화문 주변 지역 소년단체나 관련 행사를 주관 - 성북야학원 설립(1927. 7) ㆍ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가는 무산 어린이를 위한 교육 시설 ㆍ성북구락부 총무 서광훈의 어머니 김아지(金阿只)도 재학 → 일반 주민에게 교육 기회 제공

  • ○ 성북구락부 - 1923년 창립.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 등이 창립 - 1925년 5월 27일 하오 7시 삼산학교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서광훈의 사회 하에 신흥적 강령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정 ㆍ성북구락부 임원 : 부장 김동근(金東瑾, 삼산학교 교사), 총무 서광훈(삼산학교 교사), 재무 박성근(朴性根) 서기 고덕용(高德龍), 간사 김윤식(金潤植), 서광진(徐光鎭) - 1925년 6월 15일 임시총회에서 리(里)에 소방도구를 구비하고, 연전에 도난당한 상비상여를 구입하기로 결의 - 1925년 8월 8일 성북구락부원 임용이(林龍伊) 등은 만장일치로 허정숙, 권오설 등이 주도하는 사회주의계 청년단체인 한양청년연맹에 가입 - 1925 8월 13일 임시총회에서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서무부 서광훈 고덕룡, 재무부 박성근 서광진, 지육부 김동근, 체육부 서병태(徐丙泰) - 1926년 4월 25일 경성부 견지동 시천교회당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3주년 기념식에 성북구락부에서 축전 발송

    ○ 성북구락부 - 1923년 창립.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 등이 창립 - 1925년 5월 27일 하오 7시 삼산학교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서광훈의 사회 하에 신흥적 강령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정 ㆍ성북구락부 임원 : 부장 김동근(金東瑾, 삼산학교 교사), 총무 서광훈(삼산학교 교사), 재무 박성근(朴性根) 서기 고덕용(高德龍), 간사 김윤식(金潤植), 서광진(徐光鎭) - 1925년 6월 15일 임시총회에서 리(里)에 소방도구를 구비하고, 연전에 도난당한 상비상여를 구입하기로 결의 - 1925년 8월 8일 성북구락부원 임용이(林龍伊) 등은 만장일치로 허정숙, 권오설 등이 주도하는 사회주의계 청년단체인 한양청년연맹에 가입 - 1925 8월 13일 임시총회에서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서무부 서광훈 고덕룡, 재무부 박성근 서광진, 지육부 김동근, 체육부 서병태(徐丙泰) - 1926년 4월 25일 경성부 견지동 시천교회당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3주년 기념식에 성북구락부에서 축전 발송

  • 3·1운동 후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운동은 실력을 양성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오면 독립투쟁을 전개하겠다는 운동론이었다. 문화운동은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정신적 개조를 중시하여 삶의 양식인 문화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실현 방법으로 청년·여성·소년·농민·노동·학생운동 등의 부문운동과 교육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따라 성북구에서도 1920년대 청년운동과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지역의 추진단체는 성북동의 성북구락부였다. 성북구락부는 1923년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徐光勳) 등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친목단체·계몽단체로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925년 5월 27일 삼산학교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강령을 통과시키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당시 임원으로는 부장 김동근(金東瑾, 삼산학교 교사), 총무 서광훈(삼산학교 교사), 재무 박성근(朴性根), 서기 고덕룡(高德龍), 간사 김윤식(金潤植), 소광진(徐光鎭) 등이 있었다. 1925 8월 13일 임시총회에서는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서무부 서광훈 고덕룡, 재무부 박성근 서광진, 지육부 김동근, 체육부 서병태(徐丙泰)로 임원을 변경하였다. 성북구락부는 사회주의계 단체와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1925년 8월 8일 성북구락부는 만장일치로 허정숙, 권오설 등이 주도하는 화요회계의 사회주의계 청년단체인 한양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북구락부는 백정들이 평등한 대우를 실현하려고 조직한 형평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서광훈이 형평사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고, 1926년 4월 25일 경성부 견지동 시천교회당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3주년 기념식에 축전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3·1운동 후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문화운동이 전개되었다. 문화운동은 실력을 양성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기회가 오면 독립투쟁을 전개하겠다는 운동론이었다. 문화운동은 실력양성의 방법으로 정신적 개조를 중시하여 삶의 양식인 문화를 바꿈으로써 새로운 인간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실현 방법으로 청년·여성·소년·농민·노동·학생운동 등의 부문운동과 교육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 따라 성북구에서도 1920년대 청년운동과 교육운동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지역의 추진단체는 성북동의 성북구락부였다. 성북구락부는 1923년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徐光勳) 등의 주도로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친목단체·계몽단체로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925년 5월 27일 삼산학교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강령을 통과시키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당시 임원으로는 부장 김동근(金東瑾, 삼산학교 교사), 총무 서광훈(삼산학교 교사), 재무 박성근(朴性根), 서기 고덕룡(高德龍), 간사 김윤식(金潤植), 소광진(徐光鎭) 등이 있었다. 1925 8월 13일 임시총회에서는 회장제를 위원제로 변경하고 서무부 서광훈 고덕룡, 재무부 박성근 서광진, 지육부 김동근, 체육부 서병태(徐丙泰)로 임원을 변경하였다. 성북구락부는 사회주의계 단체와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1925년 8월 8일 성북구락부는 만장일치로 허정숙, 권오설 등이 주도하는 화요회계의 사회주의계 청년단체인 한양청년연맹에 가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북구락부는 백정들이 평등한 대우를 실현하려고 조직한 형평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서광훈이 형평사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였고, 1926년 4월 25일 경성부 견지동 시천교회당에서 개최된 형평사 창립 3주년 기념식에 축전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 1923년-성북구락부 조직

    1923년-성북구락부 조직

  • ○ 성북구락부의 활발한 대중운동과 서광훈 의열단을 비롯한 여러 무장단체들이 일본에 대해 강력한 저항을 이어나가는 동안 성북구에서는 대중운동 또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923년 창립돼 청년운동과 교육운동 등의 대중운동을 이끈 성북구락부가 그 중심에 있었지요. 처음에는 친목단체이자 계몽단체로 두드러진 활동이 없던 성북구락부는 1925년 사회주의계 청년단체인 한양청년연맹에 가입하면서 전보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마을 공용 소방구를 구입하고 도난당한 상비상여 재구입을 하는 등 마을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삼산학교 유지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 성북소년회 창립, 성북야학원설립 등 교육활동을 전개합니다. 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어린이들의 계몽을 위해 자매단체격인 성북소년회가 창립됩니다. 이에 어린이도 엄연히 인격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년운동이 진행됐습니다. 성북구락부의 활동은 신분차별폐지운동의 일환으로 백정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고자 일어난 형평운동으로까지 뻗어나갑니다. 이러한 성북 지역 대중운동의 중심에는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이 있었습니다. 성북구락부와 형평사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지요. 그는 신간회보다 1년 앞선 1926년 창립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활동한 민족유일당 항일운동단체인 고려혁명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성북구 지역과 관련한 사회주의단체 활동과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활동은 1930년대 이후 더욱 활발하고 본격적인 형태로 드러납니다.

    ○ 성북구락부의 활발한 대중운동과 서광훈 의열단을 비롯한 여러 무장단체들이 일본에 대해 강력한 저항을 이어나가는 동안 성북구에서는 대중운동 또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923년 창립돼 청년운동과 교육운동 등의 대중운동을 이끈 성북구락부가 그 중심에 있었지요. 처음에는 친목단체이자 계몽단체로 두드러진 활동이 없던 성북구락부는 1925년 사회주의계 청년단체인 한양청년연맹에 가입하면서 전보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마을 공용 소방구를 구입하고 도난당한 상비상여 재구입을 하는 등 마을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삼산학교 유지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고 성북소년회 창립, 성북야학원설립 등 교육활동을 전개합니다. 뿐만 아니라 1927년에는 어린이들의 계몽을 위해 자매단체격인 성북소년회가 창립됩니다. 이에 어린이도 엄연히 인격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년운동이 진행됐습니다. 성북구락부의 활동은 신분차별폐지운동의 일환으로 백정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고자 일어난 형평운동으로까지 뻗어나갑니다. 이러한 성북 지역 대중운동의 중심에는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이 있었습니다. 성북구락부와 형평사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지요. 그는 신간회보다 1년 앞선 1926년 창립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활동한 민족유일당 항일운동단체인 고려혁명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성북구 지역과 관련한 사회주의단체 활동과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활동은 1930년대 이후 더욱 활발하고 본격적인 형태로 드러납니다.

  • 일제강점기 성북동 청년들의 단결력은 어느 지역보다도 끈끈한 편이었다. 1923년 성북동에는 청년회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바로 ‘성북구락부(城北俱樂)’라는 단체였다. 성북구락부는 창립한 지 2년이 지난 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총무로 선임되었던 삼산학교 교사 서광훈(徐光勳, 1901~?)의 역할이 컸다.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성북구락부의 청년들은 마을에 필요한 공공사업이 있으면 논의를 통해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모아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마을 유지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해 소방도구와 도난당한 마을 상여를 구입하였고 운동기구도 마련했다. 여름철에는 밤늦게 물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한 피서객이 많아 주민들에게 방해가 되므로 이것을 금지하는 활동도 펼쳤다. 성북구락부는 마을의 공공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운동도 전개했다. 무엇보다 먼저 삼산학교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성북소년회’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성북야학원’을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가는 ‘무산어린이’들에게 무상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수업에 참가했다. 눈에 띄게 거창한 사업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성북구락부의 활동은 성북동 주민들의 삶에 은근한 활력을 주었다. 성북동의 청년들은 주민들의 생활에 무엇이 필요한지 점검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차근차근 해결점을 찾아 실행에 옮겼다. 이점을 생각할 때 1920년대 활동했던 성북구락부의 존재는 갈수록 이웃 간 벽이 높아져 가는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기억이자 후세에 물려줄 빛나는 자산임에 틀림없다. (성북문화원 향토사연구팀)

    일제강점기 성북동 청년들의 단결력은 어느 지역보다도 끈끈한 편이었다. 1923년 성북동에는 청년회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바로 ‘성북구락부(城北俱樂)’라는 단체였다. 성북구락부는 창립한 지 2년이 지난 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총무로 선임되었던 삼산학교 교사 서광훈(徐光勳, 1901~?)의 역할이 컸다.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영향을 받은 성북구락부의 청년들은 마을에 필요한 공공사업이 있으면 논의를 통해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모아 사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마을 유지로부터 의연금을 모집해 소방도구와 도난당한 마을 상여를 구입하였고 운동기구도 마련했다. 여름철에는 밤늦게 물놀이를 하거나 술에 취한 피서객이 많아 주민들에게 방해가 되므로 이것을 금지하는 활동도 펼쳤다. 성북구락부는 마을의 공공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운동도 전개했다. 무엇보다 먼저 삼산학교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성북소년회’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성북야학원’을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가는 ‘무산어린이’들에게 무상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여기에는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수업에 참가했다. 눈에 띄게 거창한 사업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성북구락부의 활동은 성북동 주민들의 삶에 은근한 활력을 주었다. 성북동의 청년들은 주민들의 생활에 무엇이 필요한지 점검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차근차근 해결점을 찾아 실행에 옮겼다. 이점을 생각할 때 1920년대 활동했던 성북구락부의 존재는 갈수록 이웃 간 벽이 높아져 가는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기억이자 후세에 물려줄 빛나는 자산임에 틀림없다. (성북문화원 향토사연구팀)

이 이야기를 응원해요 28

이야기를

으로 공유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