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훈

  • 徐光勳, 서명복(徐明福)
  • 사회운동
  • 1901.10.17 - ?
  • 성북동 관련 독립운동가이자 성북구락부에서 활동한 인물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이다. 성북구락부의 총무를 담당하였다. 성북리 173번지에 거주하였고, 성북구락부 임시총회의 임시의장이나 회의의 사회를 담당하였다. 1922년에 성북리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24년에 사회운동단체였던 형평사 서기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때 그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25년 이후 성북리를 떠나 활동하게 되지만 성북구락부는 성북리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근거자료

  • 1923년 당시 성북리에는 청년회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다. 이 조직은 ‘성북구락부城北俱樂部’라고 불렸다. 성북구락부는 1923년에 조직되었다. 하지만 초기 활동은 매우 미미했다. 창립한 지 2년이 지난 후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7월 27일 임시총회를 열고 부장 및 임원진을 선정했다. 당시 선정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부장 : 김동근金東瑾, 총무 : 서광훈徐光勳, 재무 : 박성근朴性根, 서기 : 고덕룡高德龍, 간사 : 김윤식金潤植 이 중 성북구락부를 이끌어간 사람은 총무 직에 선임된 서광훈이었다. 서광훈은 성북구락부 임시총회의 임시의장이었으며 성북구락부가 개최하는 회의의 사회를 도맡아 했다. 성북구락부의 부흥을 이끌었고, 조직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서광훈에 대해서 알아보자. 서광훈의 생년월일은 1901년 10월 17일이다. 성북구락부의 임시총회가 열렸던 당시 그는 25세의 젊은 청년이었으며, 성북리 173번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학력을 보면 1913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오성학교, 철원 잠업견습소를 졸업했다. 이후 평강면平康面 서기가 되었는데 1년 후 사직하고 역 앞에서 운송점을 개업했다. 1922년에 성북리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서광훈의 이력 중 독특한 점은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였던 형평사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1924년 서광훈은 형평사 서기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제 당국에서는 서광훈에 대해 “영리하고 사회주의적 언사를 일삼고 형평운동에 관여하여 다른 사람을 선동할 우려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고 경계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 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 때 서광훈의 역할이 컸다. 서광훈은 자산이 없어서 매우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북구락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성북동의 청년들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청년조직을 결성하고 마을의 일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광훈은 1925년 이후 성북동을 떠나 활동하게 되지만 성북구락부는 성북리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1923년 당시 성북리에는 청년회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다. 이 조직은 ‘성북구락부城北俱樂部’라고 불렸다. 성북구락부는 1923년에 조직되었다. 하지만 초기 활동은 매우 미미했다. 창립한 지 2년이 지난 후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7월 27일 임시총회를 열고 부장 및 임원진을 선정했다. 당시 선정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부장 : 김동근金東瑾, 총무 : 서광훈徐光勳, 재무 : 박성근朴性根, 서기 : 고덕룡高德龍, 간사 : 김윤식金潤植 이 중 성북구락부를 이끌어간 사람은 총무 직에 선임된 서광훈이었다. 서광훈은 성북구락부 임시총회의 임시의장이었으며 성북구락부가 개최하는 회의의 사회를 도맡아 했다. 성북구락부의 부흥을 이끌었고, 조직의 활동의 중심에 있었던 서광훈에 대해서 알아보자. 서광훈의 생년월일은 1901년 10월 17일이다. 성북구락부의 임시총회가 열렸던 당시 그는 25세의 젊은 청년이었으며, 성북리 173번지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학력을 보면 1913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오성학교, 철원 잠업견습소를 졸업했다. 이후 평강면平康面 서기가 되었는데 1년 후 사직하고 역 앞에서 운송점을 개업했다. 1922년에 성북리에 있던 삼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서광훈의 이력 중 독특한 점은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였던 형평사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1924년 서광훈은 형평사 서기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제 당국에서는 서광훈에 대해 “영리하고 사회주의적 언사를 일삼고 형평운동에 관여하여 다른 사람을 선동할 우려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고 경계했다. 성북구락부는 1925년 8월 8일 총회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조직인 한양청년 동맹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 때 서광훈의 역할이 컸다. 서광훈은 자산이 없어서 매우 곤란한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북구락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성북동의 청년들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청년조직을 결성하고 마을의 일을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광훈은 1925년 이후 성북동을 떠나 활동하게 되지만 성북구락부는 성북리에서 지속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 성북구락부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던 서광훈과 재무를 담당했던 김동근은 삼산학교에서 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동리 유력청년 수 명이 침식을 잊어가면서 눈물 섞인 열정으로 삼산학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성북구락부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던 서광훈과 재무를 담당했던 김동근은 삼산학교에서 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동리 유력청년 수 명이 침식을 잊어가면서 눈물 섞인 열정으로 삼산학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 1928년 3월 성북소년회 야학원의 진급식이 있었다. 우등으로 진급한 여자부 학생의 이름은 김아지金阿只였는데 그는 성북구락부 서광훈의 어머니였다.

    1928년 3월 성북소년회 야학원의 진급식이 있었다. 우등으로 진급한 여자부 학생의 이름은 김아지金阿只였는데 그는 성북구락부 서광훈의 어머니였다.

  • ○ 형평사 운동 / 고려혁명당 ·성북소년회, 형평사 운동, 고려혁명당 활동 ·1903년 10월 17일생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1922년 성북리 삼산학교 교사로 활동 ·1924년 형평사 서기, 1926년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정되어 활동하는 한편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 正衛團 총무로 활동 ·1927년 1월 19일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체포, 1928년 무죄로 석방 ·1932년 형평사 내에서 『농인』이란 잡지를 발간 ·1933년 형평사 내에 공산주의적 전위동맹을 설립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년간 신문을 받으면서 옥고를 치렀으나 1936년 무죄로 석방

    ○ 형평사 운동 / 고려혁명당 ·성북소년회, 형평사 운동, 고려혁명당 활동 ·1903년 10월 17일생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1922년 성북리 삼산학교 교사로 활동 ·1924년 형평사 서기, 1926년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정되어 활동하는 한편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 正衛團 총무로 활동 ·1927년 1월 19일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체포, 1928년 무죄로 석방 ·1932년 형평사 내에서 『농인』이란 잡지를 발간 ·1933년 형평사 내에 공산주의적 전위동맹을 설립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년간 신문을 받으면서 옥고를 치렀으나 1936년 무죄로 석방

  •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이름: 서광훈 주소(당시):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3-1 비고: 번지 이하 추정

    5. 성북동 독립운동가 주소지 ○ 민족주의 계열 이름: 서광훈 주소(당시):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주소(현재):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3-1 비고: 번지 이하 추정

  • 원적 및 주소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삼산학교 교사, 1924년 형평사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6년 길림에서 정의부, 천도교연합회, 형평사가 삼각동맹으로 조직한 고려혁명당의 조직 확장에 간여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면소로 풀려났다.

    원적 및 주소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삼산학교 교사, 1924년 형평사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926년 길림에서 정의부, 천도교연합회, 형평사가 삼각동맹으로 조직한 고려혁명당의 조직 확장에 간여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면소로 풀려났다.

  • 본적: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주소: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계열과 단체: 형평사, 고려혁명당 <활동 내용> 1913년 3월 3일 於義洞공립보통학교 졸업한 후 上星學校에서 2학년 동안 수업을 받았고, 1916년 철원잠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917년 11월 평강면 서기가 되어 활동하다 1918년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평강역전에서 운송점을 개업하였다. 1922년 성북리 三山學校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형평사 서기, 1926년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정되어 활동하는 한편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 正衛團 총무로 활동하였다. 이 외에 북풍회, 신흥청년회 등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19일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1928년 무죄로 석방되었다. 1932년 형평사 내에서 『농인』이란 잡지를 발간하였다. 1933년 형평사 내에 공산주의적 전위동맹을 설립한 혐의로 전라도 광주서에 체포되어 수년간 신문을 받으면서 옥고를 치렀으나 1936년 무죄로 석방되었다. <특이사항> 직업 평강면 서기, 운송업, 학교 교사. 신장 5척 2촌. 안색은 흑, 中肉. 이명 徐明福 <참고문헌> 『倭政時代人物史料』 1권, 111-112쪽. 『조선중앙일보』 1933.8.2., 2면 1단 <형평비밀결사사건>. 『조선중앙일보』 1936.3.21., 2면 5단 <형평사공청사건, 13명에 무죄 언도>. 『조선일보』 1936.11.22., (대구복십법원 판결, 전원 무죄 석방).

    본적: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주소: 고양군 숭인면 성북동 173번지. 계열과 단체: 형평사, 고려혁명당 <활동 내용> 1913년 3월 3일 於義洞공립보통학교 졸업한 후 上星學校에서 2학년 동안 수업을 받았고, 1916년 철원잠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917년 11월 평강면 서기가 되어 활동하다 1918년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평강역전에서 운송점을 개업하였다. 1922년 성북리 三山學校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형평사 서기, 1926년 형평사 집행위원에 선정되어 활동하는 한편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 正衛團 총무로 활동하였다. 이 외에 북풍회, 신흥청년회 등에도 참여하였다. 1927년 1월 19일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1928년 무죄로 석방되었다. 1932년 형평사 내에서 『농인』이란 잡지를 발간하였다. 1933년 형평사 내에 공산주의적 전위동맹을 설립한 혐의로 전라도 광주서에 체포되어 수년간 신문을 받으면서 옥고를 치렀으나 1936년 무죄로 석방되었다. <특이사항> 직업 평강면 서기, 운송업, 학교 교사. 신장 5척 2촌. 안색은 흑, 中肉. 이명 徐明福 <참고문헌> 『倭政時代人物史料』 1권, 111-112쪽. 『조선중앙일보』 1933.8.2., 2면 1단 <형평비밀결사사건>. 『조선중앙일보』 1936.3.21., 2면 5단 <형평사공청사건, 13명에 무죄 언도>. 『조선일보』 1936.11.22., (대구복십법원 판결, 전원 무죄 석방).

  • 이러한 성북 지역 대중운동의 중심에는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이 있었습니다. 성북구락부와 형평사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지요. 그는 신간회보다 1년 앞선 1926년 창립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활동한 민족유일당 항일운동단체인 고려혁명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성북 지역 대중운동의 중심에는 삼산학교 교사였던 서광훈이 있었습니다. 성북구락부와 형평사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지요. 그는 신간회보다 1년 앞선 1926년 창립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 활동한 민족유일당 항일운동단체인 고려혁명당의 당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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