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의숙

  • 三山義塾, 삼산학교, 삼산국민학교, 경성성북공립초등학교
  • 문화운동
  • 1908.05.28 - 1942.02
  • 일제강점기 성북동의 교육시설, 성북초등학교의 전신

성북구 선잠로 12-11(성북동 55-1)에 있었던 교육시설이다. 성북초등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1908년 김수영과 황수연의 발의로 설립하고, 성북동에 있었던 민영환의 별장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고종의 호종내관이었던 황수연이 학교의 재정을 뒷받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16년 황수연이 사망한 이후부터는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후원으로 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로부터 공식 학교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939년 6년제 소학교로 승격되었다가 1942년 공립국민학교로 전환되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공립학교로 승격되었고, 이름을 ‘경성성북공립국민학교’로 변경하였다. 1996년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국민학교’ 이름의 폐기에 따라 ‘서울성북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 삼산학교(三山學校)와 숭인면부호(崇仁面富豪), 1925.03.09

    삼산학교(三山學校)와 숭인면부호(崇仁面富豪), 1925.03.09

  • 순회탐방(巡廻探訪) 이백십팔(二百十八) 경기(京畿)의 수군(首郡)이오 경성(京城)의 번병(藩屛) <8>, 1927.02.05

    순회탐방(巡廻探訪) 이백십팔(二百十八) 경기(京畿)의 수군(首郡)이오 경성(京城)의 번병(藩屛) <8>, 1927.02.05

  • 교실(敎室)에 난로(暖爐)업서 이백생도고경(二百生徒苦境), 1928.12.13

    교실(敎室)에 난로(暖爐)업서 이백생도고경(二百生徒苦境), 1928.12.13

  • 삼산교(三山校)에 서광(曙光), 1928.12.17

    삼산교(三山校)에 서광(曙光), 1928.12.17

  • 이씨(李氏)의 미거(美擧), 1929.01.30

    이씨(李氏)의 미거(美擧), 1929.01.30

  • 운근(運勤), 1930.10.11

    운근(運勤), 1930.10.11

  • 성북리삼산교(城北里三山校) 보교(普校)로 승격(昇格), 1931.02.22

    성북리삼산교(城北里三山校) 보교(普校)로 승격(昇格), 1931.02.22

  • 삼산교운동회(三山校運動會), 1933.10.16

    삼산교운동회(三山校運動會), 1933.10.16

  • 삼산학교학예회(三山學校學藝會), 1933.12.03

    삼산학교학예회(三山學校學藝會), 1933.12.03

  • 삼산학교승격문제(三山學校昇格問題)로 후원회측(後援會側)에서 궐기(蹶起) 기지기부운동(基地寄附運動)에 반대(反對), 1938.12.08

    삼산학교승격문제(三山學校昇格問題)로 후원회측(後援會側)에서 궐기(蹶起) 기지기부운동(基地寄附運動)에 반대(反對), 1938.12.08

  • 교주(校主) 강진구씨(姜振九氏) 책임경영(責任經營)을 성명(聲明), 1938.12.12

    교주(校主) 강진구씨(姜振九氏) 책임경영(責任經營)을 성명(聲明), 1938.12.12

  • 재건(再建)의 삼산학교(三山學校), 1939.01.29

    재건(再建)의 삼산학교(三山學校), 1939.01.29

  • 삼산교동창회(三山校同窓會), 1939.03.18

    삼산교동창회(三山校同窓會), 1939.03.18

  • 삼산의숙(三山義塾)의 장래(將來), 1918.01.29

    삼산의숙(三山義塾)의 장래(將來), 1918.01.29

  • 삼산교부형회(三山校父兄會), 1924.07.01

    삼산교부형회(三山校父兄會), 1924.07.01

  • 20년[廿年]내력사(來歷史)깁흔 삼산학교확충(三山學校擴充), 1930.03.28

    20년[廿年]내력사(來歷史)깁흔 삼산학교확충(三山學校擴充), 1930.03.28

  • 삼산교확장(三山校擴張), 1930.03.29

    삼산교확장(三山校擴張), 1930.03.29

  • 성북동(城北洞)의 명촉(明燭), 황봉시의 아름다운 일, 1912.03.29

    성북동(城北洞)의 명촉(明燭), 황봉시의 아름다운 일, 1912.03.29

  • 삼산창립(三山刱立), 1908.07.18

    삼산창립(三山刱立), 1908.07.18

  • 삼산의숙 터 안내판 , 2020.01.17

    삼산의숙 터 안내판 , 2020.01.17

  • 서울성북초등학교(1971), 1971

    서울성북초등학교(1971), 1971

근거자료

  • 성북구락부는 마을의 공공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1908년에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성북구락부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던 서광훈과 재무를 담당했던 김동근은 삼산학교에서 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동리 유력청년 수 명이 침식을 잊어가면서 눈물 섞인 열정으로 삼산학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성북구락부는 마을의 공공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먼저 1908년에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성북구락부의 재건에 큰 역할을 했던 서광훈과 재무를 담당했던 김동근은 삼산학교에서 활동을 했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동리 유력청년 수 명이 침식을 잊어가면서 눈물 섞인 열정으로 삼산학교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 이신구가 성북리의 구장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구장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메이지대학 출신에 고등보통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점이 기본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에 더하여 지역 학교였던 삼산학교를 살려내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삼산학교는 지역 청년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빠져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신구는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신구의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이 신문기사에서는 이신구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인물로 묘사했다. 이신구가 성북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주민 대표직을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경력과 함께 마을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능력과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신구가 성북리의 구장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구장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메이지대학 출신에 고등보통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점이 기본적으로 작용했다. 이것에 더하여 지역 학교였던 삼산학교를 살려내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삼산학교는 지역 청년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에 빠져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신구는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신구의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이 신문기사에서는 이신구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인물로 묘사했다. 이신구가 성북동이라는 지역사회에서 주민 대표직을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경력과 함께 마을의 현안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지역사회에 능력과 공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 4.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기관 '삼산학교' 1908년 삼산의숙의 설립과 황수연 현재 성북구 지역 내에는 6개의 종합대학교와 14개의 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문 교육기관이 많은데 이것은 성북구 지역민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북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학교는 성북리에 위치했던 사립 삼산학교三山學校였다. 이 학교의 설립과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성북지역민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역주민운동에 대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교육에 있어서도 근대교육에 입각한 새로운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요청에 의해 정부에서는 동문학, 육영공원 등을 설립했다. 1895년에는 소학교령, 소학교 규칙대강 등이 지정되었고, 1899년에는 중학교관제 등이 제정되었다. 정부에서 세우는 학교 외에도 당시 사회의 요청에 의해민간인에 의해 사립학교들도 세워졌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1910년 국권을 상실하기 전까지 3,000여 개에 달하는 사립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황성신문』은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만들어진 사립학교의 수가 무려 3,000여 개에 달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1908년 현재의 성북동 지역에도 학교가 만들어졌다. 설립 당시 이 학교의 이름은 삼산의숙三山義塾이었으며, 현재 성북동에 있는 성북초등학교의 기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삼산의숙의 이름은 1910년대 『매일신보』에서는 삼산의숙라고 지칭했으며, 1920년대~30년대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는 삼산학교라고 했다. 삼산의숙은 1908년 성북동에 거주했던 김수영金洙榮의 발의로 만들어졌다. 학교 설립의 목적은 지역 청년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김수영은 교육이 중요해지는 시기에 성북동에 교육을 할 수 없는 기관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물을 양성하기 위해 삼산의숙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04년 이후 대한제국에는 전국에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만들어졌다. 수천 개를 헤아리는 사립학교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삼산의숙이 만들어졌던 1908년은대한제국의 국가체제가 흔들리는 시기였다. 이에 따라 학교설립이라는 공공사업은 국가제도의 틀 밖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설립된 사립학교의 운영은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사람의 후원으로 유지되는 경우, 향교나 서원의 재산 같은 공공재산으로 유지되는 경우, 잡세 징수와 같은 지방 공공재정을 통해 운영되는 경우가 있었다. 삼산의숙의 재정 확충과 운영 방식은 개인과 지역사람들의 일부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삼산의숙의 발의는 김수영이 했지만 실제 학교운영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봉시奉侍 황수연黃壽延이었다. 삼산의숙은 황수연의 지원과 지역 유력자들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1908년에 있었던 소풍 비용을 황수연이 부담했으며, 성북동 노인계老人契에서 공책 및 연필을 제공했다. 또한 삼학의숙 교사였던 이윤희李允熙는 연필을 제공했다. 황수연은 자신의 집에 학생 70여 명이 방문하자 공책과 연필을 제공했다. 삼산의숙은 학령아동을 가르치는 주학과晝學科와 노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과夜學科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야학과는 활동시간의 어려움으로 적절한 선생을 구하기 어려웠다. 이에 결국 야학과는 폐지되게 되었고 주학과만 운영되게 되었다. 당시 삼산의숙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던 학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완순군 이재완이 삼산의숙에 부채 81개를 기부했다는 기사가 있다.

    4. 무산아동을 위한 교육기관 '삼산학교' 1908년 삼산의숙의 설립과 황수연 현재 성북구 지역 내에는 6개의 종합대학교와 14개의 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문 교육기관이 많은데 이것은 성북구 지역민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북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학교는 성북리에 위치했던 사립 삼산학교三山學校였다. 이 학교의 설립과 운영과정을 살펴보면 성북지역민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역주민운동에 대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교육에 있어서도 근대교육에 입각한 새로운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요청에 의해 정부에서는 동문학, 육영공원 등을 설립했다. 1895년에는 소학교령, 소학교 규칙대강 등이 지정되었고, 1899년에는 중학교관제 등이 제정되었다. 정부에서 세우는 학교 외에도 당시 사회의 요청에 의해민간인에 의해 사립학교들도 세워졌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1910년 국권을 상실하기 전까지 3,000여 개에 달하는 사립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황성신문』은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만들어진 사립학교의 수가 무려 3,000여 개에 달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의해 1908년 현재의 성북동 지역에도 학교가 만들어졌다. 설립 당시 이 학교의 이름은 삼산의숙三山義塾이었으며, 현재 성북동에 있는 성북초등학교의 기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삼산의숙의 이름은 1910년대 『매일신보』에서는 삼산의숙라고 지칭했으며, 1920년대~30년대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는 삼산학교라고 했다. 삼산의숙은 1908년 성북동에 거주했던 김수영金洙榮의 발의로 만들어졌다. 학교 설립의 목적은 지역 청년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김수영은 교육이 중요해지는 시기에 성북동에 교육을 할 수 없는 기관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물을 양성하기 위해 삼산의숙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1904년 이후 대한제국에는 전국에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만들어졌다. 수천 개를 헤아리는 사립학교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삼산의숙이 만들어졌던 1908년은대한제국의 국가체제가 흔들리는 시기였다. 이에 따라 학교설립이라는 공공사업은 국가제도의 틀 밖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당시 설립된 사립학교의 운영은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사람의 후원으로 유지되는 경우, 향교나 서원의 재산 같은 공공재산으로 유지되는 경우, 잡세 징수와 같은 지방 공공재정을 통해 운영되는 경우가 있었다. 삼산의숙의 재정 확충과 운영 방식은 개인과 지역사람들의 일부 지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삼산의숙의 발의는 김수영이 했지만 실제 학교운영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은 봉시奉侍 황수연黃壽延이었다. 삼산의숙은 황수연의 지원과 지역 유력자들의 지원에 의해 운영되었다. 1908년에 있었던 소풍 비용을 황수연이 부담했으며, 성북동 노인계老人契에서 공책 및 연필을 제공했다. 또한 삼학의숙 교사였던 이윤희李允熙는 연필을 제공했다. 황수연은 자신의 집에 학생 70여 명이 방문하자 공책과 연필을 제공했다. 삼산의숙은 학령아동을 가르치는 주학과晝學科와 노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야학과夜學科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야학과는 활동시간의 어려움으로 적절한 선생을 구하기 어려웠다. 이에 결국 야학과는 폐지되게 되었고 주학과만 운영되게 되었다. 당시 삼산의숙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던 학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선대원군의 조카인 완순군 이재완이 삼산의숙에 부채 81개를 기부했다는 기사가 있다.

  • 1910년대 삼산학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학교교육에 관한 방침은 크게 네 차례에 걸쳐 바뀌었다. 이것은 교육령이 개정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먼저1911년에 발표된 「조선교육령」을 기반으로 식민지 교육제도가 정비되었다. 보통학교(3, 4년), 고등보통학교(4년), 여자고등보통학교(3년), 실업학교(2, 3년) 등이 설치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922년에 두 번째로 교육령이 개정되었다. 이때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이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고 폐지되었던 한국어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1938년에는 3번째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었다. 이 교육령의 핵심은 모든 교육내용에서 일본적인 것을 강화하고 일본어로 수업하는 등, 철저한 황국신민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학교들의 명칭도 바뀌게 되었다. 보통학교는 심상소학교,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는 고등여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것은 일본인 학교와 명칭이 같게 된 것이었다. 1941년에는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43년에는 네 번째 조선교육령인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에 의하여 일제는 한국 내에서의 교육을 철저히 전시교육체제戰時敎育體制로 바꾸고 학교교육을 전쟁의 도구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삼산학교는 성북동 지역사회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지면서 운영되었다. 이와 함께 삼산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교육 정책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했다. 1910년대 일제의 학교정책은 대한제국기에 형성된 교육적 제도와 시설, 기능과 인력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사립학교 중 일부만을 선별하여 식민지 교육체계인 공립보통학교로 편입시켰다. 대부분의 사립학교들은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지역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던 사립학교 교육은 부정되었다. 또한 일제는 향교재산 등 사립학교의 재정적 기반이 되는 것들을 박탈했다. 사립학교의 중요한 재원 중 하나였던 토지의 경우를 살펴보자.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향교 등을 법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향교재산의 소유권은 향교의 명의가 아닌 개인명의로 토지대장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공동재산이었던 향교의 재산이 개인소유로 되면서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향교재산 등과 같이 공동소유였던 재산을 재정기반으로 한 사립학교의 운영은 매우 어려워졌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되었던 지역 학교들이 모두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 단위로 성립하였던 학교들은 일부는 사립 각종학교로, 또 일부는 서당으로 허가를 얻어 ‘강습소’ 형태로 존속하게 되었다. 삼산의숙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사립 각종학교로 존속한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사립각종학교는 사립소학교, 사립보통학교, 사립중학교, 사립고등보통학교, 사립고등여학교, 사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립실업학교 및 사립전문학교 이외의 비정규 사립학교였다. 삼산의숙은 황수연이라는 개인과 일부 지역사람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일본에 병합된 1910년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삼산의숙은 전적으로 황수연에 의해 유지되었다. 1912년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황수연은 삼산의숙 재학생 60여 명을 인솔하여 인천항으로 소풍을 갔는데 경비 일체를 그가 부담했다. 또한 황수연은 자신의 비용으로 학교를 설립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삼산의숙에서는 무상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수연은 삼산의숙을 정식공립보통학교와 동일한 설비와 제도를 갖추고 운영하려고 했다. 삼산의숙의 첫 졸업생은 1912년에 배출되었다. 삼산의숙의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학교의 운영을 도맡아 했던 황수연이 1916년 별세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17년부터 학교 운영자금이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성북리 사람들은 삼산의숙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성북리에는 세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십장이었던 홍태윤洪泰潤을 중심으로 얼마 씩을 걷어서 학교 경비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삼산의숙은 이와 같이 개인의 노력과 지역민들의 노력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고 있었다.

    1910년대 삼산학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학교교육에 관한 방침은 크게 네 차례에 걸쳐 바뀌었다. 이것은 교육령이 개정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먼저1911년에 발표된 「조선교육령」을 기반으로 식민지 교육제도가 정비되었다. 보통학교(3, 4년), 고등보통학교(4년), 여자고등보통학교(3년), 실업학교(2, 3년) 등이 설치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922년에 두 번째로 교육령이 개정되었다. 이때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이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고 폐지되었던 한국어가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 1938년에는 3번째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었다. 이 교육령의 핵심은 모든 교육내용에서 일본적인 것을 강화하고 일본어로 수업하는 등, 철저한 황국신민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학교들의 명칭도 바뀌게 되었다. 보통학교는 심상소학교,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는 고등여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것은 일본인 학교와 명칭이 같게 된 것이었다. 1941년에는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43년에는 네 번째 조선교육령인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령」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에 의하여 일제는 한국 내에서의 교육을 철저히 전시교육체제戰時敎育體制로 바꾸고 학교교육을 전쟁의 도구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삼산학교는 성북동 지역사회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지면서 운영되었다. 이와 함께 삼산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교육 정책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했다. 1910년대 일제의 학교정책은 대한제국기에 형성된 교육적 제도와 시설, 기능과 인력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사립학교 중 일부만을 선별하여 식민지 교육체계인 공립보통학교로 편입시켰다. 대부분의 사립학교들은 이 과정에서 배제되었고 지역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던 사립학교 교육은 부정되었다. 또한 일제는 향교재산 등 사립학교의 재정적 기반이 되는 것들을 박탈했다. 사립학교의 중요한 재원 중 하나였던 토지의 경우를 살펴보자.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향교 등을 법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향교재산의 소유권은 향교의 명의가 아닌 개인명의로 토지대장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공동재산이었던 향교의 재산이 개인소유로 되면서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향교재산 등과 같이 공동소유였던 재산을 재정기반으로 한 사립학교의 운영은 매우 어려워졌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되었던 지역 학교들이 모두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 단위로 성립하였던 학교들은 일부는 사립 각종학교로, 또 일부는 서당으로 허가를 얻어 ‘강습소’ 형태로 존속하게 되었다. 삼산의숙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사립 각종학교로 존속한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사립각종학교는 사립소학교, 사립보통학교, 사립중학교, 사립고등보통학교, 사립고등여학교, 사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립실업학교 및 사립전문학교 이외의 비정규 사립학교였다. 삼산의숙은 황수연이라는 개인과 일부 지역사람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일본에 병합된 1910년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삼산의숙은 전적으로 황수연에 의해 유지되었다. 1912년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황수연은 삼산의숙 재학생 60여 명을 인솔하여 인천항으로 소풍을 갔는데 경비 일체를 그가 부담했다. 또한 황수연은 자신의 비용으로 학교를 설립했으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삼산의숙에서는 무상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수연은 삼산의숙을 정식공립보통학교와 동일한 설비와 제도를 갖추고 운영하려고 했다. 삼산의숙의 첫 졸업생은 1912년에 배출되었다. 삼산의숙의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학교의 운영을 도맡아 했던 황수연이 1916년 별세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17년부터 학교 운영자금이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성북리 사람들은 삼산의숙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성북리에는 세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십장이었던 홍태윤洪泰潤을 중심으로 얼마 씩을 걷어서 학교 경비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삼산의숙은 이와 같이 개인의 노력과 지역민들의 노력에 의해 설립되고 유지되고 있었다.

  • 1920년대 삼산학교 : 운영난 극복을 위한 노력 1920년대 삼산학교는 운영상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큰 이유는 운영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925년 3월 9일자 『동아일보』의 〈자유종自由鐘〉이라는 란에 삼산학교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렸다. 이 지면은 독자가 투고하는 글을 싣는 란이었다. ‘성북적천城北赤泉’이라는 가명을 쓴 사람이 삼산학교의 상황을 알리는 글을 투고했다. 이 기사의 시작 부분을 길지만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군아 보라! 배우겠다고 부르짖는 현재의 향학열을 보라.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여 애쓰는 저분들은 누구며, 제군과 같이 소작인의 작물을 가지고 금의옥식錦衣玉食으로 지내는 자는 누구인가. 각성하여라 다 같은 백의인으로 동족인 제군은 제14회의 졸업생을 내는 성북리 삼산학교에 대하여 한 점의 동정하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니 한심하지 아니한가. 전 교주 황수연씨가 죽은 뒤 성북리 주민의 열성과 숭인면 면장 김기택金基宅씨, 안응선安應善씨의 노심초사로 겨우 유지하였다. 김동근金東瑾씨의 노력과 10여 년간 변함없이 희생적 교편을 잡은 박명환朴明煥씨는 누구를 위함인가? 위의 기사에서 삼산학교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기가 높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학교의 운영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숭인면 면장과 일부 지역 사람들이 동분서주하며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산학교의 선생이었던 박명환은 무급이거나 매우 적은 봉급을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러한 사람들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기사에서 ‘제군’들로 표현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작인들의 작물을 가지고 사치스럽고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삼산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부 지역사람들과는 달리 학교의 운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사를 투고한 사람은 이들에게 각성할 것을 촉구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삼산학교에 동정을 보이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이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했다. 다른 사람이 구하여 줄자가 있는가. 의뢰심이 많은 제군아. 내 배만 불리려고 하는 제군아. 우리의 것을 우리가 구하여야 할 책임감이 있는 줄 모르는가? 생각해 보아라. 숭인보통학교 건축 당시에 다대한 금전을 각출하여도 군들의 의사에 적합하지 않은 산촌 궁벽한 곳에 지어졌음을 탄원 한마디 못하고 후회만 하지 않았는가? 교통이 편리한 삼산학교를 생각하고 동정의 눈물을 아끼지 말아라. 농촌생활의 향상과 무산계급발달을 위하여 있는 삼산교는 형체가 보일락말락하니 이것이 누구의 죄일까? 군들에게 일언을 고하니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고치고 우리 자제의 장래를 위한다면 일일이식一日二食을 하더라도 저 삼산교를 구제하여야 할 것이다. 투고자는 삼산학교는 성북리 지역 사람들이 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총독부가 보통학교를 지을 때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돈을 내었음에도 원하는 지역에 학교가 설립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일제는 1920년에서 1925년 사이 3면마다 보통학교 1개를 건설한다는 ‘3면1교’ 정책을 표방했다. 이러한 원칙을 따라 숭인면에 보통학교가 만들어졌다. 3개면에 1개의 보통학교가 설립되는 실정에서 숭인면에 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은 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성북동에 있는 부호들은 많은 돈을 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보통학교가 설립된 지역은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었고 이것은 기부금을 많이 낸 사람들의 의견과는 다른 것이었다. 삼산학교는 새로 설립된 보통학교에 비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인 성북리에 위치해 있었다. 기사를 투고한 성북적천은 이러한 삼산학교를 구하는 것은 지역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며 하루에 2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삼산학교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형체가 없어질 듯이 오리무중인 삼산학교를 위해 부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기사가 실렸던 시기인 1925년 이후에도 삼산학교의 운영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1927년 현재 삼산학교의 학생은 총 145명이었고 교장은 장인근張寅根이었다. 1928년 삼산학교의 어려운 상황이 신문에 다시 한 번 보도되었다. 20여 년간 수 백 명의 졸업생을 내면서 사회에 공헌한 삼산학교가 역경 속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보도한 기사였다. 당시 교육협성회의 윤갑병과 김동근의 주도로 운영되는 삼산학교는 위기를 맞이했다.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두 사람이 사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삼산학교는 폐지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성북리의 청년 몇 명이 열성을 가지고 삼산학교를 운영했다. 앞서 살펴본 서광훈 등이 주축이 된 성북구락부의 일원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삼산학교 학생과 선생들의 겨울나기의 어려움에 대해 보도했다. 12월 혹독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경비가 없어서 20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선생들이 불도 피우지 못한 교실에서 목불인견의 비참한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성북리에 부호들의 별장이 20여 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장을 가진 부호들은 삼산학교의 비운에는 냉담한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삼산학교의 존재 여부를 걱정하는 주민들의 근심이 매우 높아졌다. 이러한 주민들의 걱정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등장했다. 성북정회를 이끌었으며 후에 경성부의회 의원이 된 이신구였다. 이신구는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신구의 이러한 노력은 삼산학교 학부형들과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한편 경비가 부족해서 겨울철 불도 피우지 못한 삼산학교의 소식을 들은 이원우李元雨는 겨울철에 필요한 석탄을 제공했다. 이신구의 활동과 지역 사람들의 도움으로 삼산학교는 유지될 수가 있었다.

    1920년대 삼산학교 : 운영난 극복을 위한 노력 1920년대 삼산학교는 운영상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큰 이유는 운영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925년 3월 9일자 『동아일보』의 〈자유종自由鐘〉이라는 란에 삼산학교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렸다. 이 지면은 독자가 투고하는 글을 싣는 란이었다. ‘성북적천城北赤泉’이라는 가명을 쓴 사람이 삼산학교의 상황을 알리는 글을 투고했다. 이 기사의 시작 부분을 길지만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군아 보라! 배우겠다고 부르짖는 현재의 향학열을 보라.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여 애쓰는 저분들은 누구며, 제군과 같이 소작인의 작물을 가지고 금의옥식錦衣玉食으로 지내는 자는 누구인가. 각성하여라 다 같은 백의인으로 동족인 제군은 제14회의 졸업생을 내는 성북리 삼산학교에 대하여 한 점의 동정하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니 한심하지 아니한가. 전 교주 황수연씨가 죽은 뒤 성북리 주민의 열성과 숭인면 면장 김기택金基宅씨, 안응선安應善씨의 노심초사로 겨우 유지하였다. 김동근金東瑾씨의 노력과 10여 년간 변함없이 희생적 교편을 잡은 박명환朴明煥씨는 누구를 위함인가? 위의 기사에서 삼산학교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기가 높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학교의 운영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숭인면 면장과 일부 지역 사람들이 동분서주하며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산학교의 선생이었던 박명환은 무급이거나 매우 적은 봉급을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러한 사람들과 대조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기사에서 ‘제군’들로 표현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소작인들의 작물을 가지고 사치스럽고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삼산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부 지역사람들과는 달리 학교의 운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사를 투고한 사람은 이들에게 각성할 것을 촉구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삼산학교에 동정을 보이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이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했다. 다른 사람이 구하여 줄자가 있는가. 의뢰심이 많은 제군아. 내 배만 불리려고 하는 제군아. 우리의 것을 우리가 구하여야 할 책임감이 있는 줄 모르는가? 생각해 보아라. 숭인보통학교 건축 당시에 다대한 금전을 각출하여도 군들의 의사에 적합하지 않은 산촌 궁벽한 곳에 지어졌음을 탄원 한마디 못하고 후회만 하지 않았는가? 교통이 편리한 삼산학교를 생각하고 동정의 눈물을 아끼지 말아라. 농촌생활의 향상과 무산계급발달을 위하여 있는 삼산교는 형체가 보일락말락하니 이것이 누구의 죄일까? 군들에게 일언을 고하니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고치고 우리 자제의 장래를 위한다면 일일이식一日二食을 하더라도 저 삼산교를 구제하여야 할 것이다. 투고자는 삼산학교는 성북리 지역 사람들이 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총독부가 보통학교를 지을 때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돈을 내었음에도 원하는 지역에 학교가 설립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일제는 1920년에서 1925년 사이 3면마다 보통학교 1개를 건설한다는 ‘3면1교’ 정책을 표방했다. 이러한 원칙을 따라 숭인면에 보통학교가 만들어졌다. 3개면에 1개의 보통학교가 설립되는 실정에서 숭인면에 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은 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성북동에 있는 부호들은 많은 돈을 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보통학교가 설립된 지역은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었고 이것은 기부금을 많이 낸 사람들의 의견과는 다른 것이었다. 삼산학교는 새로 설립된 보통학교에 비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인 성북리에 위치해 있었다. 기사를 투고한 성북적천은 이러한 삼산학교를 구하는 것은 지역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며 하루에 2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삼산학교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형체가 없어질 듯이 오리무중인 삼산학교를 위해 부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기사가 실렸던 시기인 1925년 이후에도 삼산학교의 운영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1927년 현재 삼산학교의 학생은 총 145명이었고 교장은 장인근張寅根이었다. 1928년 삼산학교의 어려운 상황이 신문에 다시 한 번 보도되었다. 20여 년간 수 백 명의 졸업생을 내면서 사회에 공헌한 삼산학교가 역경 속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보도한 기사였다. 당시 교육협성회의 윤갑병과 김동근의 주도로 운영되는 삼산학교는 위기를 맞이했다.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두 사람이 사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삼산학교는 폐지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성북리의 청년 몇 명이 열성을 가지고 삼산학교를 운영했다. 앞서 살펴본 서광훈 등이 주축이 된 성북구락부의 일원들이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에서 삼산학교 학생과 선생들의 겨울나기의 어려움에 대해 보도했다. 12월 혹독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경비가 없어서 20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선생들이 불도 피우지 못한 교실에서 목불인견의 비참한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성북리에 부호들의 별장이 20여 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장을 가진 부호들은 삼산학교의 비운에는 냉담한 모습을 보인다고 비판했다. 삼산학교의 존재 여부를 걱정하는 주민들의 근심이 매우 높아졌다. 이러한 주민들의 걱정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되는 사람이 등장했다. 성북정회를 이끌었으며 후에 경성부의회 의원이 된 이신구였다. 이신구는 삼산학교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신구의 이러한 노력은 삼산학교 학부형들과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한편 경비가 부족해서 겨울철 불도 피우지 못한 삼산학교의 소식을 들은 이원우李元雨는 겨울철에 필요한 석탄을 제공했다. 이신구의 활동과 지역 사람들의 도움으로 삼산학교는 유지될 수가 있었다.

  • 1930년대 삼산학교 (1) : 6년제 승격운동, 보통학교로 변경 추진 1930년 현재 삼산학교는 4년제 사립각종학교였다. 당시 삼산학교의 학제는 학교 재학생들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이유는 삼산학교가 보통학교가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각종학교는 정규학교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많았다. 각종학교 졸업자는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 별도의 검정시험을 거쳐야 했다. 두 번째는 4년제 학교라는 점이었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었고, 이 법에 따라 보통학교의 교육연한이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보통학교의 6년제 승격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 이유는 4년제 학교는 6년제 학교와 교육과정에서 차이가 있었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졸업자격에 미달하였으므로 학부형과 학생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여 삼산학교의 학교 체제를 변화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주도한 사람은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고등사범과를 졸업했으며, 보성고보普成高普의 선생이었던 하윤실河允實이었다. 그는 1930년 3월 20일 삼산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교장이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쳤고 삼산학교의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하윤실의 그러한 활동은 성북리에 있던 일부 유지들의 후원을 이끌어냈다. 하윤실은 이러한 후원을 바탕으로 삼산학교를 새로운 학정체제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먼저 4년제였던 삼산학교를 6년제로 연장하려고 했다. 또한 학교 건물도 증축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하윤실의 아내였던 유명한 여류작가 김일엽金一葉 역시 스스로 삼산학교의 교편을 잡았다. 6년제로 학교를 개편하려는 노력과 함께 하윤실은 삼산학교를 각종학교에서 보통학교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그는 총독부에 삼산학교를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성북리의 인구가 늘고, 학교에 가야 하는 아동들이 많아졌으며, 시내 통학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하윤실의 적극적인 활동은 성북리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하윤실과 성북리 주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삼산학교는 보통학교로 승격되지 못했으며, 6년제 학교로도 개편되지 못했다. 1933년 4월 1일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삼산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로 1학년 1학급, 2학년 1학급, 3 · 4학년 합반 1개 학급이 있었다고 한다. 총 학생수는 약 48명이었다. 학생수가 1920년대에 비하여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4년제 사립각종학교를 졸업할 경우 상급학교로의 진학 등 여러 불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삼산학교의 6년제 학정체제로의 전환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6년제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경비 확보가 매우 중요했다. 학년연장에는 그에 상응하는 시설, 교원, 운영경비 등이 필요했다. 지방비 예산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자체적으로 교실증축비와 매년 경상비가 확보되어야 4년제에서 6년제로 승격이 가능했다. 삼산학교가 각종학교에서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한 과정 역시 매우 어려웠다. 각종학교가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해야 했다. 총독부는 이 서류를 검증한 후 전교생을 대상으로 학생들의 학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가 여부를 통보했다. 이와 같이 까다롭고 어려운 조건들로 인해 삼산학교의 체제 변화노력은 좌절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상황들은 삼산학교의 장래를 두고 내부 구성원 간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930년대 삼산학교 (1) : 6년제 승격운동, 보통학교로 변경 추진 1930년 현재 삼산학교는 4년제 사립각종학교였다. 당시 삼산학교의 학제는 학교 재학생들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이유는 삼산학교가 보통학교가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각종학교는 정규학교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에 어려움이 많았다. 각종학교 졸업자는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 별도의 검정시험을 거쳐야 했다. 두 번째는 4년제 학교라는 점이었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되었고, 이 법에 따라 보통학교의 교육연한이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보통학교의 6년제 승격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 이유는 4년제 학교는 6년제 학교와 교육과정에서 차이가 있었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졸업자격에 미달하였으므로 학부형과 학생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반영하여 삼산학교의 학교 체제를 변화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을 주도한 사람은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고등사범과를 졸업했으며, 보성고보普成高普의 선생이었던 하윤실河允實이었다. 그는 1930년 3월 20일 삼산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교장이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쳤고 삼산학교의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하윤실의 그러한 활동은 성북리에 있던 일부 유지들의 후원을 이끌어냈다. 하윤실은 이러한 후원을 바탕으로 삼산학교를 새로운 학정체제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먼저 4년제였던 삼산학교를 6년제로 연장하려고 했다. 또한 학교 건물도 증축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하윤실의 아내였던 유명한 여류작가 김일엽金一葉 역시 스스로 삼산학교의 교편을 잡았다. 6년제로 학교를 개편하려는 노력과 함께 하윤실은 삼산학교를 각종학교에서 보통학교로 승격시키려고 했다. 그는 총독부에 삼산학교를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성북리의 인구가 늘고, 학교에 가야 하는 아동들이 많아졌으며, 시내 통학에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하윤실의 적극적인 활동은 성북리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지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하윤실과 성북리 주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삼산학교는 보통학교로 승격되지 못했으며, 6년제 학교로도 개편되지 못했다. 1933년 4월 1일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삼산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로 1학년 1학급, 2학년 1학급, 3 · 4학년 합반 1개 학급이 있었다고 한다. 총 학생수는 약 48명이었다. 학생수가 1920년대에 비하여 줄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4년제 사립각종학교를 졸업할 경우 상급학교로의 진학 등 여러 불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삼산학교의 6년제 학정체제로의 전환은 매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6년제로 변경하기 위해서는 경비 확보가 매우 중요했다. 학년연장에는 그에 상응하는 시설, 교원, 운영경비 등이 필요했다. 지방비 예산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자체적으로 교실증축비와 매년 경상비가 확보되어야 4년제에서 6년제로 승격이 가능했다. 삼산학교가 각종학교에서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한 과정 역시 매우 어려웠다. 각종학교가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해야 했다. 총독부는 이 서류를 검증한 후 전교생을 대상으로 학생들의 학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인가 여부를 통보했다. 이와 같이 까다롭고 어려운 조건들로 인해 삼산학교의 체제 변화노력은 좌절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상황들은 삼산학교의 장래를 두고 내부 구성원 간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 1930년대 삼산학교 (2) : 공립학교 승격방법을 둘러싼 논란 1938년 12월 삼산학교 구성원들 간의 마찰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삼산학교를 공립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증하여 새로운 심상소학교의 모체가 되게 하자는 학교 당국자 측의 주장에 대해 삼산학교 설립자 측과 삼산학교유지후원회 및 성북정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일어난 논란이었다.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38년 12월 현재 지역주민들과 일부 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산학교는 여전히 사립보통학교로 남아 있었다. 이에 성북정 주민들과 삼산학교 학부형들은 삼산학교를 정식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삼산학교 유지후원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와중에 경성부에서 아동들을 위한 공립 심상소학교를 동소문 밖에 건설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으며, 새로운 학교의 위치는 돈암정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삼산학교의 행정을 담당했던 교무주임 이상봉과 교장 김홍규는 삼산학교 전체를 경성부에 기부하고 “삼산학교가 새롭게 돈암정에 건설되는 심상소학교의 모체가 되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현재 학교 예산으로는 자격 있는 학교를 승격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기회에 학교를 부 당국에 기부하여 새로운 학교의 모체가 되는 것이 학교의 장래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고 학부형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은 1938년 12월 4일 학부형회를 열었다. 하지만 학부형 회의는 잘 진행되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먼저 삼산학교 당국자들의 일관되지 않은 학교 기부 계획 설명 때문이었다. 학교 측에서는 학교를 기부한다는 목적을 손쉽게 진행시키기 위해 본회의에 앞서 학부형들을 만나 그들의 계획을 말하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설명하면서 다른 기준을 들어 설명했다. 즉 돈암정에 거주하고 있는 학부형에게는 삼산학교를 돈암정으로 이전할 것이며, 학교는 공립학교로 승격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성북정에 거주하는 학부형에게는 현 장소에 삼산학교는 계속 있을 것이며, 학교가 공립으로 승격될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석상에서 학교 측의 이러한 행동이 밝혀지면서 소란이 일어났다. 학교 측의 진의에 대한 질의가 이어졌으며 인신공격도 이루어졌다. 또한 삼산학교 설립자 측을 비난하는 의견도 나왔다. 회의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입회해 있던 경관에게 강제로 해산을 당하게 되었다.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한다는 계획에 대해 삼산학교 설립자측과 유지후원회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의 최종목적은 삼산학교를 자격 있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자는 사람들의 논리와 어느 정도 일치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는 성북정 지역사람들의 힘으로 자격 있는 학교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따라서 학교 교무주임이 설립자 측 및 후원회와 논의 없이 학교를 독단적으로 경성부에 기부해야 한다는 논의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려는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이사 1명과 성북정 총대가 12월 6일 오전에 경성부 학무과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학무과장에게 경성부가 새롭게 돈암정에 신설되는 심상소학교에 대한 예산에 삼산학교를 기부 받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학무과장은 “절대로 오는 봄에 신설하는 심상소학교와 삼산학교와는 별개 문제이며 이에 대하여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답변을 들은 후 유지후원회 이사와 성북정 총대는 학무과장에게 성북정의 인구가 매우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성북정에 심상소학교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며 삼산학교를 심상소학교로 승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학무과장과 면담을 마친 삼산학교유지후원회는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려는 계획에 대해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 돈암정에 새롭게 설립된 심상소학교는 삼산학교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삼산학교를 이 학교와 연계하여 설명하는 것은 학부형들을 기만하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이사장 하윤실은 매년 입학 학생들을 모집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삼산학교에 대해 힘을 다해 지원하고 키워가는 것이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삼산학교를 현 위치에 두고 이것을 기본으로 수 년 내에 심상소학교로 만들 것이며, 이것을 위한 경비를 마련할 곳도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의 입장에 대해 학교 설립자 측은 강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편 학부형회의가 종료된 후 성북정회와 삼산학교유지후원회에서는 성북정회사무소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자는 주장을 한 교장 김홍규와 교무주임 이상봉에게 사직권고서를 발송하기로 결정했다. 삼산학교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학교를 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측과 설립자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당시 학교의 교주였던 강진구姜振九는 12월 11일 삼산학교유지후원회와 학부형을 초대하고 삼산학교는 선조의 유업으로 설립된 곳으로, 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학교의 장소를 옮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래 훌륭한 학교로 만들기에 힘쓰겠다고 약속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30년대 삼산학교 (2) : 공립학교 승격방법을 둘러싼 논란 1938년 12월 삼산학교 구성원들 간의 마찰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삼산학교를 공립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증하여 새로운 심상소학교의 모체가 되게 하자는 학교 당국자 측의 주장에 대해 삼산학교 설립자 측과 삼산학교유지후원회 및 성북정회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일어난 논란이었다.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38년 12월 현재 지역주민들과 일부 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산학교는 여전히 사립보통학교로 남아 있었다. 이에 성북정 주민들과 삼산학교 학부형들은 삼산학교를 정식학교로 승격시키기 위해 삼산학교 유지후원회를 조직했다. 이러한 와중에 경성부에서 아동들을 위한 공립 심상소학교를 동소문 밖에 건설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으며, 새로운 학교의 위치는 돈암정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들은 삼산학교의 행정을 담당했던 교무주임 이상봉과 교장 김홍규는 삼산학교 전체를 경성부에 기부하고 “삼산학교가 새롭게 돈암정에 건설되는 심상소학교의 모체가 되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현재 학교 예산으로는 자격 있는 학교를 승격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기회에 학교를 부 당국에 기부하여 새로운 학교의 모체가 되는 것이 학교의 장래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고 학부형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은 1938년 12월 4일 학부형회를 열었다. 하지만 학부형 회의는 잘 진행되지가 않았다. 그 이유는 먼저 삼산학교 당국자들의 일관되지 않은 학교 기부 계획 설명 때문이었다. 학교 측에서는 학교를 기부한다는 목적을 손쉽게 진행시키기 위해 본회의에 앞서 학부형들을 만나 그들의 계획을 말하고 설득했다. 하지만 이 계획을 설명하면서 다른 기준을 들어 설명했다. 즉 돈암정에 거주하고 있는 학부형에게는 삼산학교를 돈암정으로 이전할 것이며, 학교는 공립학교로 승격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성북정에 거주하는 학부형에게는 현 장소에 삼산학교는 계속 있을 것이며, 학교가 공립으로 승격될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석상에서 학교 측의 이러한 행동이 밝혀지면서 소란이 일어났다. 학교 측의 진의에 대한 질의가 이어졌으며 인신공격도 이루어졌다. 또한 삼산학교 설립자 측을 비난하는 의견도 나왔다. 회의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입회해 있던 경관에게 강제로 해산을 당하게 되었다.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한다는 계획에 대해 삼산학교 설립자측과 유지후원회 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의 최종목적은 삼산학교를 자격 있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자는 사람들의 논리와 어느 정도 일치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는 성북정 지역사람들의 힘으로 자격 있는 학교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따라서 학교 교무주임이 설립자 측 및 후원회와 논의 없이 학교를 독단적으로 경성부에 기부해야 한다는 논의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려는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이사 1명과 성북정 총대가 12월 6일 오전에 경성부 학무과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학무과장에게 경성부가 새롭게 돈암정에 신설되는 심상소학교에 대한 예산에 삼산학교를 기부 받는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학무과장은 “절대로 오는 봄에 신설하는 심상소학교와 삼산학교와는 별개 문제이며 이에 대하여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답변을 들은 후 유지후원회 이사와 성북정 총대는 학무과장에게 성북정의 인구가 매우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성북정에 심상소학교를 설치하는 것이 필요하며 삼산학교를 심상소학교로 승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학무과장과 면담을 마친 삼산학교유지후원회는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려는 계획에 대해 더욱 강하게 비판했다. 돈암정에 새롭게 설립된 심상소학교는 삼산학교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삼산학교를 이 학교와 연계하여 설명하는 것은 학부형들을 기만하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이사장 하윤실은 매년 입학 학생들을 모집하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삼산학교에 대해 힘을 다해 지원하고 키워가는 것이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삼산학교를 현 위치에 두고 이것을 기본으로 수 년 내에 심상소학교로 만들 것이며, 이것을 위한 경비를 마련할 곳도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산학교유지후원회의 입장에 대해 학교 설립자 측은 강한 지지를 표명했다. 한편 학부형회의가 종료된 후 성북정회와 삼산학교유지후원회에서는 성북정회사무소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삼산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자는 주장을 한 교장 김홍규와 교무주임 이상봉에게 사직권고서를 발송하기로 결정했다. 삼산학교를 둘러싼 논쟁은 결국 학교를 기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측과 설립자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당시 학교의 교주였던 강진구姜振九는 12월 11일 삼산학교유지후원회와 학부형을 초대하고 삼산학교는 선조의 유업으로 설립된 곳으로, 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학교의 장소를 옮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래 훌륭한 학교로 만들기에 힘쓰겠다고 약속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 공립학교 승격방법을 둘러싼 논란 이후의 삼산학교 1938년 삼산학교 기부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있은 후 교주였던 강진구는 약속대로 학교의 경영에 힘썼던 것 같다. 1939년 1월 29일 『동아일보』는 3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무산아동의 유일한 교육기관 삼산학교의 교주 강진구가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학교 승격 신청을 위해 경성부 학무과를 방문했음을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강진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연 3,000원씩을 부담하기로 했으며, 삼산학교유지후원회에서는 교사를 책임지고 건축하기로 했다. 이 때 삼산학교는 6년제 사립심상소학교로 승격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이후 삼산학교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일제의 전시체제 정책이 강화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삼산학교는 1942년 3월 3일 공립국민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삼산학교는 설립 이래 개인소유의 토지에 건물을 짓고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3년 삼산학교가 있던 토지는 경성부의 소유로 이전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울특별시 소유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후인 1946년 2월 삼산학교는 공립으로 승격되었으며 교장은 하윤실이 담당하게 되었다. 7개월 후인 1946년 9월 삼산학교의 이름은 경성성북공립초등학교로 변경되었으며 통학구역으로는 성북정과 동소문정이 지정되었다. 삼산학교는 대한제국시기였던 1908년 설립된 이래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삼산학교는 성북동 지역주민들의 힘으로 지켜져 왔다. 또한 지역사회의 핵심 공간으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공립학교 승격방법을 둘러싼 논란 이후의 삼산학교 1938년 삼산학교 기부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있은 후 교주였던 강진구는 약속대로 학교의 경영에 힘썼던 것 같다. 1939년 1월 29일 『동아일보』는 3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무산아동의 유일한 교육기관 삼산학교의 교주 강진구가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학교 승격 신청을 위해 경성부 학무과를 방문했음을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강진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연 3,000원씩을 부담하기로 했으며, 삼산학교유지후원회에서는 교사를 책임지고 건축하기로 했다. 이 때 삼산학교는 6년제 사립심상소학교로 승격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이후 삼산학교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 일제의 전시체제 정책이 강화되면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삼산학교는 1942년 3월 3일 공립국민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삼산학교는 설립 이래 개인소유의 토지에 건물을 짓고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3년 삼산학교가 있던 토지는 경성부의 소유로 이전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울특별시 소유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후인 1946년 2월 삼산학교는 공립으로 승격되었으며 교장은 하윤실이 담당하게 되었다. 7개월 후인 1946년 9월 삼산학교의 이름은 경성성북공립초등학교로 변경되었으며 통학구역으로는 성북정과 동소문정이 지정되었다. 삼산학교는 대한제국시기였던 1908년 설립된 이래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삼산학교는 성북동 지역주민들의 힘으로 지켜져 왔다. 또한 지역사회의 핵심 공간으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 그 옆으로는 1908년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일반 주택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1908년 만들어진 삼산학교가 서 있었고, 그 아래로는 일반 주택들이 이어져 있었다.

  • 三山運動 三山義塾 秋期運動을 再昨日에 三仙坪에서 設行하였는데 賞品與午餐 諸般經費를 該塾主가 自擔하는 中 該洞 老人契에서 空册 五拾卷 鉛筆二匣과 有契에서 空册 五拾卷 鉛筆 匣麵餔 三百塊오 本墊 敎師 李允熙 氏가 鉛筆一匣을 捐助하야 一軆 施賞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8.10.24.

    三山運動 三山義塾 秋期運動을 再昨日에 三仙坪에서 設行하였는데 賞品與午餐 諸般經費를 該塾主가 自擔하는 中 該洞 老人契에서 空册 五拾卷 鉛筆二匣과 有契에서 空册 五拾卷 鉛筆 匣麵餔 三百塊오 本墊 敎師 李允熙 氏가 鉛筆一匣을 捐助하야 一軆 施賞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8.10.24.

  • 삼산학교(三山學校)와 숭인면부호(崇仁面富豪) -諸君아 보라! 배우겠다고 부르짓는 현대 向學熱을 보라. 이와 같이 향학열이 팽창하매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慘風悽雨를 不顧하고 동분서주하여 애쓰는 저분네들은 누구며 제군과 같이 소작인의 노작물을 가지고 錦衣玉食으로 지나는 자는 누구인가. 각성하여라 다 같은 白衣人 으로 同族인 제군은 실지노력은 못할망정 제 14회의 졸업은 내는 성북리 삼산학교에 대하여 한점의 동정하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니 한심하지 아니한가 -전교주 황씨의 열열한 교육열로 유지하여 오던 바 불귀으ㅢ 객이 된 후 성북리 주민의 열성과 숭인면장 金基宅씨 安應善시의 노심초사로 근근히 유지하여 그의 유업을 계승한 金東瑾씨의 노력과 10여년이나 한길깥이 변함이 없이 희생적 교편을 잡은 朴明煥씨는 누구를 위함인가? 우리의 손으로 된 삼산학교를 누가 있어 이것을 구하여 주며 우리의 것을 누구가 救할까? -다른 사람이 구하여 줄 자가 있는가. 依賴心이 많은 제군아 내 배만 불리려고 하는 제군아 우리의 것을 우리가 구하여야 할 책임감이 있는 줄 모르는가? 생각해보아라 숭인 보통학교 건축 당시에 다대한 금전을 각출하여도 군들의 의사에 적합하지 않은 산촌궁벽 한곳에 지어 놓코도 탄원 한마디 못하고 후회만 하지 않았는가? -교통이 편리한 三山校를 다시한번 회상하여 동정의 눈물을 아끼지 말아라. 농촌생활의 향상과 무산계급발달을 위하여 있는 삼산교는 오리무중에서 형체가 보일락말락하니 이것이 누구의 죄일까? 군들에게 일언을 고하니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고치고 우리 자제의 장래를 위한다면 一日二食을 하더라도 저 삼산교를 구제하여야 할 것이다.(城北赤泉) *동아일보 <自由鐘>이라는 코너에 실린 글. 독자가 투고하는 글. 『동아일보』 1925.03.09. 기사

    삼산학교(三山學校)와 숭인면부호(崇仁面富豪) -諸君아 보라! 배우겠다고 부르짓는 현대 向學熱을 보라. 이와 같이 향학열이 팽창하매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慘風悽雨를 不顧하고 동분서주하여 애쓰는 저분네들은 누구며 제군과 같이 소작인의 노작물을 가지고 錦衣玉食으로 지나는 자는 누구인가. 각성하여라 다 같은 白衣人 으로 同族인 제군은 실지노력은 못할망정 제 14회의 졸업은 내는 성북리 삼산학교에 대하여 한점의 동정하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니 한심하지 아니한가 -전교주 황씨의 열열한 교육열로 유지하여 오던 바 불귀으ㅢ 객이 된 후 성북리 주민의 열성과 숭인면장 金基宅씨 安應善시의 노심초사로 근근히 유지하여 그의 유업을 계승한 金東瑾씨의 노력과 10여년이나 한길깥이 변함이 없이 희생적 교편을 잡은 朴明煥씨는 누구를 위함인가? 우리의 손으로 된 삼산학교를 누가 있어 이것을 구하여 주며 우리의 것을 누구가 救할까? -다른 사람이 구하여 줄 자가 있는가. 依賴心이 많은 제군아 내 배만 불리려고 하는 제군아 우리의 것을 우리가 구하여야 할 책임감이 있는 줄 모르는가? 생각해보아라 숭인 보통학교 건축 당시에 다대한 금전을 각출하여도 군들의 의사에 적합하지 않은 산촌궁벽 한곳에 지어 놓코도 탄원 한마디 못하고 후회만 하지 않았는가? -교통이 편리한 三山校를 다시한번 회상하여 동정의 눈물을 아끼지 말아라. 농촌생활의 향상과 무산계급발달을 위하여 있는 삼산교는 오리무중에서 형체가 보일락말락하니 이것이 누구의 죄일까? 군들에게 일언을 고하니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고치고 우리 자제의 장래를 위한다면 一日二食을 하더라도 저 삼산교를 구제하여야 할 것이다.(城北赤泉) *동아일보 <自由鐘>이라는 코너에 실린 글. 독자가 투고하는 글. 『동아일보』 1925.03.09. 기사

  • 경기의 수군이오 경선의 번병 <8> 삼산학교 : 숭인면 성북동에 있는 융희2년 5월 28일 지역 유지 김수영(金洙塋) 김기택(金基宅) 외 수씨의 발기로 창립했다는 바 현재 학생이 145명이고 교장은 장인기(張寅根)씨라 한다. 『동아일보』, 1927.02.05.

    경기의 수군이오 경선의 번병 <8> 삼산학교 : 숭인면 성북동에 있는 융희2년 5월 28일 지역 유지 김수영(金洙塋) 김기택(金基宅) 외 수씨의 발기로 창립했다는 바 현재 학생이 145명이고 교장은 장인기(張寅根)씨라 한다. 『동아일보』, 1927.02.05.

  • 교실에 난로 없어 200생도 고생 경비가 없어 불을 못 피워 성북동 삼산교의 비운 경성 근방 삼각산을 배경삼고 경개절승한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옛날 융희 2년 고 黃壽延씨의 설립으로 그간 이십년 동안에 수백명의 졸업생을 내어서 사회에 다대한 공헌이 많았는데 그간 춘풍추우 역경 속에서 겨우 유지하다가 고 황수연씨 애손(愛孫) 김수영씨가 맡아 경영하던 중 6년전에는 교육협성회(敎育協成會)의 윤갑병(尹甲炳)씨와 김동근(金東瑾)씨가 많이 활동하다가 그들도 역시 감당키 어려워서 지난 오월 경에 사직하매 그 동리 유력 청년 수명이 침식을 잊어 가면서 눈물섞인 열성으로 유지하는 중이라는데 요사이 혹독한 추위에도 경비가 없어서 2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선생이 불도 피우지 못한 교실에서 목불인견의 현상이라 하며 성북동에는 시내 부호별장이 20여 곳이나 있으나 삼산학교의 비운에는 세상이 모두 냉정할 뿐이라 하여 그곳 주민들은 매우 근심중에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8.12.13.

    교실에 난로 없어 200생도 고생 경비가 없어 불을 못 피워 성북동 삼산교의 비운 경성 근방 삼각산을 배경삼고 경개절승한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옛날 융희 2년 고 黃壽延씨의 설립으로 그간 이십년 동안에 수백명의 졸업생을 내어서 사회에 다대한 공헌이 많았는데 그간 춘풍추우 역경 속에서 겨우 유지하다가 고 황수연씨 애손(愛孫) 김수영씨가 맡아 경영하던 중 6년전에는 교육협성회(敎育協成會)의 윤갑병(尹甲炳)씨와 김동근(金東瑾)씨가 많이 활동하다가 그들도 역시 감당키 어려워서 지난 오월 경에 사직하매 그 동리 유력 청년 수명이 침식을 잊어 가면서 눈물섞인 열성으로 유지하는 중이라는데 요사이 혹독한 추위에도 경비가 없어서 2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과 선생이 불도 피우지 못한 교실에서 목불인견의 현상이라 하며 성북동에는 시내 부호별장이 20여 곳이나 있으나 삼산학교의 비운에는 세상이 모두 냉정할 뿐이라 하여 그곳 주민들은 매우 근심중에 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8.12.13.

  • 삼산교에 서광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시외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그간 비운에 빠졌던 바 그곳 유력 청년의 희생 덕으로 활동한 결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동리유지 이신구(李信龜)씨가 그 정경을 보고 정신적, 물질적으로 다대한 찬동과 활동을 하여 제구 불비(不備)를 착착 준비중이라는 바 이 소문을 들은 동소문외 일대인사와 이백명되는 학부형들은 교당국 이씨의 열□□ 칭송하며 따라서 삼산학교는 사립학교로서는 앞으로 상당한 학교가 되리라고 칭송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8.12.17. 기사

    삼산교에 서광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시외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는 그간 비운에 빠졌던 바 그곳 유력 청년의 희생 덕으로 활동한 결과 항상 사회사업에 유의하던 동리유지 이신구(李信龜)씨가 그 정경을 보고 정신적, 물질적으로 다대한 찬동과 활동을 하여 제구 불비(不備)를 착착 준비중이라는 바 이 소문을 들은 동소문외 일대인사와 이백명되는 학부형들은 교당국 이씨의 열□□ 칭송하며 따라서 삼산학교는 사립학교로서는 앞으로 상당한 학교가 되리라고 칭송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8.12.17. 기사

  • 이씨(李氏)의 미거(美擧) 시내 황금정에 사는 이원우(李元雨)씨는 항상 공익사업에 공헌이 많은 바 이번 시외 성북리에 있는 삼산학교의 경비 곤란함을 듣고 동교의 과동할 석탄 전부를 담당하였음으로 동교 직원 및 학부형 사이에서는 이씨의 독지(篤志)에 감사함을 말지 않는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9.01.30. 기사

    이씨(李氏)의 미거(美擧) 시내 황금정에 사는 이원우(李元雨)씨는 항상 공익사업에 공헌이 많은 바 이번 시외 성북리에 있는 삼산학교의 경비 곤란함을 듣고 동교의 과동할 석탄 전부를 담당하였음으로 동교 직원 및 학부형 사이에서는 이씨의 독지(篤志)에 감사함을 말지 않는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9.01.30. 기사

  • 운근(運勤) 삼산학교 대운동회 교외성북동 동교(同敎)에서 11일 오전9시부터 연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0.10.11.

    운근(運勤) 삼산학교 대운동회 교외성북동 동교(同敎)에서 11일 오전9시부터 연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0.10.11.

  • 삼산학교 보통학교로 승격 【方今認許手續中】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외 성북리 삼산학교는 설립자, 동리 유지제씨와 교장 하윤실씨의 노력으로 학교의 내용이 날로 충실하던 중 이번에 완전한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자 방금 승격을 수속중이라 한다. 동리는 인구가 날로 늘고 학령아동이 많아짐에 따라 시내 통학에 많은 고통을 느끼는 터임으로 동학교의 승격은 자못 기대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1.02.22.

    삼산학교 보통학교로 승격 【方今認許手續中】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외 성북리 삼산학교는 설립자, 동리 유지제씨와 교장 하윤실씨의 노력으로 학교의 내용이 날로 충실하던 중 이번에 완전한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자 방금 승격을 수속중이라 한다. 동리는 인구가 날로 늘고 학령아동이 많아짐에 따라 시내 통학에 많은 고통을 느끼는 터임으로 동학교의 승격은 자못 기대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1.02.22.

  • 삼산학교 운동회 시외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에서는 오는 17일 그 학교 안에서 추계운동회를 연다는 바 그곳 성북유치원에서는 유치원 원아가 동대회의 흥치를 도읍기 위하여 아동유희를 하리라 하며 기타 여흥도 많다는데 일반은 물론이오 졸업생들은 빠짐없이 출석해주기를 바란다 한다. 『동아일보』, 1933.10.16.

    삼산학교 운동회 시외 성북동에 있는 삼산학교에서는 오는 17일 그 학교 안에서 추계운동회를 연다는 바 그곳 성북유치원에서는 유치원 원아가 동대회의 흥치를 도읍기 위하여 아동유희를 하리라 하며 기타 여흥도 많다는데 일반은 물론이오 졸업생들은 빠짐없이 출석해주기를 바란다 한다. 『동아일보』, 1933.10.16.

  • 삼산학교 학예회 시외 성북리에 있는 사립 삼산학교에서는 오는 3일 오전 10시부터 학예회를 연다고 하며 동시에 학부형회도 연다는 바 학부형은 물론이오 일반 관람자에게도 무료로 공개하니 다수 내참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3.12.03.

    삼산학교 학예회 시외 성북리에 있는 사립 삼산학교에서는 오는 3일 오전 10시부터 학예회를 연다고 하며 동시에 학부형회도 연다는 바 학부형은 물론이오 일반 관람자에게도 무료로 공개하니 다수 내참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3.12.03.

  • 삼산학교 승격문제로 후원회측에서 궐기, 기지 기부운동에 반대 부내 성북정에 있는 삼산학교는 현재 동교 설립자 강진구씨의 선친의 창설로 지금까지 30여 년간 무산아동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서 사회에 많은 일꾼을 배양하여왔다. 그런데 부당국으로부터 내년도 초등학교 증설계획에 의하여 돈암정에 심상소학교 하나를 신설한다고 하는 소식이 현실성을 띄게 되자 학교당국에서는 현재 동교가 자격이 없는 소학교로 되어 있음에 학교 기지 및 건물을 부 당국에 기부하교 현재학생과 학교직원을 신설되는 소학교에서 양수하여 달라는 의견을 가지고 4일 오전 11시부터 학부형회를 소집하여 동일한 보조를 취하려고 하였는데 동 석상에서 먼저 학교 당국에서 말하였던 것과 상위되는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인신공격문제등도 나와 결국 갑론을박을 하다가 입회하였던 경관으로부터 해산을 당하여 오후 2시경에 휴회되었다. 즉 학교당국에서 돈암정 학부형에 대해서는 성북정에 학교를 두고서 승격시킨다고 이와 같이 불일치하게 언명한 기운이 농후하여 의사가 잔 진섭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립자측을 중상하는 의론도 나와 결국 해산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 1개월 전 동교의 발전과 흥융을 위하여 성북정민은 삼산학교 유지후원회를 조직하고 이사까지 선정하여 동교설립자 강진구(姜振九)씨로부터 경영에 관한 권리와 재래교무정리에 대한 권리를 지난 30일에 위임받아 이래 동교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중으로 이 후원회 이사측에서는 동교를 현재 그대로 두고 장차 심상소학교로 만들려고 하여 학교 당국의 의견과 정반대되어 분규를 계속하고 있는바 이에 관계자의 말에 이하여 그 진상을 규명하면 다음과 같은 바가 자못 그 추이는 주목된다. 그리고 동후원회측 이사 1명과 성북정 총대 양명이 6일 오전에 부당국을 방문하고 학무과장에게 오는 봄에 신설되는 돈암정 심상소학교의 예산에 이 삼산학교 기부 문제를 고려하고 있느냐함에 대하여 절대로 오는 봄 신설을 보게 될 심상소학교와 이 삼산 학교와는 별개 문제이며 이에 대하여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답변하였다하며 동 석상에서 후원회측을 대표하여 간 양명은 후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 동시에 수 년 후에는 격증하여가는 인구수로 보아 성북정에 심상소학교를 하나 설치함이 절대 필요함으로 현재 이 삼산학교를 수년내로 심상소학교로 승격시켜달라는 뜻을 말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현재 교장 金鴻圭씨와 교무주임 李相鳳시가 없어 동교 교원 李哲圭시의 말을 들어 본 즉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우리학교는 30여 년간 무산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많이 힘써온바 오는 봄에 돈암정에 심상소학교가 설치 되리라함으로 이 기회에 학교 및 기지를 부 당국에 기부하고 현재학교 직원과 생도를 신설교에서 인수하는 동시에 충실한 심상소학교로 만들려고 합니다. 운운. 유대후원회 이사장 하윤실씨담 매년 아동입학난으로 곤란을 받는 이때 이미 설정된 학교에 대하여서는 최선의 힘을 다하야 붓돋아주고 키워가는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회로서는 어디까지나 삼산학교를 현재 위치에 그대로 두고 이것을 기본삼아 수년내로 내용충실한 심상소학교를 만들려고하며 년경상비같은 것도 구체적으로 념출할 곳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운. 『동아일보』, 1938.12.08.

    삼산학교 승격문제로 후원회측에서 궐기, 기지 기부운동에 반대 부내 성북정에 있는 삼산학교는 현재 동교 설립자 강진구씨의 선친의 창설로 지금까지 30여 년간 무산아동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서 사회에 많은 일꾼을 배양하여왔다. 그런데 부당국으로부터 내년도 초등학교 증설계획에 의하여 돈암정에 심상소학교 하나를 신설한다고 하는 소식이 현실성을 띄게 되자 학교당국에서는 현재 동교가 자격이 없는 소학교로 되어 있음에 학교 기지 및 건물을 부 당국에 기부하교 현재학생과 학교직원을 신설되는 소학교에서 양수하여 달라는 의견을 가지고 4일 오전 11시부터 학부형회를 소집하여 동일한 보조를 취하려고 하였는데 동 석상에서 먼저 학교 당국에서 말하였던 것과 상위되는 점이 많을 뿐 아니라 인신공격문제등도 나와 결국 갑론을박을 하다가 입회하였던 경관으로부터 해산을 당하여 오후 2시경에 휴회되었다. 즉 학교당국에서 돈암정 학부형에 대해서는 성북정에 학교를 두고서 승격시킨다고 이와 같이 불일치하게 언명한 기운이 농후하여 의사가 잔 진섭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립자측을 중상하는 의론도 나와 결국 해산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약 1개월 전 동교의 발전과 흥융을 위하여 성북정민은 삼산학교 유지후원회를 조직하고 이사까지 선정하여 동교설립자 강진구(姜振九)씨로부터 경영에 관한 권리와 재래교무정리에 대한 권리를 지난 30일에 위임받아 이래 동교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중으로 이 후원회 이사측에서는 동교를 현재 그대로 두고 장차 심상소학교로 만들려고 하여 학교 당국의 의견과 정반대되어 분규를 계속하고 있는바 이에 관계자의 말에 이하여 그 진상을 규명하면 다음과 같은 바가 자못 그 추이는 주목된다. 그리고 동후원회측 이사 1명과 성북정 총대 양명이 6일 오전에 부당국을 방문하고 학무과장에게 오는 봄에 신설되는 돈암정 심상소학교의 예산에 이 삼산학교 기부 문제를 고려하고 있느냐함에 대하여 절대로 오는 봄 신설을 보게 될 심상소학교와 이 삼산 학교와는 별개 문제이며 이에 대하여 생각해본 일이 없다고 답변하였다하며 동 석상에서 후원회측을 대표하여 간 양명은 후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 동시에 수 년 후에는 격증하여가는 인구수로 보아 성북정에 심상소학교를 하나 설치함이 절대 필요함으로 현재 이 삼산학교를 수년내로 심상소학교로 승격시켜달라는 뜻을 말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현재 교장 金鴻圭씨와 교무주임 李相鳳시가 없어 동교 교원 李哲圭시의 말을 들어 본 즉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우리학교는 30여 년간 무산아동의 교육을 위하여 많이 힘써온바 오는 봄에 돈암정에 심상소학교가 설치 되리라함으로 이 기회에 학교 및 기지를 부 당국에 기부하고 현재학교 직원과 생도를 신설교에서 인수하는 동시에 충실한 심상소학교로 만들려고 합니다. 운운. 유대후원회 이사장 하윤실씨담 매년 아동입학난으로 곤란을 받는 이때 이미 설정된 학교에 대하여서는 최선의 힘을 다하야 붓돋아주고 키워가는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회로서는 어디까지나 삼산학교를 현재 위치에 그대로 두고 이것을 기본삼아 수년내로 내용충실한 심상소학교를 만들려고하며 년경상비같은 것도 구체적으로 념출할 곳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운. 『동아일보』, 1938.12.08.

  • 삼산학교 교주 姜振九 氏 책임경영을 성명 3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부내 성북정 사립 삼산학교는 교무자가 돈암정에 설립될 공립소학기금으로 삼산학교 재산전부를 기부하자는 책동이 있어 암운이 떠돌던 바, 11일 정오 동교 설립자 강진구씨는 동교 유지 위원회원과 학부형을 초대하고 삼산학교는 선조의 의의깊은 유업이므로 동교 재산기부는 생각도 않할 것이며 또 동교는 동장소에서 옮기지도 않을 분만아니라 장차 훌륭한 학교로 만들기에 힘쓰겠다는 성명을 발하여 도리어 이번의 소란으로 전화위복을 보게 되었다. -성명서- 一 공사립을 막론하고 성의를 다하여 본교를 세에 적합하고 성북정 주민 내지 隣町民의 子侄의 장내출세의 유력한 학교를 만들겠다는 본의이다. 본교는 선조의 역사깊은 유업인 고로 더욱 관심을 가져 마지아니함. 二 그 시기는 돈암정에 공립소학교가 완성한 후일 것임.(단 장소는 성북정내에 두도록 할 것) 三 돈암정 소학교 신설에 본교를 기부하여 본교를 폐지할 생각은 全無함. 四 본인이 설립자로 된지 수년간에 본교에 대해서 무성의하다는 것을 악선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본인이 학교와 遠隔학 지역에 거주하는 관계가 있으나 본인으로 하여도 무성의하게 만든 것은 현 학교당국주무자가 설립자에게 무성의하였음인 것임. 五 본교의 금후 경영은 본인과 삼산학교유지위원회 諸氏도 협력하기로 함. 단 경영방침과 교무 제반취급권은 본교유지후원회에 일임함. 六 본교설립자승인이라 함에도 불구하고 본교를 돈암정에 신설할 심상소학교에 기부운동을 함으로 인심을 소란케 한 자는 적당한 처치를 하기로 이에 성명함 소화 13년 12월 11일 설립자 姜振九 『동아일보』, 1938.12.12

    삼산학교 교주 姜振九 氏 책임경영을 성명 3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부내 성북정 사립 삼산학교는 교무자가 돈암정에 설립될 공립소학기금으로 삼산학교 재산전부를 기부하자는 책동이 있어 암운이 떠돌던 바, 11일 정오 동교 설립자 강진구씨는 동교 유지 위원회원과 학부형을 초대하고 삼산학교는 선조의 의의깊은 유업이므로 동교 재산기부는 생각도 않할 것이며 또 동교는 동장소에서 옮기지도 않을 분만아니라 장차 훌륭한 학교로 만들기에 힘쓰겠다는 성명을 발하여 도리어 이번의 소란으로 전화위복을 보게 되었다. -성명서- 一 공사립을 막론하고 성의를 다하여 본교를 세에 적합하고 성북정 주민 내지 隣町民의 子侄의 장내출세의 유력한 학교를 만들겠다는 본의이다. 본교는 선조의 역사깊은 유업인 고로 더욱 관심을 가져 마지아니함. 二 그 시기는 돈암정에 공립소학교가 완성한 후일 것임.(단 장소는 성북정내에 두도록 할 것) 三 돈암정 소학교 신설에 본교를 기부하여 본교를 폐지할 생각은 全無함. 四 본인이 설립자로 된지 수년간에 본교에 대해서 무성의하다는 것을 악선전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본인이 학교와 遠隔학 지역에 거주하는 관계가 있으나 본인으로 하여도 무성의하게 만든 것은 현 학교당국주무자가 설립자에게 무성의하였음인 것임. 五 본교의 금후 경영은 본인과 삼산학교유지위원회 諸氏도 협력하기로 함. 단 경영방침과 교무 제반취급권은 본교유지후원회에 일임함. 六 본교설립자승인이라 함에도 불구하고 본교를 돈암정에 신설할 심상소학교에 기부운동을 함으로 인심을 소란케 한 자는 적당한 처치를 하기로 이에 성명함 소화 13년 12월 11일 설립자 姜振九 『동아일보』, 1938.12.12

  • 재건의 삼산학교 악전고투 30여년의 역사위에서 무산아동의 유일한 교육기관이 되어 있는 부내 성북정 삼산학교는 작금 1일부터 전하던 기괴한 풍설을 물리치고 오랫동안 숙망의 昇格을 얻으려고 설립자 강진구 씨는 28일 아침 경성부 학무과를 방문하고 승격인가 신청에 관한 수속을 정식으로 밟았다. 이제 발전의 첫 발을 디디게 된 삼산학교 재건의 뒤에 숨은 장거가 또한 있으니 설립자 강진구씨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연 3000원씩을 부담 지출키로 되었고 동교 유지후원회에서는 校舍를 책임지고 건축하기로 되어 멀지 않아 성북 일우에 위관을 이루게 되었다. 『동아일보』. 1939.01.29.

    재건의 삼산학교 악전고투 30여년의 역사위에서 무산아동의 유일한 교육기관이 되어 있는 부내 성북정 삼산학교는 작금 1일부터 전하던 기괴한 풍설을 물리치고 오랫동안 숙망의 昇格을 얻으려고 설립자 강진구 씨는 28일 아침 경성부 학무과를 방문하고 승격인가 신청에 관한 수속을 정식으로 밟았다. 이제 발전의 첫 발을 디디게 된 삼산학교 재건의 뒤에 숨은 장거가 또한 있으니 설립자 강진구씨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연 3000원씩을 부담 지출키로 되었고 동교 유지후원회에서는 校舍를 책임지고 건축하기로 되어 멀지 않아 성북 일우에 위관을 이루게 되었다. 『동아일보』. 1939.01.29.

  • 삼산학교 동창회 시내 성북정 삼산학교에서는 오는 3월 19일 오전 10시 졸업식을 거행한 후에 동창회를 개최하므로 졸업생은 많이 참석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9.03.18.

    삼산학교 동창회 시내 성북정 삼산학교에서는 오는 3월 19일 오전 10시 졸업식을 거행한 후에 동창회를 개최하므로 졸업생은 많이 참석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9.03.18.

  • 三山義塾의 將來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는 산밑에 따로 떨어져 있는 촌락이 되어 아이들이 문안 보통학교에 통학하기는 좀 곤란한고로 지난 명치41년에 고 황수연 씨가 삼산의숙을 세우고 운영해오던 바 대정 6년도부터는 설립자의 기부금이 없어서 유지방침이 없더니 그 동리 마전질 영업하는 사람들이 십장 홍태윤(洪泰潤)씨를 청하여 대정 6년 12월 11일부터 세탁공전 중에서 얼마씩을 제하여 학교 경비를 담당하기로 하였음으로 동교의 장래는 유지할 방침이 있다고 하더라. 『매일신보』, 1918.01.29

    三山義塾의 將來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는 산밑에 따로 떨어져 있는 촌락이 되어 아이들이 문안 보통학교에 통학하기는 좀 곤란한고로 지난 명치41년에 고 황수연 씨가 삼산의숙을 세우고 운영해오던 바 대정 6년도부터는 설립자의 기부금이 없어서 유지방침이 없더니 그 동리 마전질 영업하는 사람들이 십장 홍태윤(洪泰潤)씨를 청하여 대정 6년 12월 11일부터 세탁공전 중에서 얼마씩을 제하여 학교 경비를 담당하기로 하였음으로 동교의 장래는 유지할 방침이 있다고 하더라. 『매일신보』, 1918.01.29

  • 三山紀念運動(삼산기념운동)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에 있는 사립 삼산학교에서 지난 18일에 창립 제 17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 운동회를 동소문 외 삼선평 광장에서 개최하였는데 인산인해를 이룬 학부형과 부근 민중은 정각 전부터 토착하였으며 청아한 주악과 생도일동의 운동가(運動歌)로 식을 열고 교장 권규진씨의 개최가 있은 후 순서를 따라 50여종의 경기를 진행하고 흥미진진한 교감 김동근씨의 폐회사로 식은 마치었는데 당일 금품을 기부하신 씨명 및 품명은 다음과 같다고 一 樂隊一組 : 회중기독교회 一 공책 오백부 : 중앙인쇄소 송태오씨 一 공책백부 연필24타 : 사립 인창학교 一 연필12타 : 손흥일씨 一 금 25원 : 본교 졸업생 『동아일보』, 1924.05.25.

    三山紀念運動(삼산기념운동)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에 있는 사립 삼산학교에서 지난 18일에 창립 제 17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 운동회를 동소문 외 삼선평 광장에서 개최하였는데 인산인해를 이룬 학부형과 부근 민중은 정각 전부터 토착하였으며 청아한 주악과 생도일동의 운동가(運動歌)로 식을 열고 교장 권규진씨의 개최가 있은 후 순서를 따라 50여종의 경기를 진행하고 흥미진진한 교감 김동근씨의 폐회사로 식은 마치었는데 당일 금품을 기부하신 씨명 및 품명은 다음과 같다고 一 樂隊一組 : 회중기독교회 一 공책 오백부 : 중앙인쇄소 송태오씨 一 공책백부 연필24타 : 사립 인창학교 一 연필12타 : 손흥일씨 一 금 25원 : 본교 졸업생 『동아일보』, 1924.05.25.

  • 三山校父兄會(삼산교부형회)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삼산학교에서는 방금 夏節을 당하여 일반 학부형과 유지 諸彦의 위안회를 지난 26일 열었다. 당일은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영사하였는데 정각 전부터 남녀관람객은 넓은 교정에 입추의 여지가 없었는데 정각에 이르러 청아한 奏樂 裡에 교감 김동근씨 사회로 식을 열고 개회사가 있은 후 흥미진진한 활동사진이며 간간히 천진난만한 여생도 등의 아름다운 창가와 유희가 있었으며 겸하여 성북구락부원 諸氏의 의연적 출연으로는 희극도 있어 관중의 취미를 돋구고 하오12시경에 산회하였다고. 『동아일보』, 1924.07.01.

    三山校父兄會(삼산교부형회)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삼산학교에서는 방금 夏節을 당하여 일반 학부형과 유지 諸彦의 위안회를 지난 26일 열었다. 당일은 여흥으로 활동사진을 영사하였는데 정각 전부터 남녀관람객은 넓은 교정에 입추의 여지가 없었는데 정각에 이르러 청아한 奏樂 裡에 교감 김동근씨 사회로 식을 열고 개회사가 있은 후 흥미진진한 활동사진이며 간간히 천진난만한 여생도 등의 아름다운 창가와 유희가 있었으며 겸하여 성북구락부원 諸氏의 의연적 출연으로는 희극도 있어 관중의 취미를 돋구고 하오12시경에 산회하였다고. 『동아일보』, 1924.07.01.

  • 성북초등학교의 전신인 삼산의숙은 1908년 지역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되었다. 당시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주학과晝學科와 일을 하는 학생들을 위한 야학과夜學科가 개설되었다. 삼산의숙은 이후 1942년에 공립 삼산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46년 성북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학생수가 늘고, 규모가 커지며 학교 부지가 필요했고, 이 얘기를 들은 간송 전형필은 북단장 땅 일부를 기증하였다.

    성북초등학교의 전신인 삼산의숙은 1908년 지역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건립되었다. 당시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주학과晝學科와 일을 하는 학생들을 위한 야학과夜學科가 개설되었다. 삼산의숙은 이후 1942년에 공립 삼산국민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46년 성북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학생수가 늘고, 규모가 커지며 학교 부지가 필요했고, 이 얘기를 들은 간송 전형필은 북단장 땅 일부를 기증하였다.

  • 등대가 되어 가르침을 펴다 - 삼산의숙 성북동 김수영씨가 각 동의 청년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사립 삼산의숙을 창설한 취지는 다음과 같다. “… 오직 우리 성북동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유래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교육이 미칠 겨를이 없었거니와 오늘날의 문명의 다툼을 돌아보면 대풍조가 한반도에 점점 파급하여 전방인사가 급급하게 분투하야 도시나 시골에 학교건물이 계속 세워지거늘 오직 이 동네는 오히려 잠잠하여 … 이즈음에 삼산의숙이 처음으로 건립하니 어두운 동네 하늘에 등대가 되어 빛을 발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깨울 길이 나타났도다.” 『황성신문』, 1908.07.18

    등대가 되어 가르침을 펴다 - 삼산의숙 성북동 김수영씨가 각 동의 청년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사립 삼산의숙을 창설한 취지는 다음과 같다. “… 오직 우리 성북동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유래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교육이 미칠 겨를이 없었거니와 오늘날의 문명의 다툼을 돌아보면 대풍조가 한반도에 점점 파급하여 전방인사가 급급하게 분투하야 도시나 시골에 학교건물이 계속 세워지거늘 오직 이 동네는 오히려 잠잠하여 … 이즈음에 삼산의숙이 처음으로 건립하니 어두운 동네 하늘에 등대가 되어 빛을 발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깨울 길이 나타났도다.” 『황성신문』, 1908.07.18

  • 소설가 상허 이태준은 성북동에 집을 짓고 살며 소소한 일상과 성북동 풍경을 글로 남겼다. 「달밤」이라는 수필에는 조금 모자라지만 정감 가는 성북동 이웃 ‘황수건’이 등장한다. “삼산학교에 급사로 있을 시대에 삼산학교에다 남겨 놓고 나온 일화도 여러 가지라는데, 그중에 두어 가지를 동네 사람들의 말대로 옮겨 보면, 역시 그때부터도 이야기하기를 대단 즐기어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간 새, 손님이 오면 으레 손님을 앉히고는 자기도 걸상을 갖다 떡 마주 놓고 앉는 것은 물론, 마주 앉아서는 곧 자기류의 만담삼매로 빠지는 것인데 한 번은 도 학무국에서 시학관이 나온 것을 이 따위로 대접하였다. 일본말은 못하니까 만담은 할 수 없고 마주 앉아서 자꾸 일본말을 연습하였다. “센세이 히, 오하요 고사이마쓰까...... 히히 아메가 후리마쓰. 유끼가 후리마쓰까 히히......”시학관도 인정이라 처음엔 웃었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하는 데는 성이 나고 말았다. 선생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종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한 선생이 나와 보니 종 칠 것도 잊어버리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오하요 유끼가 후리마쓰까......”하는 판이다. 그날 수건이는 선생들에게 단단히 몰리고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했으나,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그예 쫓겨나오고 만 것이다.” 이태준, 「달밤」, 1933

    소설가 상허 이태준은 성북동에 집을 짓고 살며 소소한 일상과 성북동 풍경을 글로 남겼다. 「달밤」이라는 수필에는 조금 모자라지만 정감 가는 성북동 이웃 ‘황수건’이 등장한다. “삼산학교에 급사로 있을 시대에 삼산학교에다 남겨 놓고 나온 일화도 여러 가지라는데, 그중에 두어 가지를 동네 사람들의 말대로 옮겨 보면, 역시 그때부터도 이야기하기를 대단 즐기어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간 새, 손님이 오면 으레 손님을 앉히고는 자기도 걸상을 갖다 떡 마주 놓고 앉는 것은 물론, 마주 앉아서는 곧 자기류의 만담삼매로 빠지는 것인데 한 번은 도 학무국에서 시학관이 나온 것을 이 따위로 대접하였다. 일본말은 못하니까 만담은 할 수 없고 마주 앉아서 자꾸 일본말을 연습하였다. “센세이 히, 오하요 고사이마쓰까...... 히히 아메가 후리마쓰. 유끼가 후리마쓰까 히히......”시학관도 인정이라 처음엔 웃었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하는 데는 성이 나고 말았다. 선생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종 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한 선생이 나와 보니 종 칠 것도 잊어버리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오하요 유끼가 후리마쓰까......”하는 판이다. 그날 수건이는 선생들에게 단단히 몰리고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했으나,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그예 쫓겨나오고 만 것이다.” 이태준, 「달밤」, 1933

  • 1. 1908년 삼산의숙(三山義塾)의 설립과 황수연 ○ 성북구 지역에 최초로 설립한 근대적 사립학교(현 성북초등학교의 기원) ○ 일체 수업료를 받지 않는 무상교육 ○ 1908년 6월, 춘파 황수연의 양손 김수영의 발의로 설립 ※ 1904년~1910년까지 전국에서 3,000여개 사립학교가 설립됨(『황성신문』, 『매천야록』 기사 참고) - 교사(校舍) : 성북동에 있는 충정공 민영환의 별장 건물을 교사로 사용하다가 동년 7월 새 교사 착공(16칸 규모) - 교직원(5명) ㆍ교장(校長) 김수영(金洙瑩), 부교장(副校長) 황수연(黃壽延) ㆍ산술교사(算術敎師) 방한정(方漢鼎), 한문교사(漢文敎師) 장기협(張基協), 일어교사(日語敎師) 이윤희(李允煕) - 입학생 수 : 97명 - 운영 ㆍ황수연(당시 성북동 별장에 거주)의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기반으로 포백업자 등 성북동에 거주하는 유력자들의 지원으로 운영 ㆍ주학과/야학과(야학과는 운영상 어려움으로 동년 12월 폐지)

    1. 1908년 삼산의숙(三山義塾)의 설립과 황수연 ○ 성북구 지역에 최초로 설립한 근대적 사립학교(현 성북초등학교의 기원) ○ 일체 수업료를 받지 않는 무상교육 ○ 1908년 6월, 춘파 황수연의 양손 김수영의 발의로 설립 ※ 1904년~1910년까지 전국에서 3,000여개 사립학교가 설립됨(『황성신문』, 『매천야록』 기사 참고) - 교사(校舍) : 성북동에 있는 충정공 민영환의 별장 건물을 교사로 사용하다가 동년 7월 새 교사 착공(16칸 규모) - 교직원(5명) ㆍ교장(校長) 김수영(金洙瑩), 부교장(副校長) 황수연(黃壽延) ㆍ산술교사(算術敎師) 방한정(方漢鼎), 한문교사(漢文敎師) 장기협(張基協), 일어교사(日語敎師) 이윤희(李允煕) - 입학생 수 : 97명 - 운영 ㆍ황수연(당시 성북동 별장에 거주)의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기반으로 포백업자 등 성북동에 거주하는 유력자들의 지원으로 운영 ㆍ주학과/야학과(야학과는 운영상 어려움으로 동년 12월 폐지)

  • 2. 1910년대 삼산의숙 : ‘각종사립학교’ 인가 ○ 1912년 4월 첫 졸업생 배출 ○ 1911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시행, 삼산의숙을 ‘각종사립학교’로 인가 ※ 4년제 비정규학교이며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검정시험을 거쳐야 함. 보통학교에 비해 진학 불리 ○ 황수연은 삼산의숙을 정식 공립보통학교와 동일한 설비와 제도를 갖추고 운영하고자 노력 ○ 1916년 황수연이 별세하면서 운영난에 직면하자 홍태윤(洪泰潤) 등 성북리의 세탁업자들을 중심으로 운영자금을 스스로 모아 삼산의숙 운영 경비 담당

    2. 1910년대 삼산의숙 : ‘각종사립학교’ 인가 ○ 1912년 4월 첫 졸업생 배출 ○ 1911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을 시행, 삼산의숙을 ‘각종사립학교’로 인가 ※ 4년제 비정규학교이며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검정시험을 거쳐야 함. 보통학교에 비해 진학 불리 ○ 황수연은 삼산의숙을 정식 공립보통학교와 동일한 설비와 제도를 갖추고 운영하고자 노력 ○ 1916년 황수연이 별세하면서 운영난에 직면하자 홍태윤(洪泰潤) 등 성북리의 세탁업자들을 중심으로 운영자금을 스스로 모아 삼산의숙 운영 경비 담당

  • 3. 1920년대 삼산학교 : 운영난 극복을 위한 노력 ○ 1927년 현재 삼산학교 총 재학생 수 145명 ※ 일제는 1920년에서 1925년 사이 3면마다 보통학교 1개를 건설한다는 ‘3면1교’ 정책을 표방하고 이러한 원칙을 따라 숭인면에 보통학교가 만들어졌으나 삼산학교에 대한 보통학교 인가는 이루어지지 않음 ○ 교육협성회 윤갑병, 김동근이 학교 운영을 주도했으나 역부족 ○ 이후 서광훈 등이 주축이 된 성북구락부 회원들이 학교를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임 ○ 계속되는 운영난 타개를 위해 신문지면에 학교의 어려움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 - 『동아일보』 1925. 3. 9, 「자유종」에 게재한 ‘성북적천(城北赤泉)’의 투고문 - 『동아일보』 1928. 12. 13, 「교실에 난로 없어 200생도 고생」(기사) - 황금정의 부호 이원우(李元雨)는 경비가 부족해서 겨울철 불도 피우지 못한 삼산학교의 소식을 듣고 겨울철에 필요한 석탄을 제공 ○ 성북정회장 이신구의 노력과 학부형 및 지역 사람들의 조력으로 점차 운영상 어려움을 조금씩 타개

    3. 1920년대 삼산학교 : 운영난 극복을 위한 노력 ○ 1927년 현재 삼산학교 총 재학생 수 145명 ※ 일제는 1920년에서 1925년 사이 3면마다 보통학교 1개를 건설한다는 ‘3면1교’ 정책을 표방하고 이러한 원칙을 따라 숭인면에 보통학교가 만들어졌으나 삼산학교에 대한 보통학교 인가는 이루어지지 않음 ○ 교육협성회 윤갑병, 김동근이 학교 운영을 주도했으나 역부족 ○ 이후 서광훈 등이 주축이 된 성북구락부 회원들이 학교를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임 ○ 계속되는 운영난 타개를 위해 신문지면에 학교의 어려움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 - 『동아일보』 1925. 3. 9, 「자유종」에 게재한 ‘성북적천(城北赤泉)’의 투고문 - 『동아일보』 1928. 12. 13, 「교실에 난로 없어 200생도 고생」(기사) - 황금정의 부호 이원우(李元雨)는 경비가 부족해서 겨울철 불도 피우지 못한 삼산학교의 소식을 듣고 겨울철에 필요한 석탄을 제공 ○ 성북정회장 이신구의 노력과 학부형 및 지역 사람들의 조력으로 점차 운영상 어려움을 조금씩 타개

  • 4. 1930년대 삼산학교 : 6년제 승격운동, 보통학교로 변경 추진 ○ 하윤실(河允實)이 삼산학교 교장으로 취임 후 6년제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자 조선총독부에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 1933년 4월 현재 삼산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로 1학년 1학급, 2학년 1학급, 3·4학년 합반 1개 학급에 총 재학생 수 48명(1927년 학생수의 1/3) ※ 4년제 각종사립학교였기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에 불리 ○ 1938년 12월, 삼산학교의 공립학교 전환 문제를 두고 구성원들 간 갈등 발생 - 학교 당국자측의 주장 : 학교를 경성부에 기증하여 경성부가 발표한 공립심상소학교의 모체로 만들어야 함 (교장 김홍규, 교무주임 이상봉) - 학교설립자·삼산학교유지후원회·성북정회 사람들은 현재 어려운 실정이지만 모두가 힘을 다해 지원하여 키워간다면 학교를 현 위치에 두고 수 년 내에 심상소학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학교측의 계획에 반대입장을 표명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이사장 하윤실) - 삼산학교 교주 강진구(姜振九)가 12월 11일 삼산학교유지후원회와 학부형을 초대하여 삼산학교는 선조의 유업으로 설립된 곳으로, 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학교의 장소를 옮기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장래 훌륭한 학교로 만들기에 힘쓰겠다고 약속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갈등 일단락

    4. 1930년대 삼산학교 : 6년제 승격운동, 보통학교로 변경 추진 ○ 하윤실(河允實)이 삼산학교 교장으로 취임 후 6년제 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자 조선총독부에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 1933년 4월 현재 삼산학교는 4년제 보통학교로 1학년 1학급, 2학년 1학급, 3·4학년 합반 1개 학급에 총 재학생 수 48명(1927년 학생수의 1/3) ※ 4년제 각종사립학교였기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에 불리 ○ 1938년 12월, 삼산학교의 공립학교 전환 문제를 두고 구성원들 간 갈등 발생 - 학교 당국자측의 주장 : 학교를 경성부에 기증하여 경성부가 발표한 공립심상소학교의 모체로 만들어야 함 (교장 김홍규, 교무주임 이상봉) - 학교설립자·삼산학교유지후원회·성북정회 사람들은 현재 어려운 실정이지만 모두가 힘을 다해 지원하여 키워간다면 학교를 현 위치에 두고 수 년 내에 심상소학교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학교측의 계획에 반대입장을 표명 (삼산학교유지후원회 이사장 하윤실) - 삼산학교 교주 강진구(姜振九)가 12월 11일 삼산학교유지후원회와 학부형을 초대하여 삼산학교는 선조의 유업으로 설립된 곳으로, 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학교의 장소를 옮기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장래 훌륭한 학교로 만들기에 힘쓰겠다고 약속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갈등 일단락

  • 5. 공립학교 승격방법을 둘러싼 논란 이후의 삼산학교 ○ 1939년 1월, 6년제 사립심상소학교로 승격 - 교주 강진구, 1939년 1월 경성부 학무과를 방문하여 자신이 학교 운영 자금 연 3,000원씩을 부담하고, 삼산학교유지후원회에서는 교사를 책임지고 건축하기로 했음을 통보 ○ 1942년 3월, 공립국민학교로 전환 ○ 1943년 삼산학교의 토지가 경성부의 소유로 이전 ○ 1946년 2월, 공립학교로 승격(교장: 하윤실) ○ 1946년 9월, 교명을 경성성북공립국민학교로 변경 → 현 서울성북초등학교

    5. 공립학교 승격방법을 둘러싼 논란 이후의 삼산학교 ○ 1939년 1월, 6년제 사립심상소학교로 승격 - 교주 강진구, 1939년 1월 경성부 학무과를 방문하여 자신이 학교 운영 자금 연 3,000원씩을 부담하고, 삼산학교유지후원회에서는 교사를 책임지고 건축하기로 했음을 통보 ○ 1942년 3월, 공립국민학교로 전환 ○ 1943년 삼산학교의 토지가 경성부의 소유로 이전 ○ 1946년 2월, 공립학교로 승격(교장: 하윤실) ○ 1946년 9월, 교명을 경성성북공립국민학교로 변경 → 현 서울성북초등학교

  • ◈1907년 (5월 18일) 봉시(奉侍) 황수연(黃壽延)이 삼산의숙(三山義塾) 설립. 근대적인 학교라기보다 서당과 같은 성격을 띠었을 것으로 사료됨 ◈1908년 5월 28일 황수연, 김수영(金洙瑩), 김기택(金基宅) 외 여러 사람의 발기로 삼산의숙 창립. 근대적인 학교로 삼산의숙이 재창립되었을 것 ◈1908년 10월 22일 삼선평에서 추기운동회 개최 ◈1908년 10월 삼산학교 학생 단발 ◈1908년경 손 安壽瑩(김수영?)에게 학감을 맡겼는데 무리하게 학생을 학대한 고로 타인을 연빙 ◈1909년 3월 4일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음, ◈1912년 3월 제1회 졸업식을 거행

    ◈1907년 (5월 18일) 봉시(奉侍) 황수연(黃壽延)이 삼산의숙(三山義塾) 설립. 근대적인 학교라기보다 서당과 같은 성격을 띠었을 것으로 사료됨 ◈1908년 5월 28일 황수연, 김수영(金洙瑩), 김기택(金基宅) 외 여러 사람의 발기로 삼산의숙 창립. 근대적인 학교로 삼산의숙이 재창립되었을 것 ◈1908년 10월 22일 삼선평에서 추기운동회 개최 ◈1908년 10월 삼산학교 학생 단발 ◈1908년경 손 安壽瑩(김수영?)에게 학감을 맡겼는데 무리하게 학생을 학대한 고로 타인을 연빙 ◈1909년 3월 4일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음, ◈1912년 3월 제1회 졸업식을 거행

  • ◈1923년 4월 의친왕 이강이 삼산학교에 350원 사금(賜金))하였고 교실이 협착하여 비상히 곤란 중에 있었는데 시내 복익동에 거주하는 김수영(金洙瑩)이 1,000원, 청년친목회원 일동이 한 사람당 오전씩, 포백회사 매필에 5전씩 기연 ◈1923년 5월 21일 삼선평에서 춘기운동회 개최 ◈1923년 6월 경 학생 190명을 수용하기가 협착하여 유감이던 바 본면장 정규상씨는 1,500원을 대차하여 학교유직에 진력하던 중 3학년생 교실 5칸을 운동장편에 신건축하기 위하여 목하 공사에 분망 중 ◈1923년 10월 21일 삼선평에서 남녀학생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운동회 개최하였는데 종목은 순보경주(鶉步競走) 등 50종목 ◈1923년 11월 6일 일반부형과 유지 제인의 위안회 개최

    ◈1923년 4월 의친왕 이강이 삼산학교에 350원 사금(賜金))하였고 교실이 협착하여 비상히 곤란 중에 있었는데 시내 복익동에 거주하는 김수영(金洙瑩)이 1,000원, 청년친목회원 일동이 한 사람당 오전씩, 포백회사 매필에 5전씩 기연 ◈1923년 5월 21일 삼선평에서 춘기운동회 개최 ◈1923년 6월 경 학생 190명을 수용하기가 협착하여 유감이던 바 본면장 정규상씨는 1,500원을 대차하여 학교유직에 진력하던 중 3학년생 교실 5칸을 운동장편에 신건축하기 위하여 목하 공사에 분망 중 ◈1923년 10월 21일 삼선평에서 남녀학생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운동회 개최하였는데 종목은 순보경주(鶉步競走) 등 50종목 ◈1923년 11월 6일 일반부형과 유지 제인의 위안회 개최

  • ◈1928년 12월 삼산학교 200명 생도 경비가 없어서 난로를 못 피워 ◈1929년 시내 황금정에 사는 이원우씨는 삼산학교의 경비곤란을 듣고 과동할 석탄 전부를 기부 ◈1929년 2월 초 5일 삼산학교에서 삼산학교의 아동과 성북소년회원들이 신춘가극회 개회 ◈1931년 2월 삼산학교 보통학교로 승격. 인구가 늘고 학령아동이 증가함에 따라 보통학교 승격(교장은 김일엽의 남편 하윤실) ◈1938년 12월 삼산학교 분규 폭발. 교무주임 이상봉(李相鳳)이 빈약한 현재의 예산으로는 자격 있는 학교로 승격 되기가 곤란하니 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여 돈암정에 설립되는 대표적 학교로 만들자고 건의하매 12월 4일 동교에서 학부형회를 개최하였는데 갑론을박, 그리고 설립자와 정회측의 의견이 갈리어 결국 설립자와 후원회측의 의견대로 경성부에 기부하지 않기로 결의함 ◈1939년 2월 5일 한시부터 삼산학교에서 국민정신총동원성북정연맹 결성식을 거행 ◈1940년 5월 삼산교에서 시국영화회 개최 1940년 5월 23일 밤 7시에 삼산학교에서 조선군보도부 주최와 사상보국연맹 국민훈련후원회 후원으로 시국영화회를 개최

    ◈1928년 12월 삼산학교 200명 생도 경비가 없어서 난로를 못 피워 ◈1929년 시내 황금정에 사는 이원우씨는 삼산학교의 경비곤란을 듣고 과동할 석탄 전부를 기부 ◈1929년 2월 초 5일 삼산학교에서 삼산학교의 아동과 성북소년회원들이 신춘가극회 개회 ◈1931년 2월 삼산학교 보통학교로 승격. 인구가 늘고 학령아동이 증가함에 따라 보통학교 승격(교장은 김일엽의 남편 하윤실) ◈1938년 12월 삼산학교 분규 폭발. 교무주임 이상봉(李相鳳)이 빈약한 현재의 예산으로는 자격 있는 학교로 승격 되기가 곤란하니 학교를 경성부에 기부하여 돈암정에 설립되는 대표적 학교로 만들자고 건의하매 12월 4일 동교에서 학부형회를 개최하였는데 갑론을박, 그리고 설립자와 정회측의 의견이 갈리어 결국 설립자와 후원회측의 의견대로 경성부에 기부하지 않기로 결의함 ◈1939년 2월 5일 한시부터 삼산학교에서 국민정신총동원성북정연맹 결성식을 거행 ◈1940년 5월 삼산교에서 시국영화회 개최 1940년 5월 23일 밤 7시에 삼산학교에서 조선군보도부 주최와 사상보국연맹 국민훈련후원회 후원으로 시국영화회를 개최

  • 성북구에 설립된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기관으로 1907년 5월 봉시(奉侍) 황수연(黃壽延)이 설립하여 서당과 같은 형식으로 운영되다가, 1908년 5월 28일 황수연, 김수영(金洙瑩), 김기택(金基宅) 외 수 씨의 발기로 근대적인 학교인 삼산의숙으로 재창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8년 7월 18일자 잡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三山剏立 城北洞金洙榮氏가 該洞靑年子弟를 敎育하기 爲하야 私立三山義塾을 剏設趣旨가 如左하니 寳玉도 琢磨를 不加하면 光彩를 不發하고 杞榟도 培養을 不爲하면 良材를 難成하니 物皆然矣어니와 人爲甚焉하야 敎育으로 智能을 啓發하고 道德을 擴充後에야 健全人物을 始成지라 稽經往古하면 三代의 隆盛이 是를 尙이오 驗之古今하면 强國의 文明이 是를 懋이니 敎育의 功化가 豈不偉大며 豈不神靈哉아 惟我城北洞은 地脊民貧하야 由來生活不贍으로 敎育을 不遑하얏거니와 顧今文明競爭의 大風潮가 韓半島에 漸被하 全邦人士가 汲汲然憤奮하야 都野市村에 庠舍繼起히거 惟此一洞은 尙此寥寥하야 譬컨 春風流蕩에 園林이 紛葩獨히 陰崖寒谷과 如하야 發榮이 遲遲하니 엇지 慨歎者ㅣ아니리오 於是乎三山義塾이 始立하니 黑洞天中에 燈臺放光하고 迷渾渡頭에 蘇航이 浮出하얏도다 鳴呼라 從今으로 父兄은 敎導에 盡力하고 子弟學習에 熱心하야 進進不已하고 烝烝日上하 能力이 有하면엇지 乙支文德金庾信과 如人物이 不出하리오 惟我同志人士 協力勉勵하야 進步를 期圖지어다. (『황성신문』 1908.7.18., 잡보. ) 즉, 학교를 통하여 을지문덕·김유신과 같은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이 나라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구하고 진보된 문명국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삼산의숙은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외모도 근대적인 방식으로 가꾸도록 하였다. 1908년 10월 삼선평에서 가을운동회를 개최하였고, 학생의 머리를 단발로 가꾸도록 하였다. 학생을 학대하는 교사는 퇴출시켰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삼산의숙은 1909년 3월 4일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성북구에 설립된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기관으로 1907년 5월 봉시(奉侍) 황수연(黃壽延)이 설립하여 서당과 같은 형식으로 운영되다가, 1908년 5월 28일 황수연, 김수영(金洙瑩), 김기택(金基宅) 외 수 씨의 발기로 근대적인 학교인 삼산의숙으로 재창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8년 7월 18일자 잡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三山剏立 城北洞金洙榮氏가 該洞靑年子弟를 敎育하기 爲하야 私立三山義塾을 剏設趣旨가 如左하니 寳玉도 琢磨를 不加하면 光彩를 不發하고 杞榟도 培養을 不爲하면 良材를 難成하니 物皆然矣어니와 人爲甚焉하야 敎育으로 智能을 啓發하고 道德을 擴充後에야 健全人物을 始成지라 稽經往古하면 三代의 隆盛이 是를 尙이오 驗之古今하면 强國의 文明이 是를 懋이니 敎育의 功化가 豈不偉大며 豈不神靈哉아 惟我城北洞은 地脊民貧하야 由來生活不贍으로 敎育을 不遑하얏거니와 顧今文明競爭의 大風潮가 韓半島에 漸被하 全邦人士가 汲汲然憤奮하야 都野市村에 庠舍繼起히거 惟此一洞은 尙此寥寥하야 譬컨 春風流蕩에 園林이 紛葩獨히 陰崖寒谷과 如하야 發榮이 遲遲하니 엇지 慨歎者ㅣ아니리오 於是乎三山義塾이 始立하니 黑洞天中에 燈臺放光하고 迷渾渡頭에 蘇航이 浮出하얏도다 鳴呼라 從今으로 父兄은 敎導에 盡力하고 子弟學習에 熱心하야 進進不已하고 烝烝日上하 能力이 有하면엇지 乙支文德金庾信과 如人物이 不出하리오 惟我同志人士 協力勉勵하야 進步를 期圖지어다. (『황성신문』 1908.7.18., 잡보. ) 즉, 학교를 통하여 을지문덕·김유신과 같은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이 나라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구하고 진보된 문명국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삼산의숙은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외모도 근대적인 방식으로 가꾸도록 하였다. 1908년 10월 삼선평에서 가을운동회를 개최하였고, 학생의 머리를 단발로 가꾸도록 하였다. 학생을 학대하는 교사는 퇴출시켰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삼산의숙은 1909년 3월 4일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 ○ 궁벽한 산촌에 일렁인 변화의 바람 한편 경술국치 전후의 성북구는 주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성 밖 마을이었습니다. 일본이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당시 자료를 보면 주로 대지, 전답, 임야로 구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국권을 잃고 애국지사들이 동분서주하는 동안 성북구 역시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서울 중심에서 살짝 비껴간 동네는 일찍이 ‘학도촌’의 배후지로 기능을 하게 됩니다. 또한 신작로가 생기면서 도심과의 거리가 단축되고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사회·문화·교육계 인물들이 조용한 산촌마을을 아지트로 삼아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흐름의 포문을 연 계기가 1908년 삼산학교의 설립입니다. 성북구 최초의 학교로 설립 이후 본연의 기능인 교육은 물론 마을자치조직 운영과 운동회 등 각종 행사와 사회계몽활동을 전개했던 주요 기관이었습니다. 성북구의 삼산학교를 선두로 성북구 인근지역에 경성제국대학, 보성고보 등 조선인 학교의 이전 및 설립이 이어지면서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교육기관이 밀집된 동네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삼산학교를 이야기할 때 지나칠 수 없는 한 사람이 학교의 설립자 황윤명입니다. 고종의 내시였던 그는 왕이 하사한 사명인 ‘수연’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와 그의 아들 김수영은 고종과의 긴밀한 관계 하에 항일 의병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성북구의 독립운동가와 지역에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지요.

    ○ 궁벽한 산촌에 일렁인 변화의 바람 한편 경술국치 전후의 성북구는 주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성 밖 마을이었습니다. 일본이 토지 수탈을 목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당시 자료를 보면 주로 대지, 전답, 임야로 구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국권을 잃고 애국지사들이 동분서주하는 동안 성북구 역시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서울 중심에서 살짝 비껴간 동네는 일찍이 ‘학도촌’의 배후지로 기능을 하게 됩니다. 또한 신작로가 생기면서 도심과의 거리가 단축되고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사회·문화·교육계 인물들이 조용한 산촌마을을 아지트로 삼아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흐름의 포문을 연 계기가 1908년 삼산학교의 설립입니다. 성북구 최초의 학교로 설립 이후 본연의 기능인 교육은 물론 마을자치조직 운영과 운동회 등 각종 행사와 사회계몽활동을 전개했던 주요 기관이었습니다. 성북구의 삼산학교를 선두로 성북구 인근지역에 경성제국대학, 보성고보 등 조선인 학교의 이전 및 설립이 이어지면서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교육기관이 밀집된 동네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삼산학교를 이야기할 때 지나칠 수 없는 한 사람이 학교의 설립자 황윤명입니다. 고종의 내시였던 그는 왕이 하사한 사명인 ‘수연’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와 그의 아들 김수영은 고종과의 긴밀한 관계 하에 항일 의병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성북구의 독립운동가와 지역에 영향을 미친 주요 인물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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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삼산의숙’의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