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52] 시대의 억압을 벗어난 여성운동가 김일엽
작성자 오진아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습니다.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장에서 화재로 숨진 여성들을 기리며 근로 여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한 것을 기념하여 지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이른바 ‘신여성’이라 불리던 개항기 이후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여성의 날을 기념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정칠성 등이 이 신여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죠. 이중 김일엽은 성북구와 인연이 있는데요. 오늘은 그의 삶과 사상을 이야기해 보고자 압니다.

김일엽의 본명은 김원주입니다. 일엽(一葉)이라는 이름은 일본 유학 중 만난 춘원 이광수가 김원주의 글을 보고 찬탄하면서 당시 일본에서 유명했던 여성 시인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을 따와 아호를 지어준 것이 필명이 되었습니다. 김일엽은 1896년 6월 9일 평안남도에서 목사인 아버지 김용겸과 어머니 이마대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밑으로 4명의 동생이 태어났지만 모두 요절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교육에 열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생존시에 나에게 부도(婦道)와 여직(女職)에 대하여는 도무지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으셨나이다.
어머니는 나를 여자 구실은 안 시키고, 어떤 표준도 없이 그저 남의 집 열 아들 부럽지 않게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여성 아닌 남자 대장부를 만들려는 것이었나이다. 외할머니나 이모들이 그런 어머니를 보고, 계집애를 가르치지 않고 뛰어다니게만 두고, 시집보낼 옷가지 하나 장만 아니 하면 어찌할 거냐고 하면, 어머니는 “당신네들처럼 바리바리 싣고 가서 종노릇만 해야 하오?”하고 핀잔해 버리었나이다.
- 김일엽, 2002, 『청춘을 불사르고』, 김영사, 28쪽 -
『청춘을 불사르고』 초판(1962) 표지Ⓒ삼성출판박물관

『청춘을 불사르고』 초판(1962) 표지Ⓒ삼성출판박물관

김일엽은 한학자에서 목사가 된 아버지 덕에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역시 신문물을 접한 어머니 덕에 여성이 학교를 다니는 일이 드물었던 시절 소학교를 다니며 근대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양친이 모두 일찍 돌아가신 뒤에도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이화전문을 졸업하고, 1차 일본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무렵 첫 번째 남편인 이노익을 만나 결혼합니다. 이노익은 나이가 많고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지만, 연희전문에서 화학 교사로 재직하고 있어 김일엽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노익의 지원으로 김일엽이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그는 귀국하자마자 나혜석, 박인덕, 김활란 등이 ‘청탑회(靑塔會)’를 조직하여 주 1회 모임을 가지며 잡지창간을 준비하여 1920년 2월 『신여자』라는 여성 잡지를 창간합니다. 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 빌링스부인(Mrs. Billings)였지만 실제 편집은 당시 주간인 김일엽이 하였다고 합니다. 김일엽은 창간사에서 『신여자』의 발간 이유를 밝힙니다.

사회를 개조하려면 먼저 사회의 원소인 가정을 개조해야 하고 가정을 개조하려면 가정의 주인 될 여자를 해방하여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도 남같이 살려면, 남에게 지지 아니하려면, 남답게 살려면, 전부를 개조하려면 여자 먼저 해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동등이란 헛문서만 찾으려 함도 아니고 여존(女尊)이란 헛글자만 쓰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회를 위하여, 일하기 위하여, 해방을 얻기 위하여, 남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일하는데 조금이라도 공헌하는 바 있을까 하여 나온 것이 우리 『신여자』입니다.
- 김일엽, 1920, 「창간사」, 『신여자』 창간호-
『신여자』 창간사 Ⓒ국립중앙도서관

『신여자』 창간사 Ⓒ국립중앙도서관

김일엽은 『신여자』에서 자유, 권리, 의무 등 모든 면에서 성별의 제한 없이 평등해야 함을 주장하였고, 여성의 계몽과 사회참여, 교육을 촉구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습니다.

우리 신여자는 이러한 자각 밑에서 우리 조선 여자 사회에 고래로 행하여 내려오던 모든 인습적 도덕을 타파하고 합리적 새 도덕으로 남녀의 성별에 제한되는 일 없이 평등의 자유, 평등의 권리, 평등의 의무, 평등의 노작(勞作), 평등의 향락 중에서 자기발전을 수행하여 최선한 생활을 영위코자 한다.
- 김일엽, 1920,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신여자』 2호 -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국립중앙도서관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 Ⓒ국립중앙도서관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잡지 『신여자』는 총독부가 잡지에 실린 「청상의 생활」이라는 작품이 현모양처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발간금지’ 처분을 내리면서 4호를 끝으로 폐간됩니다. 하지만 여성운동과 여성의 사회의식을 북돋우는데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잡지가 폐간된 뒤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남편 이노익에게 이혼을 선언합니다. 이혼 직후 오다 세이죠와 사귀면서 아이도 낳았지만 오다의 집에서 격렬히 반대하면서 헤어지게 되었고, 이후 노월 임장화과 동거하는 등 자유로운 연애를 합니다. 이러한 행보에 세간의 비판과 질타를 받았지만 김일엽은 자신의 연애관에 이렇게 밝힙니다.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람은 신선미가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와 한 번 이라도 성적 관계가 있었다하면 그 여자는 벌써 정조를 더럽힌 저린 여자라 하였습니다. 그의 정조란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 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결코 그러한 고정체가 아닙니다.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정조가 있습니다. 만일 애인에게 대한 사랑이 소멸된다고 가정하면 정조에 대한 의무도 소멸될 것입니다.
- 김일엽, 「나의 정조관」, 『조선일보』(1927.01.08.) -

그리고 즈음에 그의 삶 후반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불교와의 인연을 가지게 됩니다. 1928년 그는 『여시(如是)』라는 잡지사에 왕래하다가 근처에 있던 『불교』지의 사원들과 알게 되면서, 『불교』지에 문예 작품을 기고합니다. 이 같은 인연을 시작으로 『불교』지의 편집 책임자였던, 권상로에게 한문을 배우며 불교를 알게 되고 불교사의 사원이었던 백성욱(白性郁, 1897-1981)과 만나게 되는데요. 백성욱은 서구에서 불교를 수학한 엘리트로 서울 돈암동에 무호산방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기고활동과 강의활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김일엽은 백성욱을 무척 신뢰하게 되었고, 결혼까지 생각하였으나 백성욱이 자신의 수행을 위해 ‘인연이 다하여 떠난다’는 요지의 편지만 남기고 떠납니다.

백성욱과 헤어지고 얼마 안 된 1929년 8월 김일엽은 하윤실과 결혼합니다.
『신여성』 7호(1933)에 실린 김일엽과 하윤실 Ⓒ국회도서관

『신여성』 7호(1933)에 실린 김일엽과 하윤실 Ⓒ국회도서관

『신여성』 7호(1933)에 실린 성북동 김일엽의 집Ⓒ국회도서관

『신여성』 7호(1933)에 실린 성북동 김일엽의 집Ⓒ국회도서관

하윤실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보성고보에서 선생으로 있었던 재원으로 만해 한용운을 따르던 항일 비밀결사체인 만당의 당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윤실이 김일엽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산학교(현 성북초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를 인연으로 삼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윤실과의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는 않았는데요. 결혼을 통한 대리만족으로는 자신의 이상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간에서 의심하는 X과 X氏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마는 절대로 특별한 사랑의 관계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불행히 이때 연인이 없었다. … 그러면 지금까지의 행동은 누구의 유혹도 아니오 또는 일시적의 허영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든지 나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또는 나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하여 나는 모든 속상(俗尙)의 비난을 무릅쓰고 나갔다. … 나를 완성하자. 그리고 내 자아 가운대서 엄숙한 인생을 창조하자. 나를 자위할 만한 이쁜 이상을 찾고 내 인격을 존중히 해 줄 지식을 닦아라. 그리고 내 감정을 보드럽게 해줄 꽃다운 정서를 기르자.
- 김일엽, 「一切의 世俗을 斷하고」, 『삼천리』 6권 11호(1934.11) -

결국 1933년 하윤실과 이혼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기 위해 출가하여 수행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일찍이 수덕사에서 우연히 승려 만공의 법문을 들었던 것을 인연으로 수덕사에 머물면서 만공선사 문하에서 출가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덕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김일엽이 말년에 성북동의 성라암(성북구 성북로31길 27)을 오가며 『청춘을 불사르고』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자 세간에서 이목을 집중했습니다.(오다 세이죠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태신(법명 일당, 승려이자 화가)도 1988년 출가해 성라암에 주석하다 2014년 입적)
성라암(2019)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라암(2019)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북동 우정의 공원에 있는 김일엽 벤치 Ⓒ 성북문화원

성북동 우정의 공원에 있는 김일엽 벤치 Ⓒ 성북문화원

어떤 이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사랑에 실패하고 입산한 글 잘 쓰는 비구니’라며 그의 삶을 일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 교육이 흔치 않았던 시기 평등한 교육을 받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교육과 사회활동을 역설하고 동시대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작품활동을 하며, 여성의 정절만 강조하고 이에서 이탈하면 비난받던 시대에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솔직히 드러내며, 자유연애론과 성해방론을 주장했던 그의 치열했던 삶을 이러한 단어 몇 개들로 일축할 수 없습니다. 그가 평범한 시대를 벗어나 튀어버린 얼룩이 아닌 부자유한 시대에 자신만의 삶을 개척한 빛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김일엽, 2002, 『청춘을 불사르고』, 김영사.

김우영, 2008, 「김일엽 문학과 자아의 의미」,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방민호, 2006, 「김일엽 문학의 사상적 변모 과정과 불교 선택의 의미」, 『한국현대문학연구』 20, 한국현대문학회.
서정자, 2013, 「일엽 김원주·『신여자』·그의 사상 다시읽기」, 『나혜석연구』 2, 나혜석학회.
김광식, 2015, 「김일엽 불교의 재인식」, 『불교학보』 72,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평인, 「일엽스님 선문집(禪文集) 다시 본다…30주기 맞아 재발간」, 『동아일보』(200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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