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1] 3.1운동 101주년 기념 '주제로 보는 성북: 독립운동' 페이지 공개
- 올해는 3.1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성북문화원에서는 <성북마을아카이브> 홈페이지에 '독립운동' 주제를 새롭게 준비하였습니다. 도심과 가깝고 교통편이 편리했으며, 주변에 교육기관이 많은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성북구는 수많은 독립지사들과 연을 맺었습니다. 성북구와 인연이 있는 인물들의 독립운동은 의병활동부터 의열 활동, 3.1운동, 무장투쟁, 임시정부 활동 등 거의 모든 유형의 독립운동을 포괄합니다. 해방 이후에도 성북구는 독립지사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링크를 따라가면 만나는 페이지에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성북의 장소, 사건, 그리고 많은 독립지사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부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그리고 독립기념관으로부터 제공받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등 여러 기관의 협조를 통해 자료들을 더욱 풍성하게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료들에는 비단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행적 또한 담겨있습니다. 여성과 남성, 양반과 평민, 서적행상과 타자수(Typist) 등 성별, 신분, 직업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이 한마음으로 독립운동이라는 물결에 크고 작은 물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이번 주말에 <성북마을아카이브>를 통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용기와 희생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이육사
- 종암동에서 거주한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5년(혹은 1926년)에 중국에 건너갔다가 1927년 여름 중국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1년 7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는 '이육사'라는 필명의 유래가 되었다. 1932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육생으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3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군사활동이 아닌 문학활동을 시작하였고, 1939년 종암동 62번지로 이사하여 이 곳에서 「청포도」, 「절정」 등 대표작을 발표하였다. 그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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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균
- 시인이자 실업가이다. 1926년 『중외일보』에 「가신누님」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대 『시인부락』과 『자오선』의 동인으로 활동을 하였으며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가 당선되면서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모더니즘 시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6.25전쟁 이후 집안 사정으로 건설 사업을 운영하였다. 그는 1980년대 초부터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시집 『추풍귀우』(1986), 『임진화』(1989)는 성북동에 거주했던 시기에 간행한 것으로 여기에 수록된 작품 중 일부에는 성북동과 그의 집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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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목월
- 시인, 교육가이다.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박두진·조지훈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하며 청록파시인으로 활동하였다. 대표작품으로 「청노루」(1946), 「나그네」(1946) 등이 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향토적 색채가 가미된 서정시였으나, 6.25전쟁 후에는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게 된다. 수필 분야에서도 일가의 경지를 이루어 『구름의 서정』(1956), 『토요일의 밤하늘』(1958), 『행복의 얼굴』(1964) 등이 있다. 돈암동에 있던 서라벌예술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종암동에는 박목월의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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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창
-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3월 6일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보수과에 입사하여 기술원으로 근무했다. 1942-1943년 단파수신기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된 조선어 방송 등을 청취하였다. 내용은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측이 승리할 것이므로, 연합군이 일본을 공략할 때 조선 동포들도 국내에서 호응하여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송 내용을 1942년 12월 성북정에 거주하는 조선방송협회 회원 김병욱에게 전달하고, 1943년 2월 20일경에는 성북정에 거주하는 동료 노현중에게 전달하였다. 1943년 7월 4일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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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