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88] 길음동의 옛 동네를 기억하며, 김소진의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작성자 김나현
11월 17일에 올겨울 첫눈이 내렸다는데, 다들 흩날리는 작은 눈송이들을 보셨을까요? 눈이 될 준비를 하고 있던 눈송이들이 겨울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잠시 찾아온 것 같습니다. 한겨울에 다다르고 있는 11월 말입니다. 오늘 금도끼에서는 하이얀 눈 속을 파헤치듯 길음동에서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는 소설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김소진의 단편 소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을 살펴보면서 이 소설에 담긴 미아리 재개발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작가 김소진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김소진은 1963년 철원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67년, 미아리고개 넘어 정릉 천변의 산동네였던 길음동으로 이사합니다. 김소진은 미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중학교를 거쳐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는데요. 미아초등학교는 길음동에, 서라벌고등학교는 돈암동에 있었던 학교로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김소진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성북구에서 보냈던 것 같습니다. 1982년 서울대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1991년 단편 『쥐잡기』가 경향신문 신촌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합니다. 이후 김소진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1993), 『장석조네 사람들』(1995), 『자전거 도둑』(1996)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며 1990년대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합니다. 김소진은 본인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소설을 상당수 집필했는데요, 어린 시절을 보낸 미아리 동네와 동네의 사람들이 창작의 원천이자 주요한 제재였습니다. 『고아떤 뺑덕어멈』(1993), 『장석조네 사람들』(1995), 『길』(1996), 『신풍근배커리 약사』(1996), 『70년대 민중의 마지막 꿈』(1997) 등 많은 작품에서 미아리와 미아리를 살아간 사람들을 담아냈습니다.

김소진이 어린 시절을 보낸 길음동 일대는 통상 미아리로 불렸던 것을 잠시 짚고 가려고 하는데요. 1950년 성북구 미아리가 미아동으로 개칭되었고 1959년에 미아제1동이 길음동이 되지만 1950년 이전 미아리에 속해있었던 여러 동이 계속해서 같은 생활권으로 인식되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묶어 통상 미아리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한편 1973년에 도봉구가 분리·신설되면서 길음동은 도봉구 미아동이 되는데요, 1975년 다시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길음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습니다. 김소진은 당시로서나 현재로서나 행정구역상으로 길음동에 거주했지만, 앞선 설명과 같은 관습으로 그 또한 자신이 살았던 곳을 미아리로 불렀던 것 같습니다.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수록된 『신풍근 배커리 약사』 표지(문학동네, 2002) ©국립중앙도서관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가 수록된 『신풍근 배커리 약사』 표지(문학동네, 2002) ©국립중앙도서관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1997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자 김소진이 마지막으로 펴낸 작품으로 이 소설 또한 미아리 판자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90년대 중후반 미아리 일대가 재개발되는 일을 중심으로, 재개발이 진행되는 현재 시점과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인 과거 시점이 번갈아 나타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소설 속 주인공 ‘나’는 보일러 수리값을 요청한 셋집의 일을 처리하면서, 재개발 시세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고자 어릴 적 살았던 미아리 동네에 들르기로 합니다.

“새것으로 해도 사십오만원이면 뒤집어쓰고 남는다는데 뭔 말라빠진 중고가 사십만원씩이야 응? 이놈의 집이 아주 작정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야. 구 경계선인 한길 너머 미아동 쪽으로 거진 철거가 끝나서 집집마다 헌 보일러가 남아돌아 너도나도 갖다 쓰라고 난리들이라고 그러더구먼.”(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문학동네, p.293)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머니도 짐짓 내가 한번 재개발을 앞둔 그 동네를 후딱 살피고 왔으면 하는 눈치였다. 서너 달 전에 본격적으로 재개발 승인이 떨어지자 그곳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심지어는 현대부동산인가 하는 데서 어머니 앞으로도 딱지를 넘길 의향이 없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넉 장’을 받고 매매를 하기로 전화로 약속까지 했다가 내가 말리는 바람에 취소한 적도 있었다. 마침 임씨 아저씨 아들인 창이형이 재개발조합에서 간사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내가 평소 가까이 지내온 창이형을 만나면 그곳 분위기나 시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어듣고 오지 않을까 내심 짐작하는 모양이었다.”(김소진, 위의 책, p.294)
‘나’의 어머니는 셋집이 있는 곳 건너편 미아동이 재개발로 인한 철거가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미루어 보았을 때, 셋집의 건너편은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미아동 일대, 셋방은 길음 뉴타운 인근으로 추측됩니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보냈을 미아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보자면, 미아리는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집단 거주한,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1957년, 미아리에서는 공동묘지가 외곽으로 이전되고 피난민 정착촌을 만들어졌는데, 사대문 안에서 수재나 화재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미아리 정착촌 주변으로 모여들어 무허가 주택을 세웠습니다. 미아리는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고, 특히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도심에서 쫓겨난 수많은 사람들의 터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주택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무허가 판자촌이었던 미아리 달동네에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했고, 소설 속 상황처럼, 재개발을 위해 달동네의 판잣집들이 철거됩니다.
1990년 미아동과 길음동의 모습. 왼쪽 부근이 현재 길음뉴타운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서울역사편찬원

1990년 미아동과 길음동의 모습. 왼쪽 부근이 현재 길음뉴타운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서울역사편찬원

1995년 길음역 7,8번 출구 부근의 길음동. 길음뉴타운 재개발 이전의 모습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95년 길음역 7,8번 출구 부근의 길음동. 길음뉴타운 재개발 이전의 모습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경의선 기차를 타고 나와 신촌에서 미아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익숙해지면질수록 내 머릿속에는 그날 새벽의 모습이 좀더 선명히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그 종이처럼 얇은 기억이 나를 이렇게 사라져가려는 동네로 밀고 가는 것이 아닐까? (중략) 나는 머리통에 난 혹을 더듬는 기분으로 손끝으로 옆머리를 짚으며 기억의 끈질김에 대해 새삼 진저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따져보니 이십 년도 더 바랜 기억이었다. 물론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미아리 셋집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 전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한 지붕 아홉 가구의 장석조네 집에 대한 기억이었다.” (김소진, 위의 책, pp.294-295)

‘나’는 오랜만에 미아리로 향하면서 한 집에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아홉 가구가 살았던 ‘장석조네 집’을 떠올리고, 그곳에서 있었던 초등학생 시절, 어느 날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장석조네 집’은 김소진의 또 다른 소설인 『장석조네 사람들』(1995)에서 자세히 묘사되는데요, 당시 김소진이 살았던 판자촌의 집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히 보여집니다.

“한 지붕 아래 아홉 개의 방이 한 일一자로 늘어서 있어 동네 사람들이 기찻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장석조씨네 집터는 옆의 행길보다 석 자 정도는 높게 다져져 있었다. 바로 옆으로는 아무렇게나 고랑을 파 놓은 시커먼 시궁창 물이 해자垓子처럼 휘우듬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직 맨홀을 깔지 않았기에 뒷돌산 채석장에서 옮겨온 두툼하고 길다란 화강암 두 개를 시궁창 위로 쓰러뜨려 시늉만으로 다리 노릇을 하게 걸쳐놓았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pp.9-10, 문학동네)

“이층 방은 흔히 루핑이라고 불리는 시커먼 기름종이를 지붕으로 삼고 있었다. 기찻집의 제일 안쪽 끄트머리에 붙은 방은 유일하게도 지붕이 슬래브였다. (중략) 그러나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라치면 잘 그을린 감자 껍질처럼 훌꺼덕 벗겨져버릴 듯이 엉성한 날림집이었다.”
(김소진, 위의 책, pp.47-48)
1972년 성북구 무허가 건물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1972년 성북구 무허가 건물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1975년 정릉천변의 무허가 주택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1975년 정릉천변의 무허가 주택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다시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나’가 떠올린 어느 날의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설이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밤중에 잠에서 깹니다. 소변이 마려웠기 때문인데요, 평소 같았으면 요강을 썼겠지만 설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사기가 깨지거나 금이 가면 끔찍한 일이 생긴다고 믿는 어머니가 요강을 감추어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밖에 있는 변소에 가서 일을 본 ‘나’는 걸어 나오다가 그만 눈 속에 감춰져 있던 연장을 밟습니다. 그리고 연장은 넘어지면서 조그마한 단지를 깨뜨립니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다음날 아침 제일 처음 들렀다가 한의원으로 가라는, 사실상의 진료 거부를 당한 신풍의원 맞은편의 동사무소 옆 골목길을 타고 꾸역꾸역 올라가다보니 길음초등학교 담벼락을 끼고서 마을버스 종점인 콘크리트 물탱크 밑 차부까지 올라갔다. 구 경계선인 한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려니까 왼쪽으로는 임마누엘교회 하나와 구멍가게 한 채를 빼놓고는 이미 철거가 다 끝난 폐허의 등성이뿐이었다.”(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문학동네, p.300)
‘나’의 아버지가 진료를 거부당했다는 신풍의원(길음동 633-14)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성북마을아카이브

‘나’의 아버지가 진료를 거부당했다는 신풍의원(길음동 633-14)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성북마을아카이브

미아리에 도착한 ‘나’는 어린 시절의 회상을 잠시 중단합니다. 그리고 재개발을 위한 철거로 교회와 가게 하나만이 남은 채 옛 건물들이 무너져있는 것을 목격합니다. ‘나’는 이곳을 ‘폐허의 등성이’이면서 ‘인적이 끊긴 적조한’ 곳으로 느끼지만, 오랜만에 만난 동네 사람들은 ‘나’가 느끼는 적적함과는 반대로 묘한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나’가 재개발 정보를 얻고자 찾았던 창이 형 역시 전과 다른 활력을 풍기고 있었는데, 몸이 약하고 무직자였으며 결혼도 하지 못했던 창이 형이 재개발조합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회인이자, 연립주택 반지하 방에 살림을 차린 가장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사라져가는 어린 시절의 공간에 대해 자신과 사람들의 반응이 상반되는 것을 느끼며, 꺼내다 만 기억의 뒷조각을 다시금 붙잡습니다.

“나는 으스스 끝에 몰려온 현훈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캄캄함 속에서 오래 전에 내가 깬 짠지 단지가 두둥실 떠올라주었다. 나는 아직 다 쓰러지지 않은 길가의 전봇대에 시린 이마를 대며 중얼거렸다. 가자.....! 그 한마디에 동화 속 같던 온 세상이 한 순간에 흰빛 절망감의 구렁텅이로 변하던 장석조네 집 마당에서 어쩔 줄 모르던 소년의 모습이 환하게 떠올랐다.”(김소진, 위의 책, pp.308-309)

연장으로 단지를 깨뜨린 어릴 적의 ‘나’는 깨진 단지를 눈사람 속에 숨기는 기발한 생각을 해냅니다. 하지만 오후의 햇살이 들면 눈사람이 녹아 깨진 단지가 발견될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날 하루 가출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길음동의 여러 곳을 돌아다닙니다.

“그 길로 처음 볼 땐 한복집인 줄 잘못 알았던 길음천변의 음산한 텍사스 거리를 겁 없이 걸어다녔다. 그런 용기를 준 것은 허기진 배와 눈사람 속에 묻힌 짠지 단지다. 텍사스 거리의 한쪽 끝에 있는 튀김집 거리를 지날 때는 싸구려 기름 냄새 때문에 뱃속의 내장들이 요동을 치다 못해 밖으로 꾸역꾸역 뛰쳐나올 듯했다. 하지만 설에도 집에 가지 못한 손톱이 긴 매춘부들이 건네주는 오징어 튀김의 유혹에 굴복하진 않았다. 나중에 떨어질 매와 꾸지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것은 다 더렵혀져도 자존심만큼은 더럽힐 수 없었다.”(김소진, 위의 책, p.311)
하월곡동 성매매 집결지 입구 ©성북마을아카이브

하월곡동 성매매 집결지 입구 ©성북마을아카이브

미아리 텍사스촌, 길음2동 성매매 집결지 골목 ©서울역사아카이브

미아리 텍사스촌, 길음2동 성매매 집결지 골목 ©서울역사아카이브

‘나’는 길음 천변의 텍사스 거리를 걷다가 해가 지자 집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서 ‘나’가 갔던 텍사스 거리는 하월곡동 88번지에 있는 성매매 집결지입니다. 1968년, 종로 3가의 성매매 집결지가 철폐되면서 도심에서 쫓겨난 업소들이 미아리로 모여들었고, ‘미아리 텍사스’로 불리는 성매매 집결지를 형성되었습니다. 정릉천 개천가를 따라 500여 미터 늘어서 있는 선술집들이 있는 형태였는데, 1978년, 월곡천과 정릉천의 복개공사로 도로가 들어서면서 현재는 월곡동 쪽에만 서울의 마지막 성매매 집결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 딴 데는 안들르고?" "오다가 저기 전에 살던 기찻집이라고 있어요. 옛날 침례교회 밑에 말예요." "으응, 있었지." "거기 뭐 좀 볼 게 있어서 들어가려다 개조심이라고 씌어 있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나왔어요. 보니깐 너무 바뀌었어요. 지붕도 기와에서 슬래브로 바뀌고 마당 쪽까지 집을 새로 지어서 반지하까지 치면 이층이나 다름없대요."”(김소진, 위의 책, p.313)

어린 시절의 회상을 끝낸 ‘나’는 창이 형과의 대화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살아서 기찻집이라고 불리었던, 주인인 장석조의 집이면서도 ‘나’의 집이었던 곳이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신식 집으로 바뀌어 있음을 창이 형에게 토로하지만, 창이 형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빈집에서 급히 볼일을 해결하다가 문득 울고 싶은 감정에 휩싸입니다. 어린 시절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들이 재개발로 사라지는 속에서, 그리고 아무도 그 공간이 담고 있는 기억들을 그리워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자신을 지탱했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나는 왜 구린내가 진동하는 깨진 항아리 속에서 똥을 누눈데 울고 싶어졌을까? 늙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이제 맛 초콜릿 맛을 안 네 살배기 아이, 이렇게 세 사람의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 비록 속눈썹이나마 이렇게 주책없이 적셔서야 되겠는가, 아아. 하지만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육체인 이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이렇게 감성적으로 만드는 게. 이 동네가 포크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깎여가면 내 허약한 기억도 송두리째 퍼내어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기껏 똥을 눌 뿐인데……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데…… (중략)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주위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걷기 시작했다.”(김소진, 위의 책, p.315)
2019년 길음뉴타운 전경(1) ©서울연구원

2019년 길음뉴타운 전경(1) ©서울연구원

2019년 길음뉴타운 전경(2) ©서울연구원

2019년 길음뉴타운 전경(2) ©서울연구원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재개발이라는 도시화의 논리로 옛 동네가 사라져 가는 것을 목격한 개인이, 자신을 잃는 것 같은 상실감과 슬픔을 느끼는 이야기입니다. 김소진은 이 소설을 통해 과거의 기억들, 즉 역사가 개인을 지탱하는 힘이며 그렇게 개인을 버티게 해주는 기억이 ‘육체’적이고 실체적인 공간과 이어져 있음을 보입니다. 현재, 김소진이 살았던 미아리 산동네와 그 주변의 풍경들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으며 과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김소진과 같은 소설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지닌 공간의 소중함을 알고, 이들을 여러 형태로 기록하고 또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를 끝으로 성북마을아카이브의 금도끼는 잠시 방학 기간을 가집니다. 성북구와 관련된 재밌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잘 준비하여 내년 초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과거를 추억하고 앞으로의 추억을 만들어낼 각자의 겨울 방학을, 평온한 연말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함께 보면 좋은 사이트
성북마을발견+문학 (https://archive.sb.go.kr/litmap/)

- 참고문헌 및 사이트
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문학동네
김소진, 2002, 『장석조네 사람들』, 문학동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강성봉 외 6인, 2014, 『미아리고개』
성북마을아카이브(https://archive.sb.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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