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189] 해방전야 – 이육사와 한용운
작성자 박수진
2024년이 밝았습니다. 갑진년, 청룡의 해라고 합니다. 청룡은 동쪽을 의미하니,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희망찬 이야기로 2024년 첫 금도끼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올해 기억해야 할 두 명의 인물을 기억할 두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육사와 한용운입니다.

두 분 모두 유명한 인물이니 여기서 따로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분 모두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노력한 독립지사이자, 그 염원을 아름다운 우리말 시로 표현한 시인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성북구에 거주했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한용운은 1933년부터 입적하실 때까지 성북동 심우장에 머물렀고,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성북구 종암동 62번지에 살았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인연이고, 공통점일 것입니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된 이육사의 사진(좌), 일제의 감시대상인물 카드 속 한용운(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첨부된 이육사의 사진(좌), 일제의 감시대상인물 카드 속 한용운(우)

하지만 불행한 공통점도 있습니다. 1944년에 순국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순국하였고,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일 자신이 살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것이죠. 생전 두 분이 썼던 아름다운 시를 생각하면, 독립의 기쁨은 또 얼마나 환희로 가득한 시어로 담았을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두 분이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은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치안유지법이라는 악법으로 일본제국주의를 조금만 비판해도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도 한창이었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무모한 전쟁인 태평양 전쟁으로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의 젊은이들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어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독립은 요원해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나라를 잃은 지도 34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시점 16살이었던 청년이 50이 되어가던 나이었습니다. 이육사는 1910년 고작 6살, 한용운은 31살이었습니다. 1944년 한 명은 40살이 되었고, 다른 한명은 65살이 되었습니다. 40살 청년은 별로 기억도 없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짧은 평생을 헌신했고, 65살 노인은 여전히 언제 올지 모르는 희망의 끊을 놓지 않았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까이 온다는 희망, 자신이 옳은 길을 간다는 믿음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지 않았을까요?

올해는 이 두 분이 순국한지 8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어디 두 분 뿐이겠습니까. 이재유, 김마리아, 김두진, 정윤희 등의 독립지사들이 1944년에 순국했습니다. 그들의 삶과 행동을 기억하는 것으로 2024년을 맞이한다면, 한 해의 시작이 조금은 뜻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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