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1935년 숭인면 정릉리 530번지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고향 정릉에 살고 있는 K는 정릉2동 공청회관의 소속 회원으로, 한 초등학교의 교통안전지킴이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2년 여름, 성북구 주민기록가 S는 정릉2동 공청회관에서 K를 만났다. 이 인터뷰의 영상 기록에는 K의 초등학교 시절 기억이 짤막하게 담겨 있다. 215번째 금도끼는 이 기록의 한 대목을 가져와 1945년 8·15해방 직전 식민지 교육의 실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K는 S초등학교 8회 졸업생이다. 194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녔다. 정릉리에서 S국민학교까지는 약 2km. 당시 기준으로는 그리 멀지 않은, 걸어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그러나 K에게 혼자서 등교한 기억은 많지 않다. 마을 아이들이 같은 시간에 나와서 한데 모인 다음 줄을 서서 학교까지 가야 했다. 상급생이 앞서서 인솔하면 마을 학생들이 뒤따라 걸었다. 그러다가 하늘에 폭격기가 떴음을 알리는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즉시 학생들은 가던 길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흩어져야 했다. 경보가 그치면 다시 모여 줄 서서 부지런히 걷고 달려 학교에 갔다. 공습경보는 자주 울렸다.
S국민학교는 일본 식민지 당국이 운영한 공립학교였다. 1940년대 초 K가 이 학교에 다닐 때에는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따라 학교에서는 반드시 일본말을 써야 했다. 수업할 때는 물론 쉬는 시간이나 변소(화장실)에 갈 때도 일본말로만 말해야 했다. 한국말은 쓰면 안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에 해당하는 일본말을 모르면 손짓, 발짓으로라도 해야지 한국말은 쓰면 안 되었다. 교사들은 한국말로 말하는 아이를 보면 언제든 옆에 있는 급우가 그를 때리라고 했다. 아이들은 교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 일을 직접 보거나 보고 받은 교사는 때린 아이에게 ‘요카타(良かった, 한국말로 ‘잘했다’는 뜻)’라고 칭찬했다.
한국말을 사용하지 못했으니 한국이름도 사용할 수 없었다. 교사는 물론 거의 모든 학생들이 창씨개명을 해 한자 넉 자로 된 일본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K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하리모도 센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일본인들이 받드는 신에게 참배하는 것은 일상 의례였다. 아이들이 몸을 굽혀 절해야 하는 ‘신적’ 대상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은 교실 출입문 바로 옆에 걸려 있었다. ‘가미다나(神棚)’라고 했다. K는 여느 학생들처럼 거기에 절한 후 손뼉을 두 번 치고 자리로 가 앉았다.
K의 국민학교 시절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까까머리 아이였던 K의 초등학교 시절은 공습경보, 일본말과 일본이름, 일본신 참배로 기억되고 있었다. 식민통치와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학교에서 어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때의 기억을 말하는 인터뷰 영상 속 K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간 것만 양 약간의 장난기마저 섞인 눈빛으로 시종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8·15 광복은 한국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이다. 그런 광복이 정릉리의 소년 K에게는 숨통 트인 학교생활을 의미했다. 새학기부터 K는 학교에 가서 아침마다 알지도 못하는 신상에 머리 숙이지 않아도 되었다. 친구들과 서로 감시하지 않아도 되었다. 교실에서 서로의 진짜 이름을 부르며 자유롭게 말해도 누구 하나 그를 일러바치거나 처벌하는 자 없었다.
(※ 이 이야기는 1940년대 일제 식민교육에 관한 일반적인 정보를 담고 있어 고유명사를 영문 이니셜로 표기했습니다.)
#정릉리 #학교 #창씨개명 #광복절 #성북마을아카이브
[참고 인터뷰 영상] 2022 한국문화원연합회 디지털 생활사 아카이빙 <동소문 밖 도시 개발과 주민들의 이야기> “정릉동 토박이의 삶” https://ncms.nculture.org/story-of-our-hometown/story/11523
1934년 교동공립보통학교의 수업 모습 (출처: 서울중부교육청 중부교육디지털박물관 홈페이지)
1937년 교동공립보통학교에서 ‘일왕 부부의 초상화’을 ‘봉대’하는 모습 (출처: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