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와 민구는 삼선교 역에서 내려 오른편으로 개천을 끼고 한참 걸어가다가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 언덕에는 일제 시대에 방공굴로 팠던 구멍이 삥 돌아가며 예닐곱개 뚫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방공굴에는 모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가마니를 붙여 놓은 문 틈으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저녁 먹고, 너의 집에 갈게." 민구가 그렇게 말하면서 세 번째 방공굴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다. 바로 그 민구네 방공굴 옆으로 좁다란 길이 언덕 위로 하나 뻗어 있다. 그리고 그 길이 뻗어 올라간 언덕 위에는 판잣집이 세 채 서 있다. 그 세 채 가운데 한 채가 은주네 집이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 있는 집이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 김내성, 2002, 『쌍무지개 뜨는 언덕』, 맑은소리. 57쪽.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암석미巖石美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假態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思想史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轉石不生苔라고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 1장이다.
- 조지훈 외, 2010, 『돌의 미학』, 나남. 20쪽.
위 작품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작품의 저자가 성북구에 거주했다는 것, 둘째는 성북구가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위치가 좋고 자연경관이 뛰어났던 성북구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였습니다. 특히 한국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여러 문인이 성북구에 거주하거나 방문하여 이곳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작품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북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많이 탄생하였고 여러 예술가가 함께 협업하여 중요한 문학사적 자료를 남기기도 하였는데요. 이러한 문인들의 작품과 자료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성북동에 위치한 성북근현대문학관입니다.
성북근현대문학관
성북근현대문학관
성북근현대문학관은 지역에 거주했던 문인들과 성북구를 배경으로 담아낸 문학작품을 비롯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문학적 소통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올해 3월, 여러 문학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북동(성북로21길 24)에 개관하였습니다. 개관식에는 문인들의 유족이 참석하여 자리를 더욱 빛내주었습니다. 한용운 선생의 외손자인 정재홍 님이 축시를 낭송하였고, 이육사 선생의 외동딸인 이옥비 여사님의 축사도 이어졌으며 이 밖에도 한용운 선생의 딸 한영숙 여사님도 함께 자리하여 문학관의 개관을 축하해주었습니다.
성북근현대문학관 개관식
한용운 선생의 외손자 정재홍 님
이육사 선생의 외동딸 이옥비 여사님
문학관은 대지 570㎡, 연면적 447.63㎡의 3층 건물로 지하 1층 자료열람 및 교육실, 1층 기획전시실, 2층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한용운, 이태준, 염상섭, 조지훈, 김내성, 박경리 등 성북구와 인연이 있는 문인들과 그들의 작품을 다각적으로 소개합니다. 문인들과 그들의 활동을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1960년대 이후 세 시기로 나누어 시대적 흐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고 ‘휴식처로서의 성북’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도시화와 개발, 삶의 터전 등 성북이 배경이 된 작품을 주제별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술 커뮤니티의 장이었던 성북과 관련된 문예지, 음악, 영화, 회화 등 여러 예술가의 협업 결과물을 만나볼 수도 있습니다. 전시장 곳곳에는 ‘성북 문학 들어보기’, ‘문학지도’, ‘필사 체험’ 같은 활동이 준비되어 있어 통해 그들의 작품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상설전시 입구
상설전시 내부
성북문학지도 체험
기획전시실에서는 특별전시가 마련되는데요. 개관 날인 3월 19일부터 현재까지는 성북을 대표하는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주제로 한 전시 ‘긔룬 것은 다 님이다’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한용운 선생의 서거 80주기를 기념하고 이를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특히 『님의 침묵』 초판본이 공개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초 예정된 전시 기간은 9월 말까지였으나 10월 20일까지로 연장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전시가 종료된 후, 11월에는 또 다른 성북의 문인을 주제로 한 전시가 준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두 개의 전시실과 더불어 문학관의 주요 공간인 자료열람 및 교육실에서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열람할 수 있으며, 강의와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획전시 '긔룬 것은 다 님이다'
『님의 침묵』 초판본
자료열람 및 교육실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 외에도, 성북근현대문학관은 성북의 문학을 주제로 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말부터는 상설전시 연계 특강인 ‘쉽게 만나는 성북 문학’을 기획하여 강의를 진행하였으며, ‘문인의 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성북동 곳곳을 다니며 답사를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문학관은 앞으로도 성북 문학의 거점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연구를 계속하며 네트워크 및 아카이브 구축을 이어 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상설전시 연계 특강 '쉽게 만나는 성북 문학' (성북근현대문학관 제공)
성북근현대문학관 안내 책자
성북근현대문학관은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개관하며 관람료도 무료입니다. 문학의 계절이라 할 수 있는 가을의 한복판에 있는 지금, 예술가들이 성북에서 교류했던 것처럼 성북동에 방문하셔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고 문학의 향기를 몸소 느끼고 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