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성북 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시리즈, 이번 주 소개해 드릴 분은 1952년 장위동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그곳에 생활 터전을 두고 계신 장위동의 토박이, 우덕수 님입니다.
우덕수 님(Ⓒ 성북문화원)
“제가 태어난 곳은 장위동이고요. 활량리라는 것도 맞고요. 장위동 토박이라고 할 수 있지요. 7대조 할아버지 때부터 장위동으로 이주하셔서 사셨다고 해요.”
조선시대, 선조분들이 파주 적성면에서 장위동으로 이주하신 이후 우덕수 님의 가족들은 대대로 장위동에 거주하셨습니다.
1966년 장석교회와 장위동 일대(Ⓒ 서울역사아카이브)
“뭐, 아주 시골이었죠. 논 있고, 밭 있고, 옆에 야산 있고, 나무들 좀 있고. 국민학교 때만 해도 주택 개발이 많이 안 됐어요. 학교 끝나면 논밭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그랬지.”
장위동의 다섯 마을(Ⓒ 서울역사아카이브)
1969년 천장산과 장위동 일대를 항공촬영한 사진 (출처: 『KIST 50년사』 제2권)
동네에서 농사를 지으셨던 부모님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우덕수 님은 누나를 따라 청량리 일대 극장을 다녔던 기억, 동네의 논과 밭 그리고 우이천 일대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던 일, 미꾸라지를 잡아 식당에 팔았던 일 등 어린 시절 동네에서의 추억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장위초등학교요. 제가 15회 졸업생입니다. 이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콘크리트 집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 미군 막사 같은 게 있어요. 함석으로 된 둥그런 거. 그다음에 우리가 3학년 땐가 학생이 자꾸 늘어나니까 또 건물을 짓고. 옛날에는 운동장도 상당히 넓었는데 지금은 좁더라고요.”
우덕수 님은 국민학교 시절, 학교 대표로 육상대회에 나갈 만큼 운동을 좋아하고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셨는데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가수의 꿈을 키우기도 하셨습니다.
“고등학교 가면서부터 노래를 한답시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가수가 꿈이었던 거지. 그래서 집에 가서 악기 좀 만지면은 아버지가 딴따라니 뭐니 하면서 악기도 부숴 놓고 그러셨어요. 그 뒤에도 포기하진 않고 음악을 했어요. 하긴 했는데 돈이 별로 없으니까 안 되더라고, 그것도.”
설악산 흔들바위에서(Ⓒ 우덕수)
아버지의 반대로 가수의 꿈을 접은 우덕수 님은 20대 초반,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30대 초였던 1982년에는 서울신문사의 판매국에 입사하였는데, 이 무렵에는 결혼도 하시며 가정을 이루셨다고 합니다. 신혼집의 위치 역시 장위동이었습니다.
우덕수 님의 자녀분들도 장위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장위초등학교 후배들이기도 하신데요. 1990년에 들어, 자녀 교육을 위해 10년간 근무한 서울신문사를 그만두시고 장위동에 식당을 개업하셨다고 합니다. 추어탕에서 매운탕으로, 그리고 고기로 주력 메뉴를 바꾸시며 현재까지 가게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활량리 식당. 이제 처음에 장사를 시작할 때 가게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하고 얘기하면서 ‘여기가 활량리인데, 활량리라고 붙여. 그런 이름은 아마 대한민국에 없을 거야.’라고 얘기가 나와서 가게 이름이 활량리가 된 거예요.”
“그때 좋았던 게 안기부가 이쪽 석관동에 있었거든. 그래서 점심시간에 직원들이 많이 나왔어요.”
가게 앞에서 우덕수 님(Ⓒ 성북문화원)
우덕수 님은 동네 주민들과 교류하며 함께 어울렸던 따뜻한 추억도 전해주셨습니다.
“세찬계(歲饌契)라고 그러죠? 그게 마을마다 있었어. 같은 마을 내에서 동네 사람들이 1년 동안 돈을 모으는 거야. 설 전에, 1년에 한 번 소를 잡기 위해서. 그렇게 모인 돈으로 소를 한 마리 사는 거야. 그래서 명절 전에 그걸 잡아서 다 나눠 먹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소고기면 최고지, 뭐.”
“동네에서 미꾸라지도 많이 잡고 했으니까 같이 모여서 끓여 먹었죠. 옛날에 추탕 끓일 때는, 도살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소기름 덩어리를 가지고 왔어요. 추탕 끓일 때도 그런 걸 넣고 끓이는 거예요. 그게 기름이니까 그걸 넣으면 국물이 부드러워지잖아요.”
1970년대 초, 동네에서 주민들과의 모임(Ⓒ 우덕수)
개발이 많이 이루어져 큰 변화를 겪은 동네인 장위동을, 우덕수 님은 아래와 같이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반쯤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그때부터 주택들 들어오면서 변하기 시작한 거지, 그전에는 전부 밭에 가면 호박 같은 거 그냥 쫙 심고 이랬을 때니까. 처음에 이제 들어온 데가 재건주택이 들어왔고, 그다음에 부흥주택이라고 들어왔고 그랬죠. 그리고 몇 년 후에 국민주택이 한쪽에 들어왔고. 또 동방주택도 생겼고요. 그렇게 되니까 외부에서 이쪽으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졌지.”
“재개발 지정은 2005년쯤 됐고, 재개발한다는 이야기는 그 전부터 나왔죠. 개발된다니까 좋았죠. 동네가 모습이 변하긴 해도 깨끗해지니까.”
1964년 장위동 국민주택(Ⓒ 서울역사아카이브)
2020년 장위2구역 전경(Ⓒ 서울연구원)
동네가 재개발에 들어가자 우덕수 님은 2017년 강북구 우이동으로 이사를 했지만, 장위동에서 계속해서 가게를 운영하시며 향우회 총무도 맡고 계실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셨습니다. 특히, 장위동 주민들은 예전부터 인근 우이천 등 하천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함께 모여 추어탕을 많이 끓여 드시곤 했다고 하시는데요. 지금까지 그 문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총무를 맡고 있죠. 매달 10일 우리 식당에서 모여요. 특이한 게 있는데, 여기는 추탕 끓이는 게 있어. 서울식으로 추탕을 끓여서 먹죠. 근데 이게 잘 없으니까 동네 사람들이 어디 가서 그걸 먹어 보지 못하잖아. 돈 주고도 못 사 먹으니까 향우회 모임 때 그걸 안 끓이면 안 나와요. 그래서 그걸 끓이는 거야. 제가 직접 끓이죠.”
“저도 이 동네를 떠났죠, 살림집은. 장위10구역에 살다가 떠났으니까. 그런데 다시 들어오겠죠, 뭐. … 우리 엄마, 아버지가 이곳에서 절 낳으셨으니 저의 고향이 된 거고, 여기서 성장 과정을 다 겪었으니 애정이 있죠. 우리 동네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어요.”
장위동에서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생활하고 계신 우덕수 님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 속에는 그 세월과 변화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소개해드린 이야기 외에도, 활량리의 터줏대감이신 우덕수 님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 성북마을아카이브 내 우덕수 님의 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