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05] 서울미래유산〈돈암동 성당〉의 유래와 문화적 가치
- 대학교 주변 풍경이 그러하듯, 성신여자대학교 정문에서부터 성신여대입구역까지 많은 식당과 가게들이 모여있습니다. 상권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돈암시장이 자리하고 있어서 젊은이들의 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젊은이들의 거리와 돈암시장 일대 아래쪽으로 성북천이 흐르면서 상권과 주거지역을 구분해 줍니다. 복잡한 상권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고풍스러운 고딕양식의 건물이 나타납니다. 이번 금도끼의 주제인 돈암동 성당입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박승호
- 동선동(현 동선동 84-41)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선천군의 원동교회 목사로 재직 중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체포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관전현의 광복군총영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요인을 암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국경 경비가 강화되어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대원들은 창고 및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유인물을 살포하고 피신했다. 박승호는 세칭 '선천서투탄사건'의 범인 16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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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 종암동에서 거주한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5년(혹은 1926년)에 중국에 건너갔다가 1927년 여름 중국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1년 7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는 '이육사'라는 필명의 유래가 되었다. 1932년 중국 난징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육생으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3년 7월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군사활동이 아닌 문학활동을 시작하였고, 1939년 종암동 62번지로 이사하여 이 곳에서 「청포도」, 「절정」 등 대표작을 발표하였다. 그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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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철
- 정릉동(현 서경로 124)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광복군 최동균(이명 최일성)의 동생이다. 1938년에 형과 함께 뤄양[洛陽]으로 건너갔다.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했고,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특과대학원대한청반에서 훈련을 받고 제1기로 졸업했다. 그 뒤 황포군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였으며 광복군 제2지대에 합류하여 제3구대 제3분대장을 맡아 대원 모집과 선전, 정보수집 등의 공작을 수행했다. 1944년 미국 국방성 전략첩보국의 협조로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고, 연합군 최후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카이펑, 허난 지구에서 일본군 내 한국인 장병의 인수 공작을 하다가 귀국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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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 정기전
-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운동경기를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승부를 겨루는 행사이다. 두 학교가 공식적으로 운동경기에서 만난 것은 1925년 열린 제5회 전(全) 조선 정구대회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사립 전문학교인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가 자주 맞붙게 되면서 두 학교의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화제가 되었고, 이들의 경기는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 민족의 혼을 살리는 민족적인 경기로 인식되었다. 1945년 12월 양교 OB구락부와 조선 축구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열린 축구전은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의 시발점이 되었고, 1956년 현재의 정기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1957년부터는 고려대가 주관시에는 고·연전으로, 연세대가 주관시에는 연·고전으로 부르기로 양교가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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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 소설가이다. 본명은 박금이(朴今伊)이며 필명인 ‘경리’는 김동리가 지어준 것이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계산」을 발표하고, 다음 해 「흑흑백백」을 게재하며 문단에 등단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돈암동 셋방에서 정릉동 골짜기 한적인 곳인 768-2번지로 집을 옮겨갔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대장정을 담은 『토지』는 정릉동 집에 살던 1969년부터 집필하였다. 1980년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여 1994년 8월 15일 탈고한 『토지』는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작가들의 창작과 교류를 위한 ‘토지문화관’을 짓고, 대학에서 후학들과 만나며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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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