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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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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대현
    인물
    여대현
    보성전문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1년 4월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일본에서 항일결사 효민회를 조직해 활동한 최홍준을 만나 일본의 민족차별에 대한 실상을 듣고 식민통치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민족문화 향상과 실력양성에 주력하였으며, 조선어 연구를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 2월 성북동에 있던 여대현의 집에서 최홍준·성장환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을 토론하며 독립의식을 길렀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판단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였다. 항일 활동을 지속하던 중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해방 이후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김한성
    인물
    김한성
    성북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한 자로, 성북정 125번지(현 성북로 87 일대)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당원들과 공산주의 이론연구와 실천운동, 동지 포섭, 조선에서 혁명운동 전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940년 7월 기관지 출판을 위해 이종갑에게 등사기와 부속도구 구입에 대한 지령을 내리고, 8월 조희영과 기관지 출판에 관해 협의하였다. 같은달 11일부터 15일까지 등사기를 사용하여 국제정세에 대한 소견과 소련을 지원, 후방을 교란하자는 내용이 담긴 기관기 43부를 출판하여 배포하였다. 이 기관지는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박진홍, 권선정 등에게 배포되었다. 1941년 9월 공산주의 운동이 발각되자 돈암동의 이재옥, 동소문동의 이상호 자택 등지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 신익희
    인물
    신익희
    정릉동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早稲田]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여, 『학지광』의 발간을 주도했다. 만주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았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했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신익희는 1919년 3월 다시 상하이로 떠나 26년 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 등을 역임했다. 광복 이후 임시정부 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신익희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초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활약했고, 1956년에는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사망하였다.
  • 차미리사
    인물
    차미리사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차미리사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교육 구국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가이다. 1900년대 초 외국 유학을 떠난 신여성으로, 미국에서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선교사로 귀국한 후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여성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에는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를 통해 '돈암동 117-1'번지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하였다.
  • 김준엽
    인물
    김준엽
    안암동의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일본 게이오대학 2학년 재학 중 학도병에 징집되었다. 중국 쉬저우지역에서 기초훈련을 받고 경비중대에 배치되었으나, 1944년 3월 하순 부대를 탈출했고, 이후 중국 중앙군 소속 유격대에 배치되었다. 6월 장준하, 윤경빈 등과 함께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향해 떠났다. 광복군 훈련반에 입교하여 1945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었으며, 8월 초 미국 전략정보국의 특별군사훈련을 받고 광복군 국내 정진군 강원도반 반장에 임명되어 국내진입의 날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려대학교 문리대 조교, 교수를 거쳐, 1982년 고려대학교 제9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1980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 홍애시덕
    인물
    홍애시덕
    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유관순과 함께 비밀결사인 여성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했고, 1920년 김활란 등과 7인전도회를 조직해 전국을 순회하며 계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결성에 참여하여 여성 권익옹호 및 사회풍토 개선활동을 했다. 1926년 기독교계 인사들과 함께 망월구락부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협력을 모색했다. 이후에도 1927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회장 역임하고, 근우회의 결성준비에 참여하는 등 종교를 통한 여성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안암동 4가에서 거주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상세 주소는 알 수 없다.
  • 최철
    인물
    최철
    정릉동(현 서경로 124)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광복군 최동균(이명 최일성)의 동생이다. 1938년에 형과 함께 뤄양[洛陽]으로 건너갔다. 1940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했고,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특과대학원대한청반에서 훈련을 받고 제1기로 졸업했다. 그 뒤 황포군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하였으며 광복군 제2지대에 합류하여 제3구대 제3분대장을 맡아 대원 모집과 선전, 정보수집 등의 공작을 수행했다. 1944년 미국 국방성 전략첩보국의 협조로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고, 연합군 최후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카이펑, 허난 지구에서 일본군 내 한국인 장병의 인수 공작을 하다가 귀국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조재옥
    인물
    조재옥
    성북동 286번지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조재옥은 1935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 건설에 뜻을 두었다. 1939년에는 자신이 거주하던 성북정 하숙집에서 윤명의, 조희영과 회견하고 독서회를 조직하여 신사상을 연구했다. 1940년 경성콤그룹에 가입하여 조선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한 실천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에는 김한성의 집에서 독소전쟁 발발 후의 정세에서 일본과 소련의 전쟁은 필연적이므로 그에 따른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기관지 발행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폐결핵으로 병보석되었으나, 다음 해인 1944년 7월 1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장기영
    인물
    장기영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강원도 영월 출신으로 1924년 상해임시정부에서 안창호, 김구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가 인디애나대학을 졸업했다. 1932년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집하고,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3년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자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충칭[重慶]에 있던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강원도 영월에서 무소속으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체신부장관, 서울특별시장, 신민당 운영위원, 국민당 사무총장, 민중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246-396'이었다.
  • 임광세
    인물
    임광세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재학 중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의식하면서 영국, 미국에 종속되는 독립을 할 바에는 조선인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여 조선인의 실력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위해 경기도 포천의 깊은 산속에 본거지를 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는 한편, 미국으로 하여금 B-29폭격기를 통해 무기를 산속으로 공중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임광세는 1944년 10월 포천의 아지트로 입산하려던 도중 체포되어 1945년 6월 기소유예로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동대문(東大門) 돈암(敦岩) 29-55(현 돈암동 29-1)였다.
  • 이정선
    인물
    이정선
    상월곡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2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이정선은 1939년 중국 난징의 국립중앙대학 재학 중 항일비밀결사 한족동맹회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했다. 이후 1942년 5월 중국 시안에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입대 지망자들을 모집하는 활동, 대적 선전공작, 일본군 동향에 대한 정보수집 등 적후방공작을 전개했다. 1945년 5월에는 한미군사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국내 침투공작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이정선의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상월곡 6-24'(현 상월곡동 산6-3)였다.
  • 이윤장
    인물
    이윤장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선 애국지사이다. 중국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투쟁에 관한 계몽 및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후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어 산시, 허난 지구에서 일본군 와해 공작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장위(長位) 74-54'(현 장위동 74-54번지)였다.
  • 이동화
    인물
    이동화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6년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혜화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경성콤그룹 학생부의 비합법 독서회에서 이론을 지도했다. 1941년 성북정 하숙집에서 경성콤그룹의 김한성으로부터 혁명운동에 참여할 것을 의뢰받았는데, 경성콤그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체포되었다. 1944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했고, 북한으로 가서 평양민보 주필,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김일성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월남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일했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55년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혁신계 엄단조치에 의해 1962년 구속, 1964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 윤하진
    인물
    윤하진
    삼선동3가(현 보문로29길 103)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단체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여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서 오동진과 함께 사령부 제2영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에는 국내진공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압록강 연안에 설립된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했다. 평안남도 경찰국과 선천경찰서 폭탄투척에 성공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1926년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44년에는 잔칫집에서 일본의 패전을 강조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유봉영
    인물
    유봉영
    장위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1919년 철산의 명흥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에 앞장섰다. 경찰과 충돌한 후 2,000원을 가지고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면서 재정지원을 하다가 여러 차례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40년 폐간될 때까지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일보가 복간한 뒤 재입사하여 1971년 퇴사했다. 학교법인 숙명학원 이사장과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주소가 성북(城北) 장위(長位) 219(현 장위동 219-3)로 표기되어 있으나, 그의 별세 기사를 통해 자택 주소는 장위동 219-403번지인 것을 확인했다.
  • 오기열
    인물
    오기열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출신으로 1919년 진안 마령면 평지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격문 3통을 작성하여 게시판에 붙이고, 시위군중을 인솔하며 선두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해방 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진안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특별기초위원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 12월 조소앙 등과 함께 사회당 발기인대회에 참여했다. 1950년 8월, 전주를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의해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 1977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돈암1동에서 거주하였는데, 상세 지번은 확인할 수 없다.
  • 엄송여
    인물
    엄송여
    성북구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 개성출신으로 1929년 개성에서 학생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갔다. 1934년에는 중국 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국인학생특별반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1935년 졸업하였다. 1935년 애국단에 가입하여 밀명을 받고 국내에 들어왔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개성역에서 체포되었다. 다음해 2월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육군에 입대하여 6.25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56년 육군대령으로 전역하였다.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2002년 대전 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서울 성북 □□ 787'에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 안석응
    인물
    안석응
    돈암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 등과 함께 의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읍내 교회에 8백여 명의 교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군중이 모이자, 대형 태극기 2개를 교회에 세워놓고 종이로 만든 백여 개의 작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유여대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삼창을 외치고 행진을 했다. 그는 일제의 검속 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의주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집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신간회 진천(鎭川)지부장으로 활약하며 독립사상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성동준
    인물
    성동준
    정릉동(현 정릉동 17-1)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4년 일본 규슈제국대학(九州帝大) 법과를 졸업하고 학병으로 동원되었다가,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일본군 60사단을 탈출하였다. 그는 김영남(金映男) 등과 함께 제3전구 충의구국군 사령부에 도착하여 미국 고문관에게 일본군 문서와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사실은 3전구 사령부에 보고되어 전선일보(戰線日報)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구국군 정치부 대일선전과에서 박영(朴英)과 함께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광복군에 편입되어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서승효
    인물
    서승효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서울에서 이우식 등 지인들에게 조선어학회에 출자하도록 권유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당시 '성북 돈암 산48'(현 동소문로 179-42)에 거주하였다. 현재 집터 추정 장소에는 1965년에 준공된 돈암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박승호
    인물
    박승호
    동선동(현 동선동 84-41)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선천군의 원동교회 목사로 재직 중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체포되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관전현의 광복군총영에서는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고, 요인을 암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국경 경비가 강화되어 무기의 반입의 늦어져, 미국 의원단이 선천을 통과하는 시기에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대원들은 창고 및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유인물을 살포하고 피신했다. 박승호는 세칭 '선천서투탄사건'의 범인 16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민영숙
    인물
    민영숙
    돈암동(현 안암동1가 48)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두 오빠와 함께 상해로 건너가 인성학교 등을 다녔다. 1942년 2월 중국 사천성 충칭[重慶]에서 임시정부의 법무부 직원에 임명되어 근무하였으며, 1944년 4월부터는 임시정부 법무부 총무과에서 근무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의 정보과원에 전보되어 근무하였고, 1944년 7월부터 회계검사원 조리원(助理員)을 맡아 일하면서 대적 방송에 종사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영재
    인물
    김영재
    성북동(현 동소문로 64)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1년 상해로 망명한 뒤 상해한인청년단을 조직하여 그 이사에 선임되었다. 또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 동지들과 함께 통합된 민족혁명당에서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 공군의 기계사 직책으로 대일전에 참가하였다. 1938년 10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립하자 그는 제3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0년에 광복군 총사령부원으로서 충칭[重慶]에서 요인 경호 및 비서직을 맡았으며, 1945년에는 미군과 합작으로 한국항공대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영기
    인물
    김영기
    삼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부터 대구사범학교에서 한문·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면서 학생들의 황도교육비판·민족정신을 함양시켰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 등 비밀결사의 조직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실질적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1941년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물』이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 체포되었고, 6개월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복 후 대구사범학교 교장, 경북 교육회장, 서울시 교육위원 문화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서울 성북 삼선1 247-1에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 김여재
    인물
    김여재
    길음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본적은 황해도 황주(黃州)이다. 1944년 초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입대하여 통역 및 포로심사, 연락업무 등을 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김여재의 주소지는 서울 성북 길음동 595-61(현 길음동 598)였다.
  • 김동수
    인물
    김동수
    돈암동(현 삼선교로 76)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23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7년 임시정부에 합류한 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부대장이 되었으며, 1941년 공작대원들이 중심이 되어 광복군 제5지대를 조직하였다. 그는 제5지대에서 시안(西安)을 중심으로 장병을 훈련시키는 동시에 선전·정보활동을 하였다. 1945년 4월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제3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1946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동북특파원으로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교포 귀국의 편의를 도모하다가 1948년 6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길영희
    인물
    길영희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재학 중 만세운동을 논의하였고, 선배와 함께 학교 대표로 학생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일 사전 계획대로 탑골공원으로 갔으나 민족대표들이 장소를 변경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체포되어 약 8개월의 옥고를 치르던 중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경신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고, 1938년경부터 인천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했다. 교직에서 물러난 뒤, 1969년 충남 덕산에 가루실농민학원을 설립, 농민교육에 헌신했다. 2005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 권태휴
    인물
    권태휴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에 출생한 권태휴는 1927년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중국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1942년 6월에 군사교육을 마쳤다. 이후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3년부터는 임시정부의 비밀명령을 받고 화중(華中) 일대에서 정보수집 등 지하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주소는 '서울 성북(城北) 성북동(城北洞) 131-55'였다.
  • 강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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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윤국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 생활을 하던 중 일제의 한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대우로 궐기하여 농성시위를 주도했다. 그 후 1945년 5월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서울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서 비밀결사인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 해 7월 24일 저녁에는 친일매국대회가 개최되는 경성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에 잠입하여 장치해 둔 2개의 폭탄을 터뜨려 대회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 거사는 일제 말기 한민족의 민족적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에 따르면 그의 주소는 서울 성북 정릉 16-29(현 정릉로40길 3)였다.
  •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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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동소문동(당시 돈암동)에서 거주한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독립협회에 참가해 활동했고, 고종 폐위 음모에 휘말려 약 6년간 옥고를 치렀다. 미국에 유학하여 5년만에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고, 1925년 탄핵 면직되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반탁반공노선을 견지하였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했다.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부산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3.15부정선거 속에서 세 차례 더 대통령에 선출되지만,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환국 이후 돈암동의 돈암장에서 약 2년간 거주하였다. 돈암장의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승만은 아래채를 썼고, 위채는 비서와 살림 맡은 사람들, 바깥채는 경비원들이 사용했다.
  • 엄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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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항섭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임시의정원 의원, 청년동맹회 집행위원, 한국교민단 의경대장, 한국독립당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 선전부장, 주석비서로 임명되어 광복 전까지 독립운동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1월 환국하여 김구를 보좌하였고, 1946년 귀국한 가족들과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삼청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김구와 함께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같은 해 9월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남북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1962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 연미당
    인물
    연미당
    성북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연충효이나 1938년 임시정부가 장사로 피신했을 때부터 아명인 ‘연미당’을 사용하였다. 1920년 가족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이주했다가 아버지를 따라 진강으로 이사하여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 사망 후 상하이에 정착하였으며, 1927년 3월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상해여자청년동맹, 한인애국단, 임시의정원, 한국독립당, 한국애국부인회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이후 엄항섭이 1945년 11월에 환국하였고, 연미당과 가족들은 1946년 6월 입국하였다. 엄항섭·연미당 가족은 경교장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 성북동 산꼭대기 별장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후 삼청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성북동에 거주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최복현
    인물
    최복현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생으로 중앙고보를 졸업,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전공했다.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에서 재직하고, 1935년부터 중앙고보에서 재직했다. 1941년 8월의 5인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3년 1월 출옥한 후 만주 봉천의 만주방적주식회사에서 교육 부문에 종사하였다. 광복 후 전남 순천중학교 교장, 서울대 사범대 교수, 중앙고등학교 교장,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교육감 등을 역임했다. 최복현은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79년 사망하였다. 1990년에는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의 유공자 정보에는 본적이 경기도 양평 용문 망탕, 주소가 서울 성북 정릉 192-272(현 서경로9길 1-3)로 표기되어 있다.
  • 정재용
    인물
    정재용
    장위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 태화관으로 변경하며 예정된 시간에 등장하지 않아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이 혼란에 빠졌는데, 이때 경신중학교 졸업생인 그가 팔각정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체포된 정재용은 평양 감옥에서 2년 6개월 간 옥고를 치뤘다. 출옥 후에는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 활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77년 12월 31일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자택의 주소는 동아일보에서는 장위동 219-100번지, 경향신문에서는 장위동 219-195번지로 보도했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이관구
    인물
    이관구
    성북동에서 집필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황해 송화 출신으로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중국과 유럽, 하와이를 여행하고 귀국하여 1914년 해주에서 이종문·오순원 등과 밀의하여 항일격문을 작성·배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사에 가입하였으며, 1916년에는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대외업무를 맡았다. 신흥학교 이시영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성낙규 등에게 권총을 수교 총독 암살을 지령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18년 초 동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다. 해방 이후 의친왕의 별장이었던 서울 성북동 별서(성락원)에 기거하면서 사학 연구회라는 학술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곳에서 『언행록』, 『의용실기』 등을 집필하며 항일운동과 사상을 집대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이강
    인물
    이강
    정릉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04년 미국에서 안창호, 정재관 등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고 1905년 기관지 『공립신문』을 창간해 주필이 되었다. 1907년 귀국하여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정재관과 함께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지회를 설립하였다. 이밖에도 『대동공보』 편집책임을 맡아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에는 강우규의 폭탄 투척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상해로 탈출하여 임시정부에 참여,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안창호가 중심이 된 흥사단 운동에도 참가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1964년 10월 13일 자택인 정릉동 재건주택 88호(현 정릉동 16-7)에서 별세하였다.
  • 황수연
    인물
    황수연
    조선시대 내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44년에 경상북도 평해에서 태어나 서울로 와서 양봉협의 양자가 되었다. 1863년 내관시험에 합격하였고, 고종의 호종내관을 지냈다. 본명은 황윤명인데 고종이 수연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호는 춘파이다. 1893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동소문 밖 별장(현 서울 성북동 별서)에 머무르면서 한시를 지었는데, 유고집 『춘파유고』에 수록된 한시 90편 가량이 대부분 성북동 별장에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에는 삼산의숙(三山義塾)을 설립하고 제반 경비를 부담하였으며 항일의병활동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과 긴밀한 관계였던 만큼 그의 활동에 고종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 황응선
    인물
    황응선
    정릉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1938년 증산교 포교 활동을 전개하던 중 김아동, 정종진과 함께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면소 처분을 받았다.
  • 황금수
    인물
    황금수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1934년 6월 조선공산당재건 코민테른 조선레포트회의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 122번지에 거주하였다.
  • 홍석표
    인물
    홍석표
    돈암동 관련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1937년 7월 경부터 경성부 충신정 33-3번지 홍규익의 집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무명그룹을 조직하여 혁명론과 계급투쟁 등에 관한 서적을 읽었으며, 의식고취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 458-26번지에 거주하였다. 1938년 검거 당시 연령은 22세였다.
  • 홍기문
    인물
    홍기문
    안암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이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 간사로 선임되었고, 1931년에는 중앙위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또한 국어연구에도 전념하여 1927년에 「조선문전요령」을 『현대문학』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음발달사』, 『조선문법연구』을 간행하였다. 1948년 4월 남북정치협상 대표였던 부친 홍명희를 따라 입북하여 그대로 잔류하면서 국어연구와 정치활동, 문화활동을 병행하였다. 1981년에는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의 공로로 노력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 현학손
    인물
    현학손
    성북동 관련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1934년 양복점 등에서 일하면서 양복직공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였고, 1937년에는 유인술·유창여·박기복과 좌익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으로 이른바 ‘조언비어(造言飛語)’를 유포죄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육군형법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월(미결구류 90일 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9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서울 성북 성북정 185-2번지에 거주하였다.
  • 한홍택
    인물
    한홍택
    안암동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기소의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수사 과정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숭인면 안암리 117번지(현 성북구 안암동)에 거주하였다.
  • 황종갑
    인물
    황종갑
    성북구 관련 독립운동가이다. 성북구 돈암동, 안암동에 거주하였던 독립운동가와 함께 항일결사단체를 조직하였다. 1940년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던 황종갑은 민족정기와 독립 쟁취에 관한 협의와 역사·정치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노국한, 이기을, 조성훈, 유영하 등과 5인독서회를 조직하고, 교사 최복현을 지도교사로 추대하였다. 1941년 7월 활동범위를 확대하며 다른 중학교 및 사회조직과 연락을 시도하다 서신이 발각되어 그 해 8월에 검거되었다가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2006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한용운
    인물
    한용운
    성북동에서 거주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승려이다. 본명은 정옥, 법호는 만해이며 용운은 법명이다. 1905년 백담사에서 출가하였고, 불경 번역과 대중화에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경성지회장을 맡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폭로하는 민중대회 사건으로 일제에 피감되었다. 1933년 성북동 심우장으로 이사하였다. 1938년에는 불교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 배후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성북동 심우장에서 만년을 보내다 1944년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피한봉
    인물
    피한봉
    안암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피한봉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안암동 164번지(현 안암동1가 164)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확산되던 때인 3월 23일 밤 10시경, 안암동 안암천 부근에서 다수의 군중을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태형 90대를 선고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2017년에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채동선
    인물
    채동선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1901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일본과 독일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연주활동을 시작하였고, 1932년부터 작곡을 하였다.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을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피아니스트 이소란과 결혼하고 성북구 성북로8길 12-8(성북동 183-17)에 양옥집을 짓고 살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피난갔다가 1953년 부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홍난파, 현제명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1세대 서양 음악가였는데, 채동선은 1930년대부터 한국 음악계를 이끄는 역할을 하며 민족의 정서를 가곡에 담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표곡으로 「동백꽃」, 「그리워」, 「내 마음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이 있다.
  • 조헌영
    인물
    조헌영
    성북동에 거주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한의학자이다.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조헌영(호는 해산)은 1927년 일본에 유학하던 중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맡았으며, 귀국해서는 명륜동에 살면서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만들어 학술지 『동양의약』을 발간하여 한국 근대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는데 공헌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어표준말사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명륜동에 거주하던 조헌영은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대 초에 성북동으로 이사 왔다. 해방 후 제헌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6.25 전쟁 중에 피난가지 않고 성북동에 머물던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한의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1988년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 조소앙
    인물
    조소앙
    돈암동에서 거주하고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한 후 경신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항일단체 대동당을 조직하였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독립운동 지도급 인사 39인의 공동성명으로 발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헌법의 기초를 비롯한 임정의 이론정립 등 전반에 걸쳐 주역을 맡았고,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다. 성북구 돈암동에 거주하면서 1950년 5.30 총선에 사회당으로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였다. 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조병옥을 꺾고 당선되어 제2대 국회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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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동선동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이후 신간회, 수양동우회 사건 등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성북구에서 출마하였다. 출마 당시 주소는 돈암동 89-7번지(현 동소문로120)로 전차 종점 부근, 현재의 동선동 태극당제과 부근으로 추정된다. 조병옥은 이 선거에서 조소앙에게 큰 표 차로 지며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대구에서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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