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1997
작품 문학
『21세기 문학』 1997년 봄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나'는 미아리고개 너머에 있는 셋집을 찾아가던 중 지금은 재개발이 진행 중인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곳에서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고, 빈 집에서 급히 볼일을 해결하다가 울고 싶은 감정을 느낀다. 작가는 재개발로 인해 다시는 어린 시절의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된 '나'를 통해 기억 속의 풍경이 점차 사라져가는 아쉬움을 그리고 있다.
길음동
  • 김소진_신풍근 배커리 약사 표지
  • 길음동 7단지 아파트 상가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김소진
  • 비고:
  • 유형: 작품 문학

시기

근거자료 원문

  • "새것으로 해도 사십오만원이면 뒤집어쓰고 남는다는데 뭔 말라빠진 중고가 사십만원씩이야 응? 이놈의 집이 아주 작정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야. 구 경계선인 한길 너머 미아동 쪽으로는 거진 철거가 끝나서 집집마다 헌 보일러가 남아돌아 너도나도 갖다 쓰라고 난리들이라고 그러더구먼."
    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293쪽
    미아리에서 셋집을 내주고 있는 ‘나‘의 어머니는 셋집에 기름보일러를 설치했지만 오래지 않아 고장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낸다. ‘나‘는 집 확인도 할 겸, 옛날 물건들을 찾아올 겸 직접 그 동네로 가보기로 한다. 이 장면은 기름보일러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보일러 시세를 알아본 후 셋집 여자에게 쌓인 불만을 ‘나‘에게 토로하는 것이다. 셋집이 있는 곳 건너편 미아동 쪽은 재개발로 인해 철거가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아, 현재 아파트가 들어선 미아동 일대로 생각되며 셋방은 길음 뉴타운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머니도 짐짓 내가 한번 재개발을 앞둔 그 동네를 후딱 살피고 왔으면 하는 눈치였다. 서너 달 전에 본격적으로 재개발 승인이 떨어지자 그곳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심지어는 현대부동산인가 하는 데서 어머니 앞으로도 딱지를 넘길 의향이 없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넉 장’을 받고 매매를 하기로 전화로 약속까지 했다가 내가 말리는 바람에 취소한 적도 있었다. 마침 임씨 아저씨 아들인 창이형이 재개발조합에서 간사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내가 평소 가까이 지내온 창이형을 만나면 그곳 분위기나 시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어듣고 오지 않을까 내심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294쪽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찾아갈 겸 직접 셋방 근처로 가기로 한 ‘나‘는 어머니에게 한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이 어머니의 본심이 아님을 느낀다. 그리고는 신촌에서 미아리행 버스를 타고 셋방 쪽으로 향한다. 이 장면은 셋방이 있던 길음 재개발 지역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재개발 승인이 이루어진 지역의 분위기와 변화된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다음날 아침 제일 처음 들렀다가 한의원으로 가라는, 사실상의 진료 거부를 당한 신풍의원 맞은편의 동사무소 옆 골목길을 타고 꾸역꾸역 올라가다보니 길음초등학교 담벼락을 끼고서 마을버스 종점인 콘크리트 물탱크 밑 차부까지 올라갔다. 구 경계선인 한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려니까 왼쪽으로는 임마누엘교회 하나와 구멍가게 한 채를 빼놓고는 이미 철거가 다 끝난 폐허의 등성이뿐이었다. 미쳐 챙겨가지 못한 망가진 가재 도구들이 제멋대로 누워 있는 벽돌 무더기 사이로 사람들이 자근자근 밟고 다녔을 골목길들이 호젓한 산길처럼 구불구불 뻗어나 서로 얽히고 설켜 있었다. 무너져 방구들이 내려앉은 집들은 터무니없이 작아 보였다. 사방 서너 발짝쯤이나 될까 한 장방형 방 안에서 살을 맞부빈 식구들이 최소한 넷 아니면 우리처럼 여섯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막 재개발이 결정된 셋집이 있는 오른편 기슭은 겉으론 아직 옛 모습 그대로인듯했지만, 이상하게도 인적이 끊긴 듯 적조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쩌면 벌써 방을 빼 나간 집주인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300-301쪽
    미아리행 버스를 타고 길음동으로 가던 중 ‘나‘는 장석조네 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어느덧 버스는 길음동에 도착하고 마을을 지나던 중 옛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눈다. 이 장면은 버스에서 내린 후 셋방으로 향하던 중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묘사한 것이다. 현재 길음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 재개발 되기 전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동사무소는 지금의 길음1동 주민센터이다. 이러한 모습은 길음 뉴타운 건축 이전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 그 하루 동안 나는 주로 더러운 곳만 골라서 돌아다녔다. 개똥 천지인 돌산길을 돌아나와,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시장거리, 연탄재가 어지럽게 뒹구는 인수교회 뒤쪽의 좁은 골목들을 혼자 떠돌다 딱총용 화약이 숭숭 박인 종이를 두 장 사서 차돌로 터뜨린 다음 콧방울을 벌름벌름하며 한껏 화약내를 맡았다. 가끔 아버지의 아티반을 사러 가는 불란서약국 뒤의 연탄 가스 냄새가 눈을 찌르는 어두운 단골 만화가게에서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 성인만화를 보며 지금쯤 녹아내렸을 눈사람에 대해 서너 번 생각했다. 마지막 만화책을 처음부터 세 번이나 되풀이 보고 덮고 나올 때 연탄 난로 위에 끓고 있는 떡볶이를 보며 후회했다. 그 길로 처음 볼땐 한복집인 줄 잘못 알았던 길음천변의 음산한 텍사스 거리를 겁 없이 걸어 다녔다. 그런 용기를 준 것은 허기진 배와 눈사람 속에 묻힌 짠지 단지다. 텍사스 거리의 한쪽 끝에 있는 튀김집 거리를 지날 때는 싸구려 기름 냄새 때문에 뱃속의 내장들이 요동을 치다 못해 밖으로 꾸역꾸역 뛰쳐나올 듯했다. 하지만 설에도 집에 가지 못한 손톱이 긴 매춘부들이 건네주는 오징어 튀김의 유혹에 굴복하진 않았다. 나중에 떨어질 매와 꾸지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것은 다 더렵혀져도 자존심만큼은 더럽힐 수 없었다.
    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311쪽
    어린 시절 장석조네 집 마당에서 단지를 깨버린 ‘나‘는 깨진 단지를 눈사람으로 만들고는 하루 동안의 가출을 결심한다. 하루 종일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집으로 온 나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일상을 보며 약간의 충격을 받는다. 이 장면은 집 밖을 나가 돌아다닌 곳을 묘사한 것이다. ‘길음천변의 텍사스 거리‘는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가 놓인 정릉로 근처 하월곡동 성매매 집결지를 가리킨다. 이곳은 현재 신월곡1정비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 그런데 나는 왜 구린내가 진동하는 깨진 항아리 속에서 똥을 누는데 울고 싶어졌을까? 늙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이제 막 초콜릿 맛을 안 네 살배기 아이, 이렇게 세 사람의 식솔을 거느린 가장이 비록 속눈썹이나마 이렇게 주책없이 적셔서야 되겠는가, 아아. 하지만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육체인 이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를 이렇게 감상적으로 만드는 게. 이 동네가 포크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깎여가면 내 허약한 기억도 송두리째 퍼내어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기껏 똥을 눌 뿐인데……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데…… 똥을 다 누고 난 나는 빈집을 나와 모래주머니를 발목에서 풀어낸 달리기 선수처럼 가뿐하게 폐허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뒤를 돌아다보니 냄새를 맡은 누렁이 한 마리가 내가 나온 집으로 코를 쑤셔박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주위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김소진, 2002, 신풍근배커리 약사, 315쪽
    재개발조합 간사인 ‘창이‘ 형을 만난 ‘나‘는 급히 볼일을 해결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뜨고, 빈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나‘는 기억을 지탱해온 이곳이 사라진다는 것을 느끼고는 서글퍼진다. 이 장면은 소설의 마지막 장면으로, 볼일을 다 본 후 동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나‘의 모습이 묘사되며 끝난다. 재개발을 앞두고 철거된 지역을 보며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슬픔이 묘사되었는데, 이러한 감정은 당시 철거이주민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났던 감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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