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한 가운데 정치가이자 화가였던 서동진(徐東辰)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1931년 일본에 건너가 1935년까지 머무르며 도쿄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서 데생과 그림 수업을 받았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 재능과 신선한 표현 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특선을 거듭하여, 천재적인 화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1937년부터 1944년의 마지막 선전까지는 가장 성공적인 위치의 추천 작가로 참가하였다.1932년 전일본수채화회전을 비롯하여 1933∼1935년의 제국미술원전(帝國美術院展, 약칭 제전), 1938년의 문부성미술전(文部省美術展, 약칭 문전), 1933·1934년의 광풍회전(光風會展)에 잇달아 입선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이인성 예술의 절정기를 이루었다.20대 중반의 청년기에 타고난 재능을 최대로 연소한 그는, 유럽의 근대 회화 사조인 인상파·후기 인상파·야수파·표현파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법으로 재치 있게 소화하고 자유롭게 활용하였다. 그의 불투명 수채화의 극히 과감한 표현 처리와 특출한 기량 발휘는 근대 한국 미술사에서 특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그로부터 처음 보인 것이다.그러나 1940년을 전후해서 그의 수채화는 그전까지의 독특한 창조성이 빛을 잃어 갔다. 그것은 유화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실적인 수법의 인물·풍경·정물 그림을 계속 그렸으나 절정기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작품 특징이 약간 엿보일 따름이다.1944년부터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였고, 광복 이후에는 한때 이화여자대학 미술과에 강사로 나갔다. 1948년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수채화와 유화를 지도하고,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추천 작가로 서양화부 심사 위원에 선임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 유작전 및 회고전으로는 1954년 『3인 유작전-구본웅·김중현·이인성』(천일 화랑), 1975년 『3인 유작전』(한일 화랑), 2000년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 작고 50주기 회고전』(호암 갤러리), 2001년 『요절과 숙명의 작가전』(가나아트센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