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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_집터
용문중 · 고교를 나와 우로 좌로 이리저리 골목을 꺾어들어가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바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땄음에도 가슴팍에 새겨진 일장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었던 마라토너 손기정의 집터다. 손기정은 해방 후 안암동에 거주하며 자신의 집을 ‘마라톤 선수 합숙소’라 이름붙이고 전국의 마라톤 유망주 20여명을 뽑아 직접 먹이고 재워가며 훈련을 시켰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1950년 보스턴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 · 은 · 동을 휩쓴 한국의 삼인방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 모두 이 곳에서 손기정에게 가르침을 받은 선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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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 최초, 2시간 30분 돌파, 올림픽 신기록 경신, 이 수많은 업적들을 이루었으면서 그가 밝을 수 없었던 것은 어떤 까닭일까? 그리고 그토록 가리고자 했던 가슴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여기까지 보았다면 이 선수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바로 한국인 최초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자, 한국인임에도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마라토너 손기정(孫基禎 1912~2002)이다. 그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경신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자신의 가슴팍에 박힌 일장기를 보며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상식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금메달 수상자에게 주어지는 묘목으로 애써 일장기를 가리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손기정이 지인에게 보낸 엽서에 쓴 세 글자에서도 드러난다. ‘슬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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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손기정은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안암동 자택에 ‘마라톤선수합숙소’라는 현판을 붙이고 전국의 마라톤 유망주 20여명을 뽑아 직접 먹이고 재워가며 훈련을 시켰다. 이에 대한 결실은 비교적 빨리 나타났다. 당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선수는 서윤복이었는데, 손기정의 가르침에 힘입어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더불어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는 손기정의 가르침을 받은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3명의 선수가 나란히 1위부터 3위까지 거머쥐는 쾌거를 거두었다. 서윤복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 … 후배들을 먹이고 재우며 훈련을 시킨 그 은혜는 또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후배들의 훈련비를 마련하기 위해 은행을 돌아다니며 모금 운동을 하신 것은 오직 선생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 마라톤의 아버지이자 저희들 의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조국을 위해 뛰어라!“ 불호령을 내리시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떠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껄껄 웃으시며 등을 다독대시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 “조국을 위해 뛰어라” 불호령이 그립습니다(2002. 11. 1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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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1953년 6 · 25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인재발굴에 나섰다. 대구에서 마라톤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이창훈을 서울로 불러 양정중학교에 입학시킨 뒤 훈련을 맡았다. 그 결과 이창훈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대표로 선발되었으며, 1958년 도쿄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 결과 손기정은 국위를 선양한 좋은 선수들을 양성했다는 공로로 1957년대한민국 체육상(지도자상)을 수상하였다.
이후에도 손기정은 지도자이자 체육행정가로서 활동하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부터 1964년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1966년 아시안 게임 한국 대표단장 등을 지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의 조직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꿈에 그리던 성화 봉송 주자로 선정되어 다시 트랙 위를 뛰기도 했다. 나라를 잃고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비운의 마라토너가 자신의 조국에 유치된 올림픽에서 뛴것이니 그 감동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성화봉송 당시에는 76세라는 비교적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펄쩍펄쩍 뛰기 까지 하였다.
이후 손기정은 다리의 동맥경화증으로 잘 걷지 못하여 바깥 출입을 못하다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북대표팀 공동입장, 2002년 한일 월드컵,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지켜보고 같은 해 11월 15일, 향년 90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