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4월 보성(普成)전문학교 재학시 그는 일본에서 항일결사 효민회(曉民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귀국한 최홍준(崔弘俊)과 만난 자리에서 일본에서의 민족차별에 대한 실상을 전해듣고, 식민통치의 부당성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조국독립의 실현을 위해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고, 먼저 민족문화 및 경제력의 향상에 힘쓰는 한편 조선어연구를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를 비롯하여 최홍준·성장환(成章煥) 등은 1943년 2월에 종로 성북동 소재의 그의 집에 모여 독립운동 의 방안에 관하여 토론을 갖고 독립의식을 길러갔다. 그와 아울러 이들은 동지포섭에도 노력하면서 동지간 유대를 강화해 갔다. 그리고 이들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배를 필연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여 독립투쟁의 실행방안을 더욱 구체화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전원이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1944년 1월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