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는 1931년 개성에서도 20여리 떨어진 시골마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자식을 공부시켜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바람을 갖고 서울 생활을 시작한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품 속에서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던 고향과 달리 현저동 셋방은 어린 소녀에게 낯선 곳이었다. 어머니는 신여성으로 딸을 키우기 위해 어려운 사정에도 공부를 시켰고, 박완서는 당시 명문이었던 숙명여고에 들어갔다. 문학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중견소설가로 활동하던 박노갑이었다. 일제강점기 국어를 배우지 못한 학생들에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선생님의 영향으로 시를 좋아하게 되고, 현실과 자신의 경험이 담긴 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같은 반이었던 소설가 한말숙, 시인 박명성, 김양식이 문학의 길을 갔다. 고교 시절 한 친구의 집이 ‘종로서관’을 열어 학교를 마치면 서점에 가서 책을 읽곤 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입학 닷새 후 한국전쟁이 터진다. “6.25가 없었다면 나는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전쟁은 박완서의 개인적인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가족들과 헤어지고, 북으로 끌려갈 뻔 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전후 미군부대에서 일하던 때의 경험과 피폐해진 공간 속에서 겪은 삶은 이후 박완서의 글 곳곳에서 드러난다.
한국전쟁 전 좌익운동에 투신했던 오빠 때문에 현저동을 떠나 돈암동으로 이사하고, 돈암동에서도 집을 세 번이나 옮겨야했다. 그래도 돈암동은 행복한 기억이 가득한 곳이었다. 어머니는 바람대로 딸을 가장 좋다는 서울대학에 보낸 기쁨과 뿌듯함을, 오빠는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행복과 안정감을, 박완서는 여대생이 되어 교정을 거닐고, 문학소녀의 꿈을 펼치는 첫 발을 내딛는 설렘을 간직 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전쟁 후 다시 돌아온 돈암동은 이전과 다른 삶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성북경찰서에서 널찍한 양회 다리를 건너 신안탕 뒤로 집들이 늘어선 골목 안에 이웃이라고는 한 집도 없었다. 텅텅 빈 집들만 있는 그 적막함이 전쟁을 떠올리게 하였다. 남과 북, 누구를 위한 대립인지도 모른 채 서로를 죽인 전쟁 중에 오빠가 총상을 입고 세상을 뜨고 만다.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야 했다. 숙부가 지게를 져 품을 팔고, 숙모는 뚝섬 살곶이 다리 밑에서 푸성귀를 받아다가 돈암시장에서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막막한 생활 속에 이웃의 주선으로 미군부대에 일자리를 얻어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답답한 현실은 그대로였다.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책에서 낙을 구했다’는 말처럼 책은 위로를 얻고, 현실을 잊게 하는 도피처였다.
1953년 결혼을 하며 돈암동을 떠난 박완서는 1970년 마흔 살이 되던 해 문단에 등단하였다. 전쟁 직후 미군부대 초상화부에서 일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의 이야기를 쓴 「나목」이 여류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된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나목」, 「엄마의 말뚝」, 「부처님 근처」 등 한국전쟁과 전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소설에서 그려냈다. 책만이 삶의 빛이었던 때 안감내 천변 헌책방에서 알게 된,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남자와 만남은 뒤에 「그 남자네 집」이라는 소설의 소재가 된다.
내 처녀적의 마지막 집도 성신여대와 성북경찰서 사이에 있었다. 내가 시집갈 무렵 친정집도 딴 동네로 이사를 가버려서 다시는 가볼 기회가 없었다. … 그제서야 내가 천주교회와 신선탕 중간 지점에 서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의 옛집은 바로 신선탕 뒷골목에 있었고, 그 남자네 집은 천주교단 뒤쪽에 있었다. 천주교당도 신선탕도 천변길에 있었다. 교회는 증축을 했는지 개축을 했는지 그 자리에 있으되 외양은 많이 바뀌고 커져 있었지만 목욕탕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고 이름까지 그대로였다. 세상에 오십년 전 그 목욕탕이 그대로 남아 있다니, 오십 년이면 목욕탕이 온천이나 사우나나 찜질방으로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아닌가.
박완서, 「그 남자네 집」
그동안 쌓인 이야기가 많았던 것일까, 박완서만의 깊은 통찰력과 날카로운 시선, 뛰어난 문체가 담긴 작품을 연이어 발표한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와 같은 작품에서 그려낸 당당한 여성상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여성 해방 문학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위선과 허영심, 물질만능주의에 휩싸인 세태를 작품을 통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40여 년 동안 그가 남긴 장편 15편과 단편 80여 편, 동화, 산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에는 해방 후 격변의 시간과 시대를 살아낸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힘이 되는 가족처럼, 함께 살아간 시대를 이야기 해준 작가는 2011년 환한 웃음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