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수
1930 - 1970
인물 개인 조각가
인물 개인 교육가
조각가이다. 석고와 돌, 나무를 조각 재료로 쓰는 다른 조각가들과 달리 철과 생활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새로운 추상조각을 선보여 ‘철 조각의 선구자’라고도 불린다. 성북고등학교(현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와 모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65년 동숭동에 있던 학교와 가까운 성북동으로 이사를 했다. 느티나무 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주변에 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1970년 서울, 추풍령, 부산 세 군데에 추상조각을 세워 달라는 건설부의 주문을 받아 작품을 만들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주요작품으로 「이준열사상」(1963), 「가족」(1964), 「대립」(1967), 「원효대사상」(1969) 등이 있다.
성북동
  • 조각 작업 중인 송영수
  • 혜화동 성당 부조 작업 중인 최만린, 김세중, 송영수(1960)
  • 송영수, 「향」, 1956
  •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을 제작중인 송영수
  • 송영수, 「승화」, 1965
  • 송영수와 수도여고 강당에 설치된 부조 「진리」
  • 송영수, 「무제」, 1960년대
  • 성북구립미술관 송영수 50주기 특별전 "상념의 공간 : 조각가의 스케치북"(6)
  • 성북구립미술관 송영수 50주기 특별전 "상념의 공간 : 조각가의 스케치북"(5)
  • 성북구립미술관 송영수 50주기 특별전 "상념의 공간 : 조각가의 스케치북"(4)
  • 성북구립미술관 송영수 50주기 특별전 "상념의 공간 : 조각가의 스케치북"(3)
  • 성북구립미술관 송영수 50주기 특별전 "상념의 공간 : 조각가의 스케치북"(2)
  • 성북구립미술관 송영수 50주기 특별전 "상념의 공간 : 조각가의 스케치북"(1)
  • 송영수 자화상
  • 혜화동 성당 부조 작업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근거자료 원문

  • 195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학과에 입학한 송영수는 대리석으로 조각을 하기 시작하여, 석고와 석조 인체상을 주로 만들었다.
  •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철조작업은 석고와 돌, 나무로 만든 조각작품이 주를 이루었던 당시 조각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 송영수는 1953년 11월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여인입상 작품 <희망>으로 특선했다. 이후 제3회 <가족>, 제4회 <악기 가진 여인>, 제5회 <향(響)>이 연이어 특선을 수상하였다.
  • 젊은 시절 성북고등학교에서 함께 교직생활을 한 인연으로 가깝게 지낸 이어령은 송영수의 비문을 "피 없는 돌에 생명을 주고, 거친 쇠붙이에 아름다운 영혼을 깃들이게 한 사람"이라 적었다. 돌, 나무, 철, 동, 스테인레스, 테라코타에 이르기까지 거칠디 거친 재료들을 조각작품으로 완성한 조각가. "그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서울의 풍경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미술평론가 이경성의 찬사처럼 송영수가 새롭게 시도한 조각 작품은 비단 새로운 재료의 도입일 뿐만 아니라 조각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 1965년 동숭동에 있던 학교와 가까운 성북동으로 이사를 했다. 느티나무 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주변에 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송영수의 집은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터였고, 건너편으로는 북단장(현재 간송미술관) 산이 보여 풍경이 좋았다. 조각가답게 집을 둥글고 멋지게 지었으나 당시에는 건축자재가 좋지 못해 여러 번 개보수를 했다.
  • 연보 1930년 서울 출생 195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학사.석사 졸업 경력 성북 중고등학교 교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국전심사위원, 애국조각 건립위원회 전문위원, 국전추천작가(1957), 국전초대작가(1965) 수상 제2, 3, 4회 국전 특선, 제5회 서울미대전 장려상, 제6회 서울미대전 학장상 전시(유작전) 신문화랑(1971), 신세계화랑(1972), 그로리치화랑(1992), 국립현대미술관(1999, 2000, 2010), 가나아트센터(2001), 모란미술관(2003) 등 작품소장 호암미술관, 고려대학교 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모란미술관 등
  • 서울 출생. ‘철 조각의 선구자’라 불리는 조각가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서 김종영에게 조각을 배웠다. 석고와 돌, 나무를 조각 재료로 쓰는 다른 조각가들과 달리 철과 생활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새로운 추상조각을 선보였다. 성북고등학교(현재 홍익대학교부속중고등학교)와 모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같이 근무한 문학평론가 이어령과 가깝게 지냈다. 1965년 동숭동에 있던 학교와 가까운 성북동으로 이사를 했다. 주변으로 나무가 울창한 곳에 집을 짓고 마당 뒤편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1970년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개통과 때를 맞추어 서울, 추풍령, 부산 세 군데에 추상조각을 세워 달라는 건설부의 주문을 받아 작품을 만들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송지영·심지혜, 2015, 성북, 100인을 만나다, 66쪽
  • ‘철 조각의 선구자’라고 불리우는 조각가로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서 김종영에게 조각을 배웠다. 석고와 돌, 나무를 조각재료로 쓰는 다른 조각가들과 달리 철과 생활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새로운 추상조각을 선보였다. 삼촌이 가져다 준 헌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의 꿈을 키워가던 송영수는 1950년 서울대미대 조소과에 입학해 대리석 조각을 시작으로 석고와 석조 인체상을 주로 제작했다. 대학 3학년이던 1953년 여인 입상으로 국전에서 특선한 이후 4년간 특선을 하며 27세의 젊은 나이로 최연소 국전 추천작가가 됐다. 1957년부터 시작한 철조각은 조각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고물들을 모아 용접하는 그의 작업방식을 두고 주변 지인들은 ‘고물장사’라고 놀리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동판을 재료에 포함시켜 재질의 중후한 맛을 더욱 살려냈다. 지금은 별달리 특별할 것이 없어보이지만 당시엔 철조각은 파격적이었다. 선적인 공간구조와 추상적 철조각은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당시의 시대분위기와도 맞아떨어져서 여러 가지 공공조각 주문도 폭주했다. 1961년 육군 사관학교 교정에 세운 국기게양대를 시작으로 통일상(1964·육군사관학교) 통일상(1964.육균사관학교) 성무대(1966·공군사관학교)등 그가 남긴 작품들은 공공조형물로는 드물게 추상적 형태로 주목받았다. 성북고등학교(현재 홍익대학교 부속중고등학교)와 모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같이 근무한 문학평론가 이어령과 가깝게 지냈고, 수학교사였던 미래의 아내를 이곳에서 만나기도 했다. 1965년 동숭동에 있던 학교와 가까운 성북동으로 이사를 했다. 주변으로 나무가 울창한 곳에 집을 짓고 마당 뒤편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1970년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개통과 때를 맞춰 서울, 추풍령, 부산, 세 군데에 추상조각을 세워 달라는 건설부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하던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절친한 동료였던 이어령 비문에서 ‘피없는 돌에 생명을 주고 거친 쇠부치에 아름다운 영혼을 깃들이게 한 사람/마흔한살의 자기 나이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살며 그는 이곳에 잠들어있다’고 그를 추모했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214-215쪽
  • 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송영수 주소(현재): 성북동 분야: 미술(조각)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9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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