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훈
1936
인물 개인 마을주민
한국 최초의 여성 이발사이다. 이발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발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1958년 이발사면허증을 취득한다. 시어머니가 덕수교회 옆 보덕사에 시주를 했던 인연으로 1967년 성북동에 이사왔다. 성북동에서 ‘명랑이발원’을 28년 동안 운영하다가 2003년 성북구 성북로 55(성북동 133-86)로 가게를 옮겨와 상호를 ‘새이용원’으로 바꾸고 운영하고 있다. 80이 넘은 나이지만 지금도 매일 아침 가게 문을 열고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성북동
  • 새이용원(2)

기본정보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북정골
  • 비고: 새이용원(활동)

근거자료 원문

  • 최초의 여성이발사 ‘명랑 할머니’ 왜정 때 우리 아버지가 이발쟁이고, 난 그 이발쟁이 맏딸이여. 골목 위에 명랑이발원에서 내가 28년 있었거든. 요 앞 맞은편 서울슈퍼로 들어가는 골목 안에 마주보이는 집이 이렇게 판잣집으로 된 집 있잖아. 간판이 명랑이발소라고 있었어. 거기서 28년 있었어. 고향은 충청도 홍성이야. 6살적에 중학동으로 이사 와서 7살에 북만주로 가서 살다가, 11살적에 해방돼서 와서 서울서 계속 살았어. 16살 적에 6·25 사변 나서 고향에서 3년 살다가 온 거 말고는 거의 서울 토박이지. 내가 뭐 고향이 있나. 왕십리서 대흥동으로 시집갔는데 12번째에 여기로 이사왔어. 일당 250원씩 받아가면서 얘들 넷이 성북초등학교 다 나왔어. 덕수교회 옆에 보덕사가 있어요. 시어머니가 그 집 지을 적에 들보 하나를 시주를 했데. 그래서 그 연고로 (성북동에) 왔지. 삼선교에 전차 다니는 길이 있었고, 쌍다리 있는 데는 느티나무가 있어서 느티나무 동네이고. 쌍다리라고 하나는 돌다리, 하나는 나무다리 그리고 그 옆에는 포도밭이 있었어. (북정골) 소방도로 나기 전에 우리 지금 사는데 거기가 쓰레기장이었다고. 동네사람들이 똥을 퍼다가 버리는 똥구덩이었어. 그 옆에다 천막집을 짓고 살았어. 심우장 쪽 골짜기로 외딴집 하나 있잖아 쬐그만하게. 내가 사는 곳이 똥골이라고 부르잖아. 우리 집(이발소) 오는 손님들이 지나다가 “이발사 아줌마 왜 거기 있어?” “여기가 우리 집이야” “정말 거기가 집이에요” 그러면 “네. 왜 여기 살면 안돼요?”라고 그랬지. 20년 동안 전기도 없이 살고, 35년 동안 수도도 없이 길어다 쓰고 옆집에서 받아다 쓰고. 고생은 이 세상에서 제일 고생한 사람이야. 우리 집에서 1동 파출소까지 물을 길러 왔어. 요 밑에 정자나무(성북치안센터) 있는데 공동수도가 있었어.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거기까지 물 길으러오고. 또 혜화동 유치원 있는데 거기 학교 앞까지 물 길으러 다니고. 공 짜가 어디있어. 물 값 내야지. 요새 돈으로 100원씩은 내야지. 근데 그게 물통이 깨져가지고 집에 가면 반통씩 밖에 안 남고 그랬지. 빨래는 그냥 개천에서 하고. 성북동에는 1967년에 왔으니까 45년 살았는데 이발은 내가 57년간 했어. 최초에 여자 이발사고, 최초의 장로 이발사야. 왕십리 살면서 왜정 때 우리 아버지가 이발쟁이고, 난 그 이발쟁이 맏딸이여. (기술을) 배우길 뭘 배워. 아버지를 좋아하다 한 거지. 부엌에서 일하는 거보다 아버지랑 일 하는게 훨씬 낫더라. 아버지가‘아이고 덕훈이 애썼다’라고, 그 소리에 한 거지. 이거(현재 운영 중인 이용원)는‘새이용원’이고 골목 위에 명랑이발원에서 내가 28년 있었거든. 요 앞 맞은편 서울슈퍼로 들어가는 골목 안에 마주보이는 집이 이렇게 판잣집으로 된 집 있잖아. 간판이 명랑이발소라고 있었어. 거기서 28년 있었어. 나하고 같이 동업하던 사람이 거기서 그만 두고 여기에 이거 차려놓고. 여기서 하다가 병들어 가지고 그만두고 내가 하게 된 거야. 이덕훈(1936-, 성북2동 북정골 45년 거주)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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