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선음악상 제정한 이소란 여사
부군을 기념하기 위해 채동선음악상을 만든 이소란 여사. 신앙과 남편에 대한 책임감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한다.『저도 세상을 뜨면 영계에서 그분부터 만날 텐데 빚진 죄인으로야, 어찌 대하나, 그동안 걱정이 많았읍니다. 상 얘기는 벌써 7, 8년된 것이라 헛된 풍문만 남기는것 같아 부담스러웠습니다. 이제 아내로서 큰 빚을 가린 것 같습니다』 30∼50년대에 일찌기 독일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바이얼리니스트로, 작곡가로 활약했던 고 채동선씨 53년 부산 피난지에서 52세로 작고한 부군을 기념하기 위해 부인 이소란여사(76)가 이번에 2천만원의 기금으로 채동선음악상을 제정, 8일 제1회수상자 김원복씨(72) 에 대한시상식을 갖는다.
가곡 『그리워』, 합창곡 『새야새야 파랑새야』, 교풍곡 『조국』등 1백여편의 작품을 남긴작곡가 채동선씨. 부인 이여사가 눈물로 회상하는 남편은 『말은 별로 없었지만 사랑이 깊은 사람』이다. 충북 진천 태생인 이여사가 채씨를 첫 상봉한 것은 이화여전 졸업반때. 여학교때부터의 단짝 친 구 채선섭씨(성악가·전리대음대학장)의 오빠로였다. 독일 유학후 귀국길의 채씨를 서울역에서 그의 동생과 함께 만났으나 긴 여행에 지친 탓인지 8년 연상의 그는 초라하고 아파보였다. 그후 채씨는 동생면회를 빙자(?)해 자주 기숙사를 찾아왔고, 서울집(고향은 전남 보성)에 초대하여 피아노솜씨가 능했던 이여사에게 반주를 부탁하기도 했다. 31년 이전졸업 직후 결혼했고, 연이어 2남4여를 낳아 키우는 정신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종일토록 아이들에게 시달리다 아내가 정신없이 잠에 곯아떨어지면 채씨는 밤늦도록 2층방에서 휘파람을 불며 작곡에 몰두했다. 아이 둘의 기저귀는 도맡아 갈아주었다. 그동안 채씨는 고려작곡가협회회장·서울시 문화위원·숙명여대교수를 지냈다. 피난지 부산에서 느닷없는 복막염으로 작고한 것은 53년. 맞이가 22살, 막내가 4살인 6명의 졸망졸망한 아이들과 함께 이여사는 46세때 혼자가 된 것이다. 고등교육은 받았지만, 남편의 뜻을 쫓아 쪽머리를 하고 집안에만 있었던 그에겐 눈앞이 캄캄하고 괴로운지, 슬픈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때 그에게 구원의 손길울 내민 사람이 당시 기독교 세계봉사회 총무였던 정동교회 정대성 장로였다.
70년대말 한국여성단체협의회부회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 이여사는 6남매를 훌륭히 키워 영철(52)·영규(47) 두 아들과 두딸은 미국에서, 다른 두딸은 한국에서 산다. 이여사는 결혼직후 부군이 설계해 지은 대지 2백평 남짓, 건평 30평 정도인 서울 성북동 183의17 자택에서 50년 넘게 살고 있다. 언젠가 이 집을 부군의 기념관으로 만들 것을 구상하고 있다. 그동안 64, 80, 83년에 부군의 유고로 3권의 작곡집을 냈다.
『중앙일보』 1984.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