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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나라의 주요 미술품들과 국학 자료들이 제대로 보관되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다. 이 때문에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주요 유물을 수집, 관리, 전시하는 일에 몰두했다.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역사를 지키는 것이라는 가치를 젊은 전형필에게 깨우쳐준 사람은 위창 오세창이다.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2이라는 삶의 소중한 가치를 깨닫는 순간, 간송은 새로운 삶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결심을 하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 소년 전형필은 고서점에서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한 일본학생이 그를 보고 ‘일본 식민지에 사는 조선인이 이런 책이 왜 필요하느냐’고 조롱하며 비웃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울분에 가득 찬 소년은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하려고 고등학교 은사를 찾아갔다. 이야기를 한참 들은 은사는 그에게 한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후에 간송 전형필은 고등학교 은사였던 고희동 선생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 학문의 적통을 이어받았으며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서예의 대가 위창 오세창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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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1933년 봄, 간송의 나이 불과 28세에 지금의 간송미술관 터를 사들였다고 한다. 그 젊은 나이에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박물관을 짓겠다고 결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일제치하였다. 일본은 우리 문화와 역사를 말살시키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던 때였다. 우리 땅이 우리의 것이 아니던 그 시절, 우리의 문화 역시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전형필은 전 재산을 들여 박물관을 짓고,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이던 명품들을 소장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위창 오세창을 뛰어넘는 청출어람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독립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간송 전형필은 민족 문화 수호에 굳은 뜻을 가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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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창 오세창을 만나면서 전형필은 자신의 재산을 우리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쓰기로 결심하고 문화재 수집에 열중했다.
어느 날 전형필은 택시를 불러 오세창과 지금의 성북동으로 갔다. 그 당시 성북동은 초가집과 기와집이 드문드문 보이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전형필과 오세창은 택시에서 내려 산등성이을 바라보며 위쪽으로 한참 걸어갔다. 그러자 산 중턱에 프랑스식 건물이 나타났다. “선생님, 제가 얼마 전에 이 건물과 부근 땅을 모두 샀습니다. 아직 한두 필지가 남아 있어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이달 말이면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중략) 그리고 이곳에 박물관을 짓기로 했습니다.”
- <간송 전형필>, 이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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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을 만든 간송 전형필全瑩弼의 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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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한국전쟁의 초입은 문화재를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긴장감으로 기억된다. 전쟁 초입 인민군들은 남침 경로의 중앙에 있는 돈암동과 성북동에 진을 쳤다. 이어 서울이 함락된 이후에는 저 유명한 간송 전형필의 문화유산의 보고인 ‘보화각’이 그네들의 손에 들어갔다. 최순우 선생 등의 기지로 이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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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송미술관-위창과 간송,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한편,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25세가 되던 해, 종로 일대에서 상권을 쥐고 수만석 지주로 군림하던 부친 전영기와 양부養父인 숙부 전명기의 재산까지 상속하여 조선 제일의 갑부인 십만석꾼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게 된 전형필은 본격적인 고미술품 수집에 나서게 된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 미술교사였던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나 우리 문화유산의 수집 · 보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전형필은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을 통해 고미술 수집에 큰 도움을 받은 한편, 화가 · 서예가 · 고미술수집가 · 미술 사학자 등 여러 분야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그의 예술감각과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전형필이 보화각을 설립했을 무렵 성북동은 문화예술인들의 공간으로써 기능하고 있었다.
심우장에서 성북동 큰길을 따라 내려오다 성북초등학교 옆 골목길로 들어가면 수풀 사이로 양옥 건물 하나가 눈에 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으로 우리나라 고미술 수장가였던 전형필에 의해 지어졌다.
전형필이 스승 고희동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날 무렵,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의 편찬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였던 전형필이 만난 오세창은 환갑이 넘은 나이임에도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오세창은 전형필의 고미술 수집 · 감정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전형필이 문화재를 소장하고 연구할 시설을 갖추기 위해 1934년 프랑스 출신 석유상이었던 쁠레장의 별장을 사들였을 때 선잠단先蠶壇의 부근이라는 뜻으로 북단장北壇莊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북단장은 1938년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보화각寶華閣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미술관으로서 고미술 소장 · 연구의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미술사 연구의 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보화각은 전형필이 사망하고 9년 후, 1971년 간송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꾸어 봄 · 가을 전시와 연구를 이어갔다.
2000년대 들어 문화예술에 대한 대중적 수요가 증가하자 늘어난 관람객의 수용과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지난 2013년 8월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하였다. 2014년 4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에서의 ‘간송문화澗松文化-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1부 : 간송전형필’전을 시작으로 2015년 현재 ‘5부 : 화훼영모-자연을 품다’전까지 꾸준한 전시를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간송미술관의 대구분관 설립과 백남준아트센터와의 협업을 통한 우리문화 공동연구 및 공동기획전을 추진하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모를 도모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에는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다. 1938년 보화각의 상량식을 마친 후 찍은 사진으로, 보화각의 주춧돌에는 오세창의 글이 남아 있다.
무인년(1938) 윤 7월 5일에 전군(전형필)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을 굽어본다. 만품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옛 골동품古董은 자랑할 만하다. 이곳에 모인 것들,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검토 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위창 오세창.
이들은 화가, 소설가, 서예가, 고미술품 수장가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로 오세창을 중심으로 보화각에 자주 모여 전형필의 수집품을 감식하고 감상하였다.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과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은 1917년 스승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기거하며 계속 화업을 쌓았던 인물이다. 안중식과 오세창은 오랜 세월 교류하며 경묵당을 중심으로 어울렸는데, 안중식의 제자 이상범과 노수현, 고희동 역시 오세창, 전형필과 어울리며 인연을 맺었던 듯하다. 오세창과의 인연을 이어가던 고희동은 전형필을 소개하여 전형필의 고미술품 소장에 오세창이 큰 역할을 하도록 한다.
월탄 박종화는 간송의 외사촌 형이며, 박종목은 박종화의 형으로 소설가였던 박종화는 전형필을 김용진에게 소개하였다. 영운穎雲 김용진金容鎭(1882-1968)은 이도영에게 사사받고 안중식, 조석진 등의 화가, 서예가들과 교류하며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서화가 많아 평소 고서와 골동품을 모으는데 취미가 있었는데, 추사 김정희의 《난맹첩蘭盟帖》과 신윤복의 〈미인도〉 등을 전형필에게 양도한 인연으로 보화각 상량식에 참석한 듯하다.
이순황은 오세창의 소개로 전형필의 한남서림을 운영하였는데, 경성 미술구락부의 조선인 주주로 참여하고 있어 경매 참가에 도움을 주었다. 이순황은 고려 초기 부도가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다는 소식을 듣고 전형필에게 이를 구입하도록 권유하였다. 반출 직전 구입 한 부도는 조선총독부에서 폐사지에서 불법으로 훔쳐온 부도를 불법 으로 반출하려 했다는 혐의로 압수하였다. 전형필은 3년간의 무효소송 끝에 승소하여 현재 간송미술관 뒤뜰에 ‘괴산 팔각당형 부도(보물 제579호)’는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성북동이라는 공간에서 전형필과 교류했던 인물이 또 있다. 성북동 길을 따라 조금 내려오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고즈넉한 한옥은 전前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가 거주하던 공간이다. 최순우 옛집은 전형필이 수집유물을 정리할 사람에게 거처할 공간으로 임대해준 장소로 보인다. 최순우 옛집 맞은편(성북동 128번지)에는 오세창이 서화류를 보관하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가옥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골동품의 수집 · 감정이 이루어졌고, 간송미술관과 최순우 옛집을 오가는 사람들의 접대 혹은 객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순우는 광복 후 보화각에 소장된 문화재를 정리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화수장가이자 서예가인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과 함께 전형필의 수장품을 지키는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1930년대 보화각이 지어질 무렵 성북동에는 서예가, 화가, 소설가, 고미술품 수장가 및 감정가 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교류하고 있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보화각에 모여 고미술품을 수집·감정·소장하던 성북동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 구심점에는 오세창과 전형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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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 102-11
성북초등학교 정문 옆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이다. 1938년 간송澗松 전형필全瑩弼(1906~1962) 선생이 설립하였으며, 미술관의 중심건물인 보화각寶華閣에는 선생이 평생 동안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제일의 고서화 소장처로서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발족한 이래 1971년 10월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및 보물급 등의 문화재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한국 미술품 소장 미술관으로 한국미술사 연구의 메카라 할 수 있다.
미술관은 1층과 2층에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그림·글씨·부도·석탑 등에 걸쳐 다양하다. 2015년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 68호)·「신윤복필 풍속도 화첩」(국보 제135호)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의 국가지정문화재와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이 등록되어 있다.
2013년 8월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사장 전성우)이 설립되어 소장품의 연구와 보존, 전시뿐 아니라 우리 고미술 연구와 민족미술계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에 많은 노력을 쏟고 있다. 2014년부터는 대중과 더욱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협소한 보화각을 벗어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DDP에 상설 전시관을 만들어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평소 간송미술관 경내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고 있으므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상설 전시관을 찾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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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全鎣弼 1906∼1962
본관 雄善. 자는 天賚, 호는 澗松·芝山·翠雪齋·玉井硏齋. 서울 출생. 中軍(西班, 정3품) 啓勳의 증손, 武科출신으로 通政大夫中樞院議官을 지낸 泳基의 2남 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內部主事를 거쳐 정3품 宮內部參書官을 지낸 숙부 命基에게 入後된다.
간송의 집안은 증조부 啓勳 때에 이르러 배우개(현 종로4가) 상권을 거의 장악, 그 이득으로 왕십리·답십리·청량리·송파 가락동 일대와 노해면 창동 일대 등 서울 주변을 비롯해서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서산 등 각처의 농지를 구입, 수만석 대지주로 부상한다.
간송은 그런 부호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0세되는 때부터 생가 양가 조부모와 양부를 여의고 14세의 나이에 유일한 친형이요 본생가의 계승자인 鎣卨이 불과 28세의 청년으로 후사없이 급서하자 이제 간송이 생가나 양가를 통틀어 배우개집에서는 유일한 嫡孫이 되어, 생가 양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생가 부모와 양모가 엄존하여 당장 집안살림 걱정까지 해야 할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於義洞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자마자 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이어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에 입학한다. 대학시절 간송은 가장 문화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문화적 우수성을 증명하자는 야망에 불탔고 그 방법을 그의 취미이기도 하였던 藏書의 수집에서 찾으려 하여, 틈만 나면 인근 고서점에 돌아다니면서 묵은 잡지나 古本을 뒤적였다. 그러면서 이 시기 민족문화재의 수호를 평생 사업으로 하리라 결심한다.
그리하여 졸업 후에 일제식민통치 아래 말살되어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을 인멸되지 않게 一堂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童消吳世昌을 자주 찾아 다니며 민족문화재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4년 甲戌年 드디어 간송은 문화재 수집을 본격화하면서 그것을 保藏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출만한 적당한 장소를 마련하였으니,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즉 지금의 성북동 정중앙 요지 만여평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이에 그 계획을 대강 짐작하던 위창은 그곳이 옛 先蠶壇 舊址 부근임을 상기하고 北壇莊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간송은 북단장을 개설하고 나서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일본은 1938년 2월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창설하여 젊은이들의 지원입대를 강요하고 3월에는 朝鮮敎育令을 개정 공포하여 중등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는 등 철저하게 우리 문화를 말살하는 강압정치를 진행하고, 간송은 이에 맞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데 북단장안에 사립박물관을 세워 이제까지 수집해 온 문화재의 精髓를 보관 전시하며 그 연구를 통해 우리 문화의 단절을 막고 우리 민족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 주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진행하는 동안 위창과 春谷 高羲東, 穎雲 金容鎭 등 당대 서화계 원로들의 자문을 수시로 구하고 그외 젊은 화가들과도 자주 만나 의논하였다. 드디어 1938년 7월 일제의 강력한 물자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니, 위창은 다음과 같은 定礎銘을 지어 돌에 새겨 놓는다.
「때는 戊寅年 윤 7월 5일 澗松 全君의 葆華閣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복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北郭을 굽어본다. 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書畵심히 아름답고, 古童은 자랑할만. 一家에 모인 것이, 千秋의 精華로다. 槿域의 남은 丹橋로, 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葦滄 吳世昌」
그는 10만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書聖·畵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金正喜와 鄭敾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한 것을 비롯하여, 沈師正·金弘道·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서예작품을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의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자료인 중국 역대미술품의 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문헌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翰南書林을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 漢籍으로 1만권의 장서와, 장차의 연구에 대비하여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관계 서적들도 가능한한 수집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에는 재단법인 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착수,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 (1945. 10∼1946. 10), 문화재보존위원회의 제1분과 제2분과 위원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나, 그 외의 공직생활은 없었고 공식석상에도 참석하지 않으며 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8월 金庠基·金元龍·秦弘燮·崔淳雨·黃壽永 등과 같이 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同人誌《考古美術》을 책으로 냈고 그외 1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62년 1월 26일 급성 腎盂炎으로 세상을 떠났다.
간송이 죽자 국가에서는 간송의 문화재 수호와 육영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해 8윌 15일에 大韓民國文化襃章을 追敍하고 1964년 11월 13일에는 大韓民國文化勳章國民章을 추서한다. 그뒤 1965년 그의 미망인과 자제와 간송측근의 고고미술동인들인 金庠基·李弘植·崔淳雨·黃壽永·秦弘燮·金元龍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북단장에 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여 그가 마련해 놓은 연구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히 진행해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고, 보화각을 澗松美術館으로 개칭, 연구소의 부속박물관으로 하였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에서는 1968년 6월 《澗松文庫 漢籍目錄》을 출간하고 1971년 10월부터는 매년 1월과 10월 두차례에 걸쳐 전시회를 개최하고 《澗松文華》를 펴내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54-7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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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초등학교 정문 옆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으로 북단장(北檀莊)이라 부르는 곳에 고 전형필(全鎣弼)선생이 1938년에 설립하였다. 이 미술관은 대지가 4,000평으로 도심속에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주위가 한적하고 조용하다. 미술관의 중심건물인 보화각에는 전형필 선생이 평생동안 수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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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란의 와중의 모습은 일관되지 않다. 저 간송 전형필 선생에게 한국전쟁의 초입은 문화재를 지키느냐 마느냐 하는 긴장감으로 기억된다. 전쟁 초입 인민군들은 남침경로의 중앙에 있는 돈암동과 성북동에 진을 쳤다. 이어 서울이 함락된 이후에는 저 유명한 간송 전형필의 문화유산의 보고인 ‘보화각’이 그네의 손에 들어갔다. 최순우 선생 등의 기지로 이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아찔한 순간이었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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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澗松) 전형필은 1906년 7월 26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당시 종로4가 일대는‘배우개’라고 하였는데 전형필 집안은 종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조선시대는 장사를 천하게 여겼으나 전형필 집안은 상업에 일찍 눈을 떠 배우개의 상권을 시작으로 규모를 늘려나갔다. 그 이득으로 왕십리, 답십리, 청량리 등 서울 주변을 비롯해 황해도 연안, 충청도 공주 등 전국 각지에 농토를 사서 증조부인 계훈 시절에는 수만 석을 추수하는 갑부가 되었다.
전형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성과 감성이 출중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 한꺼번에 집안 어른들의 죽음을 겪고 난 후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이 많은 소년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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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에 휘문보통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열여덟 살에 결혼을 한다. 청구 이마동(靑駒李馬銅)과는 동창이었는데, 후에 화가가 된 이마동보다 전형필의 미술성적이 더 좋았다. 이때 미술교사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선생을 만난다. 고희동은 일본 유학 후 민족문화의 말살을 안타까워하여 동양화로 전환한 화가이다. 그 무렵부터 전형필은 서적을 구입하는 취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1926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전형필은 곧바로 도쿄[東京]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에 입학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에서 보낸 유학생활 동안 깊은 갈등과 절망감을 맛보았다. 어느 날 고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간송은 일본학생에게 식민지인 조선인에게도 그런 책이 의미가 있느냐는 조롱을 받았다. 그때 망국노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전형필은 후에 그 일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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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돌아온 뒤 오세창과 함께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할 계획을 세울 무렵 의학도 김승현과 이순황과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평생 전형필이 형제처럼 의지했던 사람들로 특히 이순황은 평생 전형필 곁에서 그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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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전형필은 문화재 보존위원으로 활동하며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등과 깊이 사귀었다. 특히 최순우, 황수영과는 전국 각지로 고적조사를 다니고, 북단장에서도 매일같이 만났다. 또한 1960년에는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전형필은 1962년 1월 26일 급성 신우염으로 갑자기 타계한다. 그의 죽음은 민족미술계의 전체의 크나큰 슬픔이며 민족의 슬픔이었다. 정부는 그의 문화재 수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8.15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추서하고 뒤이어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을 다시 추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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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출생.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유산을 지킨 문화재수집가이다. 휘문고보 은사인 고희동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가진 서예가 오세창을 만나며 문화재 수집을 시작하였다. 1938년 성북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保華閣을 건립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신윤복의 <미인도>, 겸재 정선의 <청풍계>, 추사 김정희와 표암 강세황의 글씨 등 수십 년에 걸쳐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 보존하였다. 일본인에게 빼앗긴 문화재를 찾기 위해 거액을 들이고, 일본까지 찾아가 우리 문화재를 다시 사오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보화각 소장품을 가지고 가려 할 때 최순우와 손재형이 이송 지연작전을 벌이는 기지를 발휘해 반출을 막았다.
1960년 진홍섭, 황수영, 최순우 등과 함께 미술사학 연구 모임인 고고미술동인회를 만들고, 동인지 《고고미술》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민족교육이 절실함을 통감해 1940년 재단법인 동성학원을 설립하고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사업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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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수집가. 서울 출생. 성북동 북단장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간송미술관)을 세워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였다. 1940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착수하였고, 1960년에는 고고미술동인회를 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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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30세 전후의 청년으로 일찍이 일본대학을 졸업하고 종로 4정목에 본택이 있는 대지주·대금업자
교육가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힘썼으며 성북동에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건립(1938)
보성고보를 인수하였고 광복 후, 보성중학교 교장과 문화재 보존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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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련 인물
월탄 박종화 : 소설가이며 전형필의 외종사촌
춘곡 고희동 :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로 휘문고보 스승
위창 오세창 : 춘곡의 소개로 알게 된 정신적 은사
- 3·1운동 민족 33인 중 한 분으로 문화재 등의 감식방법 등을 전수받음
박길용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건축가
- 보화각과 화신백화점, 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사무소인 “박길용 건축사무소”설립
혜곡 최순우 : 6·25때 보화각의 문화재가 북으로 송출되는 것을 막아줌
- 간송 전형필이 필명 ‘순우’와 호인 ‘혜곡’을 지어줌 (본명 희순熙淳)
- 혜곡이 프랑스 출장시 전형필이 차고 있던 시계를 줌
여천 김중업 : 현대건축의 선구자, 전성우의 성북동 집 설계
우두 김광균 : 간송 전형필의 사돈(송리 김은영의 아버지)
- 정지용·김기림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을 선도한 시인 (대표작품 : 와사등, 설야)
우송 전성우 : 전형필의 큰아들 (화가)
- 간송 미술문화재단 이사장
- 우두 김광균과 간송 전형필의 호에서 한자씩 발췌 호를 지음
송리 김은영 : 우두 김광균의 딸이자 전성우의 처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13호 매듭장
전영우 : 전형필의 둘째 아들, 간송미술관장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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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송 전형필과 보화각(간송미술관)
1906년 : 간송 전형필 출생 (1962년 사망)
휘문고보에서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인 고희동을 스승으로 모심
고희동의 소개로 위창 오세창을 만남(정신적인 스승)
1933년 : 1933년부터 성북동 초입의 대규모 부지 매입시작
이곳이 선잠단의 북쪽에 위치하여 북단장(北壇莊)이라 명명
프랑스 출신의 석유상(장작상) 플레장(Plaisant, 한국이름 부래상富來祥)이 거주하였던 집
무악재 인근에서 나무장수들에게 커피를 따라주며 장사, 커피는 “양탕국”이라 불리우며 인기를 끌며 장작을 구입 판매
플레장은 우리나라에서 커피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고양 부씨 “부래상”이라며 장작 장사로 거부가 됨
1938년 : 보화각 건립
한국 최초의 근대건축가 박길용에게 설계 의뢰
1934년 시공에 돌입하여 1938년에 준공한 서구식 미술관
3·1운동 민족 33인 위창 오세창이 “보화각”이라는 이름 선사
1940년 : 보성고보(보성고등학교) 인수
1955년 : 한국조형문화연구소(성북동 가마, 1955~1962) 설립
조선백자의 전통을 현대에 계승 목적(현대도자공예의 시작)
정식명칭은 “Klin of Korean Art Society”이나 속칭 “성북동 가마”나 “간송요”로 불림
미국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현실화
시험요로서는 크고 제품요로서는 작은 내면적 6척입방의 각요로서 성북동 보화각 뒤 산골짜기에 위치
1962년 : 간송 전형필 사망
1966년 :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설립
민족 미술의 연도별·장르별 분류 상세분류 시작
1971년 : 간송미술관으로 명칭 변경
1962년 간송의 사망 후 보화각 기능 일시 정지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으로 명칭변경 후 유물 일반에 공개
2014년 :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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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북동 문화예술인 주소지
이름 : 전형필
주소(현재) : 성북동 102-11
분야 : 문화재 수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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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셋-성북구의 위대한 ‘멘토와 멘티’, 오세창과 전형필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데 일생을, 전 재산을 바친 간송 전형필. 기와집 한 채가 1,000원이던 시절 5,000원으로 그림 한 장을 사고 2만 원으로 도자기 하나를 산 ‘이상한 남자’의 머릿속에는 오직 “조선의 것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그가 지켜낸 문화재는 훈민정음,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조선백자, 신윤복의 <미인도> 등 국보 12점, 보물 10점에 이릅니다. 전형필이 문화재를 수집하는 감식안을 기르게 해 준 스승이 바로 위창 오세창입니다. 23살의 풋풋한 젊은이였던 전형필은 은사인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의 소개로 65세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을 만납니다. 당시 오세창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한학의 일인자였으며 또한 추사 김정희의 직계 제자인 역매 오경석의 아들로 청년 전형필로서는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지요. 오세창이 전형필에게 왜 문화재 수집을 하게 됐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민족지도자로 광복을 열망했던 오세창이 그런 청년의 스승이 되어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간송(澗松)이라는 전형필의 호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葆華閣)이라는 이름도 모두 오세창이 선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