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죽던 날은 꼭 20일 전인 4월 19일이었다. 그 무렵 딸은 전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올랐다는 신문 기사를 잃은 뒤 딸은 책상에 엎드려 우는 날이 잦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딸이 울면서 “공산당 나쁘다더니 공산당 같은 짓을 한다”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죽은 당일 날도 딸은 학교에 나가면서 혼잣말처럼 “오늘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고등학생들이 안하면 우리 클래스 친구들을 선동해서 나설 테야”라고도 했었다. 어머니는 소란스러운 시국 속에서 이러한 말을 중얼거리는 딸이 염려스러워 “너는 공부나 할 일이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단단히 말하면서 딸의 돌출행동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던 친척 아주머니만 있었다. 대문 밖 골목에는 딸이 데리고 온 학교 친구 50~60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친척 아주머니가 차려준 저녁상을 밀쳐놓은 채 딸은 어머니를 보기 위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한참이 지나도 어머니를 볼 수 없자 딸은 무엇인가를 바쁘게 연필로 적고는 친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 편지는 딸의 유언이 되었다. 그날 밤 딸은 미아리고개에서 버스를 타고 시위를 하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딸의 이름은 진영숙陳英淑이었다. 당시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2반에 재학 중이었다. 이 무렵 많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아가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고 더러는 죽음을 당하거나 혹은 부상을 입은 경우도 있었다. 진영숙의 사례는 그 일부에 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