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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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자연지리
성북구 삼선동, 종로구 이화동, 창신동, 숭인동과 맞닿는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한양도성의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동쪽에 해당하며, 남쪽 끝자락에 흥인지문(동대문)이, 북쪽 끝에는 혜화문(동소문)이 위치한다. 조선시대 낙산은 풍광이 좋아 이름난 별장 단지를 형성한 곳 중 하나였다. 낙산이 주거지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일제의 소위 ‘근대화’ 정책으로 토지를 상실한 지방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이들은 옛 한양의 외곽 지역에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낙산 자락도 그중 하나였다. 낙산 자락에 살던 대다수가 ‘토막’이라는 기초적인 주거 시설을 짓고 살았는데, 이들을 흔히 ‘토막민’이라고 불렀다. 현재 낙산은 낙산공원과 성곽 주변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주거지로 개발되었다.
보문동 삼선동
  • 한양도성 순성길(한두수 감독)
  • 동숭동낙산(東崇洞駱山)
  • 낙산 야경
  • 낙산공원(1)
  • 낙산공원(2)
  • 낙산공원(3)
  • 낙산공원(4)
  • 낙산공원 종합안내도
  • 한양도성 순성길(한두수 감독)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駱山
  • 이명칭: 타락산(駝駱山), 낙타산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자연지리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종로구
  • 비고: 성북구와 종로구의 경계

근거자료 원문

  • 한양도성과 낙산 등은 비밀회의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중략) 경기도 광주 출신의 석혜환은 낙산에서 광주공산당협의회의 비밀회의를 가졌다.
  • 보문동의 서남쪽 경계를 이루는 낙산은 한양도성의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동쪽에 해당하며, 남쪽 끝자락에 흥인지문(동대문)이, 북쪽 끝에는 혜화문(동소문)이 위치한다. 현재의 낙산은 낙산공원을 제외하면 모두 주거지로 개발되어 ‘산’의 이미지를 갖지 못하지만, 조선시대의 낙산은 산과 계곡이 좋아 이름난 별장 단지를 형성한 곳 중 하나였다. 숙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신숙필申叔弼의 개석당介石堂,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지은 이수광李睟光의 비우당庇雨堂과 함께 삼양헌三陽軒, 최락당最樂堂 등의 별장 이름도 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조선의 4대 문장가로 불리기도 했던 이정귀李廷龜(1564~1635)는 “낙산 기슭에 명원名園이 많다.”라 기록하고 있다. 낙산에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타사에 남아있는 석탑이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랜 기간 이 지역의 상징이었던 듯하다. 보문동은 탑골, 탑동 등으로 불렸는데 모두 미타사에 있는 탑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이 탑은 고려 문종 1년(1047)에 건립되었고, 충숙왕 1년(1314)에 중수된 것으로 970년의 세월 동안 보문동을 지켜왔다. 낙산이 담고 있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정순왕후 송씨의 사연이다.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단종과의 혼인으로 왕비가 된 그녀는, 남편이 상왕이 되며 대비大妃의 지위까지 오르지만, 곧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되며 군부인郡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다시 서인으로, 그리고 다시 천인의 신분까지 격하된다. 대비에서 천인까지 파란만장한 신분의 변화를 겪었다. 그녀가 낙산과 관련을 맺은 것은 궁에서 쫓겨난 이후였다. 궁에서 나온 그녀는 낙산의 청룡사 부근에 거처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은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염색을 하려 하였는데, 염색을 위해 집 근처샘에 천을 넣었더니 그 천이 저절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그녀가 단종이 그리울 때마다 그가 있던 영월(강원도)을 바라봤던 곳의 이름은 동망봉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후대에까지 남아서 영조는 이곳에 친히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써서 낙산의 바위에 새겨 놓았다(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낙산이 현재와 같이 주거지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원인은 도시의 확장이었다. 일제의 소위 ‘근대화’ 정책은 지방 농민들의 토지 상실로 인한 농민층의 빈곤을 가져왔고, 농민들은 토지를 이탈하여 빠르게 임금노동자가 되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식민지 수도 경성으로 모여든 이들은 옛 한양의 외곽 지역에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낙산 자락도 그 중 하나였다. 낙산 바로 아래 자락에 위치한 현재의 창신동은 1927년에서 1938년까지 조선인 가구만 약 1,500여 호가 늘어 당시 경성에서 가장 조선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난 곳 가운데 하나였다. 농촌과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 잡았기에 주거 환경은 좋지 않았다. 낙산 자락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토막’으로 불리던 기초적인 주거 시설을 짓고 살았는데,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흔히 ‘토막민’이라고 불렀다. 토막민들의 삶은 힘들었다. 이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1926년 1월 25일 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극도의 곤궁을 못 이겨 여자 5명이 자살시도.” 소제목은 ‘추운 날 있던 집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참상. 그중에는 방연 17세의 꽃 같은 처녀도 있다.’였다. 이들은 대 한제국 당시 육군참령을 지낸 이흥선李興善의 가족이었다. 이흥선이 죽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이들은 낙산을 찾아 그곳에서 얼어 죽고자 했던 것이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범죄도 일어났고,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이 숨어들기도 했다. 1930년 9월 3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낙산에 거주하던 토막민 김태석은 시장에서 행인의 돈을 빼앗다가 경찰 및 소방대원에게 격투 끝에 체포된다.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사는 곳을 ‘낙산 밑 토막’이라고 굳이 적은 것으로, 토막민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한편 그보다 앞선 1927년 12월 8일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무국 소속의 박응칠이란 사람이 낙산 자락으로 숨어들어 일본 경찰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이야 ‘공산당’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지만, 당시 조선공산당은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였고, 일제에게는 당연히 탄압의 대상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일본 경찰을 박응칠이라는 자를 잡아 그를 단서로 핵심당원들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박응칠이 숨어든 곳은 낙산 일대였다. 많은 이주민들이 사는 낙산이라는 공간은 낯선 사람이 찾아들어와도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박응칠은 곧 체포된다. 아마 일본 경찰은 핵심당원들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박응칠을 ‘취조’했을 것이다. 그 취조의 방법이 가혹했을 것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취조 기록을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의 낙산은 도심과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공간이었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안식처였으며, 언제든 낯선 이들을 환영하는 공간이었다. 낙산은 현재에도 서민들의 주거 공간이다. 낙산공원과 성곽 주변 일부를 제외하면 바로 밑까지 주택과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한양도성 주변의 몇 남지 않은 성곽마을인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이 모두 낙산 자락을 끼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수진 외 7인, 2017, 보문동∙안암동, 43-47쪽
  • 東崇洞駱山(동숭동낙산) 【正解者(정해자)】 東崇洞(동숭동) 駱山下人(낙산하인)要報番地姓名(요보번지성명) ◇이 산은 모다락산이라고 부르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락타(駱駝(낙타))산이라고 하엿습니다 락타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서 약대를 보셧지요. 약대는 이름이 오락타는 자랍니다. 이산이 중툭이 움쓱하여 약대등같기 때문에 락타산이라 한 것 같습니다. 혹 거꾸로 부쳐서 타락산이라고도 하나, 아마 락타산이 원이름이겠지요. 글씨 잘 쓰고 글 잘하고 그림까지 그리던 강표암선생이 이 근처에서 살았었드랍니다. 근세로 말하면 보재 이상설씨의 별장이 있었지요. 을사년 조약 된 뒤에 어느날 밤인지 달이 낮같이 밝은데 이 별장에서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표연히 밖으로 나아가서 고만 자취를 감추었답니다. 이십년동안 유리표박하면서 괴로운 마음이 귀신을 울릴만한 기적을 생각하시면 첫걸음을 내여놓은 이산 및 동구도 길게 강개한 기렴이 될 것이다. 이 잔디에 표암의 지팡이 자국이야 있겠습니까마는 이솔나무의 풀은 그늘은 보재의 걸음을 여러번 멈추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1924년 07월 16일 3면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173
  • 낙산 낙산은 산의 모양이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타락산(타락을 거꾸로 하면 낙타가 된다)으로 불렸으며, 높이는 해발 125m로 한양도성을 둘러싼 내사산 중에 가장 낮다. 낙산뿐 아니라 한양도성은 전반적으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청계천 또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물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게 만든 시설인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모두 동대문 옆에 있는 것, 지반 공사 때문에 동대문 공사에 차질이 생긴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한편 동쪽의 낮은 지세는 풍수적으로도 문제가 되었다.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었고, 곧 세자 등 후계자를 의미했다. 이런 풍수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훗날 흥인문의 이름을 흥인지문으로 바꾼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낙산은 이렇게 낮은 동쪽 지세의 중심이다. 하지만 산이 낮다고 그곳에 담긴 이야기가 적은 것은 아니다. 낮은 만큼 친근했고, 사람들이 찾기 쉬운 곳 또한 낙산이었기 때문이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49쪽
  • 조선시대의 낙산 – 별장지, 그리고 여성 현재의 낙산은 정상부근까지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최근에는 낙산을 ‘한국의 몽마르뜨 언덕’으로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낙산은 조선시대 이름난 별장지 중 하나였다. 숙종 대 우의정까지 역임한 신숙필은 낙산에 별장인 개석당介石堂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꽃을 피우고 학을 기르며 유유자적하며 지냈다고 전한다. 또한 『지봉유설』로 잘 알려진 이수광이 머물렀다는 ‘비우당庇雨堂’ 역시 낙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4대 문장가로 불리기도 한 이정귀李廷龜(1564~ 1635)는 “낙산駱山 기슭에는 옛날에 명원名園이 많았다.”고 기록하며, ‘삼양헌三陽軒’, ‘최락당最樂堂’ 등 당대의 별장 이름도 함께 남겨 당시 별장지로서 낙산의 위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한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49-150쪽
  • 이밖에도 낙산에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것은 여러 문집의 시문에도 잘 남아있다. 先軰風流久寂寥 선배들의 풍류야 못 접한 지 오래지만 我公冠珮不蕭條 우리 공 모양새는 메마르지 않았었는데 從今駝駱山前路 이제부턴 타락산 앞에 길을 거닐어도 怊悵何門杖几操 의젓한 늙은이가 뉘 집에 있단 말인가. 위의 글은 조선 후기의 문신 윤휴尹鐫가 쓴 한 선배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이다. 시의 주인공은 장례원판결사를 지낸 이정李淀인데, 이 시는 그가 낙산 부근에 살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吾村駱下衣冠盛 낙산 아래 우리 마을엔 벼슬아치도 많은데 先輩凋零獨有公 선배들 모두 세상 떠나고 오직 공만 남았었지 永感餘生惟涕淚 남은 생애에 영감으로 오직 눈물만 흘렸나니 交情兩世自孩童 두 대에 걸친 우정 어릴 적부터 사귀었어라 詩書舊業雙珠在 시서의 가업 이을 훌륭한 두 아들 있고 琴鶴遺蹤一夢空 금학의 남은 자취는 덧없는 꿈이 됐구려 惆悵他時過故宅 서글퍼라 훗날 그대 고택을 지나갈 때 破垣枯草又春風 무너진 담장 마른 풀에는 또 봄바람이 불련만 위의 글은 앞서 언급한 이정귀가 남긴 글이다. 이 글에서도 낙산 아래에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 즉 벼슬아치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50-151쪽
  • 이렇게 낙산에 많은 문인들이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좋은 경관 때문이었다. 지금 낙산 아래에 있는 이화동의 옛 이름은 쌍계동雙鷄洞으로, 삼청三淸·인왕仁王·백운白雲·청학淸鶴과 함께 한양의 5대 명소로 꼽히는 곳이었다. 쌍계동은 말 그대로 두 개의 개천이 흐르던 곳이다. 현재 낙산 아래에서는 어떤 개천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19세기 제작된 <수선전도>는 물론, 1914년 제작된 <경성부명세신지도京城府明細新地圖>에서도 지금의 대학로를 따라 청계천까지 흐르던 하천을 확인할 수 있다. 경관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지세였다. 낙산의 낮고 평평한 지세는 집을 짓기에도 좋았으며,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 중기 이후 중심이 되던 궁궐과도 매우 가까웠다. 또한 동대문과 동소문을 끼고 있어 교통도 편리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51-152쪽
  • 낙산의 근대 - 서민들의 주거공간 조선시대 문인들의 별장이 있던 낙산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서민들의 주거공간으로 지역의 성격이 크게 바뀌게 된다. 원인은 도심의 확장이었다. 일제의 소위 ‘근대화’정책은 지방 농민들의 토지 상실로 인한 농민층의 빈곤을 가져왔고, 농민들은 토지를 이탈하여 빠르게 임금노동자가 되어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식민지 수도 경성으로 모여든 이들은 옛 한양의 외곽 지역에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낙산 자락도 그 중 하나였다. 낙산 바로 아래 자락에 위치한 현재의 창신동은 1927년에서 1938년까지 조선인 가구만 약 1,500여 호가 늘어 당시 경성에서 가장 조선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난 곳 가운데 하나였다. 농촌과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 잡았기에 주거 환경은 좋지 않았다. 낙산자락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토막’으로 불리던 기초적인 주거 시설을 짓고 살았는데,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흔히 ‘토막민’이라고 불렀다. 토막민들의 삶은 힘들었다. 이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1926년 1월 25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극도의 곤궁을 못 이겨 여자 5명이 자살시도.” 소제목은 ‘추운 날 있던 집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참상. 그 중에는 방연 17세의 꽃 같은 처녀도 있다.’였다. 이들은 대한제국 당시 육군참령을 지낸 이흥선의 가족이었다. 이흥선이 죽고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자 이들은 낙산을 찾아 그곳에서 얼어 죽고자 했던 것이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범죄도 일어났고,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이 숨어들기도 했다. 1930년 9월 3일 『동아일보』에 따르면, 낙산에 거주하던 토막민 김태석은 시장에서 행인의 돈을 빼앗다가 경찰 및 소방대원에게 격투 끝에 체포된다. 이 기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사는 곳을 ‘낙산 밑 토막’이라고 굳이 적은 것으로, 토막민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55쪽
  • 한편 그보다 앞선 1927년 12월 8일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무국 소속의 박응칠이란 사람이 낙산자락으로 숨어들어 일본 경찰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금이야 ‘공산당’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지만, 당시 조선공산당은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였고, 일제에게는 당연히 탄압의 대상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일본 경찰을 박응칠이라는 자를 잡아 그를 단서로 핵심당원들의 정보를 알아내어 그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박응칠이 숨어든 곳은 낙산 일대였다. 많은 이주민들이 사는 낙산이라는 공간은 낯선 사람이 찾아들어와도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박응칠은 곧 체포된다. 아마 일본 경찰은 핵심당원들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박응칠을 ‘취조’ 했을 것이다. 그 취조의 방법이 가혹했을 것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취조 기록을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렇듯 일제 강점기의 남산은 도심과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공간이었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안식처였으며, 언제든 낯선 이들을 환영하는 공간이었다. 낙산은 현재에도 서민들의 주거 공간이다. 낙산공원과 성곽주변 일부를 제외하면 바로 밑까지 주택과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한양도성 주변의 몇 남지 않은 성곽마을인 장수마을과 이화마을이 모두 낙산자락을 끼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수진 외 5인, 2014, 한양도성 역사산책, 156-157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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