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소문동
1949.08.15
장소 인문지리
성북구의 중앙에 위치한 동의 이름이다. 일제강점기까지 동소문(혜화문) 밖은 돈암동으로 불렸는데, 1930년대까지는 한적한 시골의 모습이었으나,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1930년대부터 도시계획 아래 개발되기 시작하여 빠르게 인구가 유입되고 정비되었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동대문구에 속해 있다가,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되며 관할이 성북구로 넘어왔는데, 지역이 넓고 인구가 많아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돈암동으로 분리되었다. 동소문동이라는 이름은 동소문(혜화문)에 인접한 동네여서 동소문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이후 법정동으로서 동소문동1가~7가까지 세분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동소문동1·4가는 성북동이, 동소문동2·3·5가는 삼선동이, 동소문동6·7가는 동선동이 관할하고 있다.
성북동 동선동 삼선동
  • 4.19 혁명 당시 파출소 등 피해상황
  • 동소문지구 재개발 예정지(1990.4.30)
  • 동소문지구 주택개량재개발사업 기공(1990.4.30)
  • 삼선동2가의 반찬 가게
  • 성신여대입구 우이경전철
  • 성신여대입구 우이경전철(5)
  • 성북천 풍경(8)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인문지리

시기

  • 시대: 현대
  • 시기: 1949.08.15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근거자료 원문

  • 東小門洞 한성대입구역부터 성신여대입구역 사이의 「東小門路」좌우에 위치한 東小門洞은 1街부터 7街까지 구분되어 있는데, 동소문동이란 洞名은 서울 성곽의 4小門의 하나인 東小門의 이름을 딴 것이다. 동소문은 惠化門의 속칭으로 동소문동은 조선 초부터 漢城府에 속하였는데 조선말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東署 崇信坊(城外) 東門外契 敦岩里이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한일합방으로 日帝가 1911년 4월 1일(京畿道令 제3호) 漢城府를 京城府로 개칭하고 경기도에 편입시켜 경기도 경성부 崇信面 敦岩里 三仙坪으로 칭하다가 1914년 4월 1일(京畿道令 제1호) 경기도 高陽郡 崇仁面 敦岩里로 하였다. 다시 1936년 4월 1일(總督府令 제8호) 경성부 관할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京城府 敦岩町으로 되었으며 1943년 6월 10일(府令 제163호) 區制실시에 따라 東大門區에 속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日帝式 洞名을 고치면서 敦岩町은 敦岩洞으로 되었다. 돈암동지역은 매우 넓은데다가 광복 후에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하여 分洞이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1949년 8월 15일(大統領令 제159호) 東大門區에서 城北區가 分區될 때 東小門洞은 1∼7街로 세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洞의 명칭이 된 東小門, 즉 惠化門은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朝鮮初 太祖 5년(1396) 에 都城을 쌓으면서 城門을 낼 때 弘化門이라고 지었다. 그 후 成宗 15년(1484)에 昌慶宮을 신축하고 그 동쪽 門(現 昌慶苑 正門)을 弘化門이라고 한 까닭에 中宗 6년(1511) 에 두 門의 혼동을 막기 위해서 東小門을 惠化門으로 고쳤다. 이 문은 영조 20년(1744) 御營廳에 명하여 수축했고, 일제 때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1928년에 門樓를 헐어내고 1939년에 電車 선로를 개설할 때 虹霓마저 헐어 버렸다. 한편 이 문은 小靑門으로도 불렸는데 서울 성곽의 4大門은 아니지만 숙정문 대신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과 같이 正門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동소문 밖에는 성북동에서 내려오는 성북천 또는 安岩川이 흘러 내려가는데 이 개천이 구부러져 동쪽으로 흘러가는 곳의 남쪽과 북쪽에 山地가 서로 통해 古松이 울창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부근의 底地를 三仙川이라고 칭했다, 전에는 평평한 모래사장같은 개울바닥이었기 때문에 朝鮮時代에는 軍隊의 연병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 城北川은 三仙橋와 敦岩橋 부근 일부가 각각 覆蓋되어 商街 아파트 등이 세워져 있다. 동소문동 4가 103번지(전일 돈암동 421번지)에는 敦岩莊이 있는데 이 곳은 조선시대에 東活人署가 자리했던 곳이다. 활인서는 서울 사람들 중의 질병에 걸린 빈민, 특히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던 국립의료기관이다. 조선시대에는 東, 西 두 곳에 활인서를 두었는데 이곳에 있던 동활인서는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성동구 신당동 쪽으로 이전한 것으로 나타난다. 活人著의 기능을 보면 醫員 외에 巫堂을 배치해서 都城內에 의지할 곳이 없는 환자들을 藥과 미음으로 구휼, 보호하게 했다. 전염병이 크게 돌면 活人署 주위에 病幕을 만들어 환자들을 수용했는데 巫堂을 전속으로 배치한 이유는 전염병 유행에 대한 疫鬼의 퇴치술을 강구하게 하고, 때로는 치료 이외의 구호사업도 겸하게 했다. 活人署는 驛, 院 등과 함께 국가에서 直轄하는 사회기관으로서 飢民救護에도 큰 구실을 했다. 이 活人署에는 汗蒸場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世宗 때 기록에 땀내고 찜질하고 목욕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 후 이곳은 日帝때 平山救場이 만들어져 젖소 등을 키우기도 했는데 이송래씨가 넓은 정원에 청기와의 韓屋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광복 직후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한 李承晩이 조선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 2년간 이곳에 머물던 이승만은 麻浦莊으로 잠시 옮겼다가 梨花莊으로 간 뒤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景武臺(현 청와대)로 이전했다. 三仙中學校와 東小門洞事務所사이 언덕 위에는 靑龍庵(1街 45) 이 있다. 이 절은 원래 城北洞 狗蹲峰아래에 있었는데 政府의 山地開發計劃에 따라 절터를 매각하고 그 代金으로 1969년 5월 현 위치에 절을 세웠다. 옛 문헌에는 哲宗 때 領議政 金左根이 1853년에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옛부터 彌勒石像이 露天에 있었으므로 彌勒堂이라고도 칭했다. 한편 東小門洞 4街북쪽에 있는 치마바위는 옛날 三仙洞 3街에 있는 玉女峰에서 玉女가 세 神仙과 함께 놀다가 치마를 벗어서 이 바위에 널었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현재 城北區廳은 「普門路」변의 삼선동 5가 411번지에 자리잡고 있지만 1950년 3월 30일에 성북구가 신설될 때 1950년 3월 30일 동소문동 3가 29번지의 3층 석조 건물(경기 학원 건너편)을 청사로 삼아 開廳式을 가졌다. 그 후 1957년에 현재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동소문동 1가∼7가까지의 지역은 성북구에서는 가장 번화가로서 商街와 주택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동소문로」와 복개된 城北川지역은 삼선시장과 돈암시장이 연결되어 있어 人波와 차량으로 혼잡하다. 「동소문로」에는 지하철 4호선이 지나고 있지만 도로 확장이 추진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해질 것이다. 이 길에는 1968년 11월 29일까지 電車가 운행되기도 했다. 현재 동소문동 1가∼4가 지역은 동소문동사무소, 동소문동 5가지역은 삼선 제2동사무소, 동소문동 6가, 7가 지역은 동선 제2동사무소에서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7-770쪽
  • 〈東小門洞〉 東小門洞은 法定洞名이자 東小門洞1街, 2街, 3街, 4街지역 및 성북구민회관 남쪽 지역의 敦岩洞 일부지역 행정을 담당하는 洞長管轄區域 명칭이다. 동소문동이란 명칭은 法定洞 명칭보다 동장관할구역 명칭으로 먼저 사용되었다. 『市勢一覽』에 의하면 1947년 말에 東小門洞會가 敦岩洞일부의 행정을 관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돈암동 지역은 동소문동회, 東仙南部洞會, 東仙北部洞會, 貞和洞會, 旭丘東部洞會, 旭丘西部洞會 등 6개 동회가 행정을 담당했다. 그 후 1955년 4월 18일(市條例 제66호) 「洞制」를 실시할 때 東小門洞事務所는 돈암동 중 三仙橋로부터 敦岩橋에 이르는 城北川 이북의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1970년 5월 18일(市條例 제613호)에 동소문동 1, 2, 3, 4가 및 돈암동 중 돈암국민학교 앞을 기점으로 東묘女商에 이르는 小路이남 지역으로 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동소문동사무소는 동소문동 1이 1번지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데 1981년 6월에 신축해서 이전해 왔다. 이 옆에는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운영하는 城北 어린이집이 세워져 있다. 광복 당시부터 1990년까지 동소문동사무소의 현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770쪽 표 참조).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70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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