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주
1668 - 1716
인물 개인 학자
조선후기 오위도총부도총관, 조지서제조, 귀후서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도장, 호는 취몽헌이다. 종친부전적 오사겸의 증손으로, 할바어지는 이조판서 오상이며, 아버지는 판서 오두인이다. 1679년 12세가 되던 해에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와 혼인하여 해창위에 봉해졌고, 명덕대부의 위계를 받았다. 22세에는 희빈장씨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에 대하여 노론의 송시열 등이 반대 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찬동하여 책봉을 반대하는 의견을 상계했다가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얼마 뒤 왕명에 의하여 직첩이 환급되기도 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숙종의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금석문으로는 「오두인석비(吳斗寅石碑)」 등이 있다. 조선 후기 종암동은 해주오씨 별서로 불렸으며 고려대 뒷산의 종암 일대를 오태주가 별서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종암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吳泰周
  • 이명칭: 道長, 醉夢軒, 文孝
  • 성별: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인물 개인 학자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

근거자료 원문

  • 吳泰周 1668(현종 9)∼1716(숙종 42) 朝鮮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海州, 자는 道長, 호는 醉夢軒. 판서 斗寅의 아들이다. 1679년(숙종 5) 12세의 나이로 현종의 딸인 明安公主와 결혼하여 海昌尉에 봉해졌고 明德大夫의 위계를 받았다. 그뒤 光德大夫로 進階되었고, 오위도총부도총관·造紙署 提調·歸厚署 提調등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1689년 禧嬪 張氏의 아들을 世子(뒤에 景宗)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에 대하여 노론의 宋時烈 등과 반대운동을 일으키다가 일시 삭탈관직되었으며, 얼마 후 왕명에 의해 직첩이 환급되었지만 그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서예를 즐겼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에 능하여 1712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국왕과 대신의 시가 담긴 병풍을 원하자 그것을 書寫하기도 하였고, 왕실의 玉冊과 神板·幽誌 등을 많이 썼다. 또한 시문에도 능하여 숙종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 전하는 묵적으로는 행서체의 간찰이 다소 있고 금석문으로 吳斗寅石碑 등이 있다. 시호는 文孝이다, 城北區鍾岩1동에 그의 묘와 부인 明安公主의 묘가 있다. 이곳을 지금의 숭례국민학교를 분기점으로 하여 학교의 앞쪽을 「큰해창」, 뒤쪽을 「작은 해창」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吳泰周가 明安公主와 결혼하여 海昌尉에 봉해졌음에 그의 묘가 있다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39-740쪽
    원문에는 종암동에 명안공주와 오태주에 묘소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명안공주가 죽자 숙종은 장지를 양주 서면 염산(廉山)으로 정하길 명하였다(『숙종실록』 권18, 숙종 13년 6월 16일 임술 2번째기사). 그러나 염산은 도성 10리 이내인 금표 안의 땅이므로, 장사를 지낼 수 없다는 반대 상소를 사헌부에서 계속 올렸다고 한다. 이에 결국 광주 월곡면(현 경기도 안산시)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숙종실록』 권18, 숙종 13년 6월 21일 정묘 2번째 기사). 또한, 영조대에 오원(오태주의 계자)이 올린 상소를 보면 부모의 묘소가 경기도 광주에 있다고 한다(『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6월 17일(병신)). 따라서 종암동에 묘가 있었는데 경기도 안산으로 이전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안산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술통제

  • 작성자: 우성진
  • 작성일: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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