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청 북창
? - 1894
장소 유적
성북구 성북동 260번지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창고 유적이다. 어영청은 도성의 수비와 왕의 시위를 위해 설치된 조선후기 5군영의 하나로, 당시 수도방어에 책임을 맡고 있던 훈련도감과 더불어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재정 문제로 도성 밖에서 교대로 근무하여 병력을 유지시켰다. 현재 성북동 수월암의 남쪽 일대에 어영청의 도성 동북쪽을 경비하는 부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북둔(北屯)’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그 부대의 창고가 북창(北倉)이었다. 순조 이후 어영청은 장어영ㆍ총어영 등으로 개편되었다가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성북동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北倉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60번지

근거자료 원문

  • 4) 都城守備와 御營廳 漢京識略에 보면 城北洞일대는 北倉洞이라 소개되어 있다. 이는 朝鮮後期 御營廳의 北屯 뿐 아니라 北倉이 이곳에 두어졌기 때문이다. 城北洞 260번지 水月庵 남쪽일대가 北倉터로 알려져 있다. 御營廳은 都城守備와 王의 待衛를 위해 설치된 조선후기 五軍營의 하나이다. 1623년 仁祖反正이후 後金에 대하여 강경책을 표방한 仁祖는 親征計劃 아래 開城으로 나아갈 것을 대비하여 開城留守 李貴를 御戎使로 임명하여 260여명의 火砲軍을 골라 훈련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御營軍의 시초였다. 어영군은 그 직후 李适의 난을 맞아 국왕이 公州로 몽진하는데 호종하였으며 그곳에서 각지의 山尺砲手를 뽑아 충원하여 600여명으로 늘어났고 還都 후에는 1,000명에 달하였다. 이로써 御營軍은 당시 수도방어에 책임을 맡고 있던 訓鍊都監과 더불어 中央軍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훈련도감처럼 서울에 常駐시키지 못하고 그 교대로 500명씩 番上하게 하고 번상시의 경비를 제공하는 保人을 두었다. 御營軍은 잠시 摠戎使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나 丁卯胡亂 직후인 1628년 12월에는 그 수가 5,000명으로 늘어나 처음으로 廳으로서의 官府를 가지고 御營大將을 정점으로 하는 軍營體制를 갖추었다. 丙子胡亂 이후에는 약 7,000명으로 늘어나 8번으로 나누어 겨울철에만 번상하였다. 御營軍은 이후 孝宗의 北伐政策의 일환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효종은 그 3년(1652) 군사전문가인 李浣을 御營大將으로 삼아 군비확충의 일차적인 사업의 하나로 어영군을 21,000명으로 증원하는 한편 6번으로 나누되 21개 집단으로 편성하여 두 달씩 1,000명이 번상하게 하여 종래 겨울 결빙 때만 번상하던 것을 지양하여 1,000명의 병력이 군영에 상주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효종 이후 국가재정에 의한 운영체제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지금까지 모병에 의해 유지되던 것을 平安·咸鏡道를 제외한 6道 鄕軍이 의무적으로 번상하게 하는 체제로 바꾸는 동시에 이를 돕는 保人의 수를 대폭 늘리게 되었다, 이들 鄕軍은 25番으로 나누어 5哨씩 번상하여 두달동안 복무하게 하였는데 약 700명이 서울에 상주하였다. 그동안 어영군은 束伍法에 의해 5部·別三司·別中哨로 편제되었으나 肅宗 30년(1704) 12월에 1營을 5部, 1부를 5司, 1사를 5哨로 편제하여 모두 125哨, 16,300명으로 정비되었으며, 속오법의 기본단위인 哨의 軍摠은 127명으로 편제되었다. 그리고 기본 병종인 鄕軍이외에 騎士·別破陣·京標下軍·守門軍·軍鋪守直·本牙兵·縣錄牙兵·輜重卜馬軍·楊花律牙兵·敎師·兼別破陣·鄕騎士·標下軍 등 잡다한 병종이 鄕軍보다 더 많았다. 한편 御營廳의 본영은 漢城府 東部 運花坊에 설치되었으며, 소속 진영으로는 南小營이 남부 明哲坊 남소문 동쪽에 있고 東營이 宣仁門밖에 위치하였으며 北二營이 社稷洞에 있었다. 그 외에 集春營은 集春門밖에 있었고 糧餉을 저장한 南倉은 南小洞에 있었다. 그리고 어영청의 지휘부에는 정상적인 지휘계통 이외에 군무를 관장하는 郎廳, 군사훈련 담당관인 敎鍊官, 旗牌官·本廳軍官·出身軍官·駕前別抄·別武士·馬醫·在京軍官등이 있었으며, 西海의 永宗鎭이 그 屬營으로 있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純祖이후 御營廳은 將禦營·總禦營등으로 개편되었다가 高宗 31년(1894)에 폐지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8-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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