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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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장소 유적
서울 북쪽의 북한산에 쌓은 성곽이다. 서울의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 강북구와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걸쳐있다. 성북구에서는 정릉동의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곳이 입구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시되어 왔기에 여러 왕조에서 성을 쌓고 활용했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은 숙종 37년(1711)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긴 전란을 겪은 후 도성 방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에는 군사지휘소인 장대가 3곳, 크고 작은 문이 13개소, 우물이 99곳, 창고가 8곳이 있다. 또한 승군(僧軍)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도 여러 곳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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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北漢山城
  • 이명칭: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주소

  •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 비고: 미상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68.12.05

근거자료 원문

  • 3) 北漢山城의 築造와 普國門·大成門 建立 北漢山은 일명 三角山·華山·負兒岳으로 불리는데 古代로부터 중요한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북한산의 지세는 매우 험준하며 방어처로써 제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하였다. 따라서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겪은 후 대외적인 국방의식이 고조된 朝鮮後期의 관리들은 북한산 지세의 유리함을 들어 山城을 축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孝宗 때의 北伐論이 실패로 돌아가고 肅宗 때에 와서도 북벌론은 대두되지만, 이와 아울러 국내에서의 군사상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책으로서 北漢山城의 축조가 제기되었다, 물론 北漢山城은 조선 숙종 때 처음으로 축성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미 北漢城이 쌓여 삼국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百濟의 蓋婁王이 처음으로 북한성을 쌓았고, 이어 고구려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新羅 眞興王 때는 신라가 점령하여 진흥왕의 巡狩碑가 碑峰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高麗時代에 와서도 重興山城이 이곳에 위치하는 등 몇 차례 古城을 수축한 일이 있었으며, 지금 존재하는 山城의 형태는 朝鮮 肅宗 37년(1711)에 축조된 것으로 道峰區·城北區·鍾路區·恩平區와 京畿道 高陽市에 걸쳐 있다. 한편 北漢山城의 築城論은 肅宗 초기부터 제기되어 숙종 28년(1702)에 그 논의가 성숙되었고 숙종 자신도 축성의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강경한 築城反對論과 都城修築論으로 인하여 결국은 그 의지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36년(1710) 都城의 수축이 일단락되자 北漢山城築城論이 다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北漢山의 형세를 답사하고 돌아온 李基夏가 北城築城을 주장한 이래 문의·논의·답사 등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肅宗 37년(1711) 2월 5 일 肅宗은 大臣들과 備局堂上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北漢山의 城地를 답사하고 돌아온 摠戎使 金重器와 司直 李宇恒의 보고를 듣고 북한산성의 수축을 결정하였다. 이어 4월에 공사를 착수하고 10월 25 일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같이 北漢山城의 축성이 肅宗 29년 이전의 논의와 달리 都城修築이 끝난 뒤 1년 만에 공사를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都城의 修築이 前年인 숙종 36년(1710) 에 완공되었고 둘째, 淸나라에 海寇의 침입이 있어 朝鮮에서도 방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淸에서 보내온 咨文 중에서도 海寇의 침입에 대한 방어시설에 유의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肅宗 37년 2월에 北漢山城의 축성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으며, 3월에는 各部署가 결정되고 4월 3일에는 공사를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訓鍊都監·禁衛營·御營廳의 3軍門이 담당하였다. 축성 책임자로는 前判書 關鎭厚, 戶費判書 金宇杭, 行訓鍊院都正 摠戎使 金重器가 임명되었고, 그 아래 각 軍門에는 책임감독관으로 郎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內策應·外策應·督策將을 두었고, 工事別로 浮石牌將·築城牌將·水口牌將·運石牌將·治道牌將과 泥匠邊首·治匠邊首·石手邊首·木手邊首 등의 감독원을 두어 공사의 철저를 기하였다. 그리고 城基는 高麗이래의 基址에 따라 普賢峰·萬景臺·白雲臺·元曉峰·大西門·義湘峰·甑炊峰·羅漢峰·文殊峰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서 지금 현존하는 北漢山城의 基址그대로인 것이다. 그 길이는 총 7,620步 즉 21里 60步가 된다. 그 가운데 大西門 북쪽 옆에 있는 水門北邊에서 龍岩까지의 2,292步는 訓鍊都監에서 담당하였고, 龍岩南邊에서 普賢峰까지의 2,821步는 禁衛營에서, 普賢峰에서 水門南邊까지의 2,507步는 御營廳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따라서 城北區 북쪽경계의 북한산성은 禁衛營의 군사들이 축조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금위영에서 담당한 지역은 高築 474步, 半築 1,836步, 半半築 511步(女墻合 1,107堞)의 축성공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築城에 필요한 노동력은 3軍門의 軍士는 물론 서울의 坊民이 동원되었고, 그밖에 役軍과 각종 工匠이 동원되었다. 漢城府의 坊民은 卿相家 이하 各戶를 大·中·小로 구분하여 大戶는 3명, 中戶는 2명, 小戶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就役하였으며, 募役軍은 한 달에 쌀 9斗와 면포 2疋씩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山城의 성문을 모두 13개로 水門北邊에서 龍岩사이에 水門·北門·西暗門·白雲峰暗門이 있고, 龍岩北邊에서 普賢峰사이에는 龍岩峰暗門·大東門·輔國門·大成門이 있으며, 普賢峰에서 水門南邊사이에는 大南門·架婆洞暗門·扶王洞暗門·淸水洞暗門·大西門이 있었다. 따라서 城北區북쪽 경계에는 높이 6尺 6寸 폭 6尺 5寸의 輔國門과 높이 13尺 폭 14尺의 大成門이 있게 되었다. 한편 城廓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將臺인데, 북한산성에는 東將臺·南將臺·北將臺의 세 지휘소가 있었다. 이중 성북구 지역의 산성에 해당되지 않지만 輔國門 바로 북쪽에 있는 東將臺는 최고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柴丹峰 위에 자리잡고 있다, 肅宗 37년(1711) 7월에 右副承旨 韓配周가 將臺의 工投은 財力이 있는 摠戎廳에 맡기자고 건의하여 肅宗이 摠戎使 金重器에게 형편을 물어 공사를 맡기었다. 그리하여 將臺의 축조는 다음 해인 1712년 4월경에 완공되었다. 이때 숙종이 北漢山城에 親幸하여 柴丹峰까지 올라가서 大臣·承旨·史官 및 山城主管堂上·侍衛將士 등을 入侍하게 하여 山城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으며 北漢山의 형세를 보고 감탄하여 즉시로 6편의 詩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山城의 修築論이 전개되었을 때 反對論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은 水泉問題였다. 이에 숙종은 都提調 李頣命과 提調 趙泰耈 등이 저수지와 우물을 팔 것을 건의하자 즉시 井池를 팔 것을 명하였다. 우물의 굴착은 3軍門에서 각기 담당구역 내에 설치하도록 하였는데 숙종 38년 10월에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訓鍊都監 11개소 御營廳, 12개소, 禁衛營 3개소 등 모두 26개소의 貯水池를 확보하였으며 우물은 모두 99개소에 달하였다. 이러한 北漢山城의 축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 都城과 연결되어 首都를 보호하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朝鮮王朝는 유사시에 종종 都城을 버리고 御駕가 멀리까지 피난하는 일이 있었으며, 북한산성의축성은 이러한 일을 방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山城築城이후 국가적인 큰 전쟁이나 정변이 없어 北漢山城의 역할을 실험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朝鮮의 전략상 상당히 진전된 것만은 사실이다. 둘째로 古蹟의 보존을 들 수 있다. 北漢山에 있는 많은 史蹟들이 보호될 수 있었으며 古代로부터 각축장이었던 이곳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세째로 수려한 자연을 보호하여 지금까지 좋은 휴양처로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山城의 수축으로 樹林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자연의 훼손도 막을 수 있었다. 이상의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국가에서 1968년 12월 5일 북한산성일대 16만 8,989평을 史蹟 제162호로 지정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문화재복원계획에 따라 1992년 大南門과 大成門의 문루를 복원하고 輔國門 또한 1993년의 보수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5-88쪽
  • ○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성북구의 명소 성북구의 명소 84 북한산 성곽 삼국이 쟁탈전을 벌였던 전략적 요충지 -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도 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 고려시대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토성을 석성으로 고쳤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내에는 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과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도성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145쪽
  • 3) 北漢山城의 築造와 普國門·大成門 建立 北漢山은 일명 三角山·華山·負兒岳으로 불리는데 古代로부터 중요한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북한산의 지세는 매우 험준하며 방어처로써 제기능을 수행하기에 적절하였다. 따라서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을 겪은 후 대외적인 국방의식이 고조된 朝鮮後期의 관리들은 북한산 지세의 유리함을 들어 山城을 축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孝宗 때의 北伐論이 실패로 돌아가고 肅宗때에 와서도 북벌론은 대두되지만, 이와 아울러 국내에서의 군사상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책으로서 北漢山城의 축조가 제기되었다. 물론 北漢山城은 조선 숙종 때 처음으로 축성된 것은 아니다.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미 北漢城이 쌓여 삼국간의 각축장이 되었다. 百濟의 蓋婁王이 처음으로 북한성을 쌓았고, 이어 고구려의 수중에 넘어갔으며 新羅 眞興王 때는 신라가 점령하여 진흥왕의 巡狩碑가 碑峰에 세워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高麗時代에 와서도 重興山城이 이곳에 위치하는 등 몇 차례 古城을 수축한 일이 있었으며, 지금 존재하는 山城의 형태는 朝鮮 肅宗 37년(1711)에 축조된 것으로 道峰區·城北區·鍾路區·恩平區와 京畿道 高陽市에 걸쳐 있다. 한편 北漢山城의 築城論은 肅宗 초기부터 제기되어 숙종 28년(1702)에 그 논의가 성숙되었고 숙종 자신도 축성의 결의를 보였다. 그러나 강경한 築城反對論과 都城修築論으로 인하여 결국은 그 의지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숙종 36년(1710) 都城의 수축이 일단락되자 北漢山城築城論이 다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10월 北漢山의 형세를 답사하고 돌아온 李基夏가 北城築城을 주장한 이래 문의·논의·답사 등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肅宗 37년(1711) 2월 5 일 肅宗은 大臣들과 備局堂上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北漢山의 城地를 답사하고 돌아온 摠戎使 金重器와 司直 李宇恒의 보고를 듣고 북한산성의 수축을 결정하였다. 이어 4월에 공사를 착수하고 10월 25 일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같이 北漢山城의 축성이 肅宗 29년 이전의 논의와 달리 都城修築이 끝난 뒤 1년 만에 공사를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중요한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都城의 修築이 前年인 숙종 36년(1710) 에 완공되었고 둘째, 淸나라에 海寇의 침입이 있어 朝鮮에서도 방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淸에서 보내온 咨文 중에서도 海寇의 침입에 대한 방어시설에 유의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肅宗 37년 2월에 北漢山城의 축성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으며, 3월에는 各部署가 결정되고 4월 3일에는 공사를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訓鍊都監·禁衛營·御營廳의 3軍門이 담당하였다. 축성 책임자로는 前判書 關鎭厚, 戶費判書 金宇杭, 行訓鍊院都正 摠戎使 金重器가 임명되었고, 그 아래 각 軍門에는 책임감독관으로 郎廳을 두었으며, 또 그 아래에 內策應·外策應·督策將을 두었고, 工事別로 浮石牌將·築城牌將·水口牌將·運石牌將·治道牌將과 泥匠邊首·治匠邊首·石手邊首·木手邊首 등의 감독원을 두어 공사의 철저를 기하였다. 그리고 城基는 高麗이래의 基址에 따라 普賢峰·萬景臺·白雲臺·元曉峰·大西門·義湘峰·甑炊峰·羅漢峰·文殊峰 등을 연결하는 선으로서 지금 현존하는 北漢山城의 基址그대로인 것이다. 그 길이는 총 7,620步즉 21里 60步가 된다. 그 가운데 大西門 북쪽 옆에 있는 水門北邊에서 龍岩까지의 2,292步는 訓鍊都監에서 담당하였고, 龍岩南邊에서 普賢峰까지의 2,821步는 禁衛營에서, 普賢峰에서 水門南邊까지의 2,507步는 御營廳에서 각각 담당하여 쌓았다. 따라서 城北區 북쪽경계의 북한산성은 禁衛營의 군사들이 축조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금위영에서 담당한 지역은 高築 474步, 半築 1,836步, 半半築 511步(女墻合 1,107堞)의 축성공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築城에 필요한 노동력은 3軍門의 軍士는 물론 서울의 坊民이 동원되었고, 그밖에 役軍과 각종 工匠이 동원되었다. 漢城府의 坊民은 卿相家 이하 各戶를 大·中·小로 구분하여 大戶는 3명, 中戶는 2명, 小戶는 1명씩 식량을 지참하고 就役하였으며, 募役軍은 한 달에 쌀 9斗와 면포 2疋씩이 지급되었다. 그리고 山城의 성문을 모두 13개로 水門北邊에서 龍岩사이에 水門·北門·西暗門·白雲峰暗門이 있고, 龍岩北邊에서 普賢峰사이에는 龍岩峰暗門·大東門·輔國門·大成門이 있으며, 普賢峰에서 水門南邊사이에는 大南門·架婆洞暗門·扶王洞暗門·淸水洞暗門·大西門이 있었다. 따라서 城北區북쪽 경계에는 높이 6尺 6寸 폭 6尺 5寸의 輔國門과 높이 13尺 폭 14尺의 大成門이 있게 되었다. 한편 城廓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將臺인데, 북한산성에는 東將臺·南將臺·北將臺의 세 지휘소가 있었다. 이중 성북구 지역의 산성에 해당되지 않지만 輔國門 바로 북쪽에 있는 東將臺는 최고지휘관이 있는 곳으로 柴丹峰 위에 자리잡고 있다. 肅宗 37년(1711) 7월에 右副承旨 韓配周가 將臺의 工投은 財力이 있는 摠戎廳에 맡기자고 건의하여 肅宗이 摠戎使 金重器에게 형편을 물어 공사를 맡기었다. 그리하여 將臺의 축조는 다음 해인 1712년 4월경에 완공되었다. 이때 숙종이 北漢山城에 親幸하여 柴丹峰까지 올라가서 大臣·承旨·史官 및 山城主管堂上·侍衛將士 등을 入侍하게 하여 山城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으며 北漢山의 형세를 보고 감탄하여 즉시로 6편의 詩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山城의 修築論이 전개되었을 때 反對論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던 것은 水泉問題였다. 이에 숙종은 都提調 李頣命과 提調 趙泰耈 등이 저수지와 우물을 팔 것을 건의하자 즉시 井池를 팔 것을 명하였다. 우물의 굴착은 3軍門에서 각기 담당구역 내에 설치하도록 하였는데 숙종 38년 10월에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訓鍊都監 11개소 御營廳, 12개소, 禁衛營 3개소 등 모두 26개소의 貯水池를 확보하였으며 우물은 모두 99개소에 달하였다. 이러한 北漢山城의 축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첫째, 都城과 연결되어 首都를 보호하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朝鮮王朝는 유사시에 종종 都城을 버리고 御駕가 멀리까지 피난하는 일이 있었으며, 북한산성의축성은 이러한 일을 방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山城築城이후 국가적인 큰 전쟁이나 정변이 없어 北漢山城의 역할을 실험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나 朝鮮의 전략상 상당히 진전된 것만은 사실이다. 둘째로 古蹟의 보존을 들 수 있다. 北漢山에 있는 많은 史蹟들이 보호될 수 있었으며 古代로부터 각축장이었던 이곳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세째로 수려한 자연을 보호하여 지금까지 좋은 휴양처로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山城의 수축으로 樹林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자연의 훼손도 막을 수 있었다. 이상의 북한산성의 중요성은 국가에서 1968년 12월 5일 북한산성일대 16만 8,989평을 史蹟 제162호로 지정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문화재복원계획에 따라 1992년 大南門과 大成門의 문루를 복원하고 輔國門또한 1993년의 보수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5-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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