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 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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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성북구 선잠로 2길 47(성북동 2-22)에 위치한 조선시대 별장이다. 한국식 정원의 특징을 반영해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배치하였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크게 전원, 내원,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종의 호종내관을 지냈던 황윤명(황수연)이 조정에서 물러난 후 이 별장에 머무르며 한시를 지었다. 또한,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이관구에게 이 별장에 거주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이관구는 여기서 사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학술활동을 하고, 항일투쟁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의용실기』를 저술하였다.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2019년 별장의 원주인으로 알려진 ‘심상응’이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 ‘성락원’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두고 문화재 지정 해제 논쟁이 불거졌다. 2020년 황윤명(황수연)이 조성하여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머물었다는 점, 서울시에 몇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정원으로서의 가치 등을 인정받아 ‘서울 성북동 별서’라는 이름의 명승으로 재지정 되었다.
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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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 이명칭: 성락원(城樂園, 城樂苑)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유물 건축물

시기

주소

  • 주소: 02823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 (선잠로2길 47)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명승
  • 지정일: 2008.01.08
  • 비고: 2020년 '서울 성북동 별서'로 재지정

근거자료 원문

  • 1. 성북동의 문화재 ○ 명승 - 명승 제35호 : 성락원 -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선잠로2길 47 - 지정일 : 2008.01.08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301쪽
  • ▫ 사적 제378호 성락원 城樂園 시대 : 조선후기(헌종 15년~철종 14년, 1849~1863) 소유자 : (주)제남기업 심철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 지정연월일 : 1992. 12. 28. 원래 조선말 순조 때 황지사의 별장으로 조성된 별서(別墅) 정원이었다. 이 저택은 서울시 유형문화재였던 것을 최근에 4,358평을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조선말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던 것을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다가 그 아들 이건(李鍵)이 살았다고 한다. 성락원은 거의 자연적인 지형 그대로를 살려 건물을 배치했으므로 도심 속의 청류(淸流)를 즐길 수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북한산 구준봉(狗蹲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 개울물이 암벽 사이에서 합쳐지는 쌍룡동천(雙龍洞天)이 나타나고 다리를 건너면 깊숙한 내원(內園)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인조 동산인 용두가산(龍頭假山)을 조성해 놓았다. 이 저택은 진입공간・본원공간・심원(深園)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지형에 따라 성격이 뚜렷하다. 먼저 쌍룡동천(雙龍洞天)・용두가산(龍頭假山)으로 이루어진 진입공간은 자연스레 구성된 수풀과 Y자형의 개울 그리고 인공적인 석가산이 교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다음에 본재누각(本齋樓閣)・영벽지(影碧池)로 이루어진 본원공간은 생활・수학・수양의 기능을 수용한 공간으로 여러 채의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본재누각만이 남아있다. 영벽지는 인공이 가해진 자연 연못의 진수(眞髓)를 보여 여기에 비치는 그림자는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이어서 수각정(水閣亭)・연지(蓮池)・약수터로 이루어진 심원은 건물군 뒤의 후원과 같은 곳으로 암반을 막아 만든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잉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그 연못가에는 정자각 형태의 11칸짜리 건물인 송석정(松石亭)이 높다랗게 세워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는데 이 정자 안에는 노송이 지붕을 뚫고 서 있어, 지붕 위에 나무 그늘이 지는 것을 피해왔던 오랜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이 송석정은 옛날에는 선비들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말기에 불탄 것을 1953년에 복원했다. 이곳에서는 전일 여성 관광안내원과 주한 외국여성들을 교육하는 예지원(禮智院)이 있었다. 약 6만평이 되는 이 저택의 동쪽에는 약초를 기르는 약전(藥田)・약포(藥圃)와 과수원이 있었다. 이곳에는 소나무・참나무・다래나무・등나무 등 우리 고유의 조경수가 연못가 및 산비탈에 우거져 암벽과 폭포, 수석과 더불어 조화의 극치를 이루는데 이곳은 일본식이나 서구식의 정원수가 전혀 없는 것이 특색이다. 성락원 서쪽에는 ‘꿩의 바다마을’이 언덕 위에 형성되어 있다. 원래 이 일대는 북한산 줄기로서 수목이 울창하고 바위가 늘어서 있던 곳이어서 산새, 까치, 비둘기, 꿩 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 김광섭(金珖燮)은 이곳 풍경을 주제로 <성북동 비둘기>라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 참고자료 : 서울시, ≪서울문화재≫, 1996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94-96쪽
  • ○ 기타 성북동의 별장 의친왕 이강의 별저 : 순조선식 늙은 건물(현 성락원)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0쪽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14 성락원 장인정신이 스며든 조선시대 별장 - 성락원은 서울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조선시대 별장이다.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고,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성락원은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지형으로 전원, 내원,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원에는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과 내원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이있다. 물줄기 속 암벽에 행서체로 새긴 ‘쌍류동천’이란 글씨는 성락원의 지맥을 보호한다는 뜻도 있다. 용두가산에는 200~300년된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내원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고있다. 내원에는 본재누각, 영벽지, 폭포가 있다. 영벽지는 인공이 가해진 자연 연못의 진수를 보여주며, 여기에 비치는 그림자는 공간의 깊이를 더해준다. 후원은 송석정과 연지도가 있는 곳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송석정의 노송은 지붕을 뚫고 서 있는데, 지붕 위에 나무 그늘이 지는 것을 피해왔던 오랜 관습을 타파하고 있다. 현재 서쪽 암벽에 ‘장빙가’라고 새긴 씨는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30-31쪽
  • ○ 성락원 -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선잠로2길 47 (성북동) - 소유자(소유단체) / 관리자(관리단체) : ㈜제남기업 / 성북구 -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 → 2008년 명승 제35호로 변경 -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이 조성 - 고종 때 내관을 지낸 춘파(春坡) 황수연(黃壽延, 1844-1916)이 1916년까지 별장으로 사용 - 황수연 사후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1916년부터 1950년까지, 35년 동안 별궁으로 사용 - 1950년 심상응의 4대손 심상준(1991년 작고)이 매입한 후 ‘성 안의 낙원’이라는 뜻의 ‘성락원(城樂園)’이란 이름을 붙임. 현재 ㈜제남기업의 소유로 되어 있음. - 명승 지정면적 1만 4,407㎡로 조선시대 민가의 조원(造苑)으로는 서울에 남은 유일한 것임을 높게 평가.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84쪽
  • ○ 성락원의 암각 글씨 - 쌍류동천(雙流洞天) ㆍ성락원 입구 석가산 앞쪽 개울 바위 벽에 행서체로 음각한 것으로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있는 빼어난 경관”이라는 뜻 - 장빙가 완당(檣氷家 阮堂) ㆍ완당 김정희의 글씨를 음각한 것으로 “고드름이 달리는 집”이라는 뜻 - 청산일조(靑山壹條) ㆍ폭포 옆 바위 옆 전서체 각자. “푸른 산, 한 가닥 물줄기”라는 뜻 - 백천회불류(百泉會不流) “影碧池 海生 / 百泉會不流 爲沼碧蘭頭 自吾得此水 小作江湖遊 / 癸卯 五月 孫 文鶴 書” ㆍ 장빙가 각자 위 암벽 위 있는 각자 ㆍ 영벽지(影碧池) : “푸른 그림자의 못”으로 성락원 중앙에 있는 이 연못의 이름을 알려줌(초서체) ㆍ 해생(海生): 황수연의 호 ㆍ 백천회불류 ~ 소작강호유 황수연이 지은 오언시로 번역하면 “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沼)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뒤부터 약간의 강호놀이를 하네.”란 뜻 (『춘파유고』에 수록) ㆍ 계묘(癸卯) 오월(五月) 손(孫) 문학(文鶴) 서(書) : 계묘 5월, 즉 1903년(광무 7) 5월에 그의 양손(養孫) 문학(文鶴)이 황수연의 시문을 해서체로 옮겨 적었다. - 명월송간조(明月松間照) “明月松間照 靑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盧” ㆍ 영벽지 각자 위의 바위에 전서체로 내리쓴 또 하나의 각자 ㆍ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른다. 청산은 겹겹, 나는 내 농막을 사랑한다”는 뜻 (중국 왕유의 시 ‘山居秋暝’에서 따온 시구) - 송석(松石) ㆍ송석정 앞 연못에서 나와 떨어지며 흐르는 계류가에 있는 각자로 못가 바위 사이에 큰 소나무들이 울창했음을 알 수 있음. 1950년대 송석정 건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86쪽
  • ⑦ 城樂園 성북동 2번지 일대에 위치한 성락원 4천 3백여평이 1992년 12월 24일자로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 연혁에 대해 그 입구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本園은 哲宗 때(1849∼1863) 吏曹判書 沈相應 별장이던 것을 義親王 李堈公이 別宮으로 사용하다가 그 후 아들 李鍵公이 살던 곳이다. 그 후 조상의 열을 이으려는 沈氏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보존하기에 이르렀다. 본래에는 약 6만평의 동쪽에는 藥圃·藥田·果樹園이 있었다 狗蹲峰에서 發源한 玉水溪谷을 줄기 삼아 雙流洞天·龍頭假山·本齋·影池·心庭·松石池·茶庭·藥水泉으로 이어진다. 본원은 거의 원형으로 보존된 전통적인 私邸로서 都心속의 幽谷淸流와 太古風을 자랑한다. 東北間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두 갈래 개울물이 암벽사이에서 합류되는 雙龍洞天치란 岩刻된 것을 正門으로 삼아 左靑龍 右白虎의 풍수지리도 선명하다. 입구의 다리를 건너면 깊숙한 內園이 들여다 보이지 않도록 人造동산인 龍頭假山을 쌓았다. 漸入佳景인데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조상의 슬기가 간직된 곳이다. 위와같이 한글과 영문으로 쓰인 게시문은 이곳을 처음 찾는 이에게 큰 도움을 준다. 이곳에는 소나무·참나무·다래나무·등나무 등 우리 고유의 조경수가 연못가 및 산비탈에 우거져 암벽과 폭포, 수석과 더불어 조화의 극치를 이루는데 이곳은 일본식이나 서구식의 정원수가 전혀 없는 것이 특색이다. 또 이곳에는 암반을 막아 만든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잉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그 연못가에는 정자각형태의 11칸 짜리 건물인 松石亭이 높다랗게 앉아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는데 이 송석정은 옛날에는 선비들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었으며, 일제말기에 불탄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다. 그런데 이 송석정 방 안에는 1백년 묵은 소나무가 자리를 하여 기와지붕을 뚫고 나와 신비감을 주고 있다. 한편 이곳에는 여성교육의 전당 禮智院이 자리잡고 있다가 1986년 마포구 서교동으로 옮겨갔다. 또한 이 城樂園에는 옆의 山麓일대 고급주택가도 포함하고 있으며 優洲大使官邸가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693-694쪽
  • 70년대 되어 심상정 회장이 성락원을 개발하였다. (손인웅)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07쪽
  •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의 별궁이었던 성락원은 정원 골짜기에서 물이 곱게 흐르고 울창한 숲이 둘러 있었다. 내원에는 옛 조선시대 별궁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본재누각, 폭포와 연못이 있어서 우리 정원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2쪽
  • 그러고 여긔 적는 것이 올흘는지 엇덜넌지는 모르겟스나 李堈 殿下 別莊도 城北洞의 金季洙氏 別莊을 지나 한참 드러가면 잇다. 그러나 그집 洋屋은 아니고 純朝鮮式 늙은 建物인 듯이 인상되엿다. 『삼천리』 7권5호, 1935.06.01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2-50
  • 북둔도화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성북동 여기저기에서 도성 양반들의 별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볍지 않은 명예와 부를 가진 이들은 서민들이 사는 북저동과는 조금 거리를 둔 한적한 계곡이나 야트막한언덕에 정원을 조성하고 그 사이에 기와집 몇 채를 들여놓았다. 용도는 주로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함이었다. 수려한 자연환경에다 도심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은 양반 별서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만족했다. 1790년경부터 하나둘 조성된 별서는 19세말까지 꾸준히 그 수가 늘었다. 유득공의 북둔초당, 민영환의 음벽정, 의친왕 이강의 성락원, 윤용선, 이근택, 이종석의 별장 등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밖에 주인 미상의 별서로는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시대 성북동의 별서 조성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의 양옥 별장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재벌들의 고급 주택지 조성으로까지, 시대마다 조금씩 형태를 달리해 이어졌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56-57쪽
  •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성북동은 예로부터 문인들의 사랑을 받는 동네였다. 특히 계곡이 깊고 물이 맑아 조선시대부터 양반들의 별장지로 사랑 받았다. 의친왕 이강의 별장인 성락원, 여흥 민씨 집안인 충정공 민영환의 음벽정 등은 지금까지도 이름을 남기고 있고, 부호 이종석의 별장, 안동 김씨 집안의 별장 등도 이곳 성북동에 있었다. 성락원과 이종석 별장은 아직도 남아 당시 양반들의 호화로운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26-127쪽
  • 성락원 마을 서쪽에는 ‘꿩의바다 마을’이 언덕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창한 나무와 암석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새・까치・비둘기・꿩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이곳 역시 고급 주택가로 변모하였다. 시인 김광섭은 이곳이 변해 가는 모습을 주제로 「성북동 비둘기」 라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꿩의 바다마을’ 서쪽 일대를 삼청주택단지 또는 대교단지라고 부른다. 이곳은 1967년부터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가 닦아 놓았던 곳으로 당시에는 인기가 없어 빈터가 많았으나, 지금은 고급 주택단지와 대사관저가 밀집된 곳으로 변모하여 이국적인 멋을 풍긴다. 이곳에는 다수의 재계와 재벌 그룹 회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구두회 LG그룹 창업고문,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등이 모두 성북동민이다. 또 성북동에는 대사관저 22곳이 자리잡고 있다. 성북2동 330번지 일대에만 10곳이 몰려 있을 정도다. 여기에는 일본・싱가포르・미얀마・파푸아뉴기니 등 아시아국과 독일・아일랜드・오스트리아・포르투갈・폴란드와 노르웨이・핀란드・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을 포함한 유럽권도 있다. 캐나다・파나마・베네수엘라・엘살바도르・칠레・콜롬비아 등 미주국과 함께 호주・알제리까지 포함되어 있어 6대주를 망라한 세계 각국이 성북동에 관저를 갖고 있는 셈이다. 단일동으로 따지면 가장 많은 수다.
    양보경, 1998, (사연이 깃든) 성북의 유래, 40-42쪽
  • 성락원 명승 제35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선잠로2길 29-8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1877-1955)의 별서정원이었다. 부암동 석파정과 함께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이有二한 왕실 소유의 별장이다. 1992년 12월 28일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5호로 변경되었다. 성락원은 자연적인 지형 그대로를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으므로 도심 속의 청류를 즐길 수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북한산 구준봉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 개울물이 암벽 사이에서 합쳐지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 나타나고, 다리를 건너서는 깊숙한 내원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인조 동산인 용두가산龍頭假山을 조성해 놓았다. 성락원은 진입 공간 · 본원 공간 · 심원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지역에 따라 성격이 뚜렷하다. 먼저 쌍류동천 · 용두가산으로 이루어진 진입공간은 자연스레 구성된 수풀과 Y자형의 개울 그리 고 인공적인 석가산이 교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본재누각本齋樓閣 · 영벽지影碧池로 이루어진 본원공간은 생활 · 수학 · 수양의 기능을 수용한 공간으로 여러 채의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본재누각만이 남아있다. 영벽지는 인공이 가해진 자연 연못의 진수를 보이며 여기에 비치는 그림자가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수각정水閣亭 · 연지蓮池 · 약수터로 이루어진 심원은 건물군 뒤의 후원과 같은 곳으로 암반을 막아 만든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잉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정자각 형태의 11칸짜리 건물인 송석정松石亭이 높다랗게 세워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이 정자 안에는 노송이 지붕을 뚫고 서있어, 지붕 위에 나무 그늘이 지는 것을 피해왔던 오랜 관습을 타파하고 있다. 송석정은 선비들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말기에 불탄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다. 2015년 현재 문화재 보수 관계로 일반인의 관람은 허용치 않고 있다. 찾아가는길 버스 : 1111번, 2112번 버스 또는 02, 03번 마을버스를 이용, 홍익대부 속중 · 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5분. 지하철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 6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20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264-265쪽
  • 성락원(城樂園, 명승 제35호)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想應)의 별장이었는데, 후에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이 별궁으로 썼다. 작은 폭포를 만드는 개울이 있다. 연못과 약수터도 있는 물이 많은 성북동의 산세를 자연스럽게 이용한 아름다운 정원이다.
  • 성락원城樂園은 조선 순조 때 조성된 민가 정원이다. 철종 때는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의친왕儀親王, 1877-1955의 별궁으로 35년 동안 사용되다가 1932년 아들 이건李鍵, 1909-1990에게 상속되었다. 이건 공이 1947년 일본에 귀화한 후 박용하라는 인물이 소유하였다가 심상응의 후손인 심상준이 매입하였다.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로 지정변경되어 보존되고 있다. 자연 암반과 계곡이 아름다운 성북동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이곳은 폭포, 연못, 우거진 나무와 한옥이 어우러져 또 다른 절경을 이루고 있다.성북동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인 영벽지影碧池부근의 바위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明月松間照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靑泉石上流 푸른 산이 몇 겹 싸여 靑山數疊 나는 내 농막을 사랑한다. 吾愛吾盧
  • 구릉이 살아나고, 성북동이 성북동 자체로 하나의 문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집들이 가능하면 더 낮아져서 구릉이 좀 살아났으면 좋겠어요. 성북동에서 성북동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되는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주민이 그런 문화를 만들어가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문화가 문화재로만 존재하면 생명력이 없어요. 도심에 문화재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과 문화재가 끊임없이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만일 경복궁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놓고 보존을 한다면 깨끗하게 잘 보존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심우장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다가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인데 반해서, 성락원은 시민이 들어가지 못하는 문화재에요.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120쪽
  • 성북동 2번지의 계곡을 끼고 있는 성락원은 조선말 철종 때 이조판서 沈相應의 별장이 던 것을 義親王 李堈公이 別宮으로 쓰다가 그 아들 李鍵公이 살았는데 그 후 沈氏후손들의 소유로 되었다. 이 곳은 수려한 자연경관에 어울리게 한옥과 정자, 石像들을 배치해 놓았으며 얼마전까지 국내외 여성교육을 하던 禮智院이 사용했다. 4,300여평의 성락원은 1992년 12월 24일 문화부에서 史蹟 제378호로 지정했다. 성락원 서쪽 언덕의 3형제우물이란 약수터가 있었던 곳에는 꿩의 바다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름 그대로 핑과 비둘기, 산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므로 詩人 金珖燮은 「성북동 비둘기」라는 詩를 지었는데 이곳에는 주택들이 들어섰고, 꿩의 바다마을 서쪽에는 日本大使館 官邸 등이 자리잡은 고급 주택가인 大敎團地(일명 三淸 주택단지)가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62쪽
  • 원래 조선 말 순조 때 황지사의 별장으로 조성된 별서(別墅)정원이었다. 이 저택은 1992년 12월 28일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5호로 변경되었다. 조선 말 철종 대 이후 청송 심씨의 별장으로 사용되던 것을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했고 그 아들 이건(李鍵)도 이곳에 거주했다. 성락원은 자연적인 지형 그대로를 살려 건물을 배치하였으므로 도심 속의 청류(淸流)를 즐길 수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북한산 구준봉(狗蹲峰)에서 내려오는 두 갈래 개울물이 암벽 사이에서 합쳐지는 쌍룡동천(雙龍洞天)이 나타나고, 다리를 건너서는 깊숙한 내원(內園)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인조 동산인 용두가산(龍頭假山)을 조성해 놓았다. 이 저택은 진입 공간ㆍ본원 공간ㆍ심원(深園)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지역에 따라 성격이 뚜렷하다. 먼저 쌍룡동천ㆍ용두가산으로 이루어진 진입공간은 자연스레 구성된 수풀과 Y자형의 개울 그리고 인공적인 석가산이 교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본재누각(本齋樓閣)ㆍ영벽지(影碧池)로 이루어진 본원공간은 생활ㆍ수학ㆍ수양의 기능을 수용한 공간으로 여러 채의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본재누각만이 남아있다. 영벽지는 인공이 가해진 자연 연못의 진수를 보이며 여기에 비치는 그림자가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수각정(水閣亭)ㆍ연지(蓮池)ㆍ약수터로 이루어진 심원은 건물군 뒤의 후원과 같은 곳으로 암반을 막아 만든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는 잉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정자각 형태의 11칸짜리 건물인 송석정(松石亭)이 높다랗게 세워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이 정자 안에는 노송이 지붕을 뚫고 서 있어, 지붕 위에 나무 그늘이 지는 것을 피해왔던 오랜 관습을 타파하고 있다. 송석정은 선비들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일제 말기에 불탄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다. 또한 여성 관광안내원과 주한 외국여성들에게 한국 전통 예절을 교육시키는 ‘예지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 의친왕 이강의 별저 : 순조선식 늙은 건물(현 성락원)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0쪽
  •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자연 지형으로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이 있다. 물줄기 속 암벽에 행서체로 새긴 ‘쌍류동천’이란 글은 성락원의 자맥을 보호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또한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200∼300년 되는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안뜰과 성락원 바깥을 가려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안뜰은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늪의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것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맘껏 뽐내고 있는 성락원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 안에 위치한 몇 안되는 별서정원의 하나로 가치가 크다.
  • 조선후기 성북동이 사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교통과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도성의 바로 밖이라는 교통의 편리함, 산과 물이 어우러진 훌륭한 자연환경은 양반들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성북동은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유가 있는 양반들은 성북동에 별장을 짓기도 했다. 안동 김씨 김좌근의 별장, 여흥 민씨 충정공 민영환의 별장 등이 모두 성북동에 있었다. 의친왕 이강도 성락원이라는 별장에서 살았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1-12쪽
  • ㆍ其外諸氏의 것 이 밧게도 여러 집이 잇다. 엇잿든 城北洞안에는 十萬長者의 別莊이 14個所가 잇다느니 만치 간곳 온곳이 모다 눈을 부시게 하는 別莊이다. 黃金町서 藥種商하는 李有善 氏 別莊도 여기 잇고 海東銀行의 金季洙氏 또 서울 부자 金東圭氏의 別莊도 다 여기 잇다. 그러고 여긔 적는 것이 올흘는지 엇덜넌지는 모르겟스나 李堈 殿下 別莊도 城北洞의 金季洙氏 別莊을 지나 한참 드러가면 잇다. 그러나 그집 洋屋은 아니고 純朝鮮式 늙은 建物인 듯이 인상되엿다. 『삼천리』 7(5) 1935.6.1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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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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