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원지
1781 - 1950
비지정 문화재
장소 유적
성북구 고려대로22길 6-3(안암동5가 126-16) 고려대학교 공대 근처로, 조선시대 원빈 홍씨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이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후궁이었는데,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렸는데, 이듬해인 1779년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1781년 ‘인명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무덤을 현재 고려대학교 공대 근처에 조성하였는데, 후궁의 무덤에 ‘원’을 붙이는 것이 부당하다는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1786년 ‘원빈묘’로 강등되었다. 1950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월곡동
  • 인명원 터 표지석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仁明園址
  • 이명칭: 애기능, 원빈묘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781 - 1950
  • 비고: 1950년 서삼릉으로 이장됨

주소

  • 주소: 02748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126-16 (고려대로22길 6-3)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 비지정 인명원지 仁明園址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고려대학교 소재지 : 고려대학교 /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 1-2 인명원은 조선후기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의 묘소로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고려대학교 이공대학 자리)에 있었는데 애기능 터라고 불렸다. 원빈 홍씨는 영조 42년(1766)에 태어나 정조 2년(1778) 정조의 후궁이 되었으나 이듬해 5월 병사했다. 원빈 홍씨는 1950년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되었다. * 참고자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78쪽
  • 정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후궁묘역에 있는 조선후기 제22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무덤. 개설 인명원(仁明園)은 1781년(정조 5)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의 사후에 내린 무덤의 이름이다. 인명원은 동부 온수동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홍국영이 죽은 이후, 궁원의 호칭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따라, 원빈묘(元嬪墓)로 강등되었다. 역사적 변천 궁원의 호칭을 받은 원빈 홍씨(元嬪洪氏)의 예제상의 지위는 그녀의 오빠인 홍국영(洪國榮)의 권세에 좌우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홍국영이 퇴진하고 김종수(金鐘秀)의 탄핵 등으로 위기에 몰렸던 그녀가 1781년에 사망하자, 그 이듬해 6월에 좌승지 서유방(徐有防)이 인명원의 ‘원(園)’ 자를 없앨 것을 건의하였다. 첨지 정술조(鄭述祚)도 소를 올려, 순회·소현묘도 원이라 하지 않고 묘라 했는데 빈어의 무덤을 원이라 한 것은 고례(古例)가 아니라며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정조는 그동안 이러한 요청을 묵살해 오다가, 1786년(정조 10) 11월 11일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진달로 이를 수용하였다. 김치인은 저군(儲君)의 위호도 칭원(稱園)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예외의 의절을 창설한 것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조는 인명원의 원호를 강등하는 등의 의절을 예조에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3일 뒤에 김 영빈방(金寧嬪房)의 예에 근거하여 인명원과 효휘궁의 호를 혁파하고 정자각과 홍살문을 훼철하며 비석을 고쳐서 새기고 석호(石虎) 및 수봉관이 구처하는 절목을 없애도록 하였다. 그중에서 정자각은 배위청을 없애고 정당은 그대로 제청으로 사용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궁원의 호가 혁파됨으로써, 인명원은 원빈묘(元嬪墓)로 강등되었다. 내용 원빈 홍씨(1766~1779)는 정조의 후궁으로, 호조참판 홍낙춘(洪樂春)의 딸이며 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창덕궁 정전에서 가례를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1779년 5월 7일에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졸하였다. 이때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宮號)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이라 올렸다. 정조는 원빈의 행장을 직접 지었는데, 그것이 장서각 소장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이다. 원빈의 상장례는 예장으로 치러졌다. 인명원은 흥인문을 나가 관왕묘를 거쳐서 도착할 수 있는 동부 온수동의 해좌사향(亥坐巳向)에 조성되었다. 그곳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의 고려대학교 경내이다. 현재는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 권역의 후궁 묘역에 이장되어 있다. 궁원이 묘묘(墓廟)로 강등되자, 궁방(宮房)이나 절수(折受) 등에 의한 재원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제사 등에 대한 조처는 사당의 삭망분향을 중관이 전례대로 하고, 속절 및 시향, 묘소의 기제 및 속절은 거행하되, 제수 준비는 별도로 논의해 정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 필자 집필 (2015년) 임민혁(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명 : 인명원
  • 성북 지역에는 왕릉 이외에도 왕실의 원 · 묘 일부가 조성되었다. 1779년(정조 3) 정조의 후궁인 원빈元嬪 홍씨가 사망하자 제터고개 인근(지금의 안암동 고려대 교내)에 묘소를 만들고 인명원仁明園이라 명명하였다. 다만 후사도 없었던 후궁의 묘를 원의 호칭을 사용한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가 빗발치자 1786년(정조 10) 원에서 묘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이후 1950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70쪽

기술통제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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