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동 김진흥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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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민속문화재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성북구 돌곶이로34길 4-11(장위동76-59)에 위치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의 남편 남녕위 윤의선의 집이다. 오늘날에는 소유자의 이름을 따서 김진흥가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부마의 이름을 따서 남녕궁이라고 불렸고, 사랑채에는 남녕궁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상량문에 을축(乙丑)년에 상량했다는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이 한옥이 1865년(고종 2)에 건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건물은 ㄱ자 2개가 합쳐진 모양이며 사랑채 뒤에 있는 집은 나중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7년 9월 5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12월 가옥의 소유주였던 김진흥의 부인 권옥경이 이곳을 불교재단에 기증하면서 현재는 ‘진흥선원’이라는 이름의 절로 바뀌었다.
장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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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장위부마축제(1)
  • 2013 장위부마축제(1)
  • 2017 장위부마축제(2)
  • 김진흥 가옥 전경
  • 장위동 김진흥 가옥 입구
  • 장위동 김진흥 가옥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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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위동 김진흥 가옥(2)
  • 장위동 김진흥 가옥(1)
  • 장위동 김진흥 가옥(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 내부
  • 장위동 김진흥 가옥(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 전경
  • [성북마을방송 와보숑의 골목탐험] 장위동 옛이야기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長位洞金鎭興家
  • 이명칭: 진흥선원(鎭興禪院), 남녕재(南寧齋), 남녕궁(南寧齋)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유물 건축물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
  • 비고: 1865년 건축 추정

주소

  • 주소: 02766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76-59 (돌곶이로34길 4-11)

문화재 지정

근거자료 원문

  • 이 집은 조선 말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와 부마 남령위 윤의선의 집이다. 오늘날에는 소유자의 이름을 따서 김진흥가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부마의 이름을 따서 남령궁이라고 불렸고, 사랑채에는 남령궁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김진흥가는 사랑채 대청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상량문에 의하면 을축년에 건축하였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1865년과 1925년에 해당된다. 민속자료로 지정할 당시의 조사자는 이를 1925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았다. 이 주택의 건물 평면은 처음에 안채를 ‘ㅁ자’로 앉히고 거기에 사랑채를 안채의 대청과 나란히 ‘ㅡ자’형으로 배치하는 ‘9자형(九字型)’을 기초로 했으나 지금은 ‘ㅁ자'를 두 개 겹친 ‘쌍구자(雙口字)’모양으로 되어 있다. ‘쌍구자’의 서쪽은 큰 집을 배치하고 동쪽은 뒤쪽으로 작은 집, 앞쪽으로는 사랑채를 앉히고 있다. 사랑채 뒤에는 다시 안채 모양의 집이 있는데 건넌방 쪽으로 행랑방들을 덧붙여서 사랑 뒷마당을 ‘ㅁ자형’으로 만들고 있다. 안채의 안방 서쪽에는 큰 3간 크기의 정자가 있는데 <산호벽루(珊瑚碧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 뒤에는 뒤뜰이 시설되고 문간채 앞에는 바깥마당이 있다. 안채는 굽은 형이고 사랑채는 ‘ㅡ 자형’으로 방을 배열하였다. 안방은 ‘ㄱ자’로 꺾고 마당 내부 구석의 각 방들을 들쑥날쑥 처리하여 큰 공간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시선의 방향에 따른 공간의 분위기를 안정감 있게 하였다. 특히 사랑채 앞의 장대석 2단 석축과 후원의 석축은 우리 고유의 멋을 간직하고 있다.
  • ○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문화유적 문화유적 15 장위동 김진흥 가옥 우리 고유의 멋을 그대로 간직한 저택 -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이 집은 조선 말 순조의 셋째 부마 윤의선과 덕온공주가 살던 곳이다. 사랑채 중앙에 ‘남령재’란 현판이 걸려 있고, 안방 뒤에는 정자가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다. 안채 뒤에는 후원이 있고 문간채 앞에는 마당이 있다. 안채는 굽은 구조이고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방이 배치되어 있다. 또 마당 내부 구석의 각 방들을 엇비슷하게 배치해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시선의 방향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를 안정감 있게 한 것도 특징이다. 특히 사랑채 앞의 장대석과 석축, 후원의 석축 등은 우리 고유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저택은 윤용구가 관직을 내놓고 은거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윤용구는 ‘장위산인’이라고도 불렸는데,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했다는 뜻이다. 구한말 병과에 급제한 윤용구는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을미개혁 이후 주요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 밑에 은거했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다. 특히 금석문을 많이 썼고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다고 한다. 한일합방 후에 일제가 남작을 수여했으나 이를 거절할 정도로 선비 정신을 중요하게 여겼다. 대나무처럼 올곧았던 윤용구가 나라를 강탈한 일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윤용구는 이곳에서 말년까지 나라 잃은 설움을 삭였다고 한다.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14, 성북 100경, 32-33쪽
    김진흥 가옥은 덕온공주[1822-1844]가 죽고 덕온공주의 묘가 장위동에 들어서고, 1865년(고종 2)에 지은 재사(齋舍)이다. 따라서 '덕온공주가 살던 곳'이라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 진흥선원은 원래 순조의 넷째 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의 묘가 이쪽에 들어선 후 1865년(고종 2)에 그 옆에 지은 재사(齋舍)이다. 부마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1823∼1887)의 소유였으므로 정식 당호는 ‘남녕위궁재사’였다. 짧게 ‘부마가옥’으로 불린 이 집은 부마의 아들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갑오개혁 이후 들어와서 장위산인이란 별호를 달고 기나긴 은거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몇 차례 소유주가 갈린 뒤 고 김진흥 씨가 구입해 살림을 이어오다가 1998년 12월, 부인 고 권옥경 씨가 선학원 측에 대지와 건물 전체를 기증함으로써 이듬해 진흥선원이란 이름으로 선방을 열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온공주는 순조의 셋째 딸이므로 본문의 내용은 오기로 추정된다.
  • ④ 長位洞 金鎭興 家 長位洞 76번지 59호에 있는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韓屋이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이 한옥은 朝鮮時代 말 純宗의 駙馬가 거처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전하며 사랑채 중앙에 「南寧齋」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사랑채 대청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上樑文에 의하면 乙丑年에 건축했다고 되어 있어 1925년에 건축된 것으로 믿어진다. 현재 金鎭興 소유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의 형태는 口字 2개가 합쳐진 모양인데 사랑채 뒤에 있는 집은 더 늦게 지어진 집으로 생각되어 원래는 9字形집(안채를 口字로 앉히고 거기에 사랑채를 안채 대청과 나란히 一字形으로 배치하므로서 옆으로 누운 9자 모양을 이룬 집)이었으리라 여겨진다. 雙口字의 서쪽은 큰 집을 배치하고 동쪽은 뒤쪽으로 작은 집을, 앞쪽으로는 사랑채를 앉히고 있다. 안채는 뒤쪽 중앙에 3間크기로 대청을 놓고 京畿地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서쪽에 골방·안방·부엌·찬마루를 곱은字로 놓고 있다. 안마당 앞쪽에 있는 행랑은 서쪽에서 2間이 더 나아가서 안마당이 ㄱ字모양이 되도록 하였으며 사랑채는 행랑에서 3間정도 뒤로 들어가서 南道형식을 따라 부엌·큰사랑·대청·작은사랑이 一字로 앉혀지고 앞에는 ㄱ字모양의 담장을 둘러서 사랑마당을 따로 만들고 있다. 사랑채 뒤에는 다시 안채모양의 집이 있는데 건너방쪽으로 행랑방들을 덧붙여서 사랑뒷마당을 口字모양으로 만들고 있다. 안채의 안방 서쪽에는 큰 3間 크기의 亨子가 있는데 「珊瑚碧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 뒤에는 後庭이 시설되고 문간채 앞에는 바깥마당이 있다. 地臺石은 花崗石두별대이고 礎石은 네모뿔형 높은 초석이다. 도리는 상도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납도리이며 장혀로 받치고 있고 처마도리에서는 장혀에 바로 홈을 파서 문울거미로 쓰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臺工은 사다리꼴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이 건물은 공간배치에 있어서 안마당을 ㄱ字로 꺾고 마당내부 구석의 各室들을 들쑥날쑥하게 처리해서 큰 공간에 변화를 주고 있으며 시선의 방향에 따른 공간의 분위기를 안정감있게 하였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14-715쪽
  • 南寧齋는 장위동 76번지 59호에 있는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韓屋이다. 이 한옥은 조선시대 말 純宗의 부마가 거처하기 위해 지은 집이라고 전하며 사랑채중앙에 南寧齊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집은 현재 金鎭興家로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民俗資料 제25호에 지정되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42-743쪽
  • ▫ 서울시 민속자료 제 25 호 장위동 김진흥가 長位洞 金鎭興家 시대 : 근대(1925년 추정) 소유자 : 김진흥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장위동 76-56 지정연월일 : 1977. 9. 5. 건평 107평의 이 집은 조선말 순조의 둘째 부마 남령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과 복온공주(福溫公主)가 살던 집으로 사랑채 중앙에 ‘남령재(南寧齋)’란 현판이 걸려 있고, 안방 뒤에는 정자가 있어 공주집이라는 사실과 연관이 흥미롭다. 이에 따라 남령궁이라고 칭하는 이 집은 사랑채 대청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을축년(乙丑年)에 건축하였다고 기술되었는데 이는 1865년과 1925년에 해당된다. 민속자료로 지정할 당시의 조사자는 이를 1925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았다. 건평 107평, 대지 759평의 이 주택의 건물 평면은 처음에 ‘ㅁ자’로 앉히고 거기에 사랑채를 안채의 대청과 나란히 ‘ㅡ자’ 형으로 배치하는 ‘9자(九字)’ 형을 기초로 했으나 지금은 ‘ㅁ자’를 두 개 겹친 ‘쌍구자(雙口字)’ 모양으로 되어 있다. ‘쌍구자’의 서쪽은 큰 집을 배치하고 동쪽은 뒤쪽으로 작은 집을, 앞쪽으로는 사랑채를 앉히고 있다. 사랑채 뒤에는 다시 안채 모양의 집이 있는데 건넌방 쪽으로 행랑방들을 덧붙여서 사랑 뒷마당을 ‘ㅁ자’ 형으로 만들고 있다. 안채의 안방 서쪽에는 큰 3칸 크기의 정자가 있는데 ‘산호벽루(珊瑚碧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채 뒤에는 뒤뜰이 만들어졌고 문간채 앞에는 바깥마당이 있다. 안채는 굽은 형이고 사랑채는 ‘ㅡ자’ 형으로 방을 배열했다. 안방은 ‘ㄱ자’로 꺾고 마당 내부 구석의 각 방들을 들쑥날쑥 처리하여 큰 공간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시선의 방향에 따른 공간의 분위기를 안정감 있게 했다. 특히 사랑채 앞의 장대석 2단 석축과 후원의 석축은 우리 고유의 멋을 간직하고 있다. 이 집은 윤의선에 입양한 석촌(石村) 윤용구(尹容求: 1853~1939)가 대신 직을 내놓고 은거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윤용구는 아호를 석촌, 해관(海觀)이라 하고,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했으므로 장위동을 장위(獐位)라고 썼다. 이것은 윤 판서가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은거했다는 뜻이다. 윤용구는 고종 8년(1871)에 정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다음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 을미개혁(1895) 이후 법부, 탁지부, 내부의 대신으로 10여 회나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장위산 밑에 은거했다.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와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많이 썼으며,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다. 한일합방 후에 일제가 남작을 수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윤용구가 남령재에 은거하고 있을 때, 현 장위동 91번지에 동구다리와 현 76번지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이 다리는 당시 관직의 고하에 따라 하마(下馬)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 장위동 사람을 잡으러 왔을 경우나 죄인이 장위동으로 잠입했을 경우에도 윤 판서의 허락 없이는 체포할 수 없었다 한다. * 참고자료 : 문화재관리국, ≪문화유적총람≫, 1997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 1987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47-148쪽
    윤의선은 순조의 셋째 딸인 덕온공주와 혼인하여 남녕위로 봉해졌다. 복온공주는 순조의 둘째 딸이다. 또한 김진흥 가옥은 덕온공주가 죽고 난 후 1865년(고종 2)에 덕온공주 무덤 근처에 조성한 재사(齋舍)이다.
  • 장위동 『남녕위南寧尉 재사』 한옥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지방문화재를 지정하기 시작한 것은 1969년 9월 18일 이고(장충단비, 봉황각, 러시아공사관), 지방문화재 중 민속자료를 지정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이다. 특히 1977년 3월 19일에는 한옥韓屋을 민속자료로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서울의 한옥밀집지역을 민속경관지역民俗景觀地域으로 지정할 방침이었다고 하니 경관景觀에 대한 인식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1977년 한옥의 민속자료 지정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3월에 17곳이 지정되었고 9월에는 두 곳이 추가로 지정되었다. 3월에 지정된 곳은 종로구 가회동 백인제 가옥을 비롯한 17채였고, 1977년 9월 5일 추가로 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이 ‘제기동祭基洞 정규업丁圭葉가’와 ‘장위동長位洞 김진흥金鎭興가’ 등 두 채였다. 바로 ‘장위동 김진흥가’가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장위동 ‘남녕위南寧尉 재사齋舍’한옥이다. 건축문화재의 이름을 정할 때 보통 지정 당시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당시 소유주였던 ‘김진흥 가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민속자료 지정 당시에 ‘장위동 김진흥가’는 1925년 건축된 것으로 보았고, 건물 전체에 대한 건축면적은 107평으로 조사되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89년에 서울시는 민속자료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하게 된다. 문화재의 보수상태와 보존방안 및 향후 보존 방향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 역시 조사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때 ‘남녕위 재사’ 한옥이 1865년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2년이 지난 2001년에는 실측작업이 이루어졌고, 모든 도면을 구비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다시 10여년이 지났고, 우리는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게 되었다. 장위동이 재개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남녕위 재사’ 한옥은 문화재이기 때문에 지금 모습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한옥을 둘러싼 주변 경관은 몰라보게 달라지게 될 것이다. 전혀 다른 경관으로 둘러싸이게 되는 ‘남녕위 재사’ 한옥이 어떻게 비춰질지 짐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쉽지 않다. 지금 이 시간에도 흐릿하게 멀어져가고 있는 성북구의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 대해 알아보고 현재의 경관 속에 남아있는 모습들을 남겨놓고자 한다.
  • 장위동 남녕재의 주인들 윤의선과 윤용구로 이어진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은 주인이 바꿔가면서 유지되었다. 우선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시기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1824년 3월 24일에 신축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1962년 가옥대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1824년 신축 기록이 어떤 경위로 남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21년 4월 9일에는 소유권이 창덕궁昌德宮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창덕궁은 순종(1874~1926.6.11.)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순종황제純宗皇帝 실록實錄의 부록付祿에는 19년 4월 8일 ‘왕세자王世子는 창덕궁昌德宮의 환후患候가 극심하다는 것을 전달받고 구주歐洲 유람遊覽을 정지하고 왕세자비王世子妃 및 덕혜 옹주德惠翁主와 함께 돌아와 문후問候를 아뢰었다.’고 하였다. 이 때 창덕궁은 순조를 뜻하는 말이다. 1962년 8월 18일에는 윤용구의 손자인 윤명섭尹命燮으로 소유권이 바뀌게 되는데, 그의 주소는 장위동 76번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2년 전인 1960년에 동아일보 기사에서 윤명섭과 관련한 내욜을 볼 수 있다. 그 기사는 1960년 장위동 산 3-1번지 107,940평이 ‘동방생명’에 9,600여만환에 매각된 것과 관련하여 경찰 수사가 있었는데, 매각 과정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수사 결과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해당 토지가 원래 이조판서 윤용구의 소유였으며 그의 사망 이후 아들인 尹建榮(1893~1945)과 윤헌영尹獻榮(1896~1946)이 소비할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이왕직李王職장관’의 연대보증으로 ‘조선식산은행’에 신탁되어 오던 토지라는 유래까지 설명되어 있다.
  • 1960년 장위동 산 3-1번지가 매각된 이후로도 장위동 76번지와 ‘남명위 재사’ 한옥은 당분가 소유자가 바뀌지 않았었다. 1965년 4월 16일이 되면서 ‘남녕위 재사’ 한옥의 76번지는 몇 개의 다른 주소의 토지로 분리되었고, 분리된 땅들은 사람들에게 매각되었다. ‘남녕위 재사’ 한옥은 1965년 5월 11일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이로부터 다시 6개월이 지났고, ‘남녕위 재사’ 한옥이 서 있던 땅이 재차 분리가 되면서 매각되었는데 1965년 11월 11일에 ‘김진흥金鎭興 가옥’이 되었다. ‘김진흥 가옥’이 되면서 주소가 현재와 같은 장위동 76의 59번지로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새 주인이 된 김진흥은 이후로 30년을 넘게 소유하면서 계속 거주하였는데, 그 사이 ‘김진흥 가옥’이 1977년 9월 5일 서울시 문화재로서 ‘민속자료’가 되었다. 1998년에는 집주인의 유지에 따라 10월 21일 재단법인 선학원에 기부되었으며,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진흥선원’이 되었다. 한편 그의 부인은 같은 한옥에 2009년까지 거주하고 두 부부가 주인이었던 45년을 마감하였다. 성북구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은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와 부마 남녕위의 묘가 있던 곳이고, 강북구 번동 ‘창녕위재사’ 한옥은 순조의 둘째 딸 복온공주와 부마 창녕위의 묘가 있던 곳이다. 왼쪽 사진에서 멀리 전망대가 보이는데 바로 그 곳이 현재 북서울숲 공원이고 ‘창녕위재사’ 한옥은 공원 안에 있다.
  • 외부 공간 건물의 전체 모습은 ㅁ자 2개가 합쳐진 모양인데 사랑채 뒤에 있는 집은 늦게 지어진 집이라 생각되므로 원래는 9자형 특히 옆으로 누운 9자 모양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이런 배치였을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현재의 중문채가 원래는 철대문 위치에 있던 것을 이전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안채와 사랑채가 乙자형으로 따로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여러 건물들이 여러 번의 개축과 증축으로 인해 계속 변화되어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게 된다.
    김진흥 가옥의 외부 공간에 대한 설명
  • 다섯 채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은 모두 5개 동棟으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다. 하나, ∏자형 안채 둘, 안채와 오른쪽 하부에서 연결되는 ⨆자형 사랑채, 셋, 안채 오른쪽과 사랑채를 연결하는 ㄷ자형 중문간 행랑채, 넷, 안채 안쪽의 一자형 안채 별당채, 다섯, 동북쪽의 ㄱ자형 사랑채 별채 등이다.
    김진흥 가옥 5개 동의 한옥과 구조에 대해 설명함
  • 다섯 마당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은 전체 건물을 둘러싸는 담장이 있다. 담장 왼편에 있는 철문으로는 사람들이 출입하고, 오른편에는 경사로가 있어서 차가 출입할 수 있다. 하나, 외곽의 담장 안쪽에는 마당이 있는데, 마다에 들어서면 비로소 ‘남명위 재사’ 한옥이 드러나 보인다. 바깥마당은 ⌟자 모양이다. 화계의 각 단에는 사철나무와 유실수가 심어져 있기 때문에 한옥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계를 통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화계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남쪽 화계에는 계단이 2개가 있고 서쪽 화계에는 계단이 1개가 있다. 남쪽 화계의 계단 두 개 가운데 오른쪽 계단은 사랑채로 통하고 왼쪽 계단은 안채로 통한다. 서쪽 화계에 따로 난 계단은 사랑채 별채로 통한다. 건물이 서 있는 높은 축대와 마당 사이에 있는 높이 차이를 몇 단의 화단으로 처리하는 것은 한국 건축의 특징적인 모습 중 하나이다. 화계는 건물의 뒤편의 경사진 언덕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건물을 높은 대지 위에 지어야 하는 경우에는 앞쪽에 화계를 두고 높이차에서 오는 부담감을 줄여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계로는 ‘강릉 해운정’을 들 수 있는데 건물을 들어서는 사람에게는 위압감 대신 친근감을 주고 거주하는 집주인에게는 안정감을 줄 수 있다. 먼저 앞쪽에 각각의 건물들에는 각각의 외부 공간 또는 마당을 가지고 있다. 화계 오른쪽 계단 끝에는 담장 중간에 서 있는 협문을 볼 수 있다. 담장과 일각문 안쪽에는 사랑채 안마당이 있는데, 담장 주변으로 감나무를 비롯한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사랑채 안마당에서 낮은 담장을 바라보면 오른쪽 측면의 짧은 담장에도 역시 협문이 서 있다. 협문을 나서면 안책 중문간 행랑채의 방화장이 쭉 이어진다. 둘, 사랑채 남쪽 담장 오른편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는데 중문간 행랑채가 서 있다. 평대문으로 된 중문간을 들어서면 ⌟자 모양의 안마당이 있다. ⨅자 안채에는 두단의 장대석을 둘렀고, 오른쪽의 사랑채 측면도 두 단의 기단을 둘렀다. 이와 비교하면, 중문간 행랑채와 안채의 부속 공간은 기단을 한 단으로 둘러 낮은 높이로 만들었다. 이 역시 한국 건축의 묘미 중 하나이다. 건물로 둘러싸인 마당은 어느 위치든 높이에서 거의 차이가 없지만 마당에 접하고 있는 건물들은 높이를 다르게 하여 격格의 차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시선의 각도를 조절함으로써 마당에서 보이는 건물 위쪽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조절하는 것이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에서는 두 단의 기단과 한 단의 기단으로 그 차이가 한 단에 불과하여 크지 않기 때문에 편안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마당 한 가운데는 둥근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물을 퍼내어 나르기 위해서는 낮은 기단이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셋, 바깥마당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역시 화계 위에 서 있는 건물과 일각문을 볼 수 있다. 일각문을 중앙으로 앞쪽에는 사랑채 건물 벽이 서 있고, 뒤쪽에는 사랑채 별채 건물벽이 서 있다. 일각문을 올라서면 사랑채 안마당에 이른다. ㄴ자 사랑채와 ㄱ자 사랑채 별채가 만드는 마당 한가운데는 둥근 화단을 만들었는데, 모과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넷, 안채 마당을 지나 서쪽으로 건물을 통과하면 안채 별당이 길이 방향으로 서 있다. 이 별당 건물 안에는 산호벽루珊瑚碧樓라는 현판이 달려있었다고 한다. 남녕위 ‘부마한옥’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건물이다. 안채 안방과 너무 가까이 바짝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남녕위 ‘부마한옥’과 어울리는 별당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별당의 하부 기단을 이루는 돌 중에는 가장자리로 테를 두른 것들이 여러 개 사용되고 있어서 이질감을 준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안채 별당이 철저한 계획 아래 세워진 것은 아니라고 보이고, 혹시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안채 별당이 들어섬으로써 안채 측면 마당이 매우 비좁아지게 되었고 여유로운 후원의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 안채 별당을 돌아가면 전체 건물 뒤편에는 후원이 있다. 나지막한 화계가 단을 이루어진 모습으로서 과일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는 화계가 낮아 보이지만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원래는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 뒤쪽으로 낮은 산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도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과 건물들은 상당히 높게 위치하고 있어서 과거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진흥 가옥 다섯 동의 건물들 마당의 모습을 설명함
  • 다섯 문 다섯 동棟의 건물들과 건물이 만드는 각각의 마당에는 진입할 수 있는 입구가 다 따로 설치되어 있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을 밖에서 보면 사랑채와 안채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또한 전체를 구성하는 5동의 건물들이 만드는 마당들은 모두 분리되어 있으면서 각각의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공간들은 문이라고 연결 통로에 의해서 서로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 가장 전면에 위치한 사랑채와 사랑마당을 진입하는 문은 화계 위 담장 중앙에 설치하였는데, 일각대문이나 사주문 형식이 아니다. 한사람이 일상적인 출입에 사용하는 협문이나 샛문 형식의 문이다. 담장을 쌓기 위해 아래쪽에 기단석을 한 단 깔았는데, 문을 설치하는 중간에는 기단석과 같은 높이의 석재를 문 폭에 맞추어 직각 방향으로 설치하였다. 위에는 하인방과 신방목을 工자 모습으로 결구하여 배치하였다. 신방목 위에는 신방목보다 가는 두께의 각재 3개를 세웠으며 각재 사이에는 널판과 짧은 띠장으로 막아 널벽을 만들어 안정된 구조의 양측면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신방목 사이에는 인방을 가로지르고 양쪽에는 문선을 세우고 위쪽에는 문인방을 가로로 막아서 문얼굴을 만들었다. 현재는 한쪽 신방목이 썩어서 돌로 대신 괴어놓은 모습인데, 질이 좋지 않은 나무를 가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 상부는 각서까래를 목기연 형식으로 맞춤하였는데, 2단으로 겹처마를 구성하였다. 각서까래 위쪽에는 개판을 깔아 천장을 만들고 연암을 설치하여 기와를 깔았다. 지붕은 맞배지붕 형식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를 두고 기와 마구리는 와구토로 마감하였다. 사랑채 마당 측면 한쪽에도 협문이 있는데, 정면에 있는 협문과 유사한 형식이다. 그러나 정면의 협문에 비해 폭이 좁아서 각서까래 개수나 기와골의 수도 작다. 뿐만 아니라 지붕을 만들기 위한 각서까래 단수도 하나인 홑 처마로 하였다. 기둥과 같은 굵은 부재를 쓰지 않고 가는 부재만을 이용하여 만든 왜소한 협문이지만 정면과 측면을 달리하여 격을 달리 한 점은 건축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흥미롭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습의 협문들이 ‘남녕위재사’ 한옥이 처음 지어질 당시부터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고 또한 사랑채 앞쪽에 안마당을 만든 담장의 존재 자체에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둘, 사랑채 왼편에 있는 안채와 안채마당을 진입하는 문은 중문간 행랑채 가운데 있는데 소위 평대문 형식이다. 평대문 형식이란 진입하는 대문간의 지붕을 한 단 높여서 구성하는 솟을대문과 대비하여 부르는 말이다. 솟을대문은 주로 한옥 전체를 대표하는 문이나 사랑채를 드나들 때 사용하는 형식이다. 이에 비해 평대문은 안채를 드나들 때 사용하는 형식의 문이다. 평대문에는 2간 형식도 있고, 1간 형식도 있다. 인접한 가로방향 2간을 이용해서 만드는 평대문을 2간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입에 이용되는 대문간의 정면에는 내외벽(가림벽)이 있어서 바로 들어갈 수 없고 인접한 옆간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2간이 필요한 것이다. 주로 큰 규모의 한옥에 많이 남아있는데, ‘강릉 선교장’이나 ‘아산 윤증고택’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1간 형식은 주로 서울처럼 밀집된 지역의 한옥이나 최근에 지어진 한옥에 많이 남아있는데, 아무래도 소모되는 공간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현재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의 안채 평대문은 7간의 중문간 행랑채의 정면에 위치하고 잇다. 기둥과 기둥을 받치는 초석 사이에 고맥이 돌을 설치하고 그 위에 하인방을 배치하였다. 기둥 양옆으로 문선을 세우고 그 위로 문인방을 다시 보내서 문얼굴을 만들었다. 문얼굴 위로는 채광에 유리하도록 유리를 끼운 고창을 만들었다. 안채 평대문 역시 재료나 문의 형식을 고려할 때 오래전에 건축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안채 중문간 대문채의 건축 시기에 의문점과 관계없이 안채 중문에서 흥미로운 모습은 문의 위치와 관련된 점이다. 중문을 통해 마당에 들어섰을 때, 안채 대청의 정면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왼쪽으로 반쪽은 부엌의 벽체로 가려지게 하였고 오른쪽으로 반쪽만 대청이 보이도록 한 것이다. 2간 평대문에서 정면에 내외벽(가림벽)을 설치하여 안채 내부가 훤히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하는 수법과 일맥상통하는 1간 평대문의 고안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간채가 오래전에 건축되지 않은 것임을 고려한다면, 문을 들어섰을 때 건물의 내부 정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보이는 ‘충파衝破’를 피하여는 건축의 전통적 사고가 최근 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셋, 안채 별당채로 가기 위해서는 중문간 행랑채의 서측을 통과해야 한다. 중문간 행랑채는 ㄷ자 모양으로 안채와 연결되는데, 서측 중간에 빈 간이 있어서 중문 역할을 한다. 여기를 통과하면 후원으로 통하게 되고 안채의 안방 서쪽 건너편에 안채 별당이 있다. 안채 마당쪽에 두짝 유리문 미서기가 달려있지만, 과거의 원형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건넌편 간에는 골판문이 달렸을 것으로 보이는 문선이 그대로 남았다는 점이다. 이 문을 통과하면 안채 별당채가 있는 마당, 장독대와 화계가 있는 안채 뒷마당 그리고 사랑채 별채 뒤 공간이 모두 연결된 비교적 넓고 가장 아늑한 공간에 이르게 된다. 이 뒤뜰에는 화계가 있고 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여유로움과 차분한 마음을 갖도록 한다. 넷, 전체 건물 배치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사랑채 별채는 안채 건넌방 부분과 인접해 있다. 바로 인접한 위치에 벽을 세우고 문을 만들어 공간을 분리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이 완성되었을 당시에 계획되었을 가능성은 낮고, 1980년대 이후에 변화된 모습으로 생각된다. 이전 주인이 살면서 사랑채 공간을 임대해 주고 주인 자신은 안채 쪽에 거주했다는 증언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 사랑채 별채에 딸린 남쪽 마당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동쪽에 있는 석축 위에 별도의 협문이 마련되어 있다. 화계 계단을 오르면 사랑채 별채 부속채와 연결된 담장과 사랑채 사이에 만들었다. 출입문은 일각문 형식으로서 앞서 살펴보았던 사랑채 담장에 설치 되었던 협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신방석과 신방목 위에 사각기둥을 좌우로 세우고 용지판으로 좌우를 보강한 다음 문얼굴을 만들고 판장문을 설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채 협문보다 더 근래에 세워진 모습으로 보인다. 이 문 역시 사랑채 공간을 임대했을 당시에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문이 아니면서도 마당과 마당을 이어주는 공간이 있다. 안채 마당과 사랑채 뒷마당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지만, 두 공간을 왕래할 수 있는 위치가 있다. 안채 건넌방 남쪽에 있는 아궁이 부엌은 두 마당에 모두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아궁이 부엌에서는 신발을 신어야 하기 때문에 반半외부 공간이라고 한다면 신발을 신은 상태로 양쪽 외부공간과 통하는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양쪽 외부공간을 통할 수 있는 내부공간도 있다. 다시 말해서 신발을 벗었다가 다시 신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왕래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 더 있는데, 아궁이 부엌에서 남쪽 방향으로 아래쪽에 인접한 마루방이다. 이 곳 방에서는 한쪽 창으로는 안마당을 내다 볼 수 있고 다른 한쪽 창으로 사랑마당을 내다 볼 수 있다. 다만 마당과 마당을 연결하는 동선이 될 수 있는 아궁이 부엌이나 마루방의 모습이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현재와 같은 것이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확인이 쉽지 않은 것 같다.
    김진흥 가옥 다섯 동의 건물들을 잇는 문의 형태에 대해 설명함
  • 내부 공간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은 하나로 된 건물처럼 모든 건물이 연결된 모습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안채와 중문간 행랑채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안채, 사랑채, 그리고 안채와 중문간 행랑채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안채, 사랑채, 행랑채가 거대한 본채를 구성하고 있다. 다만 북쪽에 있는 사랑채 부속채와 서쪽에 있는 안채 별당채는 작은 규모로서 본채와 분리되어 있다. 분리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채 부속채와 안채 별당채 역시 독립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사랑채 부속채는 안채 동북쪽 모서리 건넌방 부분과 사이 간견이 좁아서 지붕은 서로 닿은 듯이 보인다. 게다가 좁은 건물 사이는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고, 두 건물의 기단석 역시 연결되도록 하였기 때문에 따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또 전체 건물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안채 별당채 역시 동쪽 장향에 안채의 안방과 부엌과 인접해 있는데, 그 사이는 기둥 간격으로 두 간 길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기둥에서 1m 정도 바깥쪽으로 처마가 설치되고, 지붕의 기와는 이보다 더 바깥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안채 별당채와 안채는 많이 떨어져 있는 모습이 아니다. 심지어 현재는 아예 두 건물 사이를 벽으로 막고 연결하였기 때문에 안채 안방과 별당은 하나의 내부공간으로 합쳐져 있다. 평면 바깥에서는 건물 전체가 연결되어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 공간은 쓰임새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안채, 사랑채, 중문간 행랑채, 안채 별당채, 사랑채 별채 등 모두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
    김진흥 가옥 내부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 ○ 사랑채 사랑채는 전체 건물 중 외부로 가장 노출된 위치에 서 있다. 남쪽에 면하여 정면을 두었는데 6간 규모이다. 전체 6간 중 가운데 4간은 앞뒤를 통하도록 하고, 좌우 각각 1간은 뒤쪽으로 건물을 달아냄으로써 ⨆자 모양으로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4간 중 서쪽 2간으로 사랑방을 두고 동쪽 2간으로 대청을 두었다. 대청 동측으로 1간 폭에는 1간 반 길이의 건넌방과 북똑으로 인접하여 2간 길이로 방을 두었다. 북쪽방의 북쪽으로 다시 반 간 규모의 공간을 만들고 위쪽은 내부에서 다락으로 사용하고 아래쪽은 외부에서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데 북쪽방의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었다. 1989년 조사된 평면도에는 이 부분이 없는데, 당시 조사 이후 증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랑채 서쪽 끝 1간 폭에는 아궁이 부엌이 2간 길이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사랑방과 툇마루에 인접해 있다. 1989년 조사에서는 광으로 조사되었는데, 2003년도 평면도에는 아궁이 부엌으로 바뀌어 있다. 사랑방의 난방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아궁이 부엌의 북쪽에는 가로 방향으로 2간의 침방이 인접해 있어서 한쪽으로는 사랑방으로 통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로 2간, 세로 1간의 침방은 네 면으로 모두 통할 수 있게 문이 달려 있다. 침방의 남쪽으로는 사랑방에 통하고, 동쪽으로는 사랑채 뒷마당으로 통하고, 북쪽으로는 마루방에 통하고 서쪽으로는 안채 안마당에 통하게 되어 있다. 침방의 남쪽은 서측 광과 인접한 한 간에는 벽을 세웠고, 동쪽 사랑방과 인접한 간에는 외짝 여닫이문을 달아서 사랑방으로 통할 수 있다. 기둥에 붙여서 설치한 작은 크기 였던 것으로 보인다. 침방의 동쪽으로는 안채마당과 연결되는 2짝 여닫이문이 달려 있고 아래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침방 서쪽으로는 사랑채 뒷마당과 연결되는 두짝 여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침방 북쪽의 출입 상황은 1989년 평면도와 2003년 평면도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1989년 평면도에서는 침방 내부에는 북쪽 공간으로 바로 가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2003년 평면도에서는 침방 북쪽에 네짝 미서기가 있어서 바로 윗방으로 갈 수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침방 북쪽에 1간 규모의 마루방이 있다. 마루방은 2003년 이후로 침방에서 통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마루방은 북쪽의 아궁이 부엌을 제외한 동쪽의 사랑 뒷마당, 서쪽의 안채 마당, 그리고 남쪽의 침방과 통하는 모습이다. 1989년 조사에서 의한 평면을 참고하면, 동측에는 작은 크기의 외짝 여닫이문이 있어서 사랑채 뒷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외여닫이문은 남쪽 기둥 모서리에 붙여서 안쪽으로 열리는 작은 크기였다. 서측에는 두짝 미서기문이 달려 있어서 안마당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앞서 설명한 대로 1989년에는 침방과 마루방 사이에 문이 없어서 통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된 점이 2003년 평면도와 다른 점이다.
    김진흥 가옥의 사랑채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 ○ 안채 안채는 사랑채 마루방 북쪽의 아궁이 부엌과 북쪽으로 건넌방이 있고, 여기에 서쪽으로 3간 대청과 안방이 있으며, 안방 앞쪽 남쪽에 부엌이 달려있어서 전체적인 모양은 ∏이 되었다. 안채만을 따로 대청 중심으로 설명하면, 중간에 3간 대청을 두고 서쪽에는 안방, 동쪽에는 건넌방을 두었다. 도심 속의 일반적인 한옥은 2간 대청이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3가 대청은 규모가 큰 것이다. 3간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각각 남쪽으로 건물을 달아냈다. 사랑채에서 양쪽 끝에서 북쪽으로 달아낸 것과 방향이 반대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사랑채는 둘러진 마당이 북쪽으로 생기게 되었고 안채는 둘러진 마당이 남쪽에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사랑채 양쪽 끝에 달아낸 건물 폭이 1간으로 같았던 것과 달리 안채의 경우에는 서쪽과 동쪽 끝에서 각각 남쪽으로 달아낸 건물의 폭이 다른 모습이다. 서쪽 끝에서 달아낸 건물은 폭이 1간반이고 동쪽 끝에서 달아낸 건물은 폭이 1간이다. 폭이 넓은 쪽에 안방이 있고 좁은 쪽에 건넌방이 있다. 남녕위 ‘부마 한옥’에서는 안채가 대청의 서쪽에 있기 때문에, 건넌방은 맞은편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다. 건넌방 아래 남쪽 간은 이전 조사에서 아궁이부엌으로 조사되었다. 아궁이만 있는 부엌이라는 뜻을 강조한 말로 보이는데, 취사를 하는 안방의 부엌에 비하여 규모가 작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취사를 하지 않는 아궁이는 부뚜막이 없기 때문에 함실만 있다는 의미에서 ‘함실 아궁이’라고도 부른다. 안방과 건넌방에 차이를 두고 여기에 달리는 아궁이 공간에도 차이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처럼 안방의 남쪽에는 난방과 취사를 겸하는 부엌을 두고, 건넌방 남쪽에는 난방 전용의 함실 아궁이를 두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니다. 이와 달리 때로는 안방과 건넌방을 대등하게 계획하고 각각의 남쪽에 달리는 공간 역시 동등하게 부엌을 설치한 경우가 가끔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서 전라북도 정읍의 ‘김동수 가옥’을 들 수 있다. 안방에 달린 부엌에서 취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방과 인접한 쪽으로 부뚜막을 두고 여러 개의 아궁이를 설치한다. 따라서 안방의 아랫목은 부엌과 인접한 남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랫목 쪽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다락문이 있다. 다락은 부뚜막과 아궁이 위쪽으로 돌출된 모습이다. 안방의 남쪽으로 아랫목이 있게 되고 북쪽 방향 반대편이 가장 추운 곳이다. 그래서 안방 북쪽으로 웃방을 두고 각종 가구를 놓아서 외풍을 막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심부름하는 이를 여기에 재우고 시중을 들게 한다. 부엌의 남쪽으로 찬마루를 두었다. 찬간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찬寒 마루다. 그래서 남은 음식을 두거나 곧 사용할 음식 재료를 짧은 시간 동안 두는 장소로 적합하다. 찬마루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유용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920년대 한옥이나 1930년대 한옥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공간의 하나다. 시간이 지나면서 찬마루는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식당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찬마루를 사용해 본 적이 있는 할머니들의 증언이다. 원래 부엌과 찬마루는 바닥 높이가 다르게 된다. 부엌은 불을 때는 아궁이 때문에 집에서 가장 낮은 공간이 되고 찬마루에는 마루를 놓아야 하기 때문에 거의 방과 같은 높이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난방이나 취사 형식이 변화하면서 소위 ‘입식 부엌’이 되는데, 이 때문에 부엌의 바닥이 높아지게 되었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부엌 역시 바닥이 높아지게 되었고, 찬마루와 같아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찬마루 또는 찬간이 따로 없고 두 공간이 합해져서 주방이 되었다. 적어도 2003년 평면도에서는 부엌과 찬간이 각각 조사되었고, 두 공간 사이에는 문이 달려 있어서 분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안채의 평면을 살펴 본 결과 가장 의문점이 드는 곳은 부엌과 찬간이 만나는 곳이다. 부엌은 남북으로 길이가 2간 규모이고, 찬간은 남북으로 길이가 1간 반 규모로 되어 있는데, 찬간의 1간 반 길이 중 반간이 부엌과 찬간이 만나는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통상적인 한옥에서 건물 모서리가 아닌 입면의 중간 위치에 반간을 삽입하여 계획하는 경우를 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대에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즉, 안책 부엌의 아래쪽에 있는 찬간부터 찬간 또는 찬마루가 유행하던 시기에 증축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의 중문간 문간채가 이전 건축되었다는 증언은 그 가능성을 더욱 생각하게 만든다.
    김진흥 가옥의 안채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 ○ 문간채 문간채는 정면에서 보면 전체 7간 규모이다. 한가운데가 대문간이다. 1989년 평면도에는 동쪽 끝에 있는 방을 제외하면 나머지 간들은 모두 광으로 조사되어 있다. 2003년에는 동쪽 끝에 있었던 방의 북쪽으로 목욕실이 설치되었고, 문간채 서쪽 모서리 한 간 규모의 공간에 화장실이 설치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2010년 현재는 대문 좌우에 있었던 각 2간 크기의 광들이 모두 방이 되면서 한쪽은 사찰 종무실로 사용되고 다른 한쪽은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간채 서쪽 끝에서는 북쪽 방향으로 3간 규모의 공간이 달려있다. 아래쪽 2간은 비어 있어서 안채 뒷마당으로 나가는 출입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고, 위쪽 북쪽 1간에는 수도가 설치되어 있어서 세면 장소로 사용되었었다. 현재는 화장실로 이용되고 있다. 동쪽으로 인접해서 한 간 규모의 광이 있었다. 다시 동쪽 찬간과 인접해 있었는데, 현재는 광, 찬간, 부엌의 벽을 모두 터서 주방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광은 현재 부엌의 전실처럼 사용되고 있다. 문간채 평면을 관찰하고 분석해 보면 몇 가지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문간채 서쪽 모서리 부분의 기둥과 사랑채 기둥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문간채와 사랑채 사이 간격이 지붕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되어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문간채 계획이 사랑채와 관계를 고려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둘째, 이와 비교하면 문간채는 안채와는 긴밀한 관련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문간채 서쪽 기둥들은 안채 기둥들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은 문간채와 사랑채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문간채 계획은 안채와 관계를 고려해서 이루어졌음을 예상할 수 있다. 셋째, 문간채가 안채가 원래부터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원래 있던 안채에 중문간을 증축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추정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엌과 찬간 사이에 반간의 기둥 간격이 삽입되어 있는 모습으로 볼 때, 중문간을 안채를 기준으로 거리를 반간 정도 이동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문채 서측으로 안채 뒷마당을 출입하는 공간을 한 간만 사용하면서 두 간으로 둔 것은 마당의 크기가 옹색하게 좁아지는 것을 염려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문간채가 원래는 바깥마당에 잇는 철대문 위치에 있었는데 후대에 이전되었다는 사람들의 증언까지 고려해 볼 때, 현재의 대문채는 이전 당시 안채 위치와의 관계와 내부 마당의 크기를 고려한 다음 ㄷ자 모양으로 건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김진흥 가옥의 문간채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 ○ 안채 별당 문간채 서측면을 통하면 안방 서쪽 건너편으로 3간 × 2간 규모의 일자형 평면으로 된 건물이 서 있다. 앞서 살펴본 바대로 현대는 안방과 벽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내부 공간으로 통하게 되어 있으며 불당佛堂으로 사용되고 있다. 과거에는 산호벽루珊瑚碧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별당채 건물의 건축 형식을 들여다보면 다른 건물들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른 건물들과 비교할 때 부재의 규격이 매우 크다는 점, 구조 형식에 있어서도 내부 공간을 크게 만들 수 있도록 안쪽에 기둥을 쓰지 않고 긴 대들보를 사용한 5량이라는 점, 기단이 높고 기단석이 다른 위치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점, 다른 건물들과 달리 홑처마이면서 비교적 굵고 긴 서까래를 사용하였다는 점, 지붕 높이도 다른 건물과 비교할 때 가장 높다는 점, 건물의 위치가 안채 안방에서 너무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채 뒷마당이 넓지 않았을 시점에 건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의문이 든다. 결국 이런 의문점들은 건물의 건축연대나 용도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진흥 가옥의 안채 별당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 ○ 사랑채 별채 사랑채 북쪽에는 ┌자를 모양의 별채가 서 있다. 가운데 2간 대청을 두고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양쪽에 있는 두 방의 폭은 1간 크기로 서로 같지만 길이는 서쪽 방이 긴 모습이어서 반대편에 있는 동쪽 방이 건넌방임을 알 수 있다. 큰 방인 서쪽 방 앞으로 아궁이 부엌을 두고 난방을 하였다. 사랑채 별채의 대청마루 종도리 장여 측면에는 1905년에 건축되었다.는 상량문이 있어서 건축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현재로서는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에서 유일하게 건축연대가 확실한 건물이다. 사랑채 별채의 동쪽 방 측면에는 ㄱ자 형태의 건물을 붙여놓은 모습이다. 나중에 증축된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건물의 간살이가 일정하지 않다든지, 창호에 사용된 살의 형식이 후대 창호 특징이라든지, 건물 외벽 방화장에 사용된 재료나 형식이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김진흥 가옥의 사랑채 별채 공간에 대한 설명이다.
  • 구조 형식 한옥의 구주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3량집, 5량집이다. 3량집은 대들보 위에 도리가 3개가 걸치게 되는 집을 말하고, 5량집은 대들보위에 도리가 5개가 걸치는 집을 말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3량집은 대들보 양쪽으로는 기둥에 걸치는 주심도리가 배치되고 가운데 높은 곳에 종도리를 배치되는 집이다. 5량집은 대들보가 길어서 3량집의 경우에서 주심도리와 종도리 사이에 중도리가 추가되는 집이다. 한옥은 경사지붕이어서 종도리만 하나고 나머지 도리들은 모두 짝을 이루면서 대칭이 되기 때문에 2개씩이다. 3, 5, 7량집은 그렇게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 때 3량집은 한 가지 종류 밖에 업사. 경사지붕을 만드는 구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모습으로서 가운데 높게 설치되는 종도리와 양쪽에 대칭인 위치에 설치되는 주심도리 2개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5량집은 3가지 동류가 있다. 먼저 긴 대들보 하나에 종도리, 중도리, 주심도리를 모두 얹어서 설치하는 무고주 5량집이 있다. 다음은 양똑 중도리 위치에 긴 기둥을 세우는 형식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대들보를 짧게 쓸 수 있다. 2고주 5량집이다. 마지막으로 한똑 중도리 위치에만 고주를 세우는 형식이 있는데, 무고주 5량집과 2고주 5량집의 장단점을 절충할 수 있게 된다. 1고주 5량집이다. 한옥의 구조를 설명할 때, 유용한 용어로는 간가間架라는 말이 있다. 간間은 도리가 설치되는 가로방향의 기둥 사이를 말하는 것이고, 가架는 보가 설치되는 세로방향의 기본 뼈대를 말한다. 1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2가가 필요하고, 2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3가가 필요하며, 3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4가가 필요하다
    김진흥 가옥의 구조 형식에 대한 설명(1)
  • ○ 사랑채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사랑채는 5량과 3량 구조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남쪽 정면의 대청과 사랑방이 있는 곳은 4간의 5가는 5량으로 만들었고 양쪽 2간부터 북쪽 방향으로는 3량으로 만들었다. 5량과 3량이 연결되는 집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직각이 되는 도리들을 연결시켜서 유기적인 구조가 되도록 해야 한다. 5량의 종도리는 높아서 3량의 종도리와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5량의 중도리는 3량의 종도리와 만나고, 5량의 주심도리는 3량의 주심도리와 만난다. 5량의 중도리와 3량의 종도리를 잘 연결시켜야 하고, 5량의 주심도리와 3량의 주심도리를 잘 연결시켜야 하는 것이다. 남쪽 정면 4간에 사용된 5량은 모두 고주가 있는 형식을 사용하였다. 고주가 있는 형식을 사용하면 툇마루를 둘 수 있게 된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사랑채엥서는 1고주 5량과 2고주 5량이 사용되었는데, 고주가 있는 쪽을 모두 정면으로 배치해서 건물 앞쪽에 툇마루를 두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가운데 4간의 5개 가架는 2고주 5량으로 하였다. 정면 4간의 좌우로 양쪽 간은 3량으로 구성하고 북쪽 방향으로 3량을 그대로 연장하였다. 5량의 주심도리와 3량의 주심도리는 기둥 높이가 같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일제화된 결구가 된다. 5량의 중도리와 3량의 종도리는 건물 안쪽 모서리에서 만나고 맞춤되는데, 기둥 없이 공중에 떠있는 모습이 되기 때문에 안정되는 구조가 되도록 유의해야 한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 사랑채에서 5량과 3량이 만나는 양쪽은 기둥 배치에서 다른 모습이다. 동쪽 측면의 기둥은 안쪽의 2고주 5량폭에서 중간에만 기둥을 배치되고 있다. 그 결과 보의 설치에서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동쪽 끝에서는 2개의 고주와 연결되는 2개의 보가 결구 되고 있고, 서쪽 끝에서는 기둥과 대들보 중간을 연결하는 1개의 보가 결구되고 있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 사랑채 구조에서 서쪽과 동쪽이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 동쪽은 5량과 3량이 직접 직교하는 모습이지만, 서쪽에서는 5량과 5량이 직교한 다음 3량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같은 5량이 만나는 것은 만나는 도리 위치가 같기 때문에 구조를 만들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5량과 3량이 이어지는 부분에서 어색한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에서는 5량과 5량이 만나는 위치에 팔작지붕의 합각을 만들고 합각의 어깨 위치 중도리에 잇달아 3량의 종도리를 만드는 방법으로 해결하였다. 첫째, 이처럼 어렵고도 특이한 해결책이 필요한 것은 침방을 2간 가로로 배치했기 때문에 비록된 것인데, 침방이 그만큼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원래는 사랑채 동쪽에서 5량과 3량이 직교하는 방식과 같ㅇ은 모습이었다가 나중에 개축하는 과정에서 변경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공통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건물의 몸체 구조와 기와지붕 표면이 분리되어 있음을 증명한다는 점이다. 목구조와 기와지붕이 한옥의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만큼 둘 사이 관계가 유기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건축의 건물 외벽과 여기에 붙이는 타일과 같은 외장재관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 사랑채에서 사랑방과 침방과 마루방이 만나는 부분의 지붕은 인위적이든 그렇지 않았든 이런 사고를 가진 목수의 생각에서 고안된 모습이라는 점은 틀림이 없다.
    김진흥 가옥의 구조 형식에 대한 설명(2)
  • ○ 안채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안채는 중간 3간이 대청이고 서쪽에는 폭이 1간 반인 안방이 동쪽에는 폭이 1간인 건넌방이 있다. 따라서 전체 정면이 5간 반이다. 대청은 3간이므로 4가로 구성되는데 5량 형식이다. 4가 중 중앙 2가는 무고주 5량이고, 양 옆의 2가는 1고주 5량이다. 중앙 2가를 무고주로 하였기 때문에 안채 대청은 툇마루가 없는 모습니다. 안채 대청의 서쪽은 건넌방이고 여기에 내달은 덧 이곳은 사랑채와 연결되는 곳이기 때문에 앞서 3량인 것을 확인한 바 있었다. 5량과 3량을 직각으로 결합하는 것은 서로 높이가 같은 5량의 중도리와 3량의 종도리를 결구하고 5량의 주심도리와 3량의 주심도리를 결구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높은 5량의 종도리는 합각을 만든다. 안채 대청의 동쪽은 안방이 되는데, 안방 가架의 폭은 대청 가架의 폭과 같다. 그래서 대청도 5량이고 안방에서 앞으로 내단 공간도 5량으로 하였다. 가로 방향과 직각으로 내달은 세로 방향 건물이 똑같이 5량으로 된다면, 종도리와 종도리, 중도리와 중도리, 주심도리와 주심도리를 연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매우 유리하다. 다만 두 방향의 지붕 모습과 용마루 높이가 같기 때문에 입면상으로 단순해지는 결점이 없지는 않다. 이런 결덤을 보완하기 위해서 가로 지붕의 용마루에는 적새를 몇 장 더 깔아서 의도적으로 지붕을 높이는 방법을 사용한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 안채에서는 구조상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정면 주심 도리와 측면 주심도리가 만나는 지점에 기둥을 설치하였다. 기둥을 설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1간에 대한 창호와 입면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남녕위 재사’ 한옥의 안채에서는 기둥을 세웠기 때문에, 1간을 둘로 나누는 모습이 되었고 반간에 대한 창호와 입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 대청 전면에 창호를 달게 되면, 반간은 외부로 열리게 되고 나머지 반간은 내부로 열리는 모습이 된다. 기둥을 세우지 않는 경우는 두 개의 부재가 직각으로 만나는 모습이지만, 기둥을 세우게 되면 세 방향의 부재가 기둥 위에서 맞춤되는 결구가 된다. 안방이나 부엌의 벽체가 서는 곳에는 1고주 4량 형식을 사용하고 벽체가 서지 않는 곳에는 무고주 5량 형식을 사용해서 건물의 안정성을 고려하면서도 내부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내부 공간에는 고주가 설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진흥 가옥의 구조 형식에 대한 설명(3)
  • ○ 문간채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문간채는 e가 모양에 가깝다. 가장 단순한 구조인 3량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직각으로 만나는 양쪽다 3량이기 때문에 만나는 도리 위치가 일정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은 구조가 된다. 종도리는 종도리끼리 결구되고, 주심도리는 주심도리끼리 결구되는 것이다. 한옥 건물이 직각으로 꺾이게 되면 모서리가 만들어지는데, 건물 바깥쪽 모서리와 건물 안쪽 모서리는 다른 모습이다. 바깥쪽 모서리는 45°방향으로 추녀가 경사지게 설치되고 추녀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낮아지는 경사면이 만들어진다. 이와 비교하면 안쪽 모서리에는 45°방향으로 기왓골이 만들어지는데, 회첨이라고 한다. 회첨에서는 양쪽 지붕 경사면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모이게 된다. 그리고 마당의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결국 회첨은 한옥에서 가장 비가 샐 확률이 높은 위치가 되고 바닥도 가장 많이 패여서 보강이 필요한 위치가 된다. 장위동 ‘남녀위 재사’ 한옥의 문간채 구조 형식을 볼 때,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다. 바로 찬간(찬마루)이다. 찬간은 1간 반 길이에 불과하지만 5량구조이다. 여기에 직각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3량이다. 그러나 5량과 3량이 직각에서 만나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찬간과 부엌이 인접한 부분이다. 부엌도 5량 형식이고 찬간도 5량형식으로 같지만, 종도리까지의 건물의 높이는 부엌 5량이 더 높고 찬간 5량이 더 낮은 모습으로 되어 있다. 동일한 5량형식이고 기둥 사이가 같은 폭이 그대로 연장되고 있지만,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두 건물은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주심도리, 중도리, 종도리가 모두 연결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두 건물의 기와지붕의 높이가 다르게 되어 단차가 있는 모습이 되었다. 이런 모습을 고려할 때, 찬간은 나중에 추가로 건축되었고 그 시기는 문간채가 증축되었을 시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한편 찬간부터 증축되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평면을 분석하면서 부엌과 찬간이 접하는 부분에 부분에 반간 거리로 기둥이 설치된 점을 예로 들었었다.
    김진흥 가옥의 구조 형식에 대한 설명(4)
  • ○ 안채 별당채 안채 별당채 一자 형태 건물이기 때문에, 구조 형식이 단순하다. 정면이 3간, 측면 2간이다. 정면 3간은 4가架 구성이다. 가운데 2가架는 무고주 5량이고 양쪽 츠겸ㄴ은 기둥 셋으로 2간을 만들었다. 이런 구조의 특징은 측면 기둥에서 대들보와 연결되는 부재가 설치된다는 것인데, 대들보와 직작으로 걸쳐지는 굽은 보를 충량衝樑이라고 한다. 충량이 양쪽으로 설치되었고, 그 위쪽으로 중도리가 네모나게 결구된다. 중도리를 만들어진 네모난 안쪽으로 천장이 만들어진다. 얼굴 양쪽의 눈썹과 같은 위치라고 해서 눈썹천장이라고 부른다. 눈썹천장은 팔작지붕에서 합각이 세워지는 안쪽의 어둡고 보기 싫은 어중간한 지붕 공간을 가려줄 수 있다.
    김진흥 가옥의 구조 형식에 대한 설명(5)
  • ○ 사랑채 별당채 1905년 상량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사랑채 별당채는 ┌자모습으로 남쪽의 정면 부분이 5량이고 앞으로 달아낸 부분이 3량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5량의 중도리와 3량의 종도리를 연결시키고, 5량의 주심도리와 3량의 주심도리를 연결시키면 안정된 구조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가장 높은 5량의 종도리를 연장하여 합각을 만들면 지붕도 완성된다. 그런데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서는 측면에 추녀를 사용하여 찰작지붕을 만들지 않고 맞배지붕으로 처리하여 소박한 모습이다. 맞배지붕은 추녀를 제작하는데 길고 두꺼운 부재를 사용해야 하고, 설치하는데 비교적 높은 기술 수준이 필요한 팔작지붕에 비하면 확실히 경제적이다. 그러나 대신 맞배지붕은 유려한 곡선을 보여주는 팔작지붕보다 외관상 화려하지 못하고, 비바람으로부터 건물 주위를 보호하는 측면이 강한 팔작지붕에 비하면 관리측면이나 내구성에서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건물의 양쪽을 모두 팔작지붕으로 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최소한 비바람에 노출되기 쉬운 쪽이나 정면성을 갖는 쪽만이라도 팔작지붕으로 만드는 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랑채 별채 동쪽 측면으로는 3량 형식의 ㄱ자 집이 덧붙여져 있다. 5량 3량처럼 서로 다른 구조 형식의 건물은 덧붙이기 용이하다. 건물의 높이도 다르고 폭도 다르기 때문이다. 대신 맞배지붕일 때 훨씬 용이하다. 높은 건물이 맞배지붕으로 가운데 서 있고 양쪽으로 낮은 건물이 서 있을 때, 낮은 건물의 안쪽은 맞배지붕이고 바깥쪽은 팔작지붕인 모습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김진흥 가옥의 구조 형식에 대한 설명(6)
  • 건축 공정 1. 석축과 기단 석축은 건축물 전체에 대한 터를 만들기 위해 쌓는 단을 말하는 것이고, 기단은 개개 건축물의 주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두르는 단을 말한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도 전체 건축물을 배치하기 위한 석축이 있고, 각각의 건축물에는 각각의 기단이 있다. 2. 안채와 사랑채 초석 초석은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 기둥을 받치는 돌이다. 따라서 초석과 기둥은 같이 서게 되고, 사용되는 개수도 같다. 초석 배치를 보면 평면 모양을 알 수 있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서 안채와 사랑채는 ㄹ자 모양으로 생겼다. 위쪽이 안채, 아래쪽이 사랑채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초석 중에서 주의 깊게 볼 것은 기단돌이나 설축돌 바로 위에 초석이 놓인 경다. 대부분의 초석은 기단돌이나 석돌 안쪽에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서 안채 경우에는 초석이 기단돌 위에 놓인 모습이 있고, 사랑채 경우에는 초석이 석축돌 위에 놓인 모습이 있다. 초석은 기둥과 위치가 같으므로 기단돌과 석축돌 위에 기둥이 세워지도록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안채와 사랑채 기둥·보 설치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다. 기둥을 세운 다음에는 앞쪽과 뒤쪽 기둥 사이에 보를 건다. 기둥 위에는 네 방향으로 홈이 파져 있는데, 그 중 세로 방향으로 기둥의 턱을 내려끼운다. 보머리와 몸통 사이에 잘록하게 생긴 부분을 숭어턱이라고 한다. 기둥과 보를 결구해서 만들어진 ∏모양을 구構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가구架構, 중국에서는 구가構架라고 한다. 4. 안채와 사랑채 주심도리 설치 기둥, 보 다음에는 사로 방향으로 도리를 결구한다. 도리는 네모 모양인 납도리가 있고 둥근 모양인 굴도리가 있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은 모두 납도리를 사용하였다. 납도리는 기둥과 기둥을 직접 결구하는 경우도 있고, 도리 아래똑에 장여를 먼저 결구하는 경우도 있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에서는 두 가지 방법 모두 사용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장여를 사용한 위치가 더 중요하고 신경을 더 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5. 안채와 사랑채 중도리 설치 한옥은 경사지붕이다. 따라서 지붕을 받치는 구조는 높아질수록 좁아지는 모습이 된다. 주심도리 결구가 끝났다면, 다음은 중도리 결구를 하게 된다. 중도리 역시 주심도리와 원칙은 같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보를 내려 끼우고 도리를 연결한다. 기둥은 대들보 위에 따로 세우는 짧은 동자주童子柱일 수도 있고, 또는 바닥에서부터 위까지 연장되어 올라온 긴 고주高柱일 수도 있다. 6. 안채와 사랑채 종도리 설치 중도리 결구가 끝나면 다음은 종도리를 결구한다. 종도리는 다른 도리와 달리 한 줄로만 설치된다. 그래서 지붕에서 제일 높은 지붕선인 용마루를 만들 수 있다. 종도리를 받치기 위해서는 짧은 기둥이나 판자를 여러 단 붙여서 만든 부재를 사용하는데, 이를 대공臺工이라고 부른다. 만약 쥠도리 다음에 중도리 없이 바로 종도리를 설치하는 경우 3량집이고, 주심도리, 중도리, 종도리를 모두 설치하는 경우 5량집이다. 7. 안채와 사랑채 장연 설치 구조가 완성된 다음에는 서까래를 걸치게 된다. 한옥에서 서까래는 지붕의 바탕이 되고 처마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중요한 요소이다. 서까래는 위치에 따라서 긴 것을 사용하기도 하고, 짧은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주심도리와 중도리 사이를 연결하는 서까래는 긴 것을 사용하게 되는데, 기둥 바깥으로 처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연長椽이라고 부은다. 또는 아래쪽에 사용되었다고 해서 하연下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 안채와 사랑채 단연 설치 처마 길이가 있는 아래쪽 서까래를 설치하고 나면, 중도리와 종도리 사이에 짧은 서까래를 설치한다. 위쪽에 설치했다고 해서 상연上椽이라고도 하고, 아래쪽에 설치한 서까래보다 짧다고 해서 단연短椽이라고 한다. 처마 길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3량집에 서까래는 거는 경우에는 장연, 단연短椽이 따로 없다. 건물 폭이 넓지 않아서 한 가지 서까래만으로 지붕을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위쪽 서까래, 아래쪽 서까래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김진흥 가옥 건축 공정에 대한 설명(1)
  • 9. 문간채 초석 설치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의 문간채는 한쪽으로는 안채에 닿고 나머지 한쪽은 사랑채에 접하고 된다. 보통의 경우에 문간채가 일자형 모습인 것을 생각하면, ‘남녕위재사’ 한옥의 문간채는 복잡한 모습이다. 회첨 부분이 3곳이나 만들어진다. 회첨은 지붕과 지붕이 만나서 생기는 골짜기를 말한다. 10. 문간채 기둥·보 설치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다. 문간채는 다른 건물에 비해 지붕이 낮고 구조도 간단하며 건물 폭도 좁다. 한옥에서 가장 간단한 구조인 3량집이다. 3량집은 앞뒤로만 기둥을 세우기 때문에 고주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5량집에는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는 경우가 있고, 이때 고주를 사용하게 된다. 11. 문간채 주심도리·종도리 설치 문간채는 가장 단순한 3량집이다. 그래서 주심도리와 종도리만 설치한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를 연결하고 가로방향으로 주심도리를 결구한다. 보 위에 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결구한다. 12. 문간채 서까래 설치 문간채는 3량집이기 때문에 한 가지 서까래만으로 지붕을 만들 수 있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 문간채는 꺾이는 부분이 많다. 모서리 바깥으로는 추녀를 설치하고 모서리 안쪽에는 회첨이 형성된다.
    김진흥 가옥 건축 공정에 대한 설명(2)
  • 13. 사랑채 별채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에서 사랑채 별채는 1905년에 세워졌다. 사랑채 별채는 사랑채 뒷마당을 중심으로 사랑채 북쪽에 지어졌다. ㄱ자를 반시계 방향으로 90° 회전시킨 모습이다. 14. 사랑채 별채 기둥·보 설치 사랑채 별채 기단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정면의 가운데 2간은 높은 기단 위에 있고 나머지 오른쪽 1간은 낮은 기단 위에 있다. 현재는 모든 기단을 똑같이 높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른쪽 부분만 기단돌을 사용하지 않은 모습에서 원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오른쪽 끝에 사용된 초석이 다른 위치에 사용된 초석들 보다 길이가 긴 것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기단 높이를 다르게 했다는 사실은 이 부분이 누마루처럼 높게 보이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채 별채의 원래 모습은 오른쪽 끝부분이 누마루인 ㄱ자 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 사랑채 별채 기둥 ·보 설치 사랑채 별채는 5량집과 3량집을 같이 사용했다. 이처럼 앞에서 보이는 정면쪽은 5량집으로 하고 측면에서 내단 쪽은 3량집으로 하는 것은 한옥의 멋진 특징 중 하나이다. 이렇게 만든 ㄱ자 집은 정면의 높은 용마루에서 낮은 용마루가 앞으로 내려와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처럼 보이게 된다. 16. 사랑채 별채 도리 설치 정면은 5량으로 하고 왼쪽의 내단 쪽은 3량으로 하였기 때문에, 정면에는 주심도리, 중도리, 종도리를 사용하였고, 왼쪽으로 내단 쪽은 주심도리와 종도리만 사용하였다. 정면 5량집은 5량 중에서 가운데 고주를 두는 1고주 5량을 사용하였다. 이 때는 고주 쪽에 툇간이 있어서 걸터 앉을 수 있는 툇마루를 만들 수 있다. 17. 사랑채 별채 서까래 설치 정면 쪽은 5량으로 만들고 내단 쪽은 3량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종도리 높이가 달라진다. 먼저 주심도리는 기둥 높이가 같기 때문에 5량이든 3량이든 같다. 다음으로 5량집의 중도리는 3량집의 종도리와 높이가 같다. 그래서 5량집의 중도리를 3량집의 종도리와 연결하면 된다. 그런데 5량집의 종도리는 가장 높은 위치가 되고 3량집의 도리와 연결할 핑요가 없다. 이렇게 높이가 차이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지붕면이 하나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서까래 위에 깔리는 산자나 개판이 있기 때문이다. 18. 사랑채 별채 부속채 증축 사랑채 별채 오른쪽으로 다시 부속채가 증축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랑채 별채의 기단이나 초석의 모습에서 오른쪽이 누마루로 계획되었다면, 인접해서 건물을 설치했을 이유가 없다. 또한 초석이나 기단의 상태, 창호를 만드는 입면 방식, 창호의 살 모습, 기둥과 같은 부재의 상태나 가공 모습 등에서 다른 건물들과 확연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이 완성되었다.
    김진흥 가옥 건축 공정에 대한 설명(3)
  • 초석 형태 초석 또는 주춧돌은 기둥을 썩고 약해지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하는 돌이다. 따라서 기둥 밑둥을 받치는 초석은 기둥의 개수와 일치한다. 초석과 같은 돌을 정이나 망치를 사용하여 손으로 직접 다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시간도 절약하고 품도 줄이기 위해서 외부로 드러나 보이는 부분만 다듬는 것이 인반적이다. 건물이 서 있는 상태에서 보이는 초석 모양과 건물을 해체한 상태에서 관찰한 초석의 모양은 많이 다르게 된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애써 가공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는 모두 133개의 초석이 사용되었다. 안채 29개, 사랑채 35개, 문간채 29개, 안채 별당 10개, 사랑채 별채 30개 등이다. 이 중에는 밖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초석들도 있다. 평면도를 보면 도면 안쪽에 서 있는 기둥들이 있는데 고주高柱를 받치는 초석들이다. 사란채나 안채에서 2고주 5량인 경우에 고주들은 건물 안쪽에 설치 되는데, 이를 받치는 초석들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사랑채 경우에 고주 초석 7개가 밖에서 보이지 않고, 안채 경우에는 고주 초석 3개가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내부 공간에 세워지는 기둥들을 받치는 초석이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관찰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는 예외적으로 관찰이 안 되는 초석들이 있다. 안채 안방과 안채 별당채를 벽으로 연결하였는데 몇 개의 초석들이 가려지게 되었다. 또 건물이 대지 경계에 바짝 붙어 조사가가 불가능한 상태인 경우도 있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을 살펴보면 초석은 4가지 모습으로 발견된다. 이 같은 4가지 유형은 밖으로 노출된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첫째는 정면은 전체 길이가 노출되고 양쪽 측면은 앞쪽 일부분만 보이는 경우이다.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가장 많은 수를 조사할 수 있다. 건물 모서리 또는 가장자리 기둥의 안쪽 부분에 사용되는 초석으로, 70개가 조사되었다. 둘째는 정면만 보이고 나머지 세 면은 보이지 않는 경우이다. 앞에서 관찰했던 초석들의 경우와 사용되는 위치가 같다. 다만 벽체를 방화장 형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둥 사이에 설치되는 흙벽이나 회벽은 기둥보다 벽체가 가늘어서 기둥이 노출되어 보인다. 그러나 방화장은 기둥보다 굵은 두께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둥은 전체가 가려지기도 하고 초석은 정면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서는 문간채와 사랑채 별채 측면벽에서 보인다. 셋째는 초석 전체 크기 중 3/4 정도만 노출된 경우이다. 건물의 바깥쪽 모서리에 세워지는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서는 안채에서 2군데, 사랑채에서 4군데, 문간채에서 6군데, 안채 별당에서 4군데, 사랑채 별채에서 7군데에서 사용되었다. 모두 23개이다. 넷째는 초석의 전체 크기 중 1/4 정도만 노출된 형태이다. ㄱ자, ㄴ자, ㄷ자 등과 같이 건물이 꺾어지는 안쪽 부분에 세워지는 초석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같은 위치에서 지붕은 빗물이 모여 흘러내리는 기와골인 ‘회첨’이 만들어진다. 그래서인지 이 곳에 사용된 소석들이 대체로 상태가 좋지 않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서는 11군데가 있다. 한옥에서 사용되는 초석들이 어떻게 또는 얼마만큼 보이나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김진흥 가옥에 사용된 초석의 형태에 관한 설명(1)
  • 이제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다섯 건물들에서 각각 사용된 초석은 각각 어떤 모습인지 알아본다. 하나, 문간채에는 29개의 초석이 잇다. A, B, C, D 타입이 모두 사용되었다. 문간채는 정면에 방화장이 사용되기 때문에 B 타입이 있다. 문간채에 사용된 초석들은 모서리가 분명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비교적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초석의 상태 역시 안채나 사랑채보다 나중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초석의 크기는 비교적 일정하고, 기둥의 굵기에 비해서 윗면이 넓은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궁색하지 않은 모습이다. 다른 초석들과 달리 변형된 모습이 보이는 초석이 회첨의 한 군데 서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잦은 공사로 인해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문간채 기둥 가운데는 굵은 것이 있는데 사랑채와 근접한 위치에 사용되었다. 문간채 건축 이후에 또다시 한 간이 증축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둘, 사랑채에는 33개의 초석이 사요외었다. A, C, D 타입이 사용되었다. 사랑채에는 방화장이 없기 때문에 B 타입은 없다. 먼저 남쪽 정면을 보면 초석들은 풍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풍화로 심한 곳은 사랑채에서 북서쪽으로 달아낸 부분으로 안채 마당에서 보이는 초석들이다. 특히 마모가 가장 심한 초석은 안채 마당에서 보이는 쪽으로 마루방에서 아궁이와 접하는 위치의 초석이다. 모서리가 많이 닳은 모습이다. 남쪽으로 바로 인접한 초석 역시 특이한 모습이다. 안채마당 쪽에서 보면 사랑채의 침방과 마루방이 인접하는 위치에 사용된 초석이다. 원래의 초석 위에 기둥 굵기 만한 크기의 돌이 하나 끼워져 있다. 보통 기둥 하부가 썩은 경우에는 썩은 밑둥을 잘라내고 새로운 목재로 짧은 기둥을 만들어 상부 기둥을 괴어서 잇는다. 이와 같은 기둥의 경구 방법을 동바리 이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무 대신 돌을 사용하여 원래보다 짧아진 기둥을 받치고 있어서 이채로운 것이다. 또 다시 남쪽 방향으로 인접한 초석에는 하인방을 끼운 것으로 추정되는 홈이 파져있다. 침방 아래쪽으로 두 간의 광 중간에 설치된 초석이다. 그러나 현재 위치에서 보면 반대편에 초석이 없기 때문에 인방이 끼워져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다른 집에서 사용되었던 초석을 재활용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사랑채 초석을 보면 정면이나 서쪽의 안마당 방향의 것들과 달리 사랑마당 쪽의 초석들은 풍화로 인한 마모가 적기 때문에 강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석 크기는 기둥보다 적적하게 넓은 돌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초석의 표면을 다른 세 면의 초석들처럼 다듬은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 쉽게 눈에 띈다. 특히 가로로 같은 위치에 있는 초석들 사이에도 뚜렷하게 구분이 될 정도로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사랑채 동측면 장대석 축대 위에 세워진 초석들은 상태가 가장 양호한 모습이다. 축대의 장대석 면과 고르게 설치된 모습으로 볼 때, 재료를 선정하고 가공하는데 신경을 쓴 모습이 역력하다. 셋, 사랑채 별채는 30개의 초석이 사용되었다. A, B, C, D 타입이 모두 사용되었다. 사랑채 별채의 동측면에도 방화장 형ㅅㄱ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채 별채에 사용된 초석의 모습을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905년의 상량문이 남아있는 ┌자 모양 건물과 여기에 한 단 낮은 지붕으로 ┓자로 붙어 있는 건물로 나누어 진다. ┌자 건물에 사용된 초석은 사랑채 전면이나 안채 전면에 사용된 초석과 유사하다. 그러나 ┓자 건물에 사용된 초석은 높이가 낮고 자연석의 평탄한 면을 위로 가도록 설치한 모습에서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사랑채 별채가 증축되었을 알려주는 초석이 또 있다. 1905년 건축된 사랑채 별채 동측면에 사용된 초석은 다른 위치의 초석에 비하면 길이가 길다. 기단의 상부 높이는 같지만 기단의 하부 높이는 다르다. 그것은 정면의 기단을 보면 왼쪽 2간의 대청 앞에는 기단석이 설치되어 있으나, 오른쪽 간에는 기단석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른쪽 간에는 머른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대청보다 높아 보이는 효과가 있는데, 누마루와 같은 것이다. 누마루는 외부 조망을 좋게 하기 위하여 삼면을 모두 개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지붕이 낮은 ┓자 건물을 원래부터 계획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후대에 증축된 것이 분명한 것이 된다. 한편 사랑채 별채에 사용된 초석이 있어서 주목된다. 이 초석의 반대편 위치에는 기둥은 없고 안채의 배면 벽체가 잇다. 현 상태에서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하인방을 끼웠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사랑채 별채와 안채 사이에 협문을 두었을 가능성은 없지 않기 때문에, 안채 벽체에 붙여서 문인방을 걸치기 위한 초석을 배치했을 수는 있다. 넷, 안채는 29개의 초석이 사용되었다. A, C, D 타입이 사용되었다. 안채에는 방화장이 없기 때문에 B 타입은 없다. 정면에 사용한 초석들은 사랑채 정면의 초석들과 유사한 모습으로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안채 오른쪽으로 사랑채와 만나는 부분의 안채 초석들은 사랑채 초석들과 상태가 거의 같은데, 풍화가 많이 진행된 모습이다. 또 대청을 중심으로 건너편에 있는 안방과 건넌방의 같은 위치의 초석의 상태가 둘 다 좋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안채에서 초석의 상태가 가장 양호한 위치는 부엌이다. 안방과 부엌이 만나는 위치에 사용된 초석은 장초석으로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사랑채 별채에 사용된 장초석보다 상태가 훨씬 좋다. 장초석의 남쪽으로 설치된 초석들은 높이가 낮지만,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건너편에 있는 사랑채의 초석들의 상태가 좋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그 이유가 궁금하다. 특히 사랑채의 기단이 두벌대이고 안채의 기단이 한 벌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의아스러운 모습이다. 안채의 배면에는 정면과 달리 자연석 초석을 사용하였다. 다섯, 안채 별당에는 10개의 초석이 사용되었다. A, C 타입만 사용되었다. 방화장이 없어서 B 타입이 없고, 회첨이 없어서 D 타입이 없다. 회첨은 ㄱ자, ㄴ자처럼 꺾이는 부분이 있는 건물에서 나타나는데, 안채 별당은 一자집이어서 꺽임부가 없기 때문에 D 타입이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안채 별당에 사용된 초석은 매우 정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그러나 상부면과 하부면의 체감이 크기 않은 특징이라든지, 기둥 굵기에 비하여 상부면이 넓은 특징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사랑채에 사용된 일부 초석이나 문간채에 사용된 일부 초석과 유사한 모습이 느껴진다. 초석의 모습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부엌과 찬간에 사용된 초석들인데, 인접한 초석들의 높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먼저 안방과 부엌이 만나는 곳에는 장초석을 사용하였다. 그 이유는 부엌 바닥과 안방 바닥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부엌 바닥이 낮은 이유는 아궁이 때문이다.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는 고래는 방바닥보다 낮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고래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 역시 방바닥 보다 낮다. 그런데 낮은 아궁이에 불을 대기 위해서는 부엌 바닥도 낮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부엌에 사용한 초석은 장초석이 아닌 초석을 사용하였다. 안방과 부엌에 사용된 기둥 높이를 같게 하는 경우에는 부엌 가운데 사용되는 초석 역시 길어져야 한다. 부엌이 낮기 때문이다. 한옥에서는 부엌에 초석을 길게 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에서는 초석 대신 기둥을 길게 사용하였다. 따라서 초석이 낮아질 수 있었다. 다시 찬간에 사용된 초석은 인접한 부엌의 초석보다 낮게 설치하였다. 다시 말해서 찬간 초석의 상부면은 부엌 초석의 상부면보다 낮은 모습이다. 이처럼 만든 이유는 엌의 지붕 높이와 찬간의 지붕 높이가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만약 찬간이 후대에 증축되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부엌 옆에 찬간을 증축할 때, 부엌의 지붕 높이와 찬간의 지붕 높이를 같도록 만드는 것보다 찬간의 지붕을 낮게 만드는 것이 더 용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붕 높이를 낮게 하면서도 내부 공간의 천장 높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초석을 낮추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이처럼 인접한 공간의 지붕을 똑같이 만들기 힘든 상황에서 이미 준비된 기둥의 높이를 줄이는 대신 초석을 낮추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김진흥 가옥에 사용된 초석의 형태에 관한 설명(2)
  • 창호 모습 한옥의 창호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미닫이문, 들어열개, 투밀이살, 불발기 등이 그렇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는 아쉽게도 불발기와 들어열개 형식의 문이 남아있지 않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라 근대화가 되면서 건물 전면의 들어열개 문들이 유리창 미서기문으로 바뀌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 안채 안방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안채 안방에서 안마당 쪽으로 동향인 창호를 살피기로 한다. 두 기둥 사이에 아래쪽으로 머름을 끼우고 위쪽으로는 문인방을 끼웠다. 머름이 달린 창호의 경우는 대체로 출입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벽체를 4등분한 다음, 양쪽 기둥에서 1/4 지점에서 각각 문선을 세우고 가운데에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여닫이문이 문선과 닿는 쪽의 세로 울거미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돌쩌귀를 달았다. 반대로 여닫이문끼리 서로 닿게 되는 세로 울거미 중간에는 국화쇠를 대고 배목을 박았다. 여닫이문 안쪽에는 내부 문틀을 덧대어 설치하고 미닫이문을 달았다. 미닫이문은 한국 창호를 대표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틀에는 2개의 가로줄 홈이 있는데, 이런 경우 바깥쪽에는 영창을 달고 안쪽에는 흑창을 다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의 안방 창호에서는 영창 대신에 유리창을 달았다. 영창이라는 말은 햇빛이 비추어져서 밝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인데, 영창으로는 부족한 채관을 유리문으로 바꿔 달아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문은 영창보다 문틀이 두껍고, 바닥 틀은 특히 ㄱ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문 홈에 한쪽을 걸친 채로 여닫도록 한다. 전통 한옥에서 영창이나 갑창은 바닥 울거미 두께 전체가 문홈에 묻힌 채로 여닫게 되어 있는 것과 다른 점이다. 유리창 안쪽으로 영창이 있다. 좌우 두 짝의 영창이 만나는 울거미 마중대에는 풍소란이 끼워져 있다. 풍소란은 제혀로 만든 경우도 있지만, 장위동 ‘남녀위 재사’ 한옥에서는 딴혀로 만들었다. 딴혀를 한쪽 마중대에 부착되도록 끼우고 닫으면 좌우 양쪽 문이 서로 물리도록 하였다. 풍소란은 말 그대로 바람을 막는 장치이다. 가장 방 안쪽에는 두껍닫이를 다는데, 두껍닫이는 문틀의 홈에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문턱 위에 설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두껍닫이는 다른 모든 문들이 열고 닫히는 기능을 하는 것과 달리 고정되어 있다는 점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두껍닫이와 흑창은 갑창 형식이다. 갑창이라고 하는 것은 문살의 양쪽 면을 모두 창호지로 바른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문살이 많을 필요도 없고 창호지가 잘 붙도록 양쪽 다 등밀이로 한다. 아무래도 양쪽을 창호지로 바르기 때문에 한쪽만 바른 것에 비하면 채광보다는 방풍에 적합한 문이고, 창호지 중간네 공기층을 배치한 원리를 이용함으로써 방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김진흥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창호 형태에 관한 설명(1)
  • ○ 안채 건너방 앞에서 살펴보았던 안방 창문의 바로 옆간은 반간이다. 대청과 안방이 만나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점은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 반간을 벽으로 막았다. 그러나 건너편의 똑같은 위치에는 창문이 달려있다. 건넌방은 여기에 창문이 있어야 안마당을 향애 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머름을 두고 문선과 문인방으로 틀을 만든 다음 띠살 두짝 여닫이를 달았다. 여닫이 안쪽은 미닫이를 달았는데, 영창은 빛을 많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살을 최소로 사용하였다. 문을 여닫는데 필요한 돌쩌귀는 한쪽 문에만 달려있고, 다른 한쪽에는 경첩이 달려있으며, 문고리를 대신해 일반 가구 손잡이가 달려있는 모습이 문짝에도 역사가 깃들여있음을 알게 해 준다.
    김진흥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창호 형태에 관한 설명(2)
  • ○ 안채 건너방 배면 안채 건넌방에서 사랑마당 쪽으로 열리는 창호는 문인방의 모습이 다른 곳과 다르다. 문인방이 보이지 않고 ∏자 모양의 문틀만 보인다. 이런 경우는 문인방의 표면을 깎아내고 그 위에 회벽으로 덮어서 바르는 것이다. 그래서 문인방의 좌우가 회벽 미장면에 가려지게 된 것이다. 같은 형식의 창문들이 사랑채 뒷마당을 둘러싼 건물면에 사용되고 있는데, 같은 시기에 동질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둥과 기둥 사이 하부에 머름을 끼우는 대신 키가 높은 하인방을 사용해서 비슷한 효과를 만들고 있다. 이런 모습은 건물의 정면보다는 문간채라든지 건물의 배면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사랑뒷마당이 과거에는 외부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닫이문 안쪽으로 달인 영창은 아자살과 숫대살을 변형한 모습이다.
    김진흥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창호 형태에 관한 설명(3)
  • ○ 안채 안방 다락 안채 안방에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창이 있다. 부엌에서 서쪽으로 열리는 80㎝ 촉의 작은 창인데, 부엌 위쪽에 달려 있는 모습으로 보아 원래는 다락에 달려 있던 창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다락이 없어지고 없기 때문에 용도가 없는 창이 되었다. 영닫이로 쌍창만 달린 것은 사람이 거주하는 방이 아니라 다락이기 때문이다. 중인방 위에 문선을 양쪽으로 세우고 상부를 반연귀로 만들어 덧홈대와 결구하였다. 덧홈대는 상인방에 고정하였는데, 문선을 반연귀로 만들어 맞춤하였다. 창은 띠살이고 투밀이살로 만들었다. 투밀이살로 가로 방향으로 위쪽과 아래쪽에 2줄, 가운데에 4줄을 울거미에 결구하고, 투밀이살 8줄을 세로로 등간격으로 가로살과 맞춤시켰다. 가로살은 가운데 2줄만 내닫이 장부로 하였고 나머지 가로살은 짧은 장부로 하였다. 문 울거미에 난 홈을 보면 살대가 결구된 방식을 알 수 있다. 울거미 두께는 4㎝가 조금 안되고, 울거미 전면에는 쌍사홈이 나 있다. 세로 울거미에는 중간에 국화쇠를 박았고, 상부 가로 울거미에는 국화쇠를 중앙으로 치우치도록 박아 장식하였다. 상부 국화쇠 안쪽은 위로 걸어 잠글 수 있도록 문고리가 달려 있게 된다. 문고리가 밖에 달리지 않은 이유는 다락의 창은 안쪽에서만 열기 때문이다.
    김진흥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창호 형태에 관한 설명(4)
  • ○ 안채 아궁이 부엌 고정창 장위동 ‘남녀위 재사’ 한옥에는 창호 위치와 관련해 흥미로운 곳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연결되는 부분인 아궁이 부엌에 있는 붙박이 팡이다. 아궁이 부엌은 안채 마당에서만 출입이 가능하고 건너편에 있는 사랑마당에서는 출입이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다라서 사랑마당에서는 출입이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마당에서 보이는 입면은 벽체로 막아도 무방한데, 반간 폭에 정자살 붙박이창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1간의 벽체 중간에는 기둥을 세워서 둘로 분리해 놓았는데 도리 하부를 그냥 받치고 있는 모습니다. 한옥의 기둥은 보와도리 또는 도리와 도리가 맞춤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도리만 받치는 기둥을 특이한 경우가 된다. 또 보통 부엌이나 광에서는 환기나 채광을 위해 살창을 사용한다. 살창이란 독락당의 담장처럼 각재로 구획을 한 다음 가는 살을 세로로만 끼워 설치한 창을 말하는데, 창호지를 바르지 않는 점이 특징 중 하나다. 그런데 이 곳 아궁이부엌에서는 창호지를 바를 수 있는 정자살의 네모창을 고정으로 설치했다는 사실은 채광을 주 목적으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엌에 창호지 바른 고정창을 설치했다든지 1간의 절반에 기둥을 세워 입면을 구획했다든지 하는 점들은 이례적인 모습이다.
    김진흥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창호 형태에 관한 설명(5)
  • ○ 사랑채 침방 사랑채 침방 창문은 좌우 문선을 길게 사용하고 있어서 특이한 모습이 되었다. 평면상으로도, 구조상으로도, 입면상으로도 궁금한 점이 많은 부분이다.
    김진흥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창호 형태에 관한 설명(6)
  • ○ 안채 정면 유리창 안채와 사랑채 보두 정면에 유리로 된 미서기문이 달려있다. 처음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방한을 위해서 새로 단 것으로 보인다. 같은 유리창문이지만 안채의 것이 사랑채에 비해 신경을 많이 쓴 모습이다. 안채의 유리창문은 하부에 청판을 달았고, 문홈을 위해 덧붙인 문선이나 문인방의 결구도 연귀 맞춤을 하였다. 안채에 사용되었었던 나무 울거미의 유리창들은 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진흥 가옥에서 볼 수 있는 창호 형태에 관한 설명(7)
  • 남녕위궁과 남녕위재사 우리는 장위동 한옥을 순조의 부마 남녕위의 궁집宮家, 즉 남녕위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녕위궁은 장위동 남녕위 재사와 별개로서 다른 건축임을 알 수 있다. 남녕궁南寧宮이라는 기록은 김형규金衡圭(1861~1935)의 『청우일록靑又日錄』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청우일록』의 1책은 1873년 10월에 시작하여 1884년 8월에 끝나는데, 그 중 1878년(고종 15년) 12월 초육일初六日 신사辛巳일 맑은 날의 일기 제목에 남녕궁적南寧宮賊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제목은 정확하게 문익공문집文翼公文集 남녕궁적南寧宮賊이지만, 본문 내용에는 문익공의 문집을 빌려준 사실과 정황만을 설명하고 있다. ‘남녕궁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이, 아마도 그 날 있었던 특이한 사건을 제목에 같이 써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암 이 날 남녕궁에 도적이 드는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1907년에도 ‘남녕위궁南寧尉宮’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1907년 당시는 헤이그 밀사라든지 고종의 양위, 조선군대 해산과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와 같은 사건들이 많았던 해였다. 역사와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조선 사람들은 이완용에게 분노하고 있었으며, 그의 집을 불대운 사건이 1907년에 발생하였다. 갈 곳이 없게 된 이완용에게 ‘남녕위궁’을 하사한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고, 그 사실이 지상에 보도된 것이다. 그리고 남녕위궁의 일부를 양식으로 수리하여 살기 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끊임 없이 추대를 부리던 이왕용이 도성 바깥 장위동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남녕위궁은 도성 안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1913년에 간행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는 윤용구의 주소가 경성京城 북부北部 재동齋洞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윤용구는 과연 언제부터 장위동에서 은거하기 시작하였을까? 윤용구는 이에 대하여 1895년부터 장위산중에 은거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 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7월 11일 윤용구는 일제로부터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운용구는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산속에서 살고 있다고 답한다. 또한 스스로에 대하여 나이는 67세이고 직업은 무직이며 주소는 고양군高陽郡 숭인면崇仁面 장위리長位里 76번지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19년 당시 윤용구가 도성 바깥 장위리에서만 거주한 것은 아니었고, 도성 안쪽 재동을 역시 왕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윤용구는 같은 신문에서 1919년 재동 집에서 새해인사를 온 윤홍섭을 만난적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남녕위궁은 남녕위 재사와 별도로 도성 안의 재동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음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다. 1932년 2월 1일 『별건곤』 〈만화경萬華鏡〉이라는 기사에서 궁가인 남녕위궁이 재동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동 초입에 윤씨 소유의 ‘남녕위궁’이 있었는데 이후 조씨가 소유하게 되면서 더 크게 개축하게 되었고 ‘재동 아방궁’ 또는 ‘재동 감옥齋洞 監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윤씨가 소유할 때도 모든 간마다 삭월세를 내주었었는데, 다음 주인이 된 조설현曺楔鉉 역시 사업에 망해서 사글세를 내주게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 장위동 남명위재사 한옥의 건축연대 지금까지 장위동 남녕위재사 부마한옥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건축연대를 언제로 볼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상량문에서 ‘을축년乙丑年’상량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데, 과연 을축년을 1805년, 1865년, 1925년 중 언제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1865년을 가장 유력하다고 보는 것 같다. 과거에는 1925년에 건축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잇엇다. 이 같은 견해는 장위동 남녕위재사 부마한옥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는 시점에 즈음하여 주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성북구편)』내용 중에는 “사랑채 대청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 상량문에 의하면 을축년에 건축했다는 것으로 보아 1925년에 건축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책의 내용중에는 “순종의 부마가 거처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전하며 사랑채 중앙에 남녕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하는 표현도 있는데, 이는 1925년에 건축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 순종의 부무 중 남녕위는 1887년 (고종 24년)에 사망하였는데, 부마 남녕위가 생전에 거처할 목적으로 지었다면 건축은 1887년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경국 장위동 남녕위재사 부마한옥은 1865년에 건축되었다는 주장이 우세하게 되었고, 1989년의 『서울시 민속자료 실태조사보고서〈한옥〉』 그리고 이후 발간된 관련된 서적에서는 같은 주장이 계속 이어진다. 1865년 건축으로 추정한 근거로는 부마 한옥으로 구전되고 있다는 점 이외에도 건축 형식적 측면을 고려한 내용이 있다. 1920년대 건축이라고 보기에 이보다 앞선 시기의 특징으로 보이는 소박한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구체적인 계로서 겹처마가 사용되지 않고 홑처마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나 소로를 장식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소로수장집 형식이 아니라는 점 등을 들었다. 1925년에 지어진 건축이 아니라는 사실은 앞의 이유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추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사랑채 뒤쪽으로 마당이 있고 건너편에 별채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 별채의 대청마루 종도리 상량문에 ‘光武九年 乙巳年’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때 광무9년인 을사년은 1905년에 해당한다. 바로 이 별채가 앞에 위치한 본채보다 나중에 지어졌다는 사실이 당연하다면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진 본채는 1905년에 이전에 건축되었어야 한다. 따라서 장위동 남녕위재사 부마한옥은 1925년 건축이 아닌 것이다. 둘째, 장위동 남녕위재사 부마한옥의 1962년에 처음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가옥대장의 연혁沿革칸에 1824년 3월 24일 신축이라고 씌여 있다. 이 문서에는 건축물 4동의 구조, 종별, 용도, 면적이 조사되어 있고, 소유자의 변경 상황역시 기입되어 있다. 1824년 신축이라는 기록의 근거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덕온공주는 1837년에 결혼하기 때문에 남녕위는 1837년 이전에는 있을 수 없고, 덕온공주가 1844년 사랑하기 때문에 1844년 이전에는 대사 건축 역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다른 사람의 소유였을 가능성이나 재사와 전혀 곤계없는 다른 용도의 건축물이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1824년 건축이라는 기록의 출처가 밝혀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 장위동 남명위재사 한옥의 변화 과정 우리가 보는 현재의 모습을 한 번에 이루어진 건축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현재의 중문채가 원래는 철대문 위치에 있던 것을 이전한 것이라고 하는 언급을 통해서도 이전 또는 개축이 있었던 사실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여러 가지 건축적인 현황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지 알아보자. 중문간 행랑채가 지금처럼 석축 위에 있지 않고 원래는 철대문 위치에 있었다고 하였다. 중문간 행랑채는 오른쪽 끝에서 사랑채 부분과 매우 근접해 있지만 사랑채와 만나지 않은 모습이고 간격이 있어서 떨어져 있다. 그런데 행랑채 기둥과 사랑채 기둥은 일직선이 아니다. 서쪽에서 중문간 행랑채가 안채와 이어져 한 몸이 되는 것과 비교된다. 중문간 행랑채 서쪽 끝은 안채 찬마루가 서쪽으로 이어진 건물의 끝과 기둥 위치에서 일치한다. 기둥 위치가 같기 때문에 두 공간은 이어질 수 있고, 그 간격은 정확하게 2간 길이에 해당한다. 2간의 좌우 양쪽 길이가 정확하게 같고 또한 건물의 다른 간과 길이가 일치한다는 것은 일부러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모습에서 안채와 중문채를 직접 연결하려는 계획이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안채의 찬마루 서쪽 두 간, 중문간 행랑채 일곱간 그리고 둘 사이를 연결하는 두 간은 모두 같은 8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의 간격이 일치한다면 동시에 계획되었음을 계상할 수 있다. 반면에 중문간 행랑채는 사랑채와 기둥 위치가 어긋난 모습으로 볼 때, 두 건물의 관련성은 크게 고려되지 않았음도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안채와 중문간 행랑채 사이의 ㄷ자 부분은 최초의 건축에서는 없었을 가능성이 있고, 이후 안채와 중문간 행랑채를 연결하는 계획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중문간 행랑채가 원래는 바깥마당의 낮은 곳에 있었는데 나중에 높은 석축 위쪽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것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안채의 높은 마당과 낮은 바깥 마당 사이에 있는 석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문간체가 없었다면 석축 위 모습은 담장으로 경계를 삼았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먼저 두 마당 사이의 높이차를 해결하기 위해 담장으로 경계를 삼았다고 하면, 전동에 위치한 창녕위재사와 유사한 모습이 될 것이다. 창녕위재사의 과거 사진을 통해서 높은 안마당과 낮은 아랫 마당 사이에 벽돌로 된 담장을 두어 공간을 구획한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남녕위 한옥’ 역시 사랑채 마당과 바깥 마당 사이 석축은 담장으로 경계를 삼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사랑채 마당의 담장과 같은 모습이 안채 마당 앞까지 연결된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에 대해서 건축물대장에는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전체 건축면적은 478.42㎡라고 하였다.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건축면적을 ㎡로 바꾸어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부터였다. 당시 기록에는 전체 건축물이 4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택 326.65㎡, 물치 45.09㎡, 납옥 99.97㎡, 변소 6.81㎡ 등이다. 1962년에도 건물은 4동으로 조사되어 있는데, 건축면적은 평으로 기재되어 있다. 1938년의 478.42㎡를 143평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 면적은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황 조사의 유래가 1921년까지 올라간다는 점에서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이 간다. 1921년 4월 9일의 ‘건물등기부’에는 일본식 용어가 한자로 씌여있다는 점이 다를 뿐 똑같은 면적은 건축이 4동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규모의 98평 건축물이 1962년의 주택이라는 말 대신 본가本家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 점만 다를 뿐이다. 1921년에 장위동에는 76번지가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76번지는 4,913평이었다. 현재 ‘남녕위 재사’ 한옥이 서 있는 76-59번지는 2,436㎡이고 즉 738평이다. 6.5배가 넘는 땅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76번지에 다른 건물들이 없었던 것일까? 1921년에 76번지 ‘건물등기부’에는 다른 건축물도 기록되어 있는데, 第三號라는 글자와 함께 기와집 본가 33평, 목조 초가집 물치 12평, 목조 초가집 물치 14평이 그것들이다. 이 건물들은 소재지번이 76-3호로 분류되어 있는 점에서 76-3번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비교하면 ‘남녀위 재사’ 한옥은 76-1호로 분류되어 있는데, 한때는 76-1전지였을 가능성이 잇는 것이다. 1976년에 폐쇄된 지적도를 보면 76의 59번지 바로 옆에 76의 1번지가 있다. 그런데 76-1번지와 76-59번지가 하나로 된 땅이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시기는 1962년에서 1965년 사이라고 생각되는데, 1962년 소유권을 이전받은 주인의 주소는 76번지로 되어 있고 1965년에 새로운 주인의 주소는 76-59번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과거의 토지나 건물 관련 기록을 통해서 건축연대나 건물의 변화 관정을 살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1977년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당시 건축면적이 107평으로 조사되었는데, 6년 후인 1983년 가옥대장에는 1921년에 조사되었던 143평에 해당하는 건축면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1905년 을사년에 건축되었다는 상량문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건축연대가 분명한 사랑채 별채의 경우에는 1921년 이후의 건물등기부, 가옥대장, 건축물대장의 건축면적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 한 가지 사랑채 별채의 건축 형식을 물치나 납옥으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보면, 사랑채 별채가 30평의 납옥은 물론 13평의 물치는 아니다. 사랑채 별채의 면적은 98평에 포함되어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을 5개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안채 90.72㎡(27.5평), 사랑채 107.87㎡(32.7평), 문간채 85.33㎡(25.9평), 안채 별당 26.14㎡(7.9평), 사랑채 별채 79.45㎡(24.1평)의 면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 맺음말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은 부마 한옥 그리고 ‘윤대감’ 한옥으로 알려져 왔다. 1919년 3·1만세 직후 윤용구 대감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1895년부터 줄곧 여기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39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이 한옥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장지조차 자택 부근이었으니까 ‘윤대감’의 한옥임에 틀림없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에는 을축乙丑년에 상량했다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한옥이 1865년에 건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현재는 상량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직접 확인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5년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랑채 북쪽에 있는 ㄱ자 모양의 사랑채 별채 종도리장여에 1905년 상량 기록이 남아 있어서 사랑채 별채의 건축연대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채 별채 상량 이전에 이미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다고 본다면 다른 건축물들은 1865년인 을축년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건축적으로도 안채나 사랑채의 건축형식이 사랑채별채의 건축 현식보다 오래된 방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1865년은 부마 윤의선이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와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직책을 수행하고 있던 해였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은 부무 윤의선의 주도 아래 지어졌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부마가 이 한옥에 살았을 가능성도 높다. 윤용구 대감은 1885년부터 장위동에서 살았다고 했는데, 이 때는 1887년 부마 윤의선이 세상을 뜨기 2년 전이 된다. 대감 윤용구는 사대문 안 재동 ‘남녕위궁’에 세를 주고 생활하였다. 이런 정황을 고려할 때 부마 윤의선 역시 장위동에서 살았을 가능성을 충분하다. 따라서 당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은 부마가 지었고 말년에 생활했던 부마 한옥이라고 할 수 있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은 건축적으로도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안채와 사랑채가 ㄹ자 모양으로 가장 먼저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채 앞쪽에서 안마당을 가려주는 중문채가 원래부터 지금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사랑채와 인접한 부분에서 기둥 배열이 어색한 점이나 지붕이 너무 가까워서 중문채 지붕이 특별히 짧은 점 든이 그렇고, 안채와 만나는 위치에서는 뒷마당으로 나가는 두 간의 통과공간이 비효율적이고 기단 돌의 현태나 시공방법 등이 차이가 나는 덤 등을 볼 때, 후대에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랑채 별채는 1905년에 증축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사랑채 별채 오른쪽의 ㄱ자 건물 역시 나중에 증축되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랑채 별채는 가운데간과 측면간의 기단에서 높이 차이가 있고 측면에만 장초석을 사용한 점 등을 보면 누마루 형식으로 계획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누마루 형식의 건물에 인접하여 서로 닿는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건축물의 증축과 관련해서 의문이 드는 건물은 안채 별당이다. 안채 별당은 안채와 너무 가깝게 있어서 심지어 현재는 벽을 막아 통하게 만들 정도다. 만약 널찍한 후원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여유없는 공간으로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현재의 건물은 대지가 분할되지 않은 넓은 대지 상태에서 지어졌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대지가 분할되고 현재처럼 좁아지면서 다른 편에 있었던 건물을 옮겨지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장위동 ‘남녕위 재사’ 한옥은 규모가 큰 경우로서 현재의 모습은 어떤 한 시점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변화가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에서는 건축적으로 세밀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부분들이 있다. 사랑채는 凹자 모양으로 생겼는데, 가운데 부분이 뒤로 내달린 부분과 만나는 곳에 돌출부가 있는 모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회첨부에서 꺾음부에 골짜기가 하나 생기는 모습이 아니게 되었다. 꺾음부 모서리에 추녀를 설치해서 돌출시키고 그 양쪽으로 회첨이 생기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마치 창덕궁 부용정 배면 모습과 같이 되었다. 평면상으로 침방이 위치하고 있는데, 평면 때문에 특이한 지붕 형태가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지붕 형태를 만들고 공간을 구성하였는지를 생각하면 재미가 있다. 안채에서는 안방과 부엌, 찬간의 구성이 오묘하다. 안방과 부엌은 높이차를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단 높이에도 차이를 두고 초석 높이도 길고 짧은 것을 적당하게 배치하였다. 더욱 찬찬이 볼 곳은 부엌 남쪽에 있는 찬간이다. 부엌과 바닥 높이가 특별히 다를 필요가 없는데도 초석 높이가 부엌보다도 낮다. 그리고 부엌과 찬간의 지붕 높이도 달라서 부엌보다 찬간의 지붕이 낮게 되어 있다. 이런 점을 보면 찬간이 나중에 증축되었거나 또는 어떤 공사에 의해서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마루방과 아궁이 부엌이 있는데, 마루방의 출입은 사랑채 침방 쪽에서만 할 수 있도록 문이 달려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사랑채와 안채 사이 남북으로 긴 건물에서는 안채 안마당 쪽 초석의 모습과 사랑채 뒷마당 쪽 초석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재미가 있다. 한옥은 19세기에 지어진 것들이 규모도 크고 다양하고 화려한 모습을 띄고 있는 것들이 다수 남아있다. 만약 우리가 한옥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면 좋은 예들이 된다. 한옥 건축의 정점에 19세기 한옥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 가운데 장위동 ‘남녕위재사’ 한옥 역시 좋은 예가 된다.
  • 남녕위재사 성북구 장위2동 76-59번지(돌곶이로34길 4-11)에는 불교사찰 진흥선원이 있다. 현재 사찰의 건물과 대지는 현재 ‘장위동 김진흥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입공간과 사랑채, 안채, 별채가 갖추어져 있는 이 널따란 조선식 한옥을 사람들은 ‘장위동 부마가옥’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23대 임금 순조의 넷째 딸 덕온공주德溫公主(1822~1844)의 묘가 장위동에 조성된 이후 1865년(고종 2)에 덕온공주의 남편인 부마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1823~1887)이 지었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남녕위재사南寧尉齋舍’는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때의 정식 이름이다. 이 집은 윤의선의 아들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들어와 ‘장위산인藏位山人’이란 별호를 달고 기나긴 은거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재사齋舍란 재실齋室이라고도 하는데,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을 말한다. 보통 재사에는 묘지기 또는 산지기가 상주하며 무덤을 관리하고, 유사가 있어서 매년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아서 한다. 하지만 남녕위재사는 묘의 관리와 제사 준비를 위한 공간만을 두고 있지는 않다. 사랑채, 안채, 별채로 구성된 집은 규모가 제법 큰 살림집의 모습을 띠고 있다. 1865년 처음 지을 때 재사 본연의 역할과 함께 별업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본래 재사 가까운 곳에는 덕온공주의 묘소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덕온공주 제청과 묘소 일원은 매우 넓었으나 19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로 경관과 지형은 물론 묘소까지 사라지는 변화를 겪었다. 건축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남녕위재사는 을축년인 1865년(고종2)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는 남녕위재사에 있었다는 ‘을축년 상량문’이라는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1865년은 부마 윤의선이 궁궐 건축 책임을 맡은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라는 직책을 수행하고 있던 해였다. 따라서 남녕위 재사는 부마 윤의선의 주도 아래 지어졌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조선시대 상류계층 살림집의 형태와 격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남녕위재사는 1977년 그 가치를 인정 받아 문화재로 지정됐다. 1962년 8월 18일 윤용구의 손자 윤영섭으로 소유권이 바뀌었을 당시 주소는 장위동 76번지였으나 지금은 76-59번지로 축소됐다. 1965년 김진흥 씨가 이 집을 사서 33년간 이곳에 거주했다. 그 사이 이 집은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1977년 9월5일)로 지정돼 문화재 명칭도 ‘김진흥 가옥’이 됐다. 현재 이 가옥의 연면적은 478.42㎡다. 김진흥 가옥은 문화재 지정 후 1993년과 1998년 2차례에 걸쳐 보수공사를 시행했다. 이후 김씨의 부인 권옥경 씨가 1998년 재단법인 선학원에 대지와 건물 전체를 기증함으로써 이듬해 진흥선원이란 이름으로 선방을 열었다. 현재 안채는 대웅전으로, 안채 별당채 는 지장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남녕위재사는 ㄷ자형 안채와 ㄱ자형 사랑채, ㄷ자형 중문간 행랑채, ㄷ자형 별채, ㅡ자형 별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중대문에 들어서면 안마당의 전면에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중앙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건넌방이 있고 ㄱ자로 꺾여서 부엌 · 마루 · 사랑채의 침방으로 연결되는 방이 배치되어 있다. 대청 왼쪽에는 윗방과 안방이 있고 꺾여서 부엌과 찬마루가 놓였다. 안채 왼쪽 터에는 별당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산호벽루珊湖碧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 행랑채 오른쪽에 있는 일각대문으로 출입을 하는데 큰사랑방, 대청, 작은사랑, 침방으로 되어있다. 침방은 안채와 연결되며 작은사랑 북쪽으로는 별채가 자리한다. 전체적으로 마당 내부 구석의 객실들을 들쑥날쑥하게 처리하여 큰 공간에 변화를 주고 있으며 시선 방향에 따른 분위기를 안정감 있게 처리한 주택이다. 전체 배치가 궁궐의 내전 일부를 보는 것 같이 상당한 규모의 격조를 지니고 있다.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90-92쪽
  • 남녕위재사의 옛 모습에 대하여 백: 지금 그 집에 가보시면 이렇게 안채가 있고 사랑채가 있고 혼자 뒤에 별당이 있습니다. 별당은 혹시 어떤 용도로 사용하셨는지 기억나세요? 유: 한쪽에 조그만 집은 헐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분들이. 그 별당은 아마 제 생각에는 사당이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백: 사당이요? 유: 네. 왜냐하면 아침이면 제를 지내는 게 많기 때문에… 제 기억으론 사당이라고요. 매일 아침마다 사당에 가시고 저녁이면 해가 지기 전에 또 한 번 가서 곡을 하시고 그러더라고요. 백: 곡 하시고… 유: 네. 저희 증조할머니가 못 가시면은 그분의 며느님이 가시고 그분의 손자들이 들어가서 사당에 들어가서 아침에 곡을 하고 나오시고 저희 할머니가 가시면 저희 할머니가 하시고요. 백: 그리고 진흥선원이 있으면 그 앞에 지금 어린이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런 공간이 있는데 그쪽까지 다 이렇게… 유: 그렇죠. 그쪽에도 다… 네. 훨씬 컸어요. 그 밑에 또 문이, 큰 솟을대문이 있고 그 다음번에 솟을대문하고 중문 사이에 또 좀방이 있었다고요. 그러니깐 일하는 분이 거기 계셨고 남자분이. 그리고 들어오셔서 광이 굉장히 큰 게 있었죠. 광이 아마 꽤 큰 광이 몇 개 있었을 거라고요. 제가 알기에는 중문으로 들어오고 난 뒤에 광이 있고 광에서 좀 들어오면은 사랑채가 있고 저희 증조부의 서재가 있고. 백: 그러면은 책이 좀 많이 있었나요 집안에? 유: 6 · 25전까지도 많았어요. 꽤 있었는데 6 · 25가 끝나고 난 뒤에 가보니까 텅텅 비었더라고요.
  • 6 · 25전쟁 당시 유실된 집안 유물에 대하여 백: 석촌대감께서 그림이나 글씨를 많이 쓰셨는데, 집 안에도 보관을 해 두셨습니까? 아니면 다 밖에 주셨습니까? 유: 6 · 25 당시에 저희가 가지고 있던 거요. 저희가 그 당시에 맘대로 남녕궁을 못 들어가죠. 왜냐하면 인민군이 사용하고 있었으니까요. 가서 그거 달라고 그랬다간 당장 대창칼로 살해를 당하죠. 백: 그렇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거기 있는 물건들도 운반하지 않는… 유: 저희가 그 근처도 못가죠. 6 · 25때는. 그렇지 않아도 6 ·25라서 학교를 국민학교를 못간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렸을 때 학교 안 간다 그러면 좋지 않습니까. 그래가지고 할머니하고 갔더니 정경부인하고 정경부인의 두 손자분하고 며느님이 피신을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용인으로. 저희가 그런 물건 같은 거를 감히 얘기는 들었지만 할머니가 당시에는 노인네시니까 저하고 갔는데 아무 소리 못하고 오죠. 그리고 소문에 많은 밑에 사람들이, 하인으로 있던 분들이 전부 공산주의로 변천을 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니깐 조심을 하시라고 누가 일러주더라고요. 인민군 공산주의로 변했고 전부 그러니까. 그럼 산지기 청지기 어딨냐, 제 생각에 그 당시에 청지기만 빼놓고 다 밑에 사람들이 공산주의인데 그 자녀들이 더 무섭다 말이야. 그 사람들 자녀들이. 그러니까 안 가시는 게 좋을 거다,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할머니께서 궁금하시니까 구태여 가셨는데 그때 제가 보기에는 벌써 인민군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저희는 장안에서 떠나본 적이 없으니까 피난을 간다는 거는 생각도 못하는데 마지막 1 · 4 후퇴 때 서울을 다 비우라 그래서 서울이 텅텅 비었어요. 그래서 증조모께서 어떻게 됐나 하고 와보니까 그때는 전차도 없고 버스도 아무것도 없었다고요. 와서 보니까 남녕궁이 텅텅 빈 거예요. 아무도 안 계시고. 그러고 난 뒤에 저희도 할 수 없이 피난을 갔고요. 그리고 저희가 유물이 좀 남았던 게 저희 이모께서 피난을 가는데 그분의 시누께서는 나이가 연로하셔서 이모댁을 지키고 계셨다고요. 그래서 그 집에 좀 갖다놓고. 그리고 6 · 25 때는 저희 책가방요. 할머니가 거기다 편지를 막 그냥 가득가득 넣고 작은어머니댁 뒷방에다가 갖다 놓으라 해서. 박: 그게 이번에 또 덕온공주의 『자경전기』인데… 하하. 유: 그거를 책가방에 할머니께서 꽉꽉 우리들한테 책을 주고 그 뒷방에다 갖다놓으라 그래서. 조그만 골방, 뒷방이 아니고 골방. 그래서 거기 있던 게 살아나온 거죠. 백: 그렇게 살아남은 사연이 있네요.
    박수진 외 5인, 2019, 장위동∙석관동, 126-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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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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