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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의 인물, 사건, 장소, 유물, 문헌, 작품 등을 유형별, 시대별, 지역별로 검색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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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정보부 본청
    장소
    중앙정보부 본청
    성북구 석관동 산1-5번지에 있던 국가기관으로 건축가 나상진이 설계하였다. 석관동 본청 자리는 의릉이 있어 넓은 부지가 확보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심과 가까우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공간이었다. 본 청사를 비롯한 주요 건물들은 1962년부터 자리를 잡았다. 1968년 항공사진을 보면, 전체 부지에서 본관(멸실)과 운동장(멸실), 강당(현존) 등 몇 개의 건물과 도로구조가 완성되었고 천장산 주변으로 담장이 둘러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72년 세워진 남산 중앙정보부 분청은 정치공작, 대공업무 등 이른바 ‘핵심업무’를 담당했고, 석관동 본청에서는 자료 수집·보관, 교육·훈련, 해외 업무 등 배후 기능을 담당했다. 1995년 청사가 내곡동으로 옮겨가며 석관동 본청은 사라지고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들어서 있다.
  • 돈암산방
    장소
    돈암산방
    성북구 돈암동 산11-25에 위치한 화가 변관식의 집이다.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은 동양화가로 외할아버지가 유명한 서화가인 조석진이다. 변관식은 겸재 정선 선생 이후 금강산 그림을 가장 잘 그린 실경산수화의 대가로 손꼽힌다. 변관식은 1954년 돈암동 한옥에 자리를 잡고 당호를 ‘돈암산방’이라 지었다. 집은 ㄷ자형의 한옥으로 화실을 두고 이곳에서 작업하였다. 말년에는 정릉골짜기에 있는 대성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 1975년 회고전을 개최하고, 이듬해 돈암동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김광균 집터
    장소
    김광균 집터
    성북구의 작가 김광균이 살았던 집터이다. 김광균은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성북동 깊은 골짜기에 거주하였다. 집터의 위치는 우리옛돌박물관 근처로 지금은 고급주택단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건물 없는 빈터였던 곳에 2019년 현재 개인주택을 건축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 흥덕문
    장소
    흥덕문
    성북구 성북동 내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 성곽의 문이다. 조선 초 성균관 동북쪽 산 아래에 흥덕사라는 절이 있었고, 이 부근의 마을을 흥덕동(현 명륜동1가)이라 하였다 한다. 도성 안쪽의 흥덕동과 밖의 선잠단(현 성북동)을 연결하는 문인 흥덕문은 조선 후기의 기록에도 보이지만, 대략적인 위치만 확인 가능할 뿐이다. 흥덕문의 위치는 현재 서울과학고등학교 북쪽, 마전터 부근의 ‘성북동 쉼터’ 부근으로 추정된다.
  • 혜화문
    장소, 유물
    혜화문
    성북구 성북동과 종로구 혜화동의 경계에 뒤치한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이다.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불렸으며, 사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사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했다. 도성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1511년(중종 6)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며 헐렸으나, 1994년 10월 18일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 한양도성
    장소
    한양도성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 초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해 성곽을 쌓도록 하고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조선시대 때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는데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축조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근대도시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성벽과 성문을 무너뜨렸으나 1968년 숙정문 중건을 시작으로 복원이 시작되었고, 1975년 서울성곽 정화 사업을 통해 전 구간의 중건이 이루어졌다.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70%, 총 13.7㎞(2020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고, 숙정문·광희문·혜화문 등의 성문도 중건되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 최순우 옛집
    장소, 유물
    최순우 옛집
    성북로15길 9에 위치한 고택이다. 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1916-1984]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성북동 한옥이 점차 사라지던 때, 2002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곳을 매입하여 '시민문화유산 1호’가 되었다. 1930년대 초 지어진 근대한옥이다. ‘ㅁ’자 평면의 전형적인 경기지방 한옥양식 주택이다.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보존·운영하고 있으며, 혜곡최순우기념관으로 시민들을 위한 전시,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 9월 19일 국가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 청암장
    장소
    청암장
    성북구 선잠로5길 68(성북동 321-3)에 있었던 상업시설이다. 청암장은 원래 이봉재(李鳳載)가 운영한 요리집이었다. 청암장은 해방 공간에서 제법 그 위세를 자랑했으며, 특히 통일된 남북한 정부수립을 위해 내한해 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인도대표 ‘싱’씨에 대한 환영회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이후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 청암장을 인수하여 대원각으로 운영하였는데, 군사정권시절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 3대 고급 요정으로 유명하였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였고, 법정 스님은 송광사로 넘겨 1997년 김영한의 법명인 길상화를 따서 길상사라는 사찰로 변화하였다.
  • 조지훈 집터
    장소
    조지훈 집터
    성북구 성북로16길 11(성북동 60-43)에 위치한 시인 조지훈의 집터이다. 조지훈(1920-1968)은 1939년 등단한 이후,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를 표현했으며,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집』(1946)을 내면서 청록파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 성북동에 남아 있는 조지훈 집터는 제헌국회의원이자 신간회 활동을 했던 아버지 조헌영(1901-1988)이 살던 집이다. 조헌영이 납북되었기 때문에 조지훈은 아버지가 돌아오실까 하여 죽는 날까지 이사하지 않았으며, 아버지 이름으로 된 명의도 바꾸지 않았다. 성북동의 ‘조지훈 집터’는 사실상 조헌영의 집터인 셈이다.
  • 정릉
    장소
    정릉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를 모신 왕릉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슬하에 2남(무안대군, 의안대군) 1녀(정순공주)를 두었으며, 1396년(태조 5) 음력 8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신덕왕후를 사랑했던 태조는 경복궁에서 바로 보이는 황화방(현 중구 정동)에 능을 조영했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이 현재 위치로 옮기고 방치했다. 이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했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 장위동 김진흥 가옥
    장소, 유물
    장위동 김진흥 가옥
    성북구 돌곶이로34길 4-11(장위동76-59)에 위치한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의 남편 남녕위 윤의선의 집이다. 오늘날에는 소유자의 이름을 따서 김진흥가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부마의 이름을 따서 남녕궁이라고 불렸고, 사랑채에는 남녕궁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상량문에 을축(乙丑)년에 상량했다는 기록이 전하기 때문에, 이 한옥이 1865년(고종 2)에 건축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건물은 ㄱ자 2개가 합쳐진 모양이며 사랑채 뒤에 있는 집은 나중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7년 9월 5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12월 가옥의 소유주였던 김진흥의 부인 권옥경이 이곳을 불교재단에 기증하면서 현재는 ‘진흥선원’이라는 이름의 절로 바뀌었다.
  • 장승업 집터
    장소
    장승업 집터
    성북구 성북동 성북1동 치안센터 뒤편에 위치한 조선의 화가 장승업의 집터이다.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3원으로 불리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장승업은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렸던 화가로도 유명하다. 장승업이 말년에 살았던 초가집이 성북로에 접해있는 성북1동 치안센터 뒤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설치해 놓았지만 파손되어 지금은 가까운 성북예술창작터에서 보관 중이다.
  • 장동옥 집
    장소
    장동옥 집
    성북구 성북동 191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장동옥의 집이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12월 의열단원이었던 김상옥을 잡기 위해 경관들이 주변 인물들을 체포하고자 출동하여 장동옥의 집을 가택 수색하였고, 이어서 관수동에 있었던 무산자동맹회에 가서 의열단원인 김한을 구인하였다. 당시의 신문기사로 이 정도의 정보만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장동옥의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되지 않고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도 못했지만, 의열단원으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들과 교전하다 숨진 김상옥과 관련된 인물인 것으로 보아 비밀리에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장교동 한규설 가옥
    장소, 유물
    장교동 한규설 가옥
    성북구 정릉로 9길 64에 위치한 조선말 한성판윤을 지낸 한규설이 살던 저택이다. 원래 위치인 중구 장교동에서 국민대학교로 옮겨와 1980년 12월 20일 완공했다. 이 가옥은 189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교동에 있을 때에는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 광채가 넓은 대지 위에 있었다. 현 위치로 옮겨 오면서 없어졌던 솟을대문, 좌우 행랑채를 복원했고, 본래는 있었으나 철거된 중문간(間) 사잇담도 복원했다. 행랑마당-사랑마당-안마당-사당마당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사대부가의 이상적이며 논리적인 공간구성이고, 조선후기 세도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 임종상  가옥
    장소
    임종상 가옥
    일제강점기 성북동에 위치했던 임종상[1885-1962]의 가옥이다. 임종상은 그 조부가 미곡무역으로 일약 거부가 되었고, 그 재력으로 고원 군수까지 지냈다고 한다. 당시 성북동 본가뿐 아니라 종로구 창신동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별장이 매우 호화로워 안남국(베트남) 국왕의 저택에 비견될 정도였으며, 세간에서는 '창신궁'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북동에 있었다는 임종상 가옥의 자세한 주소지는 현재 알 수 없다.
  • 인명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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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원지
    성북구 고려대로22길 6-3(안암동5가 126-16) 고려대학교 공대 근처로, 조선시대 원빈 홍씨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이다. 원빈 홍씨는 정조의 후궁이었는데, 1778년(정조 2)에 빈으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렸는데, 이듬해인 1779년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1781년 ‘인명원’이라는 이름을 붙인 무덤을 현재 고려대학교 공대 근처에 조성하였는데, 후궁의 무덤에 ‘원’을 붙이는 것이 부당하다는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1786년 ‘원빈묘’로 강등되었다. 1950년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 이종석 별장
    장소, 유물
    이종석 별장
    성북구 성북로 131에 위치한 근대 건축물이다. 조선 말기의 상인 이종석이 1900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종석이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랑채 비슷한 별채와 안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동북쪽에 있으며 행랑채는 북쪽에 있다. 누마루에는 ‘일관정’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살림집이라기보다 별장 건축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 별장은 당시 규모가 큰 상인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960년 기업가 이재준이 매입하였고,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 이유선 별장
    장소
    이유선 별장
    일제강점기 성북동에 있었던 별장이다. 일제강점기의 월간 종합잡지였던 『삼천리』에 의하면 성북동에는 큰 별장들이 여러 개 있었고, 약재상을 하던 이유선의 별장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성북동에는 이유선의 별장뿐만 아니라 의친왕 이강(李堈), 해동은행의 김계수, 경성부 부자였던 김동규 등 총 14개의 별장이 있었는데, 모두 크고 호화로웠다고 한다.
  • 이병도의 집
    장소
    이병도의 집
    한국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역사학자인 이병도(1896-1989)의 집이다. 두계 이병도는 1934년 진단학회를 창립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병도가 주도해서 발간한 『진단학보』 는 국문으로 된 최초의 학술지이다. 『진단학보』 창간호부터 3호까지 계동 98번지 이병도의 집에서 발간되었다. 이후 1936년 4월 발간된 4호부터 1941년 14호까지 성북리 132번지에서 발간되었다.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고, 이때의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의릉
    장소
    의릉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이다.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무덤인데,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현재 위치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고, 영조 6년(1730)에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아래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능역 내에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 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뀐 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복원 정비를 마쳤다.
  • 음벽정
    장소
    음벽정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 113번지(현 성북구 선잠로71로 추정)에 있던 별장이다.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별장이었다. 19세기 말부터 관료로서 활약했던 민영환은 성북동에 아름다운 별장을 지어놓고 많은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당시 청에서 파견되어왔던 위안스카이(袁世凱)도 민영환과 교류하며 음벽정을 방문하였었는데, 민영환이 순국한 후 그는 혼자 찾아와 추도하는 시를 읊기도 하였다. 민영환이 죽은 후 동생이 소유했던 음벽정은 1931년 가옥 임대업을 하던 일본인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1934년 한택수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때부터 요정으로 운영되어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엔 불에 타서 없어졌고, 현재 그 자리에는 연화사라는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 윤중식 가옥
    장소
    윤중식 가옥
    성북구 성북로14가길 13-14(성북동 145-23)에 위치한 주택이다. 윤중식(1913~2012년)이 50년 동안 거주하던 주택인데,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윤중식은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우리나라 서양화 2세대로 분류되는 작가로, 초기에는 일본 유학의 영향으로 단순한 형태에 강렬한 색채, 굵은 윤곽선 등을 결합한 야수파적 경향이 강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분단 상황으로 인한 실향민의 향수와 비애를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곳에는 현재 미술을 전공한 손녀 윤가현이 ‘소나무 아트스튜디오’를 열어 키즈아트 등 미술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 온녕군 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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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녕군 묘터
    성북구 미아동(현 강북구 미아동)에서 발견된 온녕군의 무덤 유물과 관련된 신문기사 등의 내용이다. 온녕군 이정[1407-1453]은 태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신빈 영월 신씨이다. 부인은 익산군부인 순천박씨이다. 1962년 도시계획에 따라 온녕군의 묘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10-1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돌관을 비롯하여 청동수저 한 벌, 항아리 접시 밥그릇 등이 발굴되었다. 조선에서 돌관이 발굴된 적이 없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이때 발굴되었던 돌관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 오봉리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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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봉리 지석묘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안에 있는 고인돌이다. 이 지석묘는 고려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팀이 주암댐 수몰지역 문화유적 발굴 조사 계획의 일환으로 전남 승주군 송광면 오봉리 신월 799번지에 해당되는 보성강 유역의 퇴적지에 16기가 남북으로 4열을 이루면서 군집되어 있던 것을 1986년 12월 1일~1987년 1월 6일에 발굴 조사할 때 발견된 것이다. 출토유물로는 홍도, 마제석검, 마제석촉, 삼각형석도, 대팻날, 무문토기편 등의 다양한 유물이 있으며 특이한 하부구조는 학술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고려대학교박물관에서는 발굴 조사된 지석묘들 중에서 4기와 그 하부구조를 1988년 12월 5일에 이전하여 현재의 자리에 복원했다.
  • 오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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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정
    조선 후기 성북동에 있었던 별장이다. 오로정(吾老亭)은 북저동 서북쪽 성곽 아래 지역에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의 덕수교회나 심우장 부근의 어느 산림 지대로 추정된다. 정조·순조대 활동한 문인인 장혼(張混, 1759-1828)은 「북저동에서 놀다(遊北渚洞)」라는 시에서 마을 서북쪽 성곽에 정자가 있으니 오로라는 내용을 남겼다. 또한 순조 3년(1803) 이만수가 「오로정」이라는 시를 지은 것에서도 확인된다. 물맑은 성북동에는 늦어도 순조 연간부터는 아름다운 별장들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영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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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단
    성북구 선잠로 9-6(성북동 75-12)에 있었던 제단이다. 영성단은 새해 농사가 잘되도록 곡식을 맡은 별과 농사를 맡은 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으로 성단(星壇)이라고도 불렀으며, 기우제를 지낼 때는 용단(龍壇)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사를 지내온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도 고려의 유제(遺制)에 따라 남교(현 한남동)에 설치하고 입추 후 진일(辰日)을 택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후 1865년(고종 2)에 혜화문 밖 선잠단의 북쪽에 다시 설치했는데, 이때에는 매년 정월 상인(上寅)에 제향을 지내는 것을 규례로 하였다. 1897년 각 분야의 별들에게 제사지내는 의리를 폐지하면서 영성단도 폐지되었다. 현재는 작은형제회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당에 영성단 표석이 세워져 있다.
  • 영보당 귀인 이씨묘터
    장소
    영보당 귀인 이씨묘터
    성북구 하월곡 2동에 위치한 묘터이다. 영보당 귀인 이씨(1843~1928)는 고종이 명성황후와 혼인하기 전, 궁인으로 총애를 받아 고종 5년 완화군(이후 완왕) 이선을 낳았다. 이후 귀인으로 봉해지고 영보당이라는 호를 하사받았다. 1928년 12월 17일에 별세하였고, 성북구 하월곡동에 묻혔다. 이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 애기능터
    장소
    애기능터
    성북구 월곡동에 있었던 고종의 장남 완친왕(完親王)의 묘터이다. 완친왕은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의 아들로 1868년(고종 5)에 태어났다. 1876년(고종 13) 완화군(完和君)에 봉해졌으나, 1880년(고종 17) 1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인 1907년에 완친왕에 추봉되었다. 완화군의 묘는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인창면 월곡리(현 성북구 월곡동)에 조성되었고, ‘장자묘’, ‘완왕묘’, ‘애기능’으로 불렸다. 지금은 개발인해 서삼릉 후궁 묘역 한쪽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오동공원(옛 애기능터공원) 월곡정(月谷亭) 앞에는 ‘애기능터’ 표지석이 있다. 한편 『성북구지』에는 동덕여대 자리에 완왕묘가 있었다고 하고, 『서울육백년사』에는 양주 남쪽 월곡 임자언덕에 묻었다고 적고 있다.
  • 만해 한용운 심우장
    장소, 유물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성북구 성북로29길 24에 있는 유적이다. 독립운동가이자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이며, 불교개혁가였던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 6월 29일 입적할 때까지 살던 집이다. 심우장은 벽산 스님이 땅을 제공하였고, 수학교사인 최수동이 설계하였으며, 방응모와 박광, 그리고 아내 유숙원 등이 자금을 보태어 만들어졌다. 조선총독부가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용운은 이곳에 거처하며 그의 또 다른 본거지인 선학원을 출입, 불교 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흑풍』을 집필하는 등 문학 활동도 이어갔다. 현재 심우장 입구에 만해 산책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매년 6월 29일 선생의 기일에 성북문화원 주관으로 추모 다례가 열린다. 2019년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등록되었다.
  • 승설암
    장소
    승설암
    성북구 성북로 154(성북동 264)에 있었던 가옥의 이름이다. 승설암은 일제강점기 종로에서 ‘백양당서점’을 운영하던 서예가 배정국이 살던 집이었다. 집 앞에는 개울이 흘렀고, 담 안으로 들어서면 이끼가 낀 작은 우물과 큰 오동나무가 있었다. 뜰에는 괴석이 놓여있어 보기가 좋았다. 배정국은 고서(古書)를 포함해서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고, 성북동에 살았던 김용준, 이태준, 김환기, 손재형 등 당대 예술인과 교류가 깊었기에, 자연스레 승설암은 성북동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국화정원’이라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는데, 옛 가옥을 활용하고 있다.
  • 숙정문
    장소, 유물
    숙정문
    삼청로11길 40(삼청동 산 2-49)에 위치한 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하나이다. 속칭 북문(北門)으로 불렸던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다른 문과 같이 1396년(태조 5)에 건설되었다. 숙정문은 풍수지리상 북쪽이 음(陰)과 물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평소에는 ‘음란한 풍조’를 방지하기 위해 폐쇄하였다 가뭄이 들면 문을 열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1976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도성의 성곽을 복원할 때 이 문의 문루를 건축하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걸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건으로 일반의 출입이 차단되었다가 2006년 4월 다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 수향산방
    장소
    수향산방
    성북구 성북로 168(성북동 274-1)에 있었던 옛집의 이름이다. 수향산방은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이곳에 살았던 김환기·김향안의 자택이었는데, 김환기는 자신의 호인 ‘수화’중 ‘수’자와 부인 김향안의 ‘향’자를 따서 수향산방으로 불렀다. 수향산방으로 불리기 전에는 화가이자 수필가였던 김용준(1904~1967, 호는 근원)이 1933년 무렵부터 1944년까지 살았는데, 오래된 감나무가 있어서 이태준이 ‘노시산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1944년 김용준은 역시 화가였던 김환기에게 집을 넘기고 의정부로 이사하였다. 수향산방은 한국 미술을 개척한 두 거장의 숨결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수연산방
    장소, 유물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1933년에 건물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1933년 8월 구인회 결성 후 구인회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이 집은 건물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건넌방, ‘공(工)자’형의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구성된 보통의 ‘ㄱ자’형 집과 비슷하나, 부엌이 뒤쪽으로 붙어 있어 앞쪽에 누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였다.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된 집으로, 현재 수연산방이란 상호를 달고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1977년에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 손응성 가옥
    장소
    손응성 가옥
    보문동에 위치한 한옥이다. 서양화가 손응성(孫應星)[1916-1979]이 거주하였다. 손응성은 강원도 평강 출생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정물화를 입상시키며 등단했고, 일본 다이헤이요 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조카 최인호는 외삼촌인 손응성을 가리켜 평생 ‘조선의 빛깔과 영혼’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손응성은 친일행적을 보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미술부문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손응성은 1948년 이 집을 매입했고, 이후 1979년 사망할 때까지 약 30여 년간 이 집에서 살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집은 주변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옥으로 보존 가치가 있다.
  • 손기정 집터
    장소
    손기정 집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의 집터와 관련된 내용이다. 손기정은 일제강점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우승 후 외국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기도 하였다. 해방 후 손기정은 안암동에 거주하며 자신의 집을 ‘마라톤 선수 합숙소’로 이름붙이고 마라톤 유망주를 뽑아 훈련시켰다. 손기정의 가르침을 받은 서윤복,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 국제대회에서 우승 등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지도자로서도 성과를 내었다. 현재 집터는 다세대주택이 들어서서 집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 세송원
    장소
    세송원
    일제강점기 성북동에 있던 별장이다. 삼산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이신구의 소유였다. 1934년 5월 11일 독립운동가 이종린이 회장으로 있는 조선 물산 장려회의 신임이사회의가 열리기도 하였다.
  • 서울 성북동 별서
    장소, 유물
    서울 성북동 별서
    성북구 선잠로 2길 47(성북동 2-22)에 위치한 조선시대 별장이다. 한국식 정원의 특징을 반영해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배치하였다. 물이 흐르는 경치에 따라 크게 전원, 내원,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종의 호종내관을 지냈던 황윤명(황수연)이 조정에서 물러난 후 이 별장에 머무르며 한시를 지었다. 또한,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하였으며, 독립운동가 이관구에게 이 별장에 거주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이관구는 여기서 사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학술활동을 하고, 항일투쟁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의용실기』를 저술하였다.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2019년 별장의 원주인으로 알려진 ‘심상응’이 허구의 인물이라는 점, ‘성락원’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두고 문화재 지정 해제 논쟁이 불거졌다. 2020년 황윤명(황수연)이 조성하여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머물었다는 점, 서울시에 몇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정원으로서의 가치 등을 인정받아 ‘서울 성북동 별서’라는 이름의 명승으로 재지정 되었다.
  • 선잠단지
    장소
    선잠단지
    성북구 성북동 64-1에 위치한 조선시대 선잠단이 있었던 터이다. 선잠단은 국가에서 양잠을 위하여 잠신(蠶神)으로 알려진 중국 신화 속 황제(黃帝)의 황후 서릉씨(西陵氏)를 배향하는 단(壇)을 쌓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선잠단의 설치와 제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친잠례가 왕비의 소임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했다. 조선 태종 때 현재 위치에 선잠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으나 1908년 단과 제향이 철폐되면서 폐허가 되어 일제강점기에 원형을 상실하고, 땅도 개인 소유가 되었다. 1963년 선잠단지를 사적 제83호로 지정하였다. 2016년 선잠단지 정밀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유구를 기초로 2017년 재현 공사를 진행하였고, 2020년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 서세옥 가옥 및 작업실
    장소, 유물
    서세옥 가옥 및 작업실
    성북구 성북로28가길 7(성북동 260-10)에 위치한 주택이다. 동양화가 서세옥(1929∼2020)이 주거와 작업실로 사용하였던 집으로 2014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73년 서세옥은 소나무 숲이었던 성북동 언덕에 창덕궁 연경당에서 본 떠 25평짜리 14칸 사랑채를 지었다. 뜰 앞에는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손으로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라는 의미의 '무송재'라는 이름에는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살고자 하는 바람이 깃들었다. 1929년에 태어난 서세옥은 서울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한 1세대 동양화가로서 수묵추상화를 개척하고 한국화와 서양적 추상화의 접점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 삼군부 총무당
    장소, 유물
    삼군부 총무당
    성북구 삼선교로4나길 19(삼선동 1가 산1-13)에 위치한 조선말 삼군부의 청사 건물이다. 삼군부는 비변사를 폐지하면서 설치한 군사업무를 총괄하던 정부기구이다. 총무당은 삼군부의 중심건물인데, 1868년 처음 건축되었을 때의 위치는 현재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었으나, 1930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총무당’이라는 현판은 당시 무신이자 외교가였던 신헌(申櫶)의 글씨이다. 삼군부의 기능약화와 함께 통리기무아문의 청사로 이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총무당은 공릉에 소재한 청헌당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 건축의 배치와 건물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현존자료이다. 1978년 1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 북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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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성
    서울 북쪽의 북한산에 쌓은 성곽이다. 서울의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 강북구와 고양시 덕양구 일대에 걸쳐있다. 성북구에서는 정릉동의 북한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있는 곳이 입구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시되어 왔기에 여러 왕조에서 성을 쌓고 활용했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은 숙종 37년(1711)에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긴 전란을 겪은 후 도성 방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성에는 군사지휘소인 장대가 3곳, 크고 작은 문이 13개소, 우물이 99곳, 창고가 8곳이 있다. 또한 승군(僧軍)을 주둔시키기 위한 사찰도 여러 곳에 두었다.
  • 어영청 북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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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영청 북창
    성북구 성북동 260번지 일대에 있었던 조선시대 창고 유적이다. 어영청은 도성의 수비와 왕의 시위를 위해 설치된 조선후기 5군영의 하나로, 당시 수도방어에 책임을 맡고 있던 훈련도감과 더불어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재정 문제로 도성 밖에서 교대로 근무하여 병력을 유지시켰다. 현재 성북동 수월암의 남쪽 일대에 어영청의 도성 동북쪽을 경비하는 부대가 주둔했기 때문에 ‘북둔(北屯)’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그 부대의 창고가 북창(北倉)이었다. 순조 이후 어영청은 장어영ㆍ총어영 등으로 개편되었다가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 봉갑리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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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갑리 지석묘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 5가 1-2) 고려대학교 안에 있는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 고인돌인 봉갑리 지석묘는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1987년 8월 주암(住岩) 댐 수몰 지역 문화 유적 발굴 조사 때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 보성강(寶城江) 유역의 돌출된 낮은 구릉의 말단 부분에 14기가 군집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출토 유물로는 마제석촉(磨製石鏃), 삼각형석도(三角形石刀) 등이 있는데 1989년 10월 30일 현재의 자리로 이동 전시했다.
  • 복녕당 귀인 양씨 묘터
    장소
    복녕당 귀인 양씨 묘터
    성북구 하월곡2동에 있던 내안당 귀인 양씨[1882-1929]의 묘터이다. 귀인 이씨는 상궁이었으나 고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1912년 딸(덕혜옹주)을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1919년 1월 고종 승하 후 홀로 지내다가 1929년 5월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원래는 영보당 귀인 이씨, 내안당 귀인 이씨와 함께 애기능터(완왕묘지)에 묘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개발로 인해 이장되어 사적 제200호인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안장되었다.
  • 보제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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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원 터
    성북구 안암동에 위치한 조선시대 구휼기관 보제원의 터이다. 1530년(중종 25)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에 따르면 한성부 동대문 밖의 보제원,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광희문 밖의 전관원 등 네 개의 원이 설치되어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공무 수행자에 대해 말과 숙식 제공 등이 주된 임무였으나, 그밖에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구휼 업무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안암동천·제기현·고암을 거쳐 수유리를 지나 노원역에 이르러 경흥으로 향하는 동북 제2로에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현재 보제원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 할 수는 없으나 안암오거리 버스정류장 옆(동대문구 양령시로 2 앞)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 백인기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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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기 별장
    일제강점기 성북구 선잠로5길 68에 있었던 별장이다. 성북동 지역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외곽이면서도 도심과 가깝고 산과 계곡으로 절경을 이루어, 조선시대 이래 권세가와 부호들의 별장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의 친일 기업가 백인기는 성북동에 별장 몇 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해방 후에는 ‘청암장’이라는 고급요정으로 운영되다가, 김영한이 인수하여 ‘대원각’이라는 요릿집으로 바뀌어 1960~70년대 고급요정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김영한이 법정스님을 통해 기부하여 현재는 조계종 소속의 ‘길상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되었다.
  • 백상규 별장
    장소
    백상규 별장
    일제강점기 성북구 성북동에 있었던 별장이다. 성북동 지역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외곽이면서도 도심과 가깝고 산과 계곡으로 절경을 이루어, 조선시대 이래 권세가와 부호들의 별장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의 잡지 『삼천리』7권 5호(1935년)에는 당시 성북동에 있었던 별장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백상규의 2층 양옥집도 등장하고 있다. 백상규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해방 후에는 여운형, 김규식 등과 건국운동을 함께 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 박완서 집터
    장소
    박완서 집터
    성북구 보문로 13바길 13-15(보문동6가 427)의 소설가 박완서가 살았던 집이 있었던 곳이다. 박완서(1931~2011)는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늦게 등단하였으나, 이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953년 결혼 후 70년대까지 보문동 한옥에서 살았다. 그의 소설에서 1960-70년대에 보문동 한옥주택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지금은 박완서가 살았던 집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고, 그 자리엔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 박경리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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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 가옥
    성북구 보국문로29가길 11(정릉동 768-2)에 위치한 가옥이다. 『토지』 『김약국의 딸들』 등의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박경리(1926~2008)가 1965년부터 1980년 원주로 이사갈 때까지 정릉골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실제 거주했던 기간은 1~2년이었다고 한다. 소설 『토지』 1~3권이 이곳에서 집필되었다. 한국 문학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인 대하소설 ‘토지(土地)’를 쓴 소설가 박경리가 생전에 거주했던 곳으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필요성 때문에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마포 최사영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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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 최사영 고택
    성북구 선잠로 68-20(성북동 9-21)에 위치한 건축물이다. 이 고택은 대한제국 시기의 관료로서 광업ㆍ금융업ㆍ창고업 등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해 재력가로도 널리 알려진 최사영이 1906년 마포동 236에 건립했던 집의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최사영은 이 집에서 1929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여러 차례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문화재 지정이 검토되던 2001년에는 1동만 남아 멸실 위기에 있었다. 그에 따라 서울시 민속자료로 가지정(假指定)하여 보존한 후 2002년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 허가를 얻어, 2003-2007년 한국가구박물관에 의해 현 부지 안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고, 2007년 서울시 문화재자료 3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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