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나는 지금 돈암동에서 사네. 공교롭게도 내가 서울에 첫발을 딛었던 곳이야. 반세기 동안 서울 천지를 헤매다가 복귀한 지 오래됐는데, 아파트의 임립을 빼면 크게 변한 것도 없어. 미아리고개 밑으로 지하철이 지나간다고 한 많은 미아리고개의 표고가 낮아지겠나? 아리랑고개를 삽으로 떠내겠나? 수더분한 첫인상대로 돈암동은 오늘도 돈암동답게 두 고개 아래 안녕하시다네. 수도의 외연 확대에 따라, 이제는 서울 동북부의 중심지역 구실을 하면서.
미아리고개의 본래 이름은 되너미고개였대, 옛날에 되놈이 이곳을 넘어 서울로 침입했기 때문이래. 돈암동은 자연히 되너미라고 불렀거늘, 아리랑고개는 조금 달라. 일정 때 정릉에 고급 요정을 차린 업자들이 그쪽으로 손님을 끌기 위해 길을 닦고, 고개 마루턱에 아리랑 민요를 딴 표목을 세우면서 비롯된 이름이라대. 결과적으로 재미있지 뭔가. 아리랑고개 밑에 즐비한 회갑잔치촌이 정릉을 대신했으니 말일세. 발병이 나서 고개를 넘지 못했는지 어땠는지 따질것 없이 잘되었어.
미아리고개 아래 운명철학관은 요즈음도 성업중이지만 아리랑고개 못미쳐 동도극장은 없네. 개봉관에서 실컷 상영한 다음에야 차례가 돌아올망정, 동도극장은 곧 죽어도 명화만 틀었지. 거기서 「미녀와 야수」도 보고, 「자전거 도둑」도 보고, 마르셀 까르네 감독의 「인생유전」도 보았지. 새파란 나이의 우쭐함으로, 다 된 인생들에 대한 연민 섞인 감동을 어쩌면 자네와 함께 그때 나누었는지도 몰라. 극장 건너 굴 속 술집 일제시대 방공호에서 뒤풀이를 했던가? 안했던가? 지금처럼 값이 오만하지 않았단던 굴비를 안주 삼아.
미아리고개, 아리랑고개, 미아리 역학촌, 동도극장 등 화자가 과거에 거주했었고 또한 현재도 살고 있는 돈암동 일대의 역사와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자는 본 소설 초반에 '동' 단위의 거주지는 그 사람의 대명사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즉, 돈암동의 과거와 현재는 화자의 정체성과 다름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