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문
1396.10.26
사적
장소 유적
유물 건축물
성북구 성북동과 종로구 혜화동의 경계에 뒤치한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이다.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불렸으며, 사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사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했다. 도성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1511년(중종 6)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며 헐렸으나, 1994년 10월 18일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성북동
  • [성북을 찾다] 도성 안 사람들
  • 혜화문(2)
  • 혜화문(4)
  • 혜화문(3)
  • 혜화문(1)
  • 혜화문 공사현장
  • 혜화문 복원 공사(1)
  • 혜화문 복원 공사(2)
  • 현판 교체 이후 혜화문(1)
  • 한성대입구역 부근
  • 김종영, 「동소문 고개」, 1933
  • 현판 교체 이후 혜화문(2)
  • 신록(新綠)의 대경성(大京城) 부감기(俯瞰記) (4)
  • 구문팔자타령(九門八字打鈴) (사(四)) 동소문(東小門) <1>
  • 의정부 육조에서 풍정을 바치다
  • 혜화문 현판(교체 이후)
  • 혜화문 누각 초석 전경
  • 혜화문 서면 누각 초석
  • 혜화문 서북면 누각 초석
  • 혜화문 서면(惠化門 西面)
  • 수선전도
  • 혜화문 외측 전경
  • 혜화문 동면(惠化門 東面)
  • 성문을 일찍 닫고 늦게 열며, 혜화문을 다시 폐쇄하게 하다
  • 혜화문의 지도리와 문짝이 부서지니 어영청에서 번군을 보내어 파수하게 하다
  • 혜화문에 어영청으로 하여금 문루를 세우게 하고 편액을 동소문이라 하다
  • 혜화문 밖에 별에 치제하는 제단을 설치할 것을 예조에서 보고하다
  • 혜화문을 지나는 상인들에게 거두는 세금을 엄격히 하도록 하다
  • [성북을 찾다] 도성 안 사람들

기본정보

  • 영문명칭:
  • 한문명칭: 惠化門
  • 이명칭: 홍화문(弘化門), 동소문(東小門)
  • 오브젝트 생산자:
  • 비고:
  • 유형: 장소 유적
  •   유물 건축물

시기

  • 시대: 조선시대
  • 시기: 1396.10.26
  • 비고: 1396년 9월 24일(음력) 준공

주소

  • 주소: 02880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가 1-1
  • 비고: 종로구 혜화동 28-13

문화재 지정

  • 지정 유형: 사적
  • 지정일: 1963.01.21
  • 비고: 한양도성

근거자료 원문

  • 혜화문은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불렸으며,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향하는 동북 교통로의 출발점이었다. 이 길을 따라 많은 물자들이 오갔는데 한양에서는 생활용품 들이 주로 나갔고 함경도에서는 각종 어물들이 들어왔다.
  • 惠化門은 都城의 동북쪽에 위치한 都城 4小門中의 하나로서 太祖 5년(1396) 9월 都城의 創築과 함께 건설되었는데 이 때의 門名은 弘化門이었다. 그러나 成宗 14년(1483)에 세운 昌慶宮의 東門을 弘化門이라고 命名하였으므로 이 昌慶宮의 東門 이름과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中宗 6년 (1511)에 弘化門을 惠化門이라고 개칭하였다, 그리고 英祖實錄에 英祖 20년(1744) 8월 庚戌條에 「惠化門」은 전에는 門樓가 없었는데 御營廳에 命하여 건립하였다」라고 한 것을 보면 惠化門도 처음 건립당시의 門樓는 언제인가 없어졌고 石門만 남았던 것을 英祖 20년에 御營廳에 下命하여 門樓를 건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惠化門은 都城의 小門中의 하나이지만 都城의 大門에 못지않은 기능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京元街道가 이 문과 연결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통행했으며 또한 北大門인 肅淸門이 항상 폐문되어 있었으므로 東小門인 惠化門이 北大門의 역할까지 하였다. 현재의 위치로는 惠化洞로터리에서 城北洞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었는데 日帝의 都市計劃이라는 명목으로 日本人들 손에 의하여 門樓는 1928년에 헐리었으며 虹霓로 된 石門마저 1939년에 헐리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혜화문은 서울市의 문화재 복원계획에 따라 1992년 말에 門樓와 성곽·옹벽 등 복원공사를 착공하여 1994년에 완공할 계획으로 인근 성곽복원과 함께 공사가 진행되어 머지않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84-85쪽
  • ⑥ 惠化門 惠化門은 都城의 동북쪽에 위치한 도성 四小門(혜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의문) 중의 하나로서 太祖 5년(1396) 9월 都城의 創築과 함께 건설되었는데 이 때의 門名은 弘化門이었다. 그 후 成宗 15년(1484)에 昌慶宮을 건축하고, 그 東門(지금의 昌慶苑 정문)을 弘化門이라 하여 門名의 혼동이 일어나므로, 中宗 6년(1511) 에 이르러 東小門을 惠化門으로 개칭하였다. 이 惠化門은 都城의 小門중의 하나이지만 大門에 못지 않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은 京元街道가 이 문과 연결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으로 통행했으며 또한 北大門인 肅靖門이 항상 폐문되어 있었으므로 東小門인 惠化門이 北大門의 역할까지 하였다. 현재의 위치로는 惠化洞로터리에서 城北洞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었다. 東小門은 文宗 원년에 京畿·忠淸·全羅道의 當領 水軍을 동원하여 都城을 수축할 때 약간 수리한 듯 하며, 英祖實錄 20년(1744) 8월 庚戌條에는 「惠化門은 전에는 門樓가 없었는데 御營廳에 命하여 건립하였다」라고 한 것이 있어 惠化門도 처음 건립 당시의 문루는 언제인가 없어졌고 石門만 남았던 것을 英祖20년에 어영청에 하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京城府史 제1권에 惠化門願의 후면과 측면에 각기 다음과 같은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後面 嘉慶二十一年丙子初一日重修 籃督官 千起一 治金直員 金成翊 計士 李浩豐 庫直 金光福 側面 己巳四月初一日 營建一坊 縣口所 金道鍾彩 嘉慶 21년은 純祖16년(1816), 己巳는 高宗 6년(1869) 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東小門은 순조 16년에 중수하고, 고종 6년에 보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후 일체 보수를 하지 않다가 1928년에 都市計劃이라는 명목으로 門樓가 헐리고 1939년에는 돈암동까지 전차노선을 연장한다고 하여 虹霓로 된 石門마저 헐려버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동소문고개라는 고개 이름만 남아 있다. 서울특별시에서 이 문을 곧 복원할 계획이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722-723쪽
  • ▫ 비지정 혜화문 惠化門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서울시 소재지 : 서울 성북구 성북동 1가 1-1 속칭 동소문으로 불리는 이 문은 서울 성곽 사소문(四小門) 중 하나이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동소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자리한 이 문은 동대문과 숙정문 사이에 위치했다. 이 문은 사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사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가 한양에 천도한 후 태조 5년(1396)에 서울 성곽을 축조하고 성문을 낼 때에 혜화문은 홍화문(弘化門)이란 명칭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도성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조선 초 성종 14년(1483)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중종 6년(1511)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한편 조선 초에는 북방의 여진족 사신의 숙소가 동대문 옆(지금의 이화여대 부속병원 자리)에 북평관(北平館)이 있었다. 이들 사신이 서울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이 문을 이용하도록 했으므로 규모가 큰 문루가 있어 위용을 과시했다. 그러나 병자호란 이후 여진족이 세운 청(淸) 사신이 명 사신이 출입하던 서대문으로 바뀌면서부터 혜화문의 관리는 소홀해져 문루(門樓)가 무너지고 홍예(虹霓)로 된 석문(石門)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는 20년(1744)에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무너진 문루를 복원하게 하고, 당시의 명필인 조강리(趙江履)로 하여금 ‘혜화문(惠化門)’이라고 쓴 현판을 새로 달게 했다. 그런데 이 문에서 문루의 천정에는 봉황(鳳凰)을 채색으로 그린 것이 특색이었다. 그 이유는 문 밖, 그러니까 지금의 동소문동, 삼선동, 동선동 일대에 참새 등이 많이 농사에 피해가 컸으므로 새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 문은 순조 16년(1816)과 고종 6년(1869)에 보수했는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일체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퇴색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도시계획이라는 핑계와 건출물이 퇴색했다는 구실을 붙여 1928년에 문루를 헐었고, 1939년에는 을지로 4가~돈암동 간의 전차(電車)를 부설하면서 돌로 된 아치 성문마저 헐어버려 조선왕조 5백년 간 의연히 서 있던 혜화문은 자취를 잃고 혜화동, 동소문동이라는 동명(洞名)만 전해 왔다. 혜화문이 훼손된 지 55년 만에 본래 그 자리는 아니지만 시민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울시에서는 1994년 10월 18일, 혜화동 고개에 혜화문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세워 놓았다. * 참고자료 : 성북구, ≪성북구지≫, 1993.
    성북문화원, 1997, 성북의 문화재, 158-159쪽
  • ○ 관련 자료 조선후기 ‘혜화문(惠化門)’ 또는 ‘동소문(東小門)’을 소재로 지은 한시 다수 철원으로 귀양살이 떠나는 윤무구를 보내며[送尹无咎謫鐵原] 첫 번째 쇠북소리에 혜화문이 열리더니 / 惠化門開第一鍾 산 넘고 물을 건너 북으로 가는 길 겹겹이로세 / 關河北去路重重 산이 대신 일산을 펴 외로운 말을 맞고 / 山張寶蓋迎孤馬 얼음발을 안개가 내려 구룡을 숨겨주리 / 霧鎖氷簾秘九龍 다행히도 잠시나마 청쇄달에서 놀았지만 / 試幸暫游靑瑣闥 우리 함께 백운봉을 오를 때만 같겠는가 / 何如同上白雲峯 듣자하니 신진 축에 뛰어난 인물 많아 / 傳聞新進多才俊 검은 머리 붉은 얼굴에 감정 자태 다 좋다네 / 玄鬢紅顔意態濃 — 정약용, 『다산시문집』 3권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1쪽
  • ○ 관련 자료 - 조선전기 여진족 사신의 혜화문 왕래 기록 정원에 전교하였다. “야인(野人)은 늘 동소문(東小門)으로 왕래하거니와, 왜인(倭人)은 이제 비로소 보건대 여염 사이의 작은 길로 데리고 다녀서는 안되겠으니, 홍화문(弘化門) 앞의 큰길로 내보내야 하겠다.” (傳于政院曰 野人則常以東小門往來也 倭人則今始見之 不可以小路 閭閻之間率去 宜以弘化門前大路 出送可也) — 『중종실록』중종 23년(1528) 9월 21일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1쪽
  • ○ 연혁 - 1396년(태조 5) 홍화문(弘化門) 건립 - 1511년(중종 6) 혜화문(惠化門)으로 개칭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문루 소실 - 1744년(영조 25) 어영청으로 하여금 문루를 세우게 하고 편액을 걺 (글씨:趙江履) - 1816년(순조 16) 중수 - 1928년 문루 헐림 ※조선시대 현판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복원한 혜화문 현판 글씨는 제27대 서울특별시장 이원종의 글씨 - 1939년 혜화동-돈암동간 전차노선 연장을 이유로 홍예문 철거 - 1994년 본래 자리의 북편 언덕에 홍예문과 문루 복원 ○ 주요 사항 - 【외교】여진(女眞)의 사신이 조정에 토산물을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혜화문을 통과했으며 이 문으로 들어온 여진인들은 성 안 북평관(北平館)에서 숙박 - 【명칭】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로 정함에 따라 1511년(중종 6) ‘혜화’로 개칭 - 【역사】연산군 동소문 인가 철거 및 동소문 폐쇄 조치 단행 - 【회화】겸재 정선(1676~1759), 〈동소문도〉그림 (1750년경, 고려대 박물관 소장) - 【건축】도성의 다른 홍예 천정에는 모두 용을 그렸는데 이곳만 봉황을 그린 것이 특징으로 문밖의 새의 피해가 많으므로, 그것을 막기 위하여 새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 전함 - 【경제】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 동북 방면의 건어물과 포목 중 상당수가 혜화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성북문화원, 2016, 성북동 역사문화자원 조사·연구, 61쪽
  • 김유(金宥)가 적성(積城)으로 가니, 김흥(金興)이 동소문(東小門) 밖에 나가 전별하였다. 민건(閔騫)과 예조 판서 이승손(李承孫)을 보내어 전별하고 아청면포 겹원령(鴉靑綿布裌圓領)·초록주 탑호(草綠紬塔胡)·유청주 철릭(柳靑紬帖裏)·백초 과두(白綃裹肚) 각각 1, 시복(矢服)·궁도(弓弢) 각각 1, 대전(大箭) 6, 각궁(角弓) 1장을 주었다. 김흥이 돌아와서 대궐에 나아가니, 노산군이 맞이하여 조계청(朝啓廳) 으로 들어갔다. 김흥이 유청사운저사(柳靑四雲紵絲) 1필, 청직금통주슬란저사(靑織金通紬膝欄紵絲) 1필, 용안(龍眼) 1합(盒), 여지(荔枝) 1합, 백사당(白沙糖) 1통(桶), 회회도아(回回絛兒) 1조(條)를 바쳤고, 노산군은 아청면포 겹원령·초록주 탑호·유청주 철릭·백초 과두 각각 1, 시복·궁도 각각 1, 대전 6, 각궁 1장을 주었다. 김흥이 또 경정 공주(慶貞公主) 집으로 가니, 노산군이 환관 김충(金忠)을 보내어 어육(魚肉)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0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52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1
  • 동소문(東小門) 밖의 다야원(多也院) 냇가에 거둥하니,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좌의정(左議政) 구치관(具致寬)·우찬성(右贊成) 박원형(朴元亨),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윤사흔(尹士昕)·김국광(金國光),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질(金礩)·우참찬(右參贊) 윤자운(尹子雲)·호조 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예조 참판(禮曹參判) 임원준(任元濬)과 승지(承旨)·아종(兒宗)250) 등이 수가(隨駕)하였다. 한명회에게 명하여 한지(閒地)251) 를 보아 가운데를 나누어 구역의 경계를 삼고, 좌우로 하여금 수전(水田) 수십 무(畝)를 만들게 하고, 아종(兒宗)과 김질에게 명하여 그 위에다 내를 막아 좌우로 하여금 개천을 열어 그 전지(田地)에 물을 대어서 보니, 뒤에 물이 장마져서 해친 바가 되고 전지가 모두 모래에 덮이었다. - 세조실록 36권, 세조 11년 6월 4일 경진 2번째기사 1465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1
  • 전교하기를, “동소문(東小門) 밖 동구에 따로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하고 군기를 배정하며, 북쪽 정문 밖 산의 각곳에 잡인을 금하여, 통행하며 올라가서 대궐 안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라.”하였다. - 연산군일기 51권, 연산 9년 11월 10일 계유 8번째기사 150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1
  • 전교하기를, “병조로 하여금 동소문을 닫아 걸게 하고 그 열쇠를 대내에 들이라.”하였다. - 연산군일기 54권, 연산 10년 7월 19일 정미 1번째기사 150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1
  • 동소문은 동북면으로 가는 가장 빠른 위치에 있었고, 그 만큼 사람이많이 드나드는 문이었다. 군사적으로 중요할 수 밖에 없었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0쪽
  • 성 쌓는 역사를 마치고 정부(丁夫)들을 돌려보내었다. 봄철에 쌓은 곳에 물이 솟아나서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석성(石城)으로 쌓고 간간(間間)이 토성(土城)을 쌓았다. 운제(雲梯)도 빗물로 인하여 무너진 곳이 있으므로 다시 쌓고, 또 운제(雲梯) 1소(所)를 두어서 수세(水勢)를 나누게 하고, 석성(石城)으로 낮은 데가 있는 데는 더 쌓았다. 또 각문(各門)의 월단 누합(月團樓閤)을 지었다.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속칭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 태조실록 10권, 태조 5년 9월 24일 기묘 2번째기사 1396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0
  • 동소문(東小門) 밖에서 무과(武科)를 복시(覆試)하였는데, 전 사정(司正) 유승연(柳承淵)을 제일(第一)로 하였다. 임금이 친열(親閱)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않고, 좌대언(左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유승연을 부사직(副司直)으로 삼았다. -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4월 6일 기유 1번째기사 141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0
  • 임금이 대비를 모시고 선암(繕巖) 아래 냇가로 행차를 옮기고, 무당으로 하여금 악차(幄次)에서 신(神)에게 제사하였다. 새벽에 임금이 두어 사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가만히 동소문(東小門)으로 들어와 흥덕사(興德寺)에 행차를 정하니, 두 대군이 도보로 따르고, 시종자들은 임금의 간 곳을 잃어, 다 동대문 밖 안암동(安巖洞)에 이르러 헛되이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시위하다가, 해가 저물어 다 성안으로 돌아왔다. 이날에 대비의 병환이 나으므로, 이로부터 밤마다 행차를 옮기시어,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6월 26일 계해 1번째기사 1420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0
  • 숙정문이 폐쇄되면서 東小門의 역할이 커졌으니, 동북지방에서 도성으로 출입하는 길목으로서 중요시된 것이다. 동소문이란 惠化門의 속칭으로 19세기에도 東小門外契라는 동리 이름이 있었다. 지금의 東小門洞·東仙洞·三仙洞·敦岩洞 일대를 일컫는데, 그 가운데로 城北川 또는 安岩川이란 개천이 성북동 골짜기에서 흘러 청계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성북구청, 1993, 성북구지, 391쪽
  • 전교하였다. “성문은 일찍 닫고 늦게 열라. 그리고 혜화문(惠化門)은 우선 다시 폐쇄하라.” - 광해군일기[중초본] 94권, 광해 7년 윤8월 3일 정미 1번째기사 1615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3
  • 이때 창의문(彰義門) 밖 동쪽에서 응봉(鷹峰)까지의 성밑과 동소문(東小門) 북쪽에서 응봉의 동쪽까지의 성 안팎에 조[栗]·기장[稷]·대두(大豆)를 파종한 자가 있었는데, 한성부(漢城府)에서 계문(啓聞)하니, 파종한 사람을 잡아내어 죄주도록 명하였다. -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3월 3일 신사 2번째기사 1687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3
  • 혜화문(惠化門)의 지도리와 문짝이 부러지고 상하여 밤 사이에 닫지 못하므로 어영청(御營廳)에서 번군(番軍) 10명을 보내어 파수하게 하였다. - 영조실록 49권, 영조 15년 4월 19일 을미 3번째기사 1739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3
  • 혜화문(惠化門)에 옛날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임금이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이를 창건하게 하고 편액을 걸었으니, 곧 세속에서 일컫는 바 동소문(東小門)이었다. - 영조실록 60권, 영조 20년 8월 6일 경술 2번째기사 1744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3
  • 예조(禮曹)에서 ‘제단(祭壇)의 이름은 성단(星壇)으로 정하고, 제단을 쌓을 곳은 혜화문(惠化門) 밖의 숭신방(崇信坊) 어창계(御倉契)에서 자좌오향(子坐午向 : 정북(正北)은 등지고 정남(正南)으로 향함)으로 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고종실록 2권, 고종 2년 11월 15일 병자 5번째기사 1865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3
  • 전교하기를, “비궁(閟宮)의 궁궐 아래에 여각(旅閣)을 설치한 것은 애당초 북도(北道)의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으로 바로 백성들을 모집하려는 뜻이었다. 그 당시 정묘조(正廟朝)의 하교도 본궁의 제조(提調)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것에 대하여 그대로 윤허한 것이었는데, 듣자니 요즘은 세금을 거두는 것이 너무 많아서 상인들이 혜화문(惠化門)을 거치지 않고 다른 곳으로 흩어져 들어와, 이로 인해 궁례(宮隷)들이 다른 문을 침탈하여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한결 같이 처음에 정한 절목에 따라 단지 혜화문을 통하여 들어온 북도 상인의 물건에 대해서만 간략히 세금을 거두도록 엄하게 신칙하여 분부하라.”하였다. -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 윤4월 9일 병진 4번째기사 1868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3
  • 정원에 전교하였다. “야인(野人)은 늘 동소문(東小門)으로 왕래하거니와, 왜인(倭人)은 이제 비로소 보건대 여염 사이의 작은 길로 데리고 다녀서는 안되겠으니, 홍화문(弘化門) 앞의 큰길로 내보내야 하겠다.” - 중종실록 63권, 중종 23년 9월 21일 경인 2번째기사 1528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2
  • 상이 문묘(文廟)에 나아가 분향례(焚香禮)를 마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글제를 내고 【주(周)나라의 태보(太保) 석(奭)이 여오(旅獒)를 받지 말기를 청하는 일을 본떠서 지은 표문[擬周太保奭請勿受旅獒表].】 우의정 이명(李蓂) 등에게 명하여 유생들을 시험보이게 하였다. 이어서 혜화문(惠化門) 밖 병암동(屛巖洞)에 거둥하여 무예를 시험보여서 【상이 계해년 가을 세자를 잃은 뒤로부터 거둥을 전폐하여 백성이 거마(車馬)와 의장의 성대함을 보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가 이제 비로소 거둥하니 구경하는 자들이 거리를 메우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진사 김효원(金孝元) 등 4인에게 문과 급제를, 충의위(忠義衛) 이원명(李源明) 등 3인에게는 무과 급제를 하사하였다. - 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 3월 20일 정사 1번째기사 1565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2
  • 도체찰사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치계하였다. “성 안의 적세(賊勢)에 대해 각처에서 정탐하여 올리는 보고가 날마다 들어 오고 있으나 그 말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직 고언백(高彦伯)의 군병은 모두 서울과 양주(楊州)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가 정탐하여 보고한 내용은 실정을 파악한 내용이 가끔 있으며 또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공사에 의하면 서울의 적세는 요사이 많은 수가 모였다고 합니다. 당초 명병이 처음 도착하던 날에는 적세가 매우 작아서 숙청문(肅淸門)·장의문(莊義門)·동소문(東小門)까지는 모두 성을 지키는 적이 없어 북쪽은 텅 비었고 남쪽 일대에만 산위에까지 적이 있었는데 그 수가 매우 적었으며, 또한 행주(幸州)의 패전으로 죽은 자가 태반이었으나 지금은 북쪽의 적이 모두 서울로 돌아왔고 원주(原州)의 적도 또한 서울의 흥덕동(興德洞) 백자정(栢子亭) 근처에 와 모이는 등 적병이 모두 모였으며, 남대문 안에서 모화관(慕華館) 근처까지 진을 쳐서 용산창(龍山倉)을 잇는가 하면, 평양에서 도망온 적이 또 성을 쌓고 둔을 쳤으며, 한강에도 적진이 있어 부교(浮橋)를 걸쳐놓고 서로 통행하며 사평원(沙平院)·천현(穿峴) 일로에 적병이 또 많이 출몰하여 수원(水原)·금천(衿川)·청회(菁回) 일대에서 날이면 날마다 분탕질한다고 합니다.” - 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9일 갑자 8번째기사 1593년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이야기 자원 모음집, No. 1-12
  • 조선시대의 성북동(1392~1910) 1. 그 골목의 끝에 강릉이 있다-한양도성의 성곽 혜화문은 조선조 오백년 동안 서울의 동북쪽 관문 역할을 했던 성문이다. 그 혜화문은 지금 터만 남겨두고 사라졌다. 흑백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층짜리 우진각 문루도 홍예도 석축도, 그것들을 받치고 있던 비탈진 고개도 식민지 시절에 말끔히 지워져 그 자리에는 넓은 신작로와 전찻길이 뚫렸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된 도로 위를 막 정지 신호에서 풀려난 한 떼의 자동차들이 맹렬한 속도로 오간다. 예나 지금이나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너머 의정부로 통하고 반대쪽은 혜화동, 창경궁을 지나 종로로 통한다. 성문은 간 데 없지만 길의 방향은 변함없다. 그 길을, 바로 옆 높은 축대 위에 20년 전 복원한 혜화문이 할 일이 없어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건너편, 한양도성 낙산 구간 탐방을 마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저 아래 건널목을 건넌다. 지치지도 않았는지 잰 걸음으로 단숨에 혜화문 앞에 다다랐다. 육중한 철문 아래 소나무 그늘에서 열기를 식힌다. 성북동 여행을 떠나기에 적당한 장소이다.
    박수진 외 4인, 2015, 성북동 : 만남의 역사, 꿈의 공간 , 18쪽
  • 한양도성의 동북쪽 관문인 혜화문은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란 현판을 달았지만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이름이 같다고 하여 이름을 혜화문惠化門으로 고쳤다. 혜화惠化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인데 여진족의 사신이 출입하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여진족 사신의 숙소인 북평관北平館도 바로 이 근처에 있었다. 동소문東小門이란 명칭은 위치 때문에 생긴 별칭이다. 사대문의 중간에 사소문을 만든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부분 교통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동소문이 지금 이곳에 세워진 것 역시 교통상의 이유를 빼놓을 수가 없다. 사대문 가운데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은 산악지역에 위치하여 사실상 성문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동북쪽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에 소문小門을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동소문이다. 동소문을 나서 미아리고개와 수유현을 넘는 길은 당시 철령鐵嶺, 영흥永興, 함흥咸興, 북청北靑, 경흥慶興을 거쳐 서수라西水羅까지 가는 동북으로 향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성봉 외 4인, 2013, 동소문 밖 능말이야기, 12-15쪽
  • 혜화문은 일제강점기 도시 확장과 문루가 낡았음을 구실로 삼아 사라졌다. 서울의 4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북동쪽에 있다 하여 동소문이라 불렸던 혜화문은 처음에는 홍화문이라 불리었다. 성종 15년 창경궁을 새로 지으며 동문을 홍화문이라 하면서, 두 문의 이름이 똑같아졌다. 혼동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중종 때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숙정문이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의 영향으로 일반인의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였던 탓에 양주와 의정부, 북쪽으로 통하는 혜화문의 이용이 빈번하였다. 또한 왕이 활을 쏘기 위해서 홍화문 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와 무과 시험을 홍화문 밖에서 치렀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등장한다. 혜화문은 조선 말기까지도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해서 나라에서도 성문을 보수하면서 계속 사용하였지만, 1928년 일제강점기에 전차 노선을 설치하기 위해 문을 헐어버렸다. 1994년 혜화문은 혜화동고개에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과거에 사람들이 활기차게 지나다니던 혜화문 앞의 모습은 사라지고 옛날 자리가 아닌 곳에 세워진 홍화문(혜화문)만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재)희망제작소 뿌리센터, 2013, 성북동이 품은 이야기 -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들, 25-27쪽
  • 혜화문은 한양의 동산東山인 낙산 끝자락에 위치한 문으로 동소문東小門이라 불렀다. 동문과 북문의 사이에 세워진 사소문 중 하나로 원래 명칭은 홍화문弘化門이다. 그러나 1483년 성종 때 새로 만들어진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하며, 서로 중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종 때인 1511년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혜화문은 일반인이 출입하지 못했던 숙정문(북대문)을 대신해 북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쓰였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며 헐렸던 것이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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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오진아
  • 작성일: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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