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164] ‘수향’, 성북에 돌아오다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이들은 전쟁의 포화를 피해 남쪽을 향해, 더 남쪽을 향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이 살던 성북동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던 수화 김환기, 그리고 김향안 부부도 있었습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차미리사
- 돈암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차미리사는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교육 구국운동이 시급하며, 특히 여성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실천한 근대 민족교육운동가이다. 1900년대 초 외국 유학을 떠난 신여성으로, 미국에서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선교사로 귀국한 후 배화학교 사감으로 있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여성 교육과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에는 덕성여자초급대학(현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유공자 정보를 통해 '돈암동 117-1'번지에 거주하였음을 확인하였다.
- 이야기 더보기
- 박재삼
- 시인이다. 도쿄에서 출생하여 1936년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을 받았고, 1955년 『현대문학』에서 서정주와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본격적인 문단생활을 시작했다. 첫 시집 『춘향이 마음』(1962) 이후 20여 권에 이르는 시집과 시선집을 간행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연이은 투병 생활로 인해 삶과 죽음에 대한 연민과 애상의 주제가 반복되고, 달관적·허무주의적인 색채가 작품에 드러난다. 1967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에는 정릉에서 건강을 회복하면서 「정릉 살면서」라는 작품을 남겼다.
- 이야기 더보기
- 인병선
- 박물관인이자 민속학자이다. 이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돈암동에 살며 신동엽이 일하던 서점을 오가면서 신동엽과 교제를 시작했고, 1957년 혼인을 하게 된다. ‘경’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신동엽의 시는 모두 아내 인병선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었다. 결혼 후 남편의 고향으로 함께 내려갔으나 신동엽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인병선은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돈암동으로 돌아왔다. 1960년 신동엽이 서울로 올라와 돈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2년 후 동선동의 한옥으로 이사한다. 신동엽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1978년부터 짚풀문화를 조사·채록하였고, 민속지 『생활용구』를 창간하였다. 1993년에는 짚풀생활사박물관을 설립하고, 짚풀문화연구회 회장,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전문위원등을 역임하였다.
- 이야기 더보기
- 파리통신Ⅰ -조각가 Y씨에게
- 1956년 6월 김환기가 조각가 불제(弗薺) 윤효중(尹孝重)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그는 편지의 서두에서 파리와 성북동이 별반 다를게 없다며 파리에 잘 도착했음을 전한다. 이 편지에는 5월 7일부터 5월 22일까지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을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어 당시 김환기의 심경과 행적을 엿볼 수 있다.
- 이야기 더보기
- 스페이스 오뉴월
- 성북구 성북로 8길 8-6(성북동 184-46)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오뉴월은 여름 한참, 한여름을 뜻하는 말로, 한여름의 뜨거운 열정으로 꾸며지는 새로운 전시공간이라는 의미를 내세워 2011년 6월에 개관하였다. 미술이론을 전공한 젊은 기획자들이 의기투합해 세운 이 갤러리는 1년에 약 8~10회의 전시를 진행하며, 모든 전시는 자체 또는 협력 기획으로 구성되며 대관은 하지 않는다. 또한 전시뿐 아니라 워크숍, 프로젝트, 세미나, 스크리닝 등의 활동을 병행하여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문화-이미지’를 잇는 가교를 만들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지역 사회, 도시 사회, 나아가 국제 사회와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을 설립 취지로 내세웠다.
- 이야기 더보기
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