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20] 성북의 문인을 잇다, 성북근현대문학관
- 은주와 민구는 삼선교 역에서 내려 오른편으로 개천을 끼고 한참 걸어가다가 언덕길을 올라갔다. 그 언덕에는 일제 시대에 방공굴로 팠던 구멍이 삥 돌아가며 예닐곱개 뚫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방공굴에는 모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가마니를 붙여 놓은 문 틈으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저녁 먹고, 너의 집에 갈게." 민구가 그렇게 말하면서 세 번째 방공굴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다. 바로 그 민구네 방공굴 옆으로 좁다란 길이 언덕 위로 하나 뻗어 있다. 그리고 그 길이 뻗어 올라간 언덕 위에는 판잣집이 세 채 서 있다. 그 세 채 가운데 한 채가 은주네 집이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 있는 집이다.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인기척이 났다. - 김내성, 2002, 『쌍무지개 뜨는 언덕』, 맑은소리. 57쪽. 성북동은 어느 방향으로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 좋다. 요즘 낙목한천落木寒天의 암석미巖石美를 맘껏 완상할 수 있는 나의 산보로는 번화의 가태假態를 벗고 미지의 진면목을 드러낸 풍성한 상념의 길이다. 나는 이 길에서 지나간 세월을 살피며 돌의 미학, 바위의 사상사思想史에 침잠한다. 내가 성북동 사람이 된 지 스물세 해, 그것도 같은 자리 같은 집에서고 보니 나도 암석의 생리를 닮은 모양이다. 전석불생태轉石不生苔라고 구르는 돌에 이끼가 앉지 않는다는 것이 암석미의 제 1장이다. - 조지훈 외, 2010, 『돌의 미학』, 나남. 20쪽.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혜화문
- 성북구 성북동과 종로구 혜화동의 경계에 뒤치한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이다.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불렸으며, 사소문 중의 하나이지만 사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북쪽의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으므로 함경도 등 북방으로 통하는 경원가도(京元街道)의 관문 역할을 했다. 도성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소문으로 불렀는데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을 새로 건립하면서 동문(東門)을 홍화문이라고 명명하자 동소문과 혼동되므로 1511년(중종 6)에 동소문을 혜화문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일제강점기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에 전찻길을 내며 헐렸으나, 1994년 10월 18일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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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
- 소설가이다. 1970년 『여성동아』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돈암동으로 이사해 몇 차례 집을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돈암동 시절의 경험과 추억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남자네 집』(2004) 등에 담겨 있다. 1953년 결혼 후 70년대까지 보문동 한옥에서 살았다. 그의 소설에서 1960-70년대에 보문동 한옥주택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박완서는 한국전쟁과 분단문제, 물질중심주의 풍조와 여성 억압의 현실, 거대화되고 메말라가는 도시 속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중산층 소시민들의 군상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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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대학교
- 성북구 서경로 124(정릉동 산 16-1)에 위치한 사립대학교이다. 1947년 재단법인 한국학원이 장충동에 ‘한국대학’이라는 이름의 4년제 야간대학을 설립하였다. 1955년 재단법인 국제학원이 인수하면서 ‘국제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교사도 이전하였으나 학교 운영 주체가 감리학원, 이화학당 등 여러 번 변경되었다. 1970년대에는 각 대학의 양적 팽창과 야간강좌 개설로, 국내 유일의 순수 야간 정규대학이라는 학교의 특징이 흐려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1980년 삼문학원, 1984년 명지학원으로 학교 운영 주체가 변경되었다가 1987년 학교법인 성한학원이 대학을 인수하고 1988년 현재 위치로 교사도 이전하였다. 199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서경대학교’로 이름도 바꾸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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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