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 #218] 이름으로 남은 다리들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죠. 하지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건 사람만이 아닙니다. 이제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름으로 우리 옆에 남아있는 것들이 성북구에도 있습니다. 성북천은 성북동과 안암동을 지나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입니다. 특히 북악산에서 시작해 성북동을 지나는 상류 구간은 복개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성북동 사람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성북천이 복개되며 아이들이 헤엄치던 모습,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모습과 성북천 주변의 복숭아꽃들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과거의 풍경과 함께 성북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들도 사라졌지만, 그 이름들은 우리 주위에 남아있습니다. 오늘의 금도끼에서는 이름을 남기고 사라진 다리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함께 살펴보면서 과거를 상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김영기
- 삼선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부터 대구사범학교에서 한문·조선어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면서 학생들의 황도교육비판·민족정신을 함양시켰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 등 비밀결사의 조직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실질적 지도아래 이루어졌다. 1941년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물』이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 체포되었고, 6개월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복 후 대구사범학교 교장, 경북 교육회장, 서울시 교육위원 문화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하면 서울 성북 삼선1 247-1에 거주한 것으로 확인된다.
- 이야기 더보기
- 운우미술관
- 성북구 선잠로 12-11(성북동 55-1)에 있던 미술관이다. 운보 김기창(1913~2002)과 그의 부인 우향 박래현(1920~1976)의 호에서 ‘운우’라는 미술관의 이름을 지었다. 이 미술관은 김기창과 박래현이 살던 집이었다. 부부는 1954년 무렵 군산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박래현의 노력으로 한옥을 장만했다. 1976년 김기창은 성북동 한옥을 헐고 아내를 위해 미술관을 건립하였지만, 불행히도 미술관이 완공되기 전에 박래현은 세상을 떠났다. 김기창은 이곳에서 1984년까지 홀로 살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어머니의 고향인 청원으로 화실을 옮겼다. 2001년 9월 27일 서울시 제1종 미술관으로 등록하고 2002년 3월 개관하였으나 미술관 대표가 운영상의 어려움을 이유로 폐관신청을 하면서 2015년 11월 10일 폐관되었다.
- 이야기 더보기
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