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도끼
금요일마다 돌아오는 성북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 [금도끼#231] 활량리 터줏대감, 우덕수의 이야기
- 금도끼 <성북 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시리즈, 이번 주 소개해 드릴 분은 1952년 장위동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그곳에 생활 터전을 두고 계신 장위동의 토박이, 우덕수 님입니다.
이 달의 마을아카이브
이 달에 기록된 성북 마을이야기를 만나봅니다.
- 길영희
- 성북동에서 거주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1학년 재학 중 만세운동을 논의하였고, 선배와 함께 학교 대표로 학생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일 사전 계획대로 탑골공원으로 갔으나 민족대표들이 장소를 변경하여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체포되어 약 8개월의 옥고를 치르던 중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경신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고, 1938년경부터 인천에서 농촌계몽운동과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했다. 교직에서 물러난 뒤, 1969년 충남 덕산에 가루실농민학원을 설립, 농민교육에 헌신했다. 2005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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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중식
- 서양화가이다. 1931년 숭실중학교 재학 당시 제2회 녹향회(綠鄕會) 공모전과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진출하였다. 일본 도쿄제국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1941년에 귀국하여 평북 선천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이래 서양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아갔고 1970년부터 1977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국전쟁으로 고향과 가족을 잃은 뒤 평생 고향을 상징하는 소재인 저녁노을, 비둘기, 돛단배, 시골풍경을 작품에 담았다. 1963년 성북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실에서 〈교회와 비둘기〉, 〈귀로〉, 〈성북동 풍경〉 등의 작품을 창작했다. 성북구립미술관에서 100세 기념전을 연 뒤 같은 해 성북동 집에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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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독립만세 운동이다. 성북구에서도 안암천 주변과 돈암동 등지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3일 밤 10시경 안감천(성북천 안암동 구간)에서 피한봉 등 500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고, 3월 26일에는 안감천에서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3월 27일에는 안감천 부근에서 500명이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돈암리(돈암동)에서는 3월 23일 돈암리시장에서 100명이 시위를 전개했고, 3월 24일 성북리(성북동)에서 60명이 시위를 전개했다. 3월 27에는 돈암리의 산(개운산으로 추정) 위에서 50명이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밖에도 성북구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종로나 미아동 일대로 나가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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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앵
- 여성국극인이다.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태어나 1936년 광주 권번에 들어가 이매방, 박모란 등과 함께 소리와 춤을 배웠다. 1939년 상경하여 1944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한다. 1948년 서울에서 박녹주·김소희 등과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여성 창극인만으로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라는 공연을 올렸는데 이때 임춘앵이 이몽룡역으로 발탁되면서 여성국극 최초의 남장연기자가 된다. 이후 <햇님과 달님>이 크게 성공하면서 여성국극에 대명사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이 쇠퇴하면서 은거하였다가 1968년 조카 김진진의 도움으로 장위동에 ‘임춘앵 무용 연구소’를 열어 여성국극의 명맥을 잇기 위해 힘썼다. 1975년 뇌출혈로 인해 장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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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월곡동
- 성북구 동쪽에 위치한 동네이다. 상월곡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제 개편 이후 현재 월곡2동에 포함되어 있다. ‘월곡’이란 이름은 천장산의 모습이 마치 반달 같다 하여 그 산 주변 마을을 다릿굴(골)이라고 불렀는데, 이 중 높은 지역을 웃다리골(상월곡리), 아래 지역을 아랫다릿골(하월곡리)이라 불렀다. 조선시대부터 월곡리라는 이름은 있었고, 해방 후 1949년 성북구가 신설될 때 성북구 관할이 되면서 상·하월곡리로 분리되었다. 원래 이 지역은 농지가 많은 시골 마을이었으나 서울의 인구가 늘면서 유입되는 인구가 늘어나고, 1960년대부터는 도심지의 철거민이 집단 이주하면서 주거지역으로 변모하였다. 현재는 동네정비와 재개발이 진행되고, 천장산을 중심으로 산책로와 운동 시설이 마련되어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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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성북
이야깃거리와 기록을 주제별로 묶어 관심 있는 주제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습니다.